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328)
0328 ———————————————-
천계(天界)
이후 한백령과의 교섭은 망량의 주도하에 면밀하게 이루어졌다. 망량은 나와 진소청에 대해서 밝히고, 남궁세가를 멸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을 밝혔다. 그러자 듣고 있던 한백령이 말했다.
“남궁세가의 악덕은 본녀가 몰랐던 일이다. 그리고 그런 개종자들이란 걸 알았다면 본녀가 먼저 멸망시켰겠지.”
나직이 말한 한백령이 말을 이었다.
“그 일은 너희 마음대로 해라.”
“감사합니다. 그리고 남궁세가가 멸한 대신에 새로운 세가를 하나 키워주실 수 있을지…”
“부탁은 세 가지 아니었나?”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충분히 화신류에 도움이 될만한 자를 모색해 뒀습니다.”
“흐음… 어떤 놈이지?”
그녀가 흥미로운 듯 되묻자 망량이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백리세가의 장손인 백리정운(百里正雲)이라는 자를 찾았습니다. 그는 지금의 무공실력은 높지 않으나 두뇌가 뛰어나고 심지가 굳어서 쓸만하다 생각합니다.”
“백리세가라. 사천에서 몰락한 대세가의 후예를 키우겠다는 말인가.”
“원하신다면 조만간 데려오겠습니다.”
“아니, 됐다. 그대만한 자가 높이 평가한다면 쓸만하겠지. 사천무림의 힘을 키워도 좋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는 옆에서 듣고 있던 중 침음성을 흘렸다.
“흠…”
백리정운!
그는 과거 내가 동방무결의 행적을 찾아 사천으로 가던 중 사천의 험지에서 발견했던 인물이었다. 백리세가는 사천의 대세가였는데 영락해서 백리정운만이 건물을 지키고 있었고, 그는 쌀이 없어서 밥을 먹지 못할 지경이었다. 가문의 무공을 다듬고 있던 그에게 도움을 주고, 그 댓가로 사천 용왕곡에 은거해있던 독고성에 관한 정보를 들은 기억이 난다.
지금의 나는 별 신경도 안 쓰고 있었던 인물인데 망량은 그 자를 영입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나는 나중에 자세히 묻기로 생각하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진소청. 네 스승인 이광도 너희 계획에 동참하고 있느냐?”
진소청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진소청은 한 줌도 흐트러지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스승님께서는 죽을 때까지 백련교에 맞서려고 하시오.”
“흥… 너는 제자면서 스승의 뜻에 반한다는 것이냐.”
“스승님이 가려는 길이 올곧다면 목숨을 바쳐 따를 것이오. 허나 스승님께서는 스스로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갈피를 잡고있지 못하오. 그 길은 허무와 파멸 뿐이니, 제자로서 바로잡는 게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하오.”
“……”
진소청의 말을 들은 한백령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진소청… 너는 이광이 어떤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스승님의 삶은 이청운 호법사자가 죽었을 때부터 꼬였소.”
단호하게 대답한 진소청의 말이 이어졌다.
“화신류의 종사이자 이청운의 친우였던 한백령 당신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오.”
“……”
백련교의 화신류 호법사자에게 하기에는 너무 건방져 보이는 말이었다. 실제로도 뒤쪽에 있던 한진성의 표정이 약간 흐트러진 걸 보면, 그가 약간 분노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진소청의 무공이 높다지만 호법사자의 위치를 생각하면 쉽게 할 수 없는 말인 것이다.
하지만 한백령은 그 말을 듣고도 화내기는 커녕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말했다.
“어디 지켜보마.”
그 때 망량이 끼어들며 말했다.
“아까 말했던 세 번째 제안 말입니다만, 흑백련을 진상할 때 함께 백련교주님을 알현할 수 있겠습니까?”
“네가 흑백련의 효능을 설명해야하니 당연한 일이지. 동석해라.”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하고 나서 화신류의 거처를 나왔다. 한씨세가에서 나온 후 나는 바로 비등을 쓰려 했으나 망량이 제지했다.
“화신류가 우릴 주목하기 시작했소. 나중에 사람들이 안보는 곳에서 사용해야하오.”
“알겠소.”
우리는 낙양의 인파에 스며들어서 교묘하게 추적을 따돌리기 시작했다. 진소청은 더러 추적자를 감지해서 몇 명을 제압하기도 했다. 그렇게 약 한 시진이 지나서야 틈이 났고, 우리는 비등을 사용해서 거점인 진랑곡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진랑곡으로 돌아온 나는 망량에게 물었다.
“망량. 백리정운 이야기는 내게 하지 않았잖소? 즉흥적인 생각이오?”
그러자 망량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나는 이미 직접 축지술로 사천으로 가서 백리정운을 만나보았소. 그리고 그의 재능과 그릇이 훌륭하다는 걸 느꼈기에 우리 편으로 만들기로 한 거요. 몰락한 명가의 후예만큼 써먹기 좋은 인재도 없으니까.”
“흠…”
“사실 원래 생각으로는 사공세가의 사공린을 영입해서 반천맹의 주춧돌로 할 생각이었소. 사공세가가 여기에서 훨씬 가까운데다 사공린의 무술재능은 단연 최정상급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가 있소.”
나는 망량의 말을 듣자 떠오르는 게 있었다.
“태산노옹!”
“그렇소. 사공린은 태산노옹, 즉 황궁 사신위 주작의 제자요. 태산노옹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지만 어쨌든간에 신표를 내줄 정도의 관계지. 그녀를 영입했다가는 필연적으로 태산노옹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오.”
나는 들으면서 망량이 철저하게 주작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태산노옹이나 사신위 주작으로만 칭할 뿐 자신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전혀 쓰지 않는 것이다. 망량의 눈이 번득였다.
“하지만 사공린도 어쨌든 때가 되면 이용해야겠지. 그녀를 이용해서 덫을 놓는다면 주작의 의표를 찌를 수 있을 것이오.”
“이용이라니…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잖소?”
“지금 우리가 그녀의 사정을 봐줄 때가 아니오. 주작은 내 두뇌와 당신의 능력, 진소청의 재능을 모두 동원해도 이길까말까한 상대요. 우선 이기고 생각합시다.”
“흠, 알겠소.”
옆에서 듣고 있던 진소청이 말했다.
“망량. 그럼 이제부터 어찌할 생각이오?”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남궁세가의 화근을 뿌리뽑는 것이오.”
단호하게 대답한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화신류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내 정보망을 이용해서 강호에 남궁세가의 악행을 대대적으로 알리고 그들을 비난하게 할 것이오. 조만간 그들은 표국과의 거래도 끊기고 정파의 고수들에게 백안시되겠지. 그때부터 남궁세가가 힘을 이용해서 뭉개려 들 텐데, 그 때 당신들이 나서서 남궁세가의 고수들을 척살해 주시오.”
“알겠소.”
“혹시나 해서 말해두겠는데 결코 인정사정 봐주지 마시오. 이제 그들은 우리 앞날의 장애물에 불과하니 철저하게 치우시오.”
망량의 시선은 진소청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이 어떤 뜻인지 알 수 있었다.
‘ 망량은 진소청과 남궁세가 사람들 사이에 면식이 있다는 걸 신경쓰고 있어.’
충분히 걱정할 만 하다. 특히 내가 직접 본 바로는 남궁민이라는 여인은 약간이지만 진소청에게 호감마저 품고 있는 기색이었다. 대협의 기질이 강한 진소청이 세가의 멸문이라는 잔혹한 일에 손을 얹을 수 있을지 걱정할 수밖에 없다.
그걸 느낀 진소청이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알았소.”
망량은 확답을 받은 후 말을 이었다.
“아마 백련교 입교 후에 모든 일이 급속도로 진행될 것이오. 그 일에 대해서도 일단 말해두자면…”
이어진 망량의 말에 나는 놀랐다.
“백련교주는 백웅이 아니라 진소청을 제자로 삼으려 할 것이오.”
“……!!”
‘ 백련교주의 무공수위라면 삼보를 완벽히 터득한 진소청의 무공을 알아볼 수 있겠지. 그리고 그 묘리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할 게 분명하오. 또한 천재가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니 그건 어쩔 수 없겠지.”
나는 입맛이 썼다. 대충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망량의 입으로 들으니 한층 기분이 저조해지는 것이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진소청이 말했다.
“그건 원래 계획과 달라지지 않소? 백웅이 천령단의 비밀을 손에 넣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오.”
“방법을 달리하면 그만이오. 진소청 당신이 천령단의 비밀을 알아낸 후에 백웅에게 전달하면 되는 것. 직접 체감하는 것보다 효율은 떨어지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효율을 더 올리는 방법도 있지.”
“그렇다면…”
“그렇소. 백웅이 진소청 당신에게 흑요석의 술법을 가르쳐 주면 되는 것이오. 그리고 흑요석의 술법으로 백웅에게 다시 옮기는 거지. 백웅. 어떻소?”
진소청에게 흑요석의 술법을 가르친다!
나는 그 발상을 듣자 생각에 잠겼다. 가능불가능을 생각하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이 술법지식은 이족의 언어와 마법으로 이루어져 있소. 나는 이걸 이해는 하고 있으나 인간의 언어로 전달하거나 전수할 자신이 없소. 애초에 선지자의 마법으로 얻게 된 능력이기 때문이오.”
“그럴 줄 알았소. 그러면 선지자와 추가로 거래를 하는 수밖에 없소.”
“흐음. 마도서를 더 얻으려면 내황각의 무명제사서를 얻어야 할 텐데.”
“일단 그건 당장 급한 일은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선지자와 거래할만한 보물은 앞으로 천천히 얻을 수 있을 것이오.”
망량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것저것 할 일이 많지만 잡다한 건 내게 맡겨 두시오. 지금 당장은 남궁세가를 멸하는데만 집중합시다.”
“알겠소.”
“검마와 이야기를 해야하니 무영문으로 갑시다.”
파앗!
우리는 무영문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화신류와의 교섭 결과를 검마에게 이야기했는데, 검마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됐군. 나도 그럼 계획대로 하겠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야 뭐… 마도팔문을 움직여서 남궁세가를 압박하겠네. 그리고 모용연 소저와 이야기가 다 되었으니 모용세가와 연수해서 안휘성 일대에 새로운 세력을 하나 만들 생각일세.”
망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휘도 무영문의 것이 되겠군요.”
“하하, 이 정도 차익을 챙기는 건 괜찮지 않나? 원래 마도팔문이 남궁세가에 압박을 가하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었어. 오대세가의 결속이 공고한데다 남궁세가 자체의 무력이 너무 강해서 엄두도 못 냈는데, 지금도 상당히 위험부담을 무릅쓰는 거라네.”
“아닙니다. 문주의 뜻대로 하십시오.”
망량은 선선히 대답한 후 검마에게 말했다.
“그리고 십이율과 회담을 하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물론이네. 자네는 이미 그들과 대화를 터놓은 모양이더군.”
“십이율주와 이야기해본 결과 무영문을 십이율로 받아들이겠다는 확답도 받았습니다.”
“자네는 한참 앞서나가는군. 나는 아직 생각만 해둔 단계였는데…”
“싫으십니까?”
“아닐세. 되려 편하군. 자네같은 책사가 있었다면 나는 예전에 강호를 제패했을 텐데 말일세.”
쓴웃음을 짓던 검마가 말했다.
“흠… 그래. 진소청. 자네가 새로 얻었다는 삼보의 묘리를 견식할 수 있겠나?”
“알겠소.”
이윽고 검마와 진소청이 비무대에 마주섰다. 맨손으로 남궁세가를 때려부순 진소청의 무위를 바로 옆에서 본 나로서는 진소청이 우세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삼봉의 절학을 전수받은 건 검마 또한 마찬가지여서, 남궁세가주 남궁명과 싸울 때처럼 압도적인 싸움은 되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파앗
잠시 후 검마와 진소청의 일 초가 마주쳤다. 파공음과 함께 공간이 일그러진 잔향이 비무대 위의 공기를 떨게 만들었다.
파슛
진소청의 주먹에는 실선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 상처를 내려다보던 진소청은 창(槍)을 들었다.
“으음!”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단 한 수를 부딪혔는데도 진소청이 창을 꺼내들었다는 건 큰 의미가 있었다. 남궁세가를 통째로 맨손으로 때려부수면서도 창을 꺼내지 않았던 진소청이었다. 그런 그가 창을 들지 않으면 상대할 수 없다고 느낄 정도로 검마가 강해졌다는 의미였다.
검마는 창을 든 진소청을 마주하자 약간 식은땀을 흘리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엄청나군… 자네는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가 있는 건가? 삼보의 간격을 뚫는 게 불가능한 듯 여겨지는군.”
그 말에 진소청이 대답했다.
“문주의 경지도 훌륭하십니다. 칠성둔영의 묘리를 깨우치진 못했으나 나머지 절학을 연계시키는 법을 터득하셨군요. 그 짧은 시간에 독학으로 연마하셨다니 굉장하십니다.”
“흐음… 아무래도 안 되겠군. 사선을 세 개나 넘을 자신이 없어.”
검마가 한숨을 쉬며 검을 늘어뜨렸다.
“내가 졌네.”
“좋은 대결이었습니다.”
겨우 일 초를 겨루고 나서 승패가 난 상황. 무림인들이라면 이걸 보고 한심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나는 초절정의 경지였기에 방금 전의 대결이 굉장히 엄밀한 계산하에 결판이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검마는 진소청보다 실력이 부족하지만 죽을 위기를 넘기면 진소청에게 일격을 먹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승산이 있지만, 친선대련인데다가 너무 확률이 적기 때문에 그만둔 셈이었다.
‘ 대단한 고수들이다…’
나는 찬탄할 수밖에 없었다. 눈 앞의 두 사람이 힘을 합친다면 호법사자를 이기는 것도 꿈은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일 내가 천령단의 비밀을 얻게 된다면 앞으로 그 꿈은 현실이 될 것이다.
검마가 비무대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백웅. 나중에 나한테도 진소청같은 가르침을 주게. 꼭 부탁하네.”
“으… 그렇게 말씀하셔도 엄청나게 큰 흑요석이 필요해서…”
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최대한 흑요석 광산을 찾아보지. 필요하다면 그 광산을 사버릴 걸세. 그러니 기다리고 있게.”
“……”
검마는 아무래도 이번 비무에서 진소청에게 밀린 게 못내 분한 모양이었다. 나는 언제나 냉정침착한 검마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진소청의 무예가 타 고수에게 호승심을 일으키는 듯 했다.
비무가 끝나고 나서 망량이 나를 따로 불러서 말했다.
“백웅. 남궁세가를 본격적으로 치는 건 칠 주야 후로 합시다. 그 때까지는 검마나 내게 압박을 맡기시오.”
“응? 무슨 이유라도 있소?”
“진랑곡에서 수련을 해야지. 당신은 더 강해져야 하니까.”
망량의 눈이 반짝였다.
“이제 천신경 술법의 진짜 사용법을 알려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