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316)
0316 ———————————————-
천계(天界)
진소청의 ‘수련’이 시작되었다. 그는 내가 없는 며칠 동안에 내공을 다스렸는지 체력이 크게 진일보해 있었고, 자연히 수련의 강도도 혹독해졌다. 진소청은 쉴새없이 온갖 종류의 절학과 초식을 사용하면서 뭔가를 고민하는 듯 했고 무려 한 시진 동안 쉬지 않고 초식만 펼치는 일도 다반사였다.
나는 진소청의 수련을 방해하면 안된다고 생각했으므로 일단 그에게서 약간 떨어지기로 했다.
‘ 나는 뭘 하지?’
해야할 일을 생각해보던 중, 문득 황연이 생각났다. 황연과 대뢰옥의 생존자들을 구출해서 목갑에 넣은지도 꽤 시간이 지났는데 괜찮은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목갑의 성능에 관해서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게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목갑 안으로 걸어들어가 보았다.
파앗
목갑 안에는 황연과 생존자들이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다만 그들이 있는 장소에는 내가 그동안 얻었던 기연이나 영약이 존재하지 않았다. 목갑은 내 의지대로 구획을 분할할 수 있기 때문에 목갑 안에 넣어둔 사람이 내 영약을 가져갈 수는 없었다. 나는 황연 대장군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장군. 들어오신지 얼마나 지나신 것 같습니까?”
그러자 황연이 힐끔 나를 보고는 말했다.
“대략 반 각 정도 지난 느낌이군. 왜 그러나?”
“흠 그렇군요. 일행에 문제가 있습니까?”
“겨우 반 각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나.”
내가 황연을 구출한지 한 달 이상의 시간이 흐른것 같지만 그 시간은 내부에서는 반 각 정도로 느껴지는 셈이다. 시간이 거의 안 흐르는 셈이었다. 나는 빠르게 황연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다시 나가보겠습니다. 금방 꺼내드리겠습니다.”
“그러게.”
내가 다시 목갑에서 나오고 나서 주변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수련을 하고 있던 진소청에게 갔다. 땀투성이가 되어서 미친듯이 수련하고 있던 진소청은 나를 발견하자 반갑다는 듯 말했다.
“어 왔구려.”
“마지막으로 봤을 때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소?”
그러자 진소청이 어리둥절한 듯 말했다.
“얼마나 지나다니… 바로 방금 전에 봤잖소.”
“흠! 하루도 안 지났다는 거요?”
“하루라니. 방금 전에 봤다니까.”
아무래도 가설이 확실해진 것 같았기에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 그렇군. 목갑의 시간은 외부에 비해서 천천히 흐르지만, 그 시간격차는 내게 적용되지 않아.’
내가 목갑 안에 들어가서 보낸 시간은 대략 숨을 스무 번 쉴 정도였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목갑에 적용되는 시간배율을 생각하면 바깥에서는 벌써 며칠이 지났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그 시간배율이 나에게만은 적용이 되지 않는 듯 했다.
모순된 일이었지만 이건 마도구의 주인인 나에게만 적용되는 특권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 이 특성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어쩐지 이 특성은 나중에 잘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진소청이 말했다.
“마침 잘 됐군. 백웅, 내가 중대한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듣고 가시오.”
“응?”
수련한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중대한 걸 알아냈단 말인가? 내가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뜨자 진소청이 조용히 창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창극(槍戟)은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고요하게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정중동(靜中動).”
스파앗
“……!!”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삼 장 밖으로 이동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원래라면 멸혼보를 사용해서 고속이동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 진소청의 움직임은 멸혼보가 아니었다. 방금 진소청의 한 수를 간파하지 못해서 내가 허둥대자 진소청이 말했다.
“백웅. 이 움직임이 멸혼보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을 것이오. 그럼 이게 뭐라고 생각하오?”
“잘 모르겠소.”
“이건 바로 칠성둔영(七星遁影)이오.”
“칠성둔영? 정말이오?”
“그렇소.”
칠성둔영(七星遁影)!
그것은 장삼봉의 칠대절학 중 하나로서 일종의 신법이었다. 칠성둔영도 절세신법으로 상당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단순속도는 멸혼보가 훨씬 빨랐다. 그렇다 해서 전투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뇌영보 천주살이 응용력과 순간속도도 앞섰기에 칠성둔영은 일단 버려두고 있었다.
진소청이 창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칠성둔영은 극의에 이르기 전에는 뇌영보 천주살만 못하오. 그러나 수준이 높아질수록 굴공검과 천축검 등의 다른 오의의 위력을 극대화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듯 싶소.”
“무슨 소리요? 그 말은 당신이 벌써 칠성둔영의 극의에 도달했다는 말이오?”
“그런 뜻은 아니오. 단지 칠성둔영에 숨겨진 잠재력을 알게 되었소.”
무덤덤하게 말한 진소청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왠지, 칠성둔영을 포함해서 나머지 육대절학을 조화롭게 익혀야 무쌍패(無雙覇)에 입문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소.”
“무쌍패…”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무쌍패는 17번이나 전생을 하면서도 실마리조차 잡지 못한, 장삼봉의 칠대절학 중에서도 신비에 싸인 궁극의 절학이었다. 검마나 명룡자도 무쌍패의 그림자만 좇았을 뿐 그게 무엇인지는 감을 잡지 못했다. 의념절기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밍숭맹숭하고 뜬구름잡는 요결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지금의 진소청은 무쌍패의 존재가 어떤건지 감을 잡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소. 나는 우선 망량을 기다리고 있을테니 수련에 힘써 주시오.”
진소청은 다시 말 없이 수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지금까지 없었던 함묵과 광기를 담고 있어서 단순히 즐기는 차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내면에 숨겨진 감정을 읽자 기가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 진소청은 여인들의 불행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있어.’
원래라면 그저 지금 자기 상황을 기연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며 무예수련을 즐겨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진소청은 자신의 수련이 하루 늦어질 때마다 그녀들이 하루만큼 불행해진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목숨을 걸고 ‘한 달’이라는 기한을 엄수하려는 듯 했다. 그건 진소청이 그녀들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저게 협의지심이라는 것인가?
내가 지금 [옛 지배자]과 황궁의 만행을 막기 위해서 전생을 거듭하며 싸우고 있지만, 그건 협(俠) 하나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무한히 반복될지도 모르는 전생에서 압도적인 절대자의 횡포를 극복할 수단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을 구한다느니 하는 사명감은 적었다. 그런 동기는 도리어 망량 쪽에 있었고, 나를 돕고 있는 검마 혹은 독고성의 경우에도 그들 나름대로의 이득을 챙기는 김에 나를 돕는 셈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진소청이 자신의 전신전령을 타인을 위해 쏟아붓는 저 자세를 머릿속으로 이해할 지언정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진소청이 타고난 대협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후우. 생각해 봤자군…’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다.
‘ 한 달 동안 내가 뭘 할 수 있지?’
무공수련을 지금 해 봤자 진소청의 효율에는 발끝에도 못 미친다. 그렇다고 술법수련을 혼자 해 봤자 의미가 없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비등을 이용해서 아스타나의 선지자에게 가 보았다.
파앗
아스타나의 선지자에게 방문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거래하고 싶다!”
[ 간만의 인간이군… 무슨 일… 헉…]
선지자는 말을 하다 말고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나를 경계하는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
[ … 네 놈은 전생자(轉生者)인가?] “……!!”바로 알아채다니?!
하지만 나는 과거에 선지자가 말했던 걸 떠올렸다.
17번째 전생에서 나는 그가 모르는 정보를 이용해서 도박을 걸었고, 그 결과 무창의 탑의 이용권한을 얻어낼 수 있었다. 어쩌다보니 일이 꼬여서 그 권한을 반납하긴 했지만 성공적인 도박이었던 셈이다. 그 때 선지자는 투덜거리면서 다음부터는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었다.
‘각인’에 ‘정보’를 넣어두었다는 것.
나는 그 때 권한을 반납하면서 각인도 같이 돌려주었기에 이번에는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번뜩하고 알아차리고는 말했다.
“당신은 내 영혼에 단말(端末)을 새긴 거였군.”
아마도 각인을 내게 줄 때, 마치 여동빈이 강림하는 ‘길’을 만들듯이 내 영혼에 단말을 새긴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는 나를 보자마자 전생자라는 걸 알아차린 듯 했다.
[ ……]선지자는 눈을 데굴거리다가 촉수를 뻗었다.
[ 전생자는 전 우주를 통틀어도 찾기 힘들다. 기나긴 우리 종족의 역사에서도 거의 발견하지 못한 희소한 예시다… 네 녀석은 전생을 반복하면서 나와 거래를 해 왔던 모양이군.] “그렇다.”나는 말을 하면서도 내심 안심이 되는 걸 느꼈다.
‘ 아무래도 단말에는 그저 내가 전생자라는 표식만 해둔 모양이군.’
하긴 자세한 거래내용까지 단말을 통해서 전생으로 넘길 수 있다면 너무 사기적인 술법이다. 천암비서만큼의 효율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이후의 자기자신이 거래에서 손해를 보지 않도록 ‘백웅이 전생자다’ 라는 정도의 표식을 해둔 듯 했다. 전생자라는 걸 알고만 있어도 섣불리 내가 제시하는 내기를 따르지 않을테니 말이다.
나는 선지자에게 마도서를 내밀며 말했다.
“이번에도 거래다. 받아들이겠나?”
[ 흐음… 나인성본전이군. 거래자격은 충분하지만 껄끄럽다.]
“내가 전생자라서?”
[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다오…]
고민하던 선지자가 말했다.
[ 거래조건을 말해 봐라. 조건에 따라서 받아들이겠다.]생각같아서는 선지자가 내 영혼에 새긴 전생자의 표식을 없애달라고 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선지자가 손해를 보는 일이므로 절대 해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까움을 느꼈지만 잠시 후 내가 이 곳에 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선지자. 거래하기 전에 먼저 이 흑요석을 받아라.”
스윽
내가 흑요석을 내밀자, 그는 불쾌한 듯 촉수를 떨었다.
[ 짜증나는군… 너는 이미 내게서 흑요석의 술법을 받아갔던 것이냐?] “미안하군. 하지만 백 마디 말보다는 이게 낫다는 걸 너도 알고 있을 거다.”[ 어떤 기억이 담겨 있지?] “내 17번째 전생의 기억이다. 그걸 알아야 이야기가 될 것 같다.”
[ … 좋다.]
선지자는 흑요석을 받아들고는 기억을 읽었다. 잠시 후 그는 놀라운 듯 말했다.
[ 호오… 칠요가 두 개나… 사도 달기라… 봉선의식… 황궁의 [옛 지배자]가 강림했었던 건가… 여러모로 아주 흥미롭군…] “흥미로 끝낼 게 아니야.”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보다시피 나는 당신에게서 받은 흉신의 주문을 이용해서 사도 달기까지는 어떻게든 처치했다. 하지만 이후에 소환된 [옛 지배자]를 상대로는 소용이 없었어.”
[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나는 [옛 지배자]에게도 먹히는 주문을 알고 싶다. 없애는 건 무리라고 해도 최소한 봉인을 하거나 억제할 수 있는 주문을!”
[ ……]
“그런 주문이 있나?”
선지자는 자신의 촉수를 꿈틀거리며 침묵했다. 그의 침묵은 지금까지보다 꽤 오래 이어졌는데, 그의 장고(長考)를 보면 이 일이 중대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선지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 없지는 않지.] “있다고?! 정말?!”나는 도리어 놀라서 외쳤다.
그 무시무시한 악신을 억제할 수 있는 주문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순식간에 희망의 빛이 밝아오는 게 느껴졌다. 내가 기대어린 눈으로 선지자를 쳐다보자,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 같은 [옛 지배자]의 권능을 빌려오는 주문이 몇 가지 존재한다… 하지만 그걸 사용하기 위해서는 신을 모시는 추종자이거나 사제여야 한다… 그리고 이 주문을 쓴다고 해도 [옛 지배자]를 없애거나 봉인하는 건 불가능하고… 그저 억제시켜서 잠시동안 피할 시간을 마련하거나 이야기를 하는 틈을 마련하는 것이다.] “까다롭군.”[ 이 주문을 알기 원하는 것이냐… 허나 너는 모시고 있는 [옛 지배자]가 없을 텐데… 그러면 알아봤자 소용이 없다…]
즉 신(神)을 믿어야 신앙으로 주문을 사용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옛 지배자]를 어떻게 믿는다는 말인가? 인신공양은 기본이고 자신의 추종자들을 벌레처럼 여기는 궁극의 악신을 믿기 위해서는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요구조건이 까다로웠지만, 나는 제갈사라면 이 주문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제갈사는 [옛 지배자]의 신앙을 지니고 있어.’
제갈사가 그 주문을 알게 된다면, 그는 분명히 [옛 지배자]를 일시적으로 억제시키는 게 가능할 것이다. 중원 천지를 통틀어서 그보다 악신의 신앙에 정통한 자는 아마 없을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머릿속에 해결책이 떠오르고서도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과연 내가 제갈사를 제어하는 게 가능할까?
그 광서생(狂書生)을?
“……”
[ 고민되나 보군… 정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추천해 줄 수도 있다.]
“어떤 방법?”
선지자가 눈을 데굴거리며 말했다.
[ 무창의 탑을 이용할 권한을 주겠다… 거기에 있는 무기를 일 회 정도라면 대여해도 된다.] “어? 그건 너희 왕족의 권한이라서 주면 안되는 거 아니었나?”나는 뜻밖의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선지자가 대꾸했다.
그러고보니 선지자는 온건파 이족의 수장격인 존재였다. 태허천존이 어쩌면 [옛 지배자]와 관련있을지도 모르며, 그가 말했던 칠요의 정보가 거짓이라는 건 큰 의미가 있었다. 선지자는 그 정보 자체도 빚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지난번 전생에서는 무제한 이용권을 주었으나… 이번에는 단 1회만 대여 가능하니… 신중하게 결정하라.] “잠깐. 그렇다면 무창의 탑에 있는 무기라면 [옛 지배자]를 상대할 수 있다는 거냐?”선지자가 대답했다.
[ 내 종족은 [옛 지배자]를 굳이 신앙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몇 안되는 강대종족이다… 당연히 그 정도 위력은 있지. 주문만큼은 아니지만 무창의 탑에 있는 무기라면 [옛 지배자]를 잠시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 문명에 비하면 너희는 원숭이에 불과하다…]
다소 거만하게 대꾸한 선지자가 내 손에 각인을 새겼다.
스스스…
회색빛의 문양이 내 손등에 나타났다. 내가 물끄러미 그 각인을 보자 선지자가 말했다.
[ 무창의 탑은 남만 지역에 있다… 그걸 잘 이용하면 화요(火曜)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화요를?”[ 무창의 탑에 가 보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선지자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거래가 끝났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뜻밖의 호의에 어리둥절했지만, 이게 마냥 호의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온건파 이족의 수장이었기에 지금 내 활동이 그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도서를 받는 김에 천계를 견제하기 위해서 내게 힘을 실어준 셈이다.
‘ 앞으로 해야할 일이 생겨서 잘 됐군.’
나는 눈을 빛냈다.
“가 보자!”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진소청이 수련을 마칠 때까지 최대한 남만으로 가 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밤낮으로 계속 달리면 어떻게든 시간 내에 도착할 수는 있을 것이다.
목표는 남만이다!
나는 우선 내가 가봤던 장소 중에서 가장 남쪽인 사천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천에서 곧장 방향을 잡고 남쪽으로 쭈욱 달리기 시작했다. 사천성에서 남쪽으로 가면 곧이어 운남(雲南)이 나타나는데, 운남까지 가는 데만 대략 천 리를 가야 했다. 그리고 운남에 도착하고 나서 다시 남만까지 가는데 수천 리를 가야할 게 분명했다.
“으아아아!!”
타다다닷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여섯 시진째 쉬지 않고 계속해서 멸혼보로 달리고 있었다. 바람처럼 산과 들을 넘어서 달리는 속도는 광풍처럼 빨라서, 주변의 광경이 선처럼 스쳐지나가는 걸 느꼈다. 내가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체력이었지만 천년설삼을 비롯한 영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내력이 쉽게 고갈되지도 않았다. 내력이 고갈되고 나서야 체력이 소모되므로 실질적으로 무한체력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나는 어느 새 운남성으로 짐작되는 커다란 성 앞에 도착해 있었다. 성을 경비하고 있던 무사들은 가도를 엄청난 속도로 질주해오는 내게 놀랐는지 도열해서 경계하고 있었다.
“허억!”
“멈춰랏!”
달리면서 먼지구름을 끌고오는 나를 위협적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멈춰줄 이유가 없었으므로, 그들을 무시한 채 뛰어올랐다. 부웅하고 한 달음에 이십여 장을 뛰어오르자 단번에 인간이 쪼그라들듯이 작아졌다. 성벽을 단숨에 뛰어넘은 나는 질주를 계속했다.
달린다!
성 내의 사람들에게 피해가 안 가게끔 도약과 질주를 반복하며 운남성마저 횡단하자 나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계속 달려서 강과 산을 넘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이 곳은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형이었으므로 당분간은 평야 하나 없이 계속 산만 넘어야 했다. 산을 수십 개쯤 넘은 후에야 평탄한 지형이 보이기 시작했다.
타다닷
“헉… 허억… 지치는군.”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달리는 속도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말이 달리는 속도보다 조금 느려져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계속 달리기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예 인적이 없는 장소까지 와서야 지쳐서 잠시 쉬었다. 이름없는 산골짜기였는데 동굴에 들어가서 쉬었다. 근처에는 마을은 커녕 인간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완전한 오지에 와 있었다. 수천 리를 한 달음에 달린 셈이었으므로 나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 남만까지는 얼마나 남았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중원을 거의 벗어났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조금만 더 가보자는 생각을 하면서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때였다.
“네 녀석은 누구냐?”
쉬이익
갑자기 내가 쉬고 있던 동굴 앞에 세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뭣…”
나는 당황해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그들은 하나하나가 상당한 고수였다. 두 명은 뛰어난 절정고수로 보였고, 나머지 한 명은 명백히 초절정고수였다. 어둠 속이라서 자세히 형체를 볼 수는 없었지만 기파만으로도 그들이 보기 드문 강자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방금 들린 것은 화북지역의 사투리가 섞여 있어서 그들이 이 지방 사람이 아닌 걸 알 수 있었다.
‘ 뭐지 이 놈들은?’
그들 중 가장 강해보이는 자가 앞으로 걸어나와서 말했다.
“아해가 굉장한 내공을 지니고 있구나. 혹시 백련인이라면 미리 말해라. 우리는 백련교와 척을 지고 싶지 않다.”
“……?”
백련인?
그러고보니 상대방의 목소리는 어디서 들어본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 설마 이 녀석…’
나는 침착하게 안력을 돋우어서 어둠 속을 잘 살펴보았다. 그러자 상대방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고, 나는 그들의 생김새를 확인하자 짐작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상대방의 무위를 잘못 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흑의괴인 두 명이 자신의 힘을 낮추고 있기에 초절정급이라고 보지 못한 것이다. 상대방이 생각보다 강적인데도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진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백련인이 아닙니다만 혹시 귀하는 백련교와 관련이 있으십니까?”
“크크… 백련인이 아니라… 그러면 볼 일이 없다.”
어둠 속의 고수들은 괴소를 흘리고는 갑자기 자신들의 병장기를 뽑았다. 흑의괴인 두 명은 자신의 장검을 빼들었으며 백의를 입은 자는 자신의 주먹을 들었다. 아무래도 무력행사를 해서 나를 제압하려는 생각인 듯 했다.
나는 씩 웃었다.
“중원이 아니라서 원숭이 가면도 안 쓰고 다니나보군, 백원쌍마(白猿雙魔).”
“……!!”
흑의괴인 두 명이 당황했다. 그들은 난데없이 자신들의 정체가 들킨 셈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에 있던 백의괴인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 녀석은 누구냐?”
“내 정체는 알 필요가 없겠지만 당신 정체는 잘 알고 있소.”
“엉? 무슨 개소리냐?”
백의괴인이 으르렁거렸지만 내가 말을 잇자 그는 눈을 부릅떴다.
“천상괴의(天上怪醫)가 이런 남쪽 오지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랬다.
눈 앞에 있는 것은 바로 천하 오대의원 중 하나인 천상괴의(天上怪醫) 동방무결(東方無潔)이었으며, 그의 옆에 있는 두 명의 괴인은 바로 사파의 초절정고수인 백원쌍마였다. 백련교주의 명에 따라서 용화수의 단서를 찾아 남만으로 향했던 그들과 우연하게 마주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