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235)
0235 ———————————————-
천계(天界)
나는 검마와 의논한 후, 십이율의 지존인 십이율주와 교섭을 해야한다는 결과에 이르렀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던 중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우선 문파를 정리해야겠군. 그러고 나서 고려로 가도록 하세.”
“고려로요?”
“신단이라고 하는 도시에는 왠지 주술적인 방어가 있을 것 같네. 자네가 설령 비등을 이용해서 거기에 갈 수 있다 해도 공연한 경계심을 십이율주에게 주는 건 좋지 않아.”
나는 그의 말을 마저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철욱 가주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먼저 고려 개경에 터를 잡는 게 낫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십이율에 가입할지 어떨지는 그 이후에 결정하도록 하지.”
확실히 묘안이었다.
직접 십이율주를 찾아 신단에 가는 게 아니라, 고려의 권력자의 비호부터 받는 것! 그렇게 된다면 십이율주는 결코 무영문을 함부로 공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십이율의 제안이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무영문은 안전할 것이다.
검마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부터 사흘 내로 문파의 재산을 정리하도록 하겠네.”
검마의 의지가 떨어지자 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검마가 바쁘게 문호를 정리하는 틈을 타서, 나는 먼저 고려에서 작업을 하기로 했다.
파앗!
나는 비등을 사용해서 고려에 와서 화서명 의원을 만났다. 화서명 의원은 나를 발견하자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헛. 또 낮도깨비처럼 나타났군.”
나는 그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오늘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응?”
나는 현재 무영문의 사정과, 무영문이 고려로 본거지를 옮기고자 하며 정씨 가문의 도움이 필요함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화서명 의원의 얼굴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래서 화 의원님이 정 가주께 먼저 말씀을 올려주셨으면 해서 왔습니다.”
“으음… 그 일은 어려운 건 아니네만…”
말꼬리를 흐린 화서명이 말했다.
“자네들은 정 가주를 어떻게 설득하려고 그러나?”
“그건…”
“무영문은 중원 제일의 사파문파가 아닌가! 하북 화씨세가의 의가를 옮겨오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일일세. 정철욱 가주도 무림의 일에 어두운 게 아니니, 무영문처럼 강력한 중원문파의 이주를 허용했다가는 십이율의 반발이 만만치 않은 걸 알고 있을 게야.”
“십이율주를 설득할 자신도 있습니다.”
“그건 먼저 정 가주를 통과했을 때겠지.”
화서명은 한숨을 쉬었다.
“말해두지만 이 정도로 큰 사안이라면 정 가주에게 금괴 따위는 먹히지 않을 걸세. 그는 고려 제일의 세도가라서 부나 명예, 보물에 아쉬울 일은 없어. 그 방법을 생각해서 다시 찾아와 주게.”
“……”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천년설삼에 준하는 천고의 영약이나 보물이라고 해도 말입니까?”
“그 정도라면야 어찌 될 법도 하다만… 그런게 존재하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목갑에서 흑백련과 쌍고검을 꺼냈다.
“이걸로 될 겁니다.”
“헉…!!”
화서명은 흑백련을 보자마자 그 진가를 알아차렸는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내가 흑백련과 쌍고검의 가치를 설명하자, 화서명은 어찌나 놀랐는지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말했다.
“되, 되겠군. 일단 말을 올려보겠네.”
“감사합니다.”
“근데 흑백련 한 뿌리만 나 주면 안되겠나?”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말씀만 잘 해주신다면야 그 정도야 충분히 드릴 수 있지요.”
“내게 맡기게!”
화서명은 이윽고 흑백련 한 뿌리값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로 그 날 정철욱 가주를 방문해서 무영문의 이주에 대해 말했다. 정철욱 가주는 그 말을 듣자 호기심이 생겼는지 나를 보기를 청했다.
내가 정철욱 가주의 앞으로 가자, 그는 흥미로운 듯 수염을 쓸며 말했다.
“무영문에 대해서는 나도 들어본 적 있었네. 중원의 마도팔문이라는 사파 중에서도 으뜸가는 문파라 했었지.”
“그렇습니다.”
“흐음… 우선 물건부터 보고싶군.”
“네. 이것입니다.”
내가 흑백련과 쌍고검을 보여주자 그는 왠지 침음성을 흘렸다. 고려 제일의 세도가인 그로써도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인 듯 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정철욱 가주가 말했다.
“성의는 충분하지만 나로서는 확신이 필요하네.”
“확신이라 하시면…”
“자네의 말마따나 무영문이 사파로 분류될 뿐 정사중간의 문파라고 해도, 결국 세간에는 사파의 우두머리라고 불리지. 십이율의 문주들은 틀림없이 자네들을 문제거리라고 생각할 걸세. 그 안좋은 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 증거같은 게 있는가?”
즉 무영문이 고려에 왔을 때 사고를 안 칠 수 있도록 확신을 달라는 소리였다. 정철욱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요구였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건 저희와 십이율주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십이율주를 설득하는 건 십이율을 설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호오… 그 괴물같은 위인을 정말로 설득할 자신이 있는 건가?”
“괴물같다니요? 그 또한 결국 인간이지 않습니까?”
“……”
내가 태연하게 대꾸하자, 정철욱 가주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왠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우하하하! 폐하는 물론 나나 이씨가문의 가주도 십이율주를 함부로 대할 수 없네.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건 중원대륙의 황제가 아니라 바로 십이율주일세.”
“……!!”
“좋아. 그렇게까지 확신한다면 어디 내가 자리를 주선해 보지. 모든 책임을 질 자신이 있다면야 믿어주겠네.”
정철욱 가주는 은근히 호탕한 면이 있었다. 좀 더 쫌생이처럼 군다면 몇 군데는 더 따질 게 있을텐데도 무영문을 일단 받아들여 주기로 한 것이다. 나는 교섭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걸 알게 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흑백련과 쌍고검을 내놓은 후 무영문에 돌아와서 결과를 검마에게 보고하자, 검마는 크게 기뻐했다.
“아주 잘 했네! 세상 그 누구도 자네처럼 빠르고 확실하게 좋은 결과를 내놓을 순 없을걸세.”
“문제는 십이율주를 설득하는 겁니다.”
“흠. 그게 제일 귀찮겠지…”
인상을 찌푸린 검마는 내게 말했다.
“그 흑백련은 이번에 정 가주에게 준 게 전부인가?”
“아뇨. 사실 황산의 연못에 가서 더 캘 수 있습니다.”
흑백련은 연꽃 가득 피어있었으므로 적어도 수십 개는 더 캘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굳이 그렇게까지 캐놓을 이유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아도 예닐곱 개의 흑백련만 있어도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차고 넘쳤다.
그러자 검마가 말했다.
“그럼 열 개 정도 더 캐어 주게.”
“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슬슬 우리 무영문에도 책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머리쓰는 대소사를 하기에는 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해.”
나는 검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망량을 끌어들이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는 천하제일의 기재 중 한 명이지. 되려 지금도 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하네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싶지 않습니다.”
망량을 끌어들이려 했다면 이번 16번째 전생 초기에 끌어들였어야 했다. 내 개인적으로 힘을 키우려는 욕심 때문에 그를 일부러 방치해버린 것이다. 지금에 와서 망량을 끌어들였다가는 어떤 원망을 들을지 몰랐다. 그를 볼 면목도 없었다.
검마는 내 생각을 읽은 건지 차분하게 말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군.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망량이라는 사내는 그 정도 일로 자네를 원망하거나 내칠 정도의 소인배가 아니라는 말일세. 그토록 오랫동안 함께 해 왔으면서도 아직도 그를 모르겠나? 도리어 그는 자네가 자신을 선택해 줄 때마다 기뻐하곤 했네.”
딱 잘라서 말한 검마가 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언제나 망량의 주군(主君)이었네.”
“……”
“망량은 틀림없이 자네를 이해해 줄 것일세. 그리고 변화한 현재의 상황에 맞춰서 최고의 계책을 짜 주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주군!
나는 그 말을 듣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언제나 망량에게서 큰 은혜를 입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망량에게 진 빚을 갚는 기분으로 살아왔다. 주군과 책사라는 개념으로 접근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검마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왠지 석연치 않아. 어쩌면 망량의 지혜까지 있어야 십이율주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 예감이 들어.”
“음…”
“자자, 가 보게. 거리낄 필요는 없네.”
나는 반쯤은 떠밀리듯이 무영문에서 나왔다. 하지만 바로 비등으로 이동할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근처의 야산에 주저앉아서 한참동안 생각을 했다.
나는 이번 생에 근 7년 가까이 개인수련을 하기 위해서 그를 방치해 두었다. 그게 너무 미안해서 그를 찾아갈 생각조차 들지 않은 것이다. 망량이 어째서 천하의 악을 내버려두냐고 호통을 칠까봐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검마의 말대로라면 이렇게 생각하는게 되려 바보짓이라는 말이다.
‘ 망량에게 사과하자.’
망량은 내 선택을 이해해 줄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먼저 황산에서 흑백련을 열 개 캐놓은 다음, 비등을 써서 진랑곡으로 향했다.
파앗!
진랑곡에 도착해서는 익숙한 망량의 거처를 향해 올라갔다. 바로 갈 수도 있었지만 왠지 망량을 다짜고짜 낮도깨비처럼 놀라게 하기보다는 정식으로 방문하고 싶었다.
그런데 올라가는 도중에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망운진이 없다?”
망량이 호신용으로 거처 주위에 늘 펼쳐두던 망운진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망량이 망운진을 펼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싶어서 제법 빠른 걸음으로 망량의 초가집까지 올라갔다.
초가집은 을씨년스러운 기색을 풍기고 있었다. 대낮인데도 명백히 사람이 없는 듯 퀘퀘한 냄새를 풍겼고, 내부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나는 초가집의 내부를 다시 살펴보았는데 망량이 평소에 비치해두던 서가라던가 책은 하나도 없었다.
‘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망량의 거처를 내려가서 진랑곡 사람들에게 망량의 행적을 물었다.
그러자 망량의 부하 역할을 하던 진랑곡 사람 중 하나가 곰방대를 뻑뻑 피며 말했다.
“망량선사 말이우? 그 양반, 수련을 한답시고 떠나버렸수.”
“… 뭐라고요?”
그는 곰방대를 바닥에 툭툭 치더니 말을 이었다.
“거 뭐냐… 도사로 깨나 벌어먹고 살았지. 재산도 이 현(縣)에서 제일갈 정도로 알부자였을 거요. 그런데 난데없이 그걸 다 팽개치고 어딘가에 술법을 배우러 간답시고 가버렸소.”
“술법?”
“도사님이니까 당연한 것 아니것소.”
그의 말은 얼핏 옳아보였지만, 나는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있다. 내가 막야를 주어서 수기공양의식을 통해서 재능을 해방시키지 않는다면 – 망량의 술법재능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난데없이 맨몸으로 술법을 배우러 간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로 떠났답니까?”
“흠…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알 만한 사람이 없습니까?”
그러자 마을사람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몰러. 돈을 주고 가끔 일을 시키긴 했지만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히 신비주의였던 양반이니… 진랑곡에 그런 걸 아는 인간은 한 명도 없을 거요.”
“……”
나는 그의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망량은 섣불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데다 진랑곡에 자신의 흔적을 흘리고 다닐 정도로 허술하지도 않았다. 정말로 망량이 술법을 찾아서 여행을 떠났다면 아무도 모르는 게 맞다.
나는 고민하다가 이번에는 환신 천우진이 있는 낙양 인근의 마을으로 향했다.
파앗!
천암비서를 소나무숲에 숨긴 후, 천우진이 있는 마을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천우진에게 걸릴 경우 죽을수도 있었지만 그걸 감수해야할 정도로 지금 내 마음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에 진입해서 약 스무 걸음을 걷기도 전에 난데없이 주변에는 자욱한 환무(幻霧)가 일렁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안개가 끼이자, 안개 저편에서 천우진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7년이 지났는데도 외모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앳된 농촌의 청년같았다. 천우진은 나를 예리한 눈으로 노려보더니 말했다.
“강호의 무림인이군.”
“……”
“그런데 당신의 몸에 흐르는 그 심상치 않은 신기(神氣)는 무엇이오?”
“신기?”
“시치미 떼지 마시오. 당신은 보패(寶佩)를 지니고 있는 게 틀림없소.”
그렇게 말한 천우진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말했다.
“어느 선인의 제자인지는 모르지만 썩 꺼지시오. 그렇지 않으면 실력행사를 하겠소.”
“선인의 제자? 난 그런 게 아니오.”
“그럼 당신은 뭐요?”
“나는 백웅이라고 하오. 나는 당신의 사형인 망량의 행적을 알기 위해서 여기에 왔소.”
“……!!”
천우진은 내 말을 듣자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는 경계하는 기색으로 나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내 사형의 일을 어찌 알고 있지?”
“나는 그의 동료요. 그런데 갑자기 진랑곡에서 사라져 버려서, 동문이라면 알고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온 것이오.”
“믿지 못하겠군.”
천우진이 그렇게 대꾸하더니 손을 휘둘렀다.
“아무래도 당신을 제압해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겠군. 어디 이걸 받아 보시오.”
파아앗!!
그 순간이었다. 어마어마한 구름떼가 내 쪽으로 몰려오더니 천지의 분간이 없어졌다. 의념도 느껴지지 않았고 갑작스러운 기세라서 나로써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당황해서 멸혼보를 써서 그 구름떼를 간신히 피했는데, 구름 저편에서 천우진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 강신의 술법을 사용하는가? 그래봤자 환무진을 벗어날 수는 없다.]강신의 술법?
아마도 멸혼보를 칭하는 것이겠지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 음… 확실히 무한히 피할 순 없겠어.’
멸혼보의 가공할만한 속도로 최대한 천우진의 안개를 피하고는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 환무 내에서 시공간이 그의 뜻대로 자유자재로 조종되는 한 내가 이길 방법은 없는 것이다.
나는 별 수 없이 막야를 꺼내서 손에 들었다. 혹시나 싶지만 이게 뭔가 해결책이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날아오는 안개를 향해 막야를 휘둘렀다.
쩌억!
그 순간이었다. 난데없이 사방에 자욱하던 안개가 흩어지더니, 그 자리에는 낭패한 기색으로 서 있는 환신 천우진이 있었다. 천우진은 자신의 왼손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방금 막야를 휘둘렀을 때 내뿜어진 검기에 부상을 입은 듯 했다.
‘ 헉…. 깼다!!’
내가 환신 천우진의 환술을 깼단 말인가?!
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서 눈을 꿈벅거렸다.
천우진은 자신의 손에 느껴지는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경악해서 외쳤다.
“치… 칠요(七曜)! 칠요의 주인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