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238)
0238 ———————————————-
천계(天界)
나는 그날부터 바로 정씨 가문의 도움을 받아서 무영문을 고려로 옮겨오는 작업에 착수했다. 무영문의 재산을 담은 금궤짝을 모두 목갑에 집어넣은 후, 무영문도들 모두를 목갑에 넣었다. 비등을 사용하자 순식간에 무영문의 대부분이 고려땅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검마와 함께 앞으로 무영문의 터전이 될 땅과 건물부터 사들였다.
기본적인 터전마련이 끝나자 검마가 말했다.
“둘이서만 갈 곳이 있네.”
“네.”
파앗!
나는 다음 날, 검마와 함께 다시 중원으로 갔다. 무영문 근처로 온 검마는 나를 어디론가 인도했고, 이윽고 외진 산속에 있는 어떤 동굴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굴은 다소 인공적인 솜씨로 길이 트여있었고 맨 안쪽에는 왠 시꺼먼 상자가 놓여 있었다.
“이건?”
“이게 진짜 무영문의 정수(精髓)일세. 본문의 무영탈혼검법을 비롯해서 주요무공의 비급(秘級)은 물론 역대 조사명부, 비사, 일지, 비술 따위가 기록되어 있네.”
“……!!”
“십이율에 가기 전에 혹시나 싶어서 감춰두었지.”
‘혹시나’라는 건 역시 불의의 사고 때문에 검마가 사망에 이르는 경우였을 것이다. 자신이 죽을 경우에도 소문주 서문혜에게 이 검은 상자를 찾게 하면 무영문의 맥을 이을 수 있었으리라. 나는 새삼 검마가 철두철미한 성격이라는 걸 깨달았다.
검은 상자를 들어올린 검마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해야할 말을 좀 하고 가야겠군.”
“네.”
십이율과 대담해서 십삼율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그 날부터 겨우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정신이 없어서 향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못한 것이다. 검마는 동굴에 단둘이 온 김에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생각인 듯 했다.
검마가 말했다.
“말했다시피 십이율주는 그 때 내게 이렇게 말했네. [ 무영문을 십이율에 넣어주고 차별하지 않을테니, 칠요의 주인을 신단으로 보내주시오] 라고.”
“……”
“아마 자네를 본 순간부터 칠요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아챘을 것 같아. 그렇지 않다면 회의를 그렇게 제 뜻대로 직선적으로 진행할 수가 없지.”
“그렇겠죠.”
그 날 십이율주는 찬성과 반대 두 쪽의 의견을 모두 듣는 척 하다가 결국에는 자기 마음대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비록 찬성과 반대가 비교적 팽팽하긴 했으나, 설령 모두가 반대했다고 하더라도 십이율주는 무영문을 받아들여줬을 것 같았다. 그것은 무영문 하나보다도 칠요의 문제가 그에게 있어서 보다 중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십이율주는 굉장한 위엄을 가지고 있었어.’
검마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래저래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결국 자네의 신보(神寶)가 모든 걸 해결해버린 셈이군.”
“그렇지 않습니다. 충분히 대비를 하지 않았다면 이만한 결과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 그렇지만.”
검마는 동굴 바닥에 걸터앉았다. 그는 다소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문제는 자네를 신단에 보낼 경우 자네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일세.”
“……”
“진퇴양난이군.”
검마의 말대로였다.
만일 십이율주가 지위와 무력을 내세워서 내게서 수요 막야를 빼앗으려고 해도, 나는 거기에 저항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단에 가지 않는다면 십이율주가 무영문에 제재를 가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간에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단언하듯 말했다.
“신단에 가겠습니다.”
“웃기는 소리.”
검마가 인상을 찡그렸다.
“거기는 사로(死路)야. 설령 호법사자라고 해도 혈혈단신으로 신단에 들어가서 살아나오지는 못할 것일세. 죽는 걸 뻔히 아는데 보낼 수는 없지.”
나는 검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여태껏 많이도 죽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 죽음이 한번 더해진다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었다. 그러자 검마가 잠시 나를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갑자기 달려들어서 내 뺨을 철썩 때렸다.
쿠웅
의념으로 가속한 움직임이었기에 순간적으로 놓쳤다. 내가 동굴바닥에 쓰러지자 검마가 격하게 화를 내며 말했다.
“빌어먹을, 그걸 지금 내 앞에서 말하는 건가? 자네는 대체 무슨 정신머리인가!”
“하지만… 제가 가지 않으면.”
검마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웃기지 말게. 십이율에서 우리를 핍박한다면 다시 한 번 백련교의 발바닥을 핥아서라도 살아남으면 그만이야. 나는 여기에 자네를 설득하러 데려온 걸세.”
“……”
나는 뺨이 퉁퉁 부었다는 걸 깨달았고, 서서히 격통이 찾아온다는 걸 알아챘다. 검마가 안 봐주고 뺨을 갈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격통보다도 더욱 아픈 게 심장에서 느껴지는 걸 알아챘다.
‘ 아프다.’
누가 나를 이렇게 걱정해주는가?
망량과 미호 외에는 누구도 없었다. 수치심과 창피함보다는 울컥하며 격렬한 감정이 비어져 나왔다. 그것은 눈 앞에 있는 검마에 대한 고마움을 진심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메어오는 목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죽는 한이 있어도 가야 합니다.”
“왜?”
“제가 죽을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내 대답을 들은 검마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뛰어난 지력을 지닌 검마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기 때문이리라. 검마가 말을 잇지 못할 때 나는 말을 이었다.
“저는 아시다시피 무려 열댓 번을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느낀 게 있습니다.”
“느낀 거? 그게 대체 뭔가.”
“죽을 거 같은 선택을 하면 왠만하면 살더군요.”
“허허…”
검마는 기가막힌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그렇다.
이게 내가 느낀 죽음의 법칙이었다.
검마도 이내 내 표정이 진심이라는 걸 느꼈는지 의혹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농을 하는 건 아니겠지?”
“진짜입니다.”
“확실한가?”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검마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 뭔가 심경의 변화가 생긴 듯 어투가 달라졌다.
“그럼 왜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마의 말에 대답했다.
“제가 제 죽음의 때를 예상한 적은 없었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필연적인 선택을 할 때는 위험해보이는 길에서 도리어 생로(生路)를 찾은 적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뻔히 죽으러 가는 길처럼 보이는게 사실은 살아날 길이 무궁무진한 미래가 열려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으음…”
검마는 이제 흥미가 어린 듯 했다.
“그건 정말 특이한 견해로군. 나도 강호에 출도한지 수십 년이 넘었으며 그동안 생사의 고비를 무수히 넘겼네. 하지만 자네처럼 그저 운에 맡기고 위험한 선택을 한 적은 없었어. 주변에서는 내 선택을 도박이라고 했었지만 나는 모든 걸 철두철미한 계산을 한 후에 진행했지.”
“그래서 문주께서 강호에서 절세의 승부사라고 불리시는 겁니다.”
“자네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검마는 내 말을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듯 했다. 얼핏 황당해보이지만 내 직감을 사실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검마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자네는… 명(命)을 깨달은 게야.”
“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검마가 말했다.
“자네가 10번째 전생에서 정철욱 가주와 대화할 때였지.”
“아.”
그러고보니 그 대화는 인상이 깊어서 내 기억에 똑똑히 남아 있다. 검마는 그 기억을 순간적으로 포착해낸 모양이었다.
“자네가 그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제멋대로 행불행이 튀어나오는 것이 운이라고 하면, 명이라는 건 자네가 ‘올바른 선택’을 했기에 ‘올바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의미라 했지. 거대한 필연(必然)이 사소한 우연을 인간의 의지로 벗어나게끔 한다는 의미였어.”
“……”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자네는 여태껏 큰 판단을 그르치지 않았기에 사소한 우연에 발목이 잡히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일세. 그게 바로 명(命)이라고 볼 수 있네.”
기억이 난다.
분명히 그 때는 태허천존의 대운이 없는데도 일이 순탄하게 풀려서 왜 이렇게 잘되나 싶었는데, 정철욱 가주가 사주학의 예를 들어서 내가 명에 따라서 살고 있다고 했던 것이다. 내가 검마의 말을 곱씹고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건… 자네가 거대한 판단을 그르치지 않는 법을 직감으로 느끼기 시작했다는 의미일지도 모르네.”
“네…?”
“그런 생각해본 적 없나?”
검마가 팔짱을 꼈다.
“자네는 무려 열다섯 번이나 죽었고, 그 동안 생사의 고비를 열 배는 넘겼으며, 보통 사람이라면 일생에 한 번 하기도 힘든 거대한 선택을 수십 번이나 강요받았네. 역모도 여러번 일으켰지. 인생(人生) 하나에 있어서는 자네는 내가 감히 범접하기도 힘든 어마어마한 경험을 쌓아온 게야.
나는 자네가 그 경험을 쌓는 동안에, 어떻게 해야 나쁜 선택을 피할 수 있는가, 그릇된 판단을 피하는 [감각(感覺)] 그 자체를 깨달았다고 생각해.”
“……!!”
그런 생각은 전혀 해본 적도 없다!
내가 멍하니 서 있자, 검마가 말했다.
“운(運)이란 타고나는 거라 어쩔 수 없다 해도 자네는 이제 명(命)을 느끼게 되었으니 쉽사리 죽지 않게 되었을 게야. 극소수의 천재나 군주의 재(才)를 타고난 자들이 희소한 확률로 얻게 되는 능력을 후천적으로 수련한 셈이지.”
“하… 하지만 그건 좀 억지스러울지도…”
내가 말을 꺼냈는데도 내가 당황스럽다. 내가 당황하자 검마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흑요석을 통해 자네의 기억을 보지 않았다면 이런 이야기는 하지 못했을 게야. 하지만 최근에 자네가 죽었던 이유를 잘 살펴 보게.”
“음…”
“10번째 전생 이전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어처구니없이 죽었던 일이 대부분이었지. 그러나 그 이후에는 다소 불가항력적인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결코 무의미하게 죽지 않았어. 최소한 무언가를 얻어내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지.”
“그렇긴 합니다.”
“자네가 이성으로 의식하지는 못하겠지만,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일세. 죽음의 함정이 사방에 드리워질 경우, 최대한 죽음을 피하려 함과 동시에 손해보지 않고 죽는 법을 터득했다는 거지!”
“……”
나는 입을 쩌억 벌렸다.
‘ 내가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검마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후천적으로 대단한 기술을 익힌 셈이다. 세상 그 누가 운명에서 명을 감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게 마냥 좋다고 하기도 뭐한게 아무리 그래도 죽음은 아프고 두려운 것이었다. 좋다고 헤벌쭉 웃을만큼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검마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자네를 믿겠네. 죽든 살든 나중에 일단 가 보게나.”
“너, 너무 믿어주시는 거 같은데…”
갑작스러운 태세변환에 내가 더 당황했다. 검마의 유연성에 놀란 것이다.
“자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아마 죽지는 않을 걸세. 이론으로 설명하기 힘들겠지만 자네는 십이율주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직감한 거겠지. 또한 이 만남을 거치지 않으면 거대한 기회를 놓칠 거라고 직감했을지도…”
거대한 기회라.
내가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을 때 검마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자네를 믿는만큼 자네도 나를 믿으면 되지 않는가? 죽을 경우에는 내 전력을 다해 복수해 줄 테니 안심하게.”
“……!!”
복수해 준다!
분명히 검마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인데도 왠지 마음속 부담감이 씻겨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신단에 들어가서 절대 죽지 않겠다는 생의 의지가 불타오르는 것도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검마에게 단순히 빚을 지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내 감정을 의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파앗
나는 비등을 써서 검마와 함께 무영문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석 달 동안 검마를 도와서 고려에 무영문이 정착하도록 노력했다.
무영문에는 절정고수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그들은 금새 고려 귀족들의 호위무사 일거리를 받을 수 있었으며 세력을 확장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십이율이 무영문을 새로운 동방의 율법으로 받아들였기에 타 세력과의 다툼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십이율에 가입했다는 건 고려 전체를 주름잡는 강대한 대문파로 발돋움했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였다.
‘ 슬슬 신단에 갈 준비를 해야겠군.’
각오를 해야 한다. 나는 슬슬 무공을 점검하면서 신단에 가려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서문혜가 찾아온 건 바로 그 때였다. 그녀는 불안한 안색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내게 찾아와서 말했다.
“백 호법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소문주. 무슨 일이십니까?”
“강전길 의원님이 얼마 전부터 정씨가문에 있는 화서명 의원님과 왕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몰랐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내 그럴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 하긴 같은 천하오대의원이 아닌가? 서로 아웅다웅하긴 하지만 서로의 의술을 내심 인정하는 사이였다. 개경에서 가까이 지내게 되었으니 의술을 교류하는 건 당연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서문혜가 말했다.
“그리고 강전길 의원님이 뭔가를 알아내셨는지, 백 호법님을 부르셨어요. 저는 그 말을 전달하러 왔어요.”
“음…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화서명 의원님이 계시는 의약전으로 가시면 된다 하셨어요.”
“감사합니다.”
꽈악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갑자기 서문혜가 내 옷자락을 잡았다. 내가 서문혜를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혹시 어디로 떠나시나요?”
“아닙니다.”
눈치가 귀신같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했지만 서문혜는 뭔가 심증이 있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시 후 말했다.
“백 호법님 덕에 무영문이 흥하고 있어요. 호법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두 문주님의 실력이지요.”
“겸손하실 필요 없어요. 무영문 사람들은 모두 호법님을 문주님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있답니다.”
“……”
서문혜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중원무림에서도 절세미녀로 일컬어지며 사파의 한떨기 꽃이라고까지 불렸던 서문혜의 옥용을 마주보자 마치 빛이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 눈을 마주치던 서문혜가 말했다.
“백 호법님. 부디 저와 아버님을 지켜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서문혜는 물러났다. 뭔가 예전과는 약간 말이 다른 것 같았지만 대단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강전길 의원이 기다리고 있는 의약전으로 향했다.
의약전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 곳에는 천하오대의원 중 두 사람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마주앉아서 무언가를 심도있게 논의하고 있었고 굉장한 집중상태인 듯 했다. 그리고 그들은 내 기척을 느끼자 나를 돌아보았다.
“오오!”
“왔군.”
“두 분께서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
“이리 와 보게.”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강전길 의원이 바닥에 있던 왠 상자를 들었다. 나는 그 상자를 보자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건 예전의…”
“그렇네. 투마의 몸뚱이에서 채취한 촉수의 표본이 들어있네.”
그렇게 말한 강전길 의원이 갑자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촉수가 굼실거리며 새어나올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뜻밖에 농도짙은 흑암의 기운이 상자 밖으로 이글거리며 흘러나왔다.
내가 가까이 가서 살펴보자, 상자 안에는 왠 조그마한 뱀같은 게 들어 있었다.
‘ 아니… 뱀이 아니군. 팔다리가 달려있고 머리가…’
나는 이내 손가락 두 마디만한 그 조그마한 형체가 무엇인지 깨닫고 말했다.
“용(龍)?”
“그렇네, 용일세.”
자세히 보자 그건 조그마한 용이었다. 전신에서 시꺼먼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그 기세가 과해서 차라리 조그마한 흑염이 일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아니, 분명히 그 때 넣은 것은 무한으로 재생하는 끔찍한 촉수 아니었습니까?”
“그렇네. 하지만 그 때부터 완전 밀폐된 공간에서 가만히 놔두었더니, 약 보름 전에 갑자기 비명소리를 내며 요동을 치는 게야. 놀라서 열어보니 이 안에 조그마한 용이 기력이 다해서 가만히 있더군.”
“……”
이게 무슨 일인가.
‘ 촉수가 용이 되었다고?’
내가 혼란해하자 옆에 있던 화서명이 말했다.
“나는 거기 강가 놈과 함께 모든 의학지식과 의서를 그동안 연구했다. 보름동안 있는 짓 없는짓 다 동원하며 관련된 문헌을 찾아보았어. 허나 그 용에 대한 것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더군.”
“으음…”
“다만 현재로써 가장 유력한 가설은, 그 용이야말로 촉수가 완전히 성장한 모습이라는 것일세.”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촉수는 투마의 몸을 끊임없이 재생하려 들었는데 분리되자마자 성장이라니…”
“그렇지. 정말 이상한 일일세. 그래서 자네를 부른 게야.”
“네?”
화서명과 강전길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 용에게 기를 불어넣어 주게.”
“……!!”
“어쩌면 이 용은 힘이 부족해서 동면상태일지도 몰라. 그리고 자네는 엄청난 내공을 지니고 있으니 용을 동면에서 깨울 수 있을지도…”
“먹이를 주는 건 어떨까요?”
“다른 먹이는 다 시도해봤어. 허나 반응도 않더군. 남은 방법은 무형의 기를 불어넣는 것 뿐이라고 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보겠습니다.”
고오오오
나는 잠시 후 기를 모아서 손에 집중했다. 그리고는 조그마한 흑룡에게로 한꺼번에 밀어넣었다. 내 전력을 다한 내공이었기에 건물이 떨리고 땅이 요동칠 정도였다. 잠시 후 기의 전이가 끝났을 때였다.
쿠르르르…
흑룡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손가락 두 마디만한 크기였던 흑룡은 고작해야 반 각 만에 사람의 팔뚝만큼 커져 있었고 용의 형상이 명백히 드러나 보였다. 마치 전신에서 기를 먹어치우는듯, 쉴새없이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이었다.
“오오…!!”
우리는 그 모습을 경악을 하며 바라보았다. 강전길이 감탄한 듯 외쳤다.
“기를 먹고 성장하는 생물이라니! 이런 게 존재한단 말인가!”
“용에 대해 새로운 걸 알게 되었군!”
“속단하지 말게! 저게 용이란 증거는 아직 어디에도 없어.”
그렇게 두 명의 절세의원이 잡담을 하는 동안에도 흑룡은 계속 커졌다. 이윽고 흑룡이 커다란 황소만큼 커졌을 때야, 흑룡은 성장을 멈추고 천천히 눈을 떴다. 흑룡은 자신의 날개를 서서히 홰치더니 주변을 인식하는 듯 했다.
뀨르륵
흑룡은 기묘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 놈은 이상하게도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듯 했는데 마치 이성이 존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윽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 고… 맙… 다… ]괴어(怪語)!
명백히 이족의 말이었는데 내 머릿속에 명백히 해석이 되어서 들려왔다. 짧은 말이긴 했지만 다른 때와 다르게 확실하게 번역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 전생을 겪으며 한번도 없었던 일인지라 내가 당황하자 흑룡의 몸 앞에 시꺼먼 구멍같은 게 생겨났다.
쉬익!
흑룡은 그 구멍을 통해서 난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게 왠 낮도깨비같은 일인가 싶었지만 이내 구멍쪽으로 손을 뻗자, 갑자기 품 속에 있던 황금비등이 반응했다.
우우웅
전에 없이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내가 당황해서 황금비등을 품속에서 꺼내자, 황금비등이 갑작스럽게 내 머릿속에 말을 걸었다.
[ 암천향(暗天鄕)으로 가겠는가…]아니!
나는 즉시 황금비등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눈 앞에 있던 구멍도 사라졌고 황금비등의 황금빛도 사라졌다. 그리고 소요가 끝나고 정적이 남은 이 자리에는 멍청히 굳어 있는 의원들의 표정만 남아 있었다.
“대… 대체 무슨.”
“이게 무슨 일이지.”
“……”
하지만 나는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 흑룡은 암천향에 거하던 종족이군. 하지만 연금술사의 주술에 의해 자신의 형태를 잃고 원시적인 촉수형태로 변해서 사람에게 강제로 이식되었던 거야.’
그리고 인간의 몸에서 벗어나서 기를 먹고 자신의 형태를 되찾자, 암천향으로 향하는 통로를 열어서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내 품 속에 있던 황금비등은 이차원으로 향하는 통로가 생겨나자 거기에 자동으로 반응한 걸로 보였다.
‘ 그렇다면…’
나는 이 일이 한가지 더 끔찍한 사실을 암시한다는 걸 깨달았다.
‘ 연금술사란 놈은 암천향에서 자유자재로 마물을 소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용인화는 용족을 소환해서 시전하는 주술일 것이고, 마인화도 비슷한 원리일 가능성이 컸다. 연금술사는 어떤 마법을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한 수준의 능력자인 건 틀림없었다. 비록 직접전투능력은 낮았으나 그걸 메꾸고도 남을 정도로 가공할만한 지식과 마법의 보유자인 듯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한층 각오를 더할 수밖에 없었다.
‘ 이번에 십이율주에게 물어봐야겠군.’
단순히 십이율주에게서 살아남는다는 각오가 아니다.
그걸 넘어서서, 그에게서 최대한의 정보를 알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향후 막야를 사용해서 황궁과 싸울 때 크게 유리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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