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25)
0025 ———————————————-
금의위(錦衣衛)
쿠르르릉
절벽, 그리고 폭포. 한없이 쏟아지는 물줄기를 건너편에서 바라보던 나는 새삼 감회에 젖어 있었다. 저 맞은 편에 천년설삼이 잠들어 있다.
‘ 세상에 영약을 두 번 먹는 인간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천년설삼이 백 년만에 나온 절세영약이었기에 무수한 인간들이 쟁탈전을 벌이며 무림이 피로 물들었던 것이다. 천년설삼처럼 희귀한 영약을 두 번 이상 먹는 일은 굉장히 확률이 낮았다. 나는 잡생각을 거두고 폭포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폭포 안의 동굴을 지나가자 천년설삼이 잠든 설원(雪園)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설원의 눈을 치우고, 근처의 민가(民家)에서 대충 훔쳐 온 물통과 화섭자를 내려놓았다. 저번에도 했듯이 이번에도 흑백련의 잎과 뿌리까지 꼭꼭 데쳐서 씹어먹어야 했다. 요리기구는 필수로 갖고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혈 안으로 들어가서 천년설삼의 위용을 재감상했다. 역시 아무런 변화가 없이 오연한 백류문양을 뽐내고 있었다. 나는 천년설삼 옆에서 예전처럼 흑백련을 끓여서 데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준비가 다 되자 나는 망설임없이 흑백련부터 뿌리를 꼭꼭 씹어먹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생각했었지만 마치 감자같은 맛이 났다. 맛은 나쁠 게 없지만 이걸 먹은 후에 찾아올 시련을 생각하자 긴장이 되었다.
“으으으윽…”
쉬쉬쉭…
단전(丹田)에서 엄청난 양기(陽氣)가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나는 저번에 겪었던 지옥같은 고통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지만, 어째 생각보다는 그리 아프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말 그대로 내장이 용암에 녹는 고통이 아랫배에서 몰아쳤는데, 지금은 그냥 간단한 복통 정도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 어? 별로 안 아프네?’
기가 범람하고 있지만 내 몸은 이미 대량의 기(氣)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인 듯 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양기를 가만히 놔둬서도 안 되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옆에 있던 천년설삼을 뽑아서 와작와작 씹어먹었다.
목구멍을 타고 한기가 청량하게 넘어간다. 이윽고 몸 내부에서 거대한 음기와 양기가 부딪히더니, 폭발하려는 듯 응축(凝縮)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는 눈을 까뒤집고 쌍코피를 터뜨렸고, 전신의 가죽을 한점한점 떼는듯한 고통이 느껴졌기에 나는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목이 베일 때 이상의 긴장감이 전신에 엄습해 왔다.
쿠르릉
“……?”
하지만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단전에서 휘돌며 폭발하려던 거대한 음기와 양기는, 이내 땅에 스며든 물처럼 자연스럽게 사그라드는 게 아닌가? 고통도 없이 눈 녹듯이 사르르 없어지는 기세는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예전처럼 뇌룡일기공과 마보행공으로 필사적으로 발버둥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도 없이 그냥 뇌룡일기공의 대주천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안정되어 갔다.
‘ 어떻게 된 거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를 흘려서 생사현관쪽의 대맥(大脈)을 감지해 보았다. 생사현관은 여전히 뚫린 채였고, 주변의 세맥도 뚫려 있었다. 다만 내면에 들어차있던 거대한 기운이 용솟음치며 생사현관까지 뚫고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나는 한참을 기다렸지만 그냥 머리가 띵한 거 빼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뭐야. 이거 쎄진거야 만 거야?”
지금 내 내공을 감지해보려 했지만 원래도 측정이 안 되던 양이었다. 이제 와서 내 공력을 스스로 재어볼 방법도 없다. 설마 영약 여러번 먹기가 안 된다는 말인가? 혹시 내가 주화입마(周火入魔)에 걸렸나 싶어서 허공에 가볍게 뇌운장(雷雲掌)의 초식을 뿌려 보았다.
꾸콰쾅
“……!!”
그 순간이었다. 공기가 터지듯 폭발하며 뇌풍(雷風)이 허공에 난무(亂舞)했다. 예전에 펼쳤을 때보다 더욱 대단한 위력이라서, 나는 내 내공이 더욱 늘어났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러나 동시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억윽, 씨발!”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다.
내가 비명을 토해냄과 동시에 비경의 곳곳에 쌓여있던 거대한 양의 적설(積雪)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 곳에 있는 눈이 소리와 폭발음 때문에 크게 공명하면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눈사태!
나는 새하얗게 천하를 뒤덮듯이 쏟아지는 눈을 피해서 황급히 딱 하나 있는 샛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요리도구같은 걸 챙길 새도 없었고 그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내 경공이 매우 빠른 편인데도 눈사태가 날아내리는 속도보다 딱히 빠르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옛날에 눈에 파묻혀 죽었으리라.
쿠르르르르릉
“으아아아아악.”
나는 무려 오십 장을 뛰는데도 산을 뒤덮듯이 내려오는 눈사태를 보자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비경이라지만 이 정도의 눈이 대체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나는 그 후로 삼십 장을 더 뛰고 나서야 눈사태의 전개속도가 느려지는 걸 확인했고, 근처의 바위에 앉아서 숨을 돌렸다.
“허억… 허억… 죽을 뻔 했다…”
웃기지도 않는다. 영약은 먹었지만 내공을 시험해보다가 눈사태로 죽을 뻔 했습니다, 라니. 하긴 이 황산 일대는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 아니라서 눈사태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내 실수였다.
마음을 진정시킨 후 나는 내 내공이 2배로 늘어났나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뇌운장의 위력이 늘어난 것만으로 그렇게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처음 천년설삼을 먹었을 때의 그 엄청난 고통이 사라지고 밋밋하게 복용과정이 넘어간 게 껄끄러운 것이다. 힘이 약한 것도 찝찝하지만 세졌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찝찝한 일이었다.
나는 이제부터 뭘 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천암비서와 영약, 필요한 건 다 챙겼지만 지금부터 뭘 해야한다는 말인가? 청룡무관에 들어가서 수련을 하면 좋겠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기에 나는 고민했다.
돌연 짜증이 났다.
‘ 그냥 수련같은거 잊어버리고 편하게 살아볼까?’
보통 무림인이라면 기겁을 할 생각이었다. 역행이라는 기연에다가 천년설삼을 2번이나 처먹은 상태에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나는 3번째 전생에서 황산까지 오는 과정에서 회의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렇게까지 고생하면서 무공을 쌓고, 또 무명제사서를 훔치는 일에 도전해서, 결국 얻어내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너무 고생했다.
내가 편하게 살고자 하면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못한다.
이미 충분한 힘도 있다.
“……”
나는 고민을 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안락하게 살자.”
이번에는 다른 귀찮은 고민 하지말고, 하고싶었던 거나 진탕 해버리자.
무명제사서 같은 건 당분간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황산의 아랫마을에 내려오자마자, 평소부터 소작농을 괴롭히기로 유명했던 알부자네 집으로 몰래 들어갔다. 그리고는 안에서 은자 50냥을 꺼내서 나왔다.
‘ 이걸로 여비정도는 되겠지.’
명백한 도둑질이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원래부터 마을사람한테 죽어라 욕먹는 놈이었고 소작농에게도 가혹했다.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것이다. 나는 마을을 나와서 갈랫길 앞에 서서 고민했다.
“……”
여기서 어디로 가면 좋을까. 새삼 고민이 되었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동쪽 방향을 택했다. 이건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는 것으로써, 내 고향마을인 소을(小乙) 마을로 돌아가는 일이다.
사공표국으로 가서 사공린의 예쁜 얼굴을 다시 볼 수도 있다.
망량에게 찾아가서 기문둔갑과 지식을 추가로 배울 수도 있다.
이런저런 방향이 있었지만 소을 마을로 다시 돌아간다.
내가 황산을 떠나서 느긋하게 먹고자면서 마을에 다시 도착하는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산길을 질러다니지 않고 관도로만 다녔으며, 역참에서 종종 마차를 빌려탔으며, 때로는 직접 말을 타기도 했기 때문이다. 은자 50냥이라는 여비를 소모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소을 마을의 입구에 걸어들어와서 차갑게 웃었다.
“하하핫!”
내가 왜 여기에 돌아왔는가.
그 동안 벼르고 별러왔던 복수를 하기 위해서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번에 역행하고나서 왜 그 생각을 못했나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촌장이 살수조를 고용해서 날 죽이게 했을 때의 정신적 충격이 컸기 때문이리라. 그 때 너무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이것저것 따지면서 복수를 회피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약을 2번이나 처먹은 지금의 나는 굉장히 생각이 느긋해져 있었고 한편으로는 냉정했다.
촌장의 후환? 다 죽여버리면 알 게 뭔가.
복수 후에 뒷조사를 한다고 해도 그냥 튀어버리면 그만이다.
하루아침에 소똥이가 촌장일가를 몰살시켰다고 한들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사람은 하고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지.’
나는 한쪽 팔에 진기를 돋우며 천천히 마을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내 눈가에는 살기가 번득이고 있었다. 누구든지간에 한 놈 걸리면 본보기로 전신을 찢어놓고 볼 생각이었다.
그 때였다.
“소똥아, 돌아왔느냐!”
“……?”
나는 내게 반가운 척 하는 인물을 보자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생전 일면식밖에 없던 왠 촌부(村夫)가 내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생을 통틀어서 제대로 이야기해본 적은 없었고, 그저 촌장에게 소작을 바치는 소작농이라는 인식밖에 없었다. 심지어 나는 그의 이름도 제대로 몰랐기에 얼떨결에 대답했다.
“어 네, 네.”
살기가 죽어버렸다. 나는 본질적으로 이 마을의 모든 존재들에게 증오를 품고 있었는데 설마 인사를 해 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촌 아저씨는 내게 왠 감자를 건네주며 말했다.
“뭐하러 마을에 돌아왔냐. 그냥 나가서 살 것이지.”
“네?”
그가 안쓰러운 듯 혀를 끌끌 찼다.
“워낙 네 삶이 고단하길래 촌장에게서 도망친 줄 알았다.”
나는 그가 하는 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전부 내가 괴롭힘당하는 걸 보고 고소해하는 게 아니었던가?
게다가 나를 동정하는 듯한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내가 감자를 두 손으로 잡은 채 가만히 앉아있자 그가 말했다.
“돌림병이 유행할때 네 부모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너도 평범한 마을 애들처럼 크고 있을텐데 참 세상일이란게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 내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 돌림병 때문에 두분 다 돌아가셨다. 나는 그 때 난데없이 고아(孤兒)가 되었고, 마을사람들은 남아있는 나를 누가 키울까 언쟁을 하다가 촌장네 집에서 키우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촌장집에서 하인처럼 살면서 십대 시절을 보내야 했다.
나는 감자를 한 입 베어물면서 말했다.
“촌장놈을 확 죽여버리려고 돌아왔습니다.”
“하하하, 그러면 오죽 좋게?”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역시 내가 하는 말이 그냥 화풀이로 하는 푸념인 걸로 알고 있는 듯 했다. 하긴 누가 10대 꼬마가 천하제일급 내공을 갖고있다고 생각하고 있겠는가? 지금 나는 학살을 벌일 능력도 의지도 충분히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저씨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나? 장수(長水)다.”
“진짜 평범한 이름이네요.”
“나같은 놈 이름이 다 그렇지.”
“아저씨 아들 이름이 뭐였습니까?”
“장태(長太)다.”
“……”
나는 장수의 아들인 장태를 잘 알고 있었다. 마을아이들끼리 몰려다니면서 나를 때리는 데 일조했고 다굴놓을 때 주로 발차기를 했던 놈이다. 내가 외양간에서 자고 있을 때 찬 물을 뿌려서 약올렸던 놈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첫 전생에서 복수를 하려고 마을에 찾아왔을 때 발로 대가리를 차서 장태를 황천으로 보내버린 기억이 있다. 장태의 대가리가 터져서 덜렁거리는 걸 짓밟고 미친듯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 개새끼가 장수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 이 아저씨는 착해보이는데 왜 아들놈은 병신일까?’
하긴 장수도 마냥 선하다고는 볼 수 없다.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촌장일가에게 학대당하는데도 못본 척 한 것이다. 물론 그에게 촌장에게 뭐라고 간섭할만한 현실적인 능력도 권한도 없으니 이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고 봐줘야 한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저씨는 만일에 인생을 반복할 수 있다면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반복? 과거로 돌아간다는 뜻이냐?”
“네.”
“뭐… 후회할 일 안하고, 하고싶은 일 하면서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겠지.”
나는 장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투둑
장수는 그 순간 앞으로 쓰러져서 기절해 버렸다. 내가 빠르게 점혈(點穴)을 해버린 것이다.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깊은 점혈이 아니므로 한시진 후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를 나무등걸 밑에 대충 앉혀놓고는 중얼거렸다.
“가 볼까나.”
후회할 일을 하지 않는다.
하고싶은 일을 한다.
행복하게 산다.
이건 간단해 보였지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다. 나는 더 이상의 망설임을 지운 채 마을에서 위쪽에 지어져있는 촌장네 집으로 향했다. 지금이 초저녁이라서 그런지 촌장일가는 옹기종기 모여서 저녁을 먹을 준비를 하고있는 걸로 보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광경을 보면 단란하고 행복해 보여서 흐뭇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촌장의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 속에서 뭐가 울컥하고 치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갑작스럽게 살수조장의 검기에 목이 베였을 때의 기억, 그리고 어떻게든 잘 살아보겠다고 지난번 삶에서 미친듯이 굴렀던 기억이 혼재되면서 심장을 끓게 만들었다.
나는 촌장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촌장은 어?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호통을 쳤다.
“소똥이 네 이놈! 어딜 함부로 가출했다가 이제야…”
“촌장!!”
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소리는 약하게 떨친 사자후라서 우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촌장은 뭔가 심상치 않은 걸 감지했는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살기를 토해내며 말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살리고 싶은 놈을 딱 하나 정해 봐라. 그 놈은 살려 주겠다.”
“……”
“당장 대답해.”
촌장은 어버버 하다가 갑자기 냉정해졌는지 허둥거림을 멈췄다. 그러더니 자기자신을 가리켰다.
“나, 나…”
“그럴 줄 알았다.”
퍼버벅!!
다음 순간 촌장의 대가리가 뇌운장에 맞아서 날아가 버렸다. 뇌수가 튀고 혈육이 비산했다. 그를 괴롭히면서 죽일 수도 있었지만 아까 장수와의 이야기 때문에 마음속이 혼란스러워서 그냥 빨리 끝내버리고 싶었다.
“꺄아아아아악!!”
“촌장님!! 아악!”
“여보!!”
아수라장이 벌어지며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몇몇은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걸 눈치채고 도망치려 했으나 나는 날듯이 뛰어서 그 자들부터 때려죽였다.
투콱
콰앙
“아아아악!!”
주먹 한 방에 한 사람씩 죽어나갔고 겨우 열 걸음을 옮긴 상황에서 살아있는 인간은 딱 한 명밖에 되지 않았다. 피바다 속에서도 나는 피 한 방울 안 묻은 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남아있는 금만재는 갑작스러운 학살의 현장에서 현실파악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갑작스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아니 현실도피를 하고 있는 눈이었다.
나는 금만재에게 다가가서 뺨을 철썩 후려쳤다.
“끄악.”
내공을 약간 실은 것에 불과했지만 금만재의 이빨이 튕겨나오며 모로 쓰러졌다. 일부러 안 쓰러질 정도로 힘의 가감을 했다. 나는 쓰러진 금만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넌 이 상황이 왜 일어난건지 모르겠지?”
“아… 으… 왜… 대체 왜…”
“난 말이다, 너한테 50년치 원한이 있어. 너한테 제대로 갚아주는 건 오늘이 처음이거든.”
“……”
금만재는 공포와 분노 때문에 몸만 벌벌 떨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긴 이 상황에서 제정신을 차릴 정도로 정신력이 강한 놈이었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원한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빌어먹을 새끼! 애비 잘 만나서 편하게 호의호식하던 금수저가 마음 한번 곱게 쓰기가 그렇게 힘들더냐?”
퍼억
금만재는 숨도 못쉬고 배를 잡고 꺽꺽거리며 쓰러졌다. 내공을 실은 게 아니었지만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는 충분했다. 나는 금만재가 괴로워하는 꼴을 보니 수십년 먹은 체증이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이 놈이 나를 괴롭혔던 기억은 너무나 생생했다. 마을아이들이 단체로 나를 따돌리고 폭행하도록 선동한 주범(主犯)이며, 한시도 쉬지 않고 나를 집안에서 하인취급했고 인간대접도 하지 않았다. 어리기만 했던 내가 괴로워서 외양간에서 한숨섞인 눈물을 흘린 게 수백 번은 될 것이다.
첫번째 삶에서 표사로 살면서 가장 괴로웠던 점은, 하루하루 먹고살기가 힘들다는 게 아니었다. 나를 괴롭히던 놈은 여전히 잘먹고 잘살면서 호의호식하고 있는데 나는 그 원한을 갚아줄 방법조차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원한을 갚을 수 있는 상황이 되니 내부에서 격랑이 미친듯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내부에서 악랄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나는 두려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금만재의 눈빛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순간, 내가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했다.
“눈깔이 지랄맞군. 그딴 눈깔은 없어도 될 거다.”
뿌지직
“끄아아아아아아악!!”
그 순간 금만재의 양쪽 눈알이 내 손에 잡혔다. 혈관을 잘라서 눈알을 뚝 떼어내자 금만재는 핏덩어리가 되어서 발광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이 그에게 닥쳐오고 있는 중이리라.
“네놈도 불알 두쪽만 갖고 어디 살아 봐라. 금만재.”
나는 복수가 끝났기에 살육의 현장을 등지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촌장의 집에 들어가서 비밀장치를 작동시킨 후 은금괴가 들어있는 금고를 가지고 나왔다. 이것만 있으면 앞으로 먹고사는 데 부족함은 없으리라.
원래는 마을사람도 싸그리 몰살시켜버릴 생각이었으나, 장수와의 만남때문에 관두기로 했다. 그가 인간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마을 또한 피바다가 되었을 것이고, 나는 피바다가 된 마을에 기름을 뿌리고 방화해 버렸을 것이다.
저벅
저벅
나는 마을 바깥으로 나와서 은금고를 내려놓고 개울물에 피묻은 손을 씻었다.
한참을 씻던 중, 손이 미친듯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
개울물에 비친 내 얼굴이 일렁이고 있었다.
‘ 나는 지금 행복한가?’
수십 년이나 별려왔던 복수를 오늘 제대로 저질러 버렸다. 후환같은 거 생각도 안 하고 제대로 저질렀다. 금만재가 살아남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양쪽 눈이 뽑혀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앞으로 사람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살수조에 죽은 원한과 수십년치 원한을 제대로 갚아준 셈이었다. 후환을 걱정할 일도 없었다.
후환? 그건 나를 원망하는 주체에게 ‘힘’이 있을 때나 생기는 일이다. 아마 매화표국이나 개방에서 나를 범인으로 특정하는 건 가능할 테지만, 촌장일가를 위해서 끝까지 쫓아다녀줄 의리는 없다. 기껏해야 한두 해 소똥이와 닮은 범인을 이 근처에서 찾아다니다가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버릴 것이다.
촌장이 죽어버린 시점에서 나는 아무런 걱정거리도 없었다. 그동안 너무 걱정하고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은 그리 상쾌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마을청년들을 뻥뻥 차죽였던 때의 극렬한 쾌감과는 달리 칙칙한 어둠이 마음속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해도 잔인하게 학살을 해버렸다는 양심과 자책감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제일 찝찝한 것은 – 촌장과 일가가 자신들의 잘못을 충분히 뉘우치지도 않고 그냥 뒈져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죽이는 건 너무 쉬웠지만, 싸늘하게 죽어있는 자들의 피바다를 보니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풀리다가 말아버린 듯한 찝찝함이었다.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
그냥 짜증난다.
나는 고개를 크게 젓고는 재차 걸음을 옮겼다.
지금의 이 기분은 아마도 평생 찢어지게 괴롭게 먹고 살았던 내 반발심이 터져나오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왠지, 학살을 저지르고 난 직후가 되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흐르는대로 몸을 맡기게 되었다.
냉정하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우선은 이 은괴를 전장(錢場)에서 바꿀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 흠, 바로 환전하면 안 되겠군. 몇 년동안 묵혀뒀다가 바꿔야겠어.’
촌장일가가 몰살당했으니 매화표국과 개방에서 움직일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주변의 의심스러운 행적을 탐문할 것이고, 어린아이가 갑자기 거대한 양의 은괴를 돈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를 추적할 게 뻔했다. 은괴는 최소한 몇 년을 묵혀두었다가 바꿀 필요성이 느껴졌다.
나는 은금고를 어디에 숨겨둘까 고민하다가, 적당한 소나무숲에 묻어두었다. 여기는 눈에 익숙한 지형이기에 언젠가 다시 찾아와도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으로 앞으로 3년 후에 은금고를 파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진짜 고민이 다가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무데나 가도 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선택이 힘들었다.
“……”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행선지를 망량의 집으로 잡았다.
‘ 지금은 지혜가 필요하다.’
청룡무관에 들어가서 무예를 수양해야 고수가 될 수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벌어서 먹고사려니 어떤 재간을 발휘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는 머리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기에 망량에게 현재의 내 상태를 상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망량은 내가 청룡무관에 들어갈 수 있는 지혜를 내어줄 지도 모른다. 물론 이제와서 망량과 무명제사서 이야기를 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다. 일단은 당장 내 처지부터 개선하는 게 중요하다.
목표는 망량의 집이 있는 진랑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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