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264)
0264 ———————————————-
천계(天界)
17번째 인생이 시작되었다.
익숙한 외양간의 냄새가 코로 흘러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나는 지난번에 쌓았던 모든 인연을 잃었다는 걸 실감했으며, 장성한 육체에서 어린 육체로 되돌아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동안에 얻었던 내공의 성취는 고스란히 내게 전승된 상태였다. 나는 객관적으로 내 상태를 살피면서 차분하게 일어섰다.
“생각을 좀 해 봐야겠군.”
16번째 삶이 만족스러웠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아쉬움이 너무 많았다. 황궁을 쳐서 멸망시킨 것은 좋았지만 결국 수요 막야가 폭주해서 천계와 싸우다가 봉인당할 뻔 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내 머릿속에는 지선 망량이 불어넣은 술법의 지식과 경험이 들어와 있었다.
지선 망량은 곤륜산에 막무가내로 입산한 후 약 이 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해서 술법을 익혔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넘는 수행 끝에 대라신선 구천현녀(九天玄女)의 직계제자로 들어가는 기연을 얻게 되었고, 천계의 보물을 취함으로써 사용가능한 술법과 능력을 향상시킨 것이다. 짧은 시간 내에 보패를 사용가능한 지선의 수준이 된 것은 온전히 그 자신의 운, 노력, 실력이 합쳐진 결과였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의문점이 들었다.
‘ 어째서 막야에 불어넣어져 있던 이타콰가 폭주한 거지?’
아스타나의 선지자는 내게 말했었다.
[ 혹시 이타콰가 내 정신이나 몸을 빼앗을 가능성이 있는가?] [ 그럴 리는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 깃들어있는 이타콰는 본체가 아니라 화신(化神)이기 때문이다… 계약을 결코 어길 수 없다…] [ 화신?] [ 대부분의 [옛 지배자]는 결코 본체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뭐… 계약이기 때문에 이타콰의 모든 힘에서 몇 할은 확실히 들어가 있겠지.]나는 이미 선지자에게 이타콰의 신체강탈 가능성을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최상의 지혜를 지니고 있다는 선지자가 그 부분을 단호하게 부정했기 때문에 망설임없이 막야를 성장시키는데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막야의 힘을 키울대로 키운 결과는 이타콰의 육체강탈과 폭주로 이어졌다.
선지자가 나를 속인 것인가?
나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다른 생각이 들어서 화를 가라앉혔다.
‘ 아냐. 다른 가능성도 있어.’
나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선지자에게 이 문제를 확실히 따져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나는 ‘황궁타도’가 전면적인 목표였다. 사실 황궁을 쓰러뜨리는 것만 해도 굉장히 큰 고난이었기에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지난번 생에서 막상 황궁을 쓰러뜨리고 나니 천계가 큰 장애물로 다가왔다. 또한 지선 망량의 기억도 천계의 내면에 가공할만한 어둠이 존재한다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천계 또한 가상의 적으로 여기고 싸워야 한다. 만에 하나 천계가 만악의 근원일 경우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망량을 만나봐야겠군.”
나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든 저렇든간에 모든 문제의 열쇠를 품고 있는 것은 바로 망량이다. 현재와 과거, 미래를 잇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떤 지혜로 어떤 결론을 내든간에 그가 생각한 것이 가장 옳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곧장 천암비서를 얻으려고 움직이려다가 멈칫했다.
‘ 그러고보니 절연의 언령으로 여동빈을 바로 쫓아내는 게 옳을까?’
내게 붙어있는 천계투선 여동빈의 단말은 상시빙의상태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마(魔)를 감지할 경우에만 여동빈이 미리 강림해서 나와 호응하는 형태였다. 그래서 지금은 여동빈이 내 상태를 상세하게 살피고 있지 못하다.
여동빈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절연의 언령을 시전해서 쫓아버려도 부족하지만, 나는 성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번 생에서는 상황이 꼬이다보니 여동빈과 척지고 천계와 척지게 된 것이지만, 여동빈 자체는 크나큰 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물과 대적할 때 여동빈이 없으면 불편할 경우가 있을 것 같았다.
‘ 수요 막야를 해방시킬 때까지는 일단 놔두자.’
좀 더 여동빈의 천둔검법을 체감할 때까지 놔둬도 상관없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천암비서를 얻고 나서 황금비등을 얻는 과정은 당연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뇌옥으로 가서 거대 두꺼비인 [달의 짐승]과 싸우기 직전에 이르렀다.
파아아앗
달의 짐승과 마주치자 검선 여동빈이 내게 강림하기 시작했다.
[ 마를 물리치러 내가 왔노라!!]그 목소리에는 창노한 기백이 담겨 있었다. 거대한 영혼이 내 몸을 뒤덮는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존재감을 느끼다가 문득 생각했다.
‘ 가만. 천둔검법을 내가 배울 수는 없을까?’
천둔검법은 인간의 검법이 아니라 신선의 검법이었다. 그렇기에 초식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요결(要決)이 대신했다. 그리하여 첫째 요결인 신(信)에서 시작해서 두번째 요결 해(解)로 이어지며, 해란 염(念)을 감응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까지 천둔검법의 두번째 요결까지 습득한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검선 여동빈에게 몸을 내어주지 않으며 그의 영혼에게 물었다.
[ 여동빈이여. 궁금한 게 있습니다.] [ 연자여. 무엇인가?] [ 천둔검법의 요결은 어디까지 있습니까? 그리고 저는 어디까지 습득할 수 있습니까?]꾸워어어 –
눈 앞에서는 거대 두꺼비가 몸을 꿈틀거리며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덮쳐올 것 같아서 긴장되었지만 나는 현재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여동빈이 대답했다.
[ 신(信)으로 시작하여 해(解)로 이어지며, 입멸(入滅)하여 공(空)을 깨달아 천둔(天遁)이 되는 것이다.] [ 총 5단계란 말이군요.] [ 그렇다. 연자가 나를 믿고 맡기지 않으면 첫째 요결에 입문할 수가 없노라.]즉, 강신을 받아들이는 신의 단계에서 시작하여 강대한 대라신선인 여동빈이 내 심령을 일깨우면서 천둔검법의 정수를 익히게끔 한다는 소리였다. 나는 천둔검법의 습득이 어떤 구조인지 대강 알 것 같았다.
나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 여동빈이여. 제가 싸우는 걸 평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여동빈의 당혹한 대답이 들려왔다.
[ 무엇이?] [ 저도 나름대로의 검술 실력이 있습니다. 대라신선에서도 검선으로 불리는 분의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 원하는 대로 하거라.]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달의 짐승에게 달려들었다. 대뢰옥을 지배하는 마물의 주인인 달의 짐승은 엄청난 크기를 지닌 마물이었고, 한때 진소청과 이광이 동시에 덤벼들어서 절기를 뿜어냈는데도 죽지 않은 맷집을 자랑했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놈과 싸우기가 꺼려져서 늘 여동빈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지난번 생에서 나름대로의 무예실력을 키웠기에 놈과 제대로 싸워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검선이라 불리는 신선급 존재에게 평가받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타닷
멸혼보로 달려든 나는 곧장 검강을 일으켜서 놈의 머리통을 부숴버리려 했다. 예전에 미호의 도움을 받아서 손쉽게 해치웠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 카앗!!]그러나 예전과 달리 달의 짐승은 기음을 뿜어내며 갑자기 전신의 피부에서 창칼같은 가시를 뿜어냈다. 보호본능이 일어나자 자동으로 발동하는 신체능력인 듯 했다. 나는 급히 그 가시를 피하며 물러섰다.
‘ 뭐지? 예전엔 이런 반응이…’
문득 지난번에는 미호의 도움으로 전이술을 써서 기습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반응할 수 없는 공격일 경우 저 가시능력이 발동하지 않는 것이다. 즉 왠만한 근접공격으로는 놈을 일격에 처치하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달의 짐승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꽈과광!!
[ 크아아악!!]쿠궁
의념절기로 검강을 일으키고 뇌신류의 비기와 보법을 써서 싸우기를 얼마나 했을까, 나는 어느 새 내가 놈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찰 정도로 싸운 기분이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 대략 사백 초 정도 사용했나…’
짧다면 짧은 초수였지만 내가 뇌명을 일으키며 싸웠으므로 체력과 내공소모가 꽤 있었다. 내가 정좌하며 기력을 회복시키려 하자 여동빈이 말을 걸어왔다.
[ 연자여. 어린 나이에 대단한 무공이로다.] [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까?] [ 쓸데없는 움직임이 있었고 의념절기의 소모도가 높았느니라. 그리고 지닌 바 내공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좀 더 경험을 쌓으면 좋을 것이라 보이는구나.]소모도?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동빈의 조언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짚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검마가 내게 늘 무공을 전수할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검마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내게 의념절기를 더 쉽게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했다. 검마는 아마 내 성취가 숙련되면 요령을 전수할 생각이었을 것이리라.
‘ 설마 이광이 나보다 쉽게 의념절기를 난사했던 건 숙련도 차이였던 건가?’
뭔가 이해가 되는 기분이다. 나는 궁금해져서 더 물어보았다.
[ 만일 무한의 내공을 지닌 자라면 무한으로 의념절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내공을 대신 소모시킴으로써 의념절기의 정신력 소모도를 낮출 수 있겠지.] [ 으음.] [ 어차피 무한의 내공이란 건 인간의 경지에서는 불가능하므로 잊도록 하거라.]스스스
여동빈이 단말에서 떠나는 게 느껴졌다. 마가 퇴치되었으니 더 머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듯 했다. 하지만 여동빈이 내게 해 준 조언은 금괴보다 더한 가치가 있었으므로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했다.
‘ 호법사자가 초절정고수들과의 결투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건 그런 이유도 있었구나.’
의념절기는 가공할 정신력을 소모하므로 대결에서 그리 자주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해진 순간에만 적절하게 분배해야 하는 필살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법사자가 무한의 내공을 지니고 있다면, 마치 내가 내공으로 억지로 검강을 썼을 때처럼 내공을 대신 소모할 수도 있다. 그렇게 자신의 소모를 극도로 낮추면서 필살기를 연발할 수 있기에 호법사자가 두려운 존재인 것이다.
나는 목갑과 나인성본전, 쌍고검을 챙긴 후 황연대장군을 포함한 포로들을 구출했다. 그리고 마냥 그들을 내보내기 전에 황연 대장군과 이야기를 했다.
“대장군. 여쭤볼 게 있습니다만.”
“말해 보시게.”
“혹시 진천휘 장군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내 질문에 황연 대장군은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대답했다.
“소년영웅. 자네는 그와 어떤 관계인가?”
“제 사문의 사형이 그 분의 아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헉… 그렇다면 자네는 이광의 제자인가?”
“진소청을 알고 계시는군요.”
황연 대장군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물론일세. 이광에게서 편지로 그의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네.”
“이광이 사실 뇌신류의 유지를 잇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시는지요?”
“당연하지.”
황연은 아마 초기 시점에서도 이광과 뇌신류에 대해서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지금까지는 황연에게 흥미가 없어서 내버려 두었지만, 나는 이번 생에서는 진소청의 아버지인 진천휘라는 존재를 캐어볼 생각이었다. 왠지 진천휘의 존재가 앞으로 내 행보에 큰 열쇠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연이어서 질문했다.
“소림사의 제일고수인 신승 또한 진천휘 장군을 알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십니까?”
“신승이라… 그야 진천휘의 사문이 소림사이니 당연한 일이겠지.”
“네? 소림사라고요?”
황연 대장군은 다리가 아픈지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소림에서 무공을 연마하다가 군부에 투신했네. 무공의 재능도 특출난 자라서 소림속가의 수장으로도 거론된 자였으니 신승이 진천휘를 알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흐음…”
“진천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듯 하군.”
“중원에서 제일가는 명장이었다고 들었지만 막상 그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광이 말해주지 않던가?”
“언급 자체를 꺼리는 듯 했습니다.’
그러자 황연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애송이 이광이 황궁에 적응하게끔 도와준 게 진천휘였으니.”
“그는 지금 살아 있습니까?”
“죽었네.”
“어째서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어진 말에 나는 경악했다.
“현 황제보다 우위에 있는 황위 계승권자였으니까!”
“……!!”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황위… 라고요? 설마 진천휘는 황족이었단 말입니까?”
“그렇네. 어린 시절에 소림사에서 키워지고 다시 군부에 입신하여 출세했으나 그는 원래부터 황족이었지. 현 황제의 형뻘 되었어.”
“……”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꼬투리를 잡아서 그를 멸문지화에 빠뜨려서 처형했네. 자신의 황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겠지.”
나는 뭔가가 가닥이 잡히는 걸 느꼈다.
‘ 설마 진소청은…’
황연과 이광이 그렇게나 진소청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유. 그리고 뇌신류의 재흥 외에는 관심도 없을것 같은 철혈의 이광이 진소청을 자식처럼 키운 이유. 그게 모조리 한 점에 이어져서 관통되고 있었다.
황연이 말했다.
“자네에게 이토록 큰 비밀을 알려주는 이유는, 자네가 왠지 큰 일을 할 사람으로 느껴져서일세.”
“큰 일이라고요.”
“우리는 지금까지 이 비밀을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현실의 한계에 부딪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그러나 왠지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자네에게서는 그만한 그릇의 크기가 느껴지네.”
나는 황연의 평가가 부담스러웠다. 나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후 황연과 포로들을 목갑에 넣어두고 바로 황산에 가서 흑백련과 천년설삼을 채취하고는 막야와 금괴도 손에 넣었다.
나는 비등을 사용해서 해적섬으로 가기 직전에 생각했다.
‘ 흠. 검마 문주님의 부탁이 있었지.’
만일의 경우 전생하게 되면 검마가 순서를 바꿔달라고 했었다.
지금까지는 검마와 자주 만나는 게 부담이라서 일부러 무영문에는 나중에 들렀었다. 그러나 검마가 믿을만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차라리 그를 빠르게 보는 게 나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동영의 광산에 가서 흑요석을 채취한 후 무영문에 들렀다. 무영문의 문지기를 통과해서 무영문주 검마를 마주치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흐음. 자네가 내 딸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자인가?”
담담하게 내게 말하는 검마 서문대룡은 과거 보았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나와 사제지간으로 지냈던 기억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고 현 시점에서는 완전한 타인이었다. 나는 그게 가슴아팠지만, 일단 이야기를 꺼냈다.
“네. 저를 따라 오시면 됩니다.”
“믿을 수가 없군.”
“그러면 직접 따님을 구출하실 기회를 잃으시는 겁니다.”
“갑자기 자네같은 소년이 나타나서 딸의 행방을 알고 있으니 따라오라 하면 그 누구라도 의심할 것일세.”
“그렇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품 속에 있던 큼직한 흑요석을 꺼냈다. 그리고는 말했다.
“제게는 기억을 전승하는 신비한 술법이 있습니다. 이걸로 제 기억을 읽어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허허허… 갈수록 태산이군. 이게 함정이 아니란 걸 어찌 믿지?”
“하지만 문주님은 지금 서문혜 소저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라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으실 겁니다. 당연히 마도팔마 투마를 의심해서 그 자의 정보를 캐내고 계시는 중일 테고요.”
“……”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흑요석에 손을 올려 주십시오.”
검마 서문대룡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마음을 정했는지 천천히 흑요석에 손을 올렸다.
파아아앗!!
다음 순간, 내가 꽉꽉 담아두었던 기억이 흑요석을 통해서 검마에게로 흘러들어갔다. 검마는 그 거대한 기억의 흐름을 받아들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검마가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 그랬던 건가.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일인데… 믿을 수밖에 없군.”
나는 다시금 제자의 예를 취하며 포권했다.
“반갑습니다, 검마 문주님.”
검마는 16회차까지의 내 기억을 얻은 상태가 된 것이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듯 하더니 말했다.
“일단 해적이란 놈들을 없애러 가 보세. 그 목갑에 우리 무영문도들을 넣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검마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다름아닌 자신의 금지옥엽 외동딸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개자식들을 다같이 찢어죽이고 말겠다.”
그랬다.
16번째 생에서의 검마는 자기 손으로 직접 해적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내게 사전에 기억을 되살려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