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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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위(錦衣衛)
그 날로부터 다시 2년째, 청룡무관에 입관한지는 딱 5년차가 되는 시점이었다.
몸은 성인이 다 되었다.
나는 오전에는 사범역할로 문하생들을 지도함과 동시에 남는 시간에는 개인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무술이라는 것은 파고들면 들수록 내 부족함을 깨닫는 것인데다, 나는 지금 까마득한 고수들을 목표로 하고있기 때문에 열정이 마를 날이 없었다. 비록 삼절 이광에게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는건 힘들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무술을 수련하는 게 즐거울 때는 없었다.
‘ 이제 8년만 더 수련하고… 철혈문에 도전하러 갈까…!!’
그 때쯤이면 뭐가 되어도 되어있을 것이다.
철혈문의 제일장로를 일대일로 이길 정도가 된다면, 앞으로 강호에서 두려워할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청룡무관 출신이라는 게 감안되면 예전처럼 함부로 비무중에 목을 베려고 하지도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 자를 쓰러뜨린 후에는 명예와 재물을 얻으며 편하게 살 생각이다. 그 이상의 무력을 목표로 하기에는 내 재능이 미약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10년을 잡은 채 밤낮없이 수련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내 10년의 결심은 갑작스럽게 막히고 말았다.
그 날의 수련이 끝난 후 삼절 이광이 나를 와룡전으로 부른 것이다.
그리고는 대뜸 말했다.
“백웅아. 네가 내 친구의 도움으로 금의위(錦衣衛)에 추천되었다.”
“네?”
나는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다. 하지만 삼절 이광은 별다른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읽고있던 책의 다음 장을 넘겼다. 일일이 부연설명을 해주는 게 아니라 냉담하게 사실전달만 하는 게 삼절 이광의 대화방식이었기에, 나는 이내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금의위라는 건 황궁(皇宮)과 황실을 호위하는 최고위 무예직이 아닙니까? 무과에 급제한 자들 중에서도 최고의 무위를 지닌 자들만이 금의위가 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어떻게…”
그렇다.
일 년에 딱 한 번 열리는 황실 무과(武科)에서 등용되는 무관은 한 해에 고작해야 100여 명에 불과한데, 그 중에서도 상위 1할만이 금의위에 선발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금의위가 되고 난 후 따로 훈련을 거쳐서 전사(戰士)로 거듭난다고 하니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낙양의 무예명문인 쌍문사가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거쳐서 자기문파의 문하생을 무과에 한 명 급제시킬까 말까한데, 거기서 또 다른 경쟁을 거치는 것이 금의위! 망량에게 듣기로는 고관대작이 뇌물을 써도 자식을 들어가게 할 수 없는 거의 유일한 직종이라고 들었다. 황실을 수호하기 때문에 결코 어설픈 자를 뽑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낙양에서 한참 떨어진 관중지방의 청룡무관에서 사범일을 하고 있는 내가 금의위에 추천된다는 건 굉장히 뜬금없다. 내가 놀라고 있자 삼절 이광이 서서히 책을 덮으며 말했다.
“내가 볼 때 네 실력은 충분하다. 내 진전을 잇기에는 부족하지만 금의위에서도 부총령(副總領)과 맞먹는다. 너라면 거기서 일하는 금의위 중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역량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의외로 삼절 이광의 나에 대한 평가가 좋다.
금의위 부총령이란 총령, 부총령, 천호, 위사의 금의위의 4대직급 중에서 2위였다. 즉 금의위를 통솔하는 수장인 금의위 총령 바로 다음가는 직위인 것이다. 예전 황궁침투를 꾸밀 때 망량에게서 금의위의 체계를 전해들어서 알고 있었다. 내 실력이 고위무관과 비교할 정도면 그 동안 많이 성장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내 실력적인 부분이 아니다.
원래 나는 삼절 이광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편이었으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재차 물었다.
“하지만… 금의위라니 너무 뜬금없지 않습니까? 갑자기 제가 왜…”
그러자 삼절 이광은 화를 내지 않고 훗하고 웃었다.
“네 사형, 진소청을 독립시키기 위해서다.”
“……?!”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내가 황당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삼절 이광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너도 네 사형의 실력이 일개무관의 사범으로 썩을 정도가 아니란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중원(中原)에 이름을 떨칠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 네, 그렇습니다.”
나는 순순히 이광의 말을 인정했다.
돌이켜보면 진소청은 이번 생의 5년 전,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절정고수를 뛰어넘은 경지였던 것 같았다. 나이에 비한다면 정말 엄청난 속도의 성취였으며 5년이 지난 지금은 도저히 그의 경지가 측정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지금 당장 진소청이 강호를 떠돌며 의협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1년 내에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쌓여서 대문파를 만드는 게 가능할 정도였다.
“허나, 그 아이는 조직을 이용하거나 타인의 권모술수를 대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또한 청렴하고 올곧아서 쓸데없는 일에 부딪히거나 난국(難局)을 맞이하는 일도 많겠지. 그건 개인의 지혜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주고 끌어주어야만 버텨낼 수 있는 시련이다.”
나는 이광의 말에 숨겨진 뜻을 눈치채고 말했다.
“제가 금의위에 가서 차후 사형을 도와주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그렇다. 너라면 총령까지는 몰라도 천호까지는 금방이고 부총령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금의위는 다른 무관직과는 다르게 철저한 실력위주의 사회니까. 네가 황궁에서 확실한 자리를 잡는다면, 나중에 네 사형이 곤란에 처했을 때 도와줄 수 있지 않겠느냐?”
“……”
“그리고 그 놈들이 의심스러우니 견제해야하고.”
확실히, 망량에게서 듣기로 금의위 고위무관의 권세는 상당했다. 왠만한 권신(權臣)이 아니고서는 금의위에게 밉보이지 않으려고 아부를 떨 정도였고 왠만한 순찰병력도 독단적으로 차출하는 게 가능했다. 장군(將軍)을 제외하고는 무관직의 꿈이나 다름없는 직종이었다.
“처음에 너를 받아들일 때는 무관을 흥하게 하기 위해서 뛰어난 사범으로 키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네 역량은 참 애매하더구나. 무관사범으로 놔두기엔 아깝지만 뇌신류(雷神流)의 전승자로는 많이 부족하다.”
이광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많이 고민하던 끝에 내 연줄을 동원해서 너를 금의위에 추천했다. 너도 세상에 웅지(雄志)를 펼 수 있고, 네 사형에게도 도움이 되는 길이다.”
“음…”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이광에게는 내가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하는 걸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나는 갑작스러운 선택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 이렇게 뜬금없는 기회가 오다니.’
이번 생에서는 그저 무예의 향상만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머릿속 한켠에 치워둔 사실이지만, 나는 천암비서(天暗秘書)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 해석을 위해서는 황실의 심처에 보관되어 있는 무명제사서(無名祭事書)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 역행(逆行)의 비밀을 풀어낼 수 있다.
다만 황제 모가지도 딸 수 있을 정도의 심처에 잠입하는게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기에 그냥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금의위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다니! 정말로 뜬금없는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다.
만일에 금의위가 되어서 그들 중에서도 극히 상위의 실력자만이 근무할 수 있다는 황실경비로 들어가게 된다면 – 어쩌면 무명제사서를 얻어내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지금 내 무술실력은 철혈문에서 죽었을 때보다 두 배 이상 상승했다고 자신하고 있다.
‘ … 될지도. 이건 될지도.’
삼절 이광이 전에 없이 차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허나, 만일에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이번 제안은 넣어두겠다. 나로써는 네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주고 싶다. 네가 사범일을 계속 하며 살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망설임을 모두 접고 대답했다. 이건 정말로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냐?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느냐?”
“물론입니다.”
삼절 이광은 반쯤은 내 대답을 유도한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빳빳하게 밀봉된 서찰을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럼 내일 바로 낙양으로 가거라. 거기서 태검문주(太劍門主)에게 이 서찰을 보여주면 될 것이다.”
“태, 태검문주요?”
“그래. 내 오랜 친우(親友)다.”
“……”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낙양 쌍문사가(雙門四家)! 그 중에서도 화산파 장로를 비무에서 100초만에 패배시켰다는 낙양의 절세고수이자 일문의 지존이 바로 태검문주였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초절정고수와 삼절 이광이 친구라고 하니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왠지 속으로는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외적인 명성은 당연히 태양과 반딧불처럼 비교되는 수준이지만, 삼절 이광의 실력은 절정고수를 한참 전에 뛰어넘어 있다. 내가 태어나서 봤던 무림인 중에서 그보다 강한 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태검문주가 삼절 이광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다면 당연히 대등한 친구로 맞이할 게 뻔했다.
삼절 이광이 차분하게 말했다.
“너는 태검문의 자리 하나를 빌려서 출세(出世)하는 것이다. 당연히 태검문에서는 말과 행동을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달았다. 삼절 이광은 친구인 태검문주에게 부탁을 했고, 태검문주는 아마 황궁 금의위에 내정된 자리를 하나 빼서 내게 주기로 한 것이다. 그게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삼절 이광이 저렇게 확신하는 걸 보면 확실해 보였다. 그런고로 태검문 사람들에게는 내가 절대 곱게 보이지 않을 듯 했다.
‘ 으, 눈칫쌀이 죽이겠군.’
하지만 그 정도는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네.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겠습니다.”
“좋아.”
“아, 사형에게 인사를 하고 가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이후 진소청을 찾아가서 내가 금의위에 붙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진소청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나를 축하해 주었다.
“잘됐군! 자네라면 장래에 금의위의 장(長)이 될지도 몰라.”
“그 정도는 아닙니다.”
“하하. 농이 아니야. 정말로 자네는 그 정도 능력이 있어.”
나는 진소청의 격려를 듣자 기분이 좋아졌다. 하긴 내게는 청룡무관에서 다진 무공과 압도적인 내공이 있다. 왠만한 무인은 상대도 되지 않는게 자명한 사실이었다. 표정관리가 안되서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억지로 내리자 진소청이 말했다.
“다만 조심하게. 금의위는 외적을 물리치는 것 뿐만 아니라 권모술수에도 능해야 한다고 들었네. 사제가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누구도 지켜줄 수 없을 게야.”
“걱정 마십시오. 다 감안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광이 나를 금의위에 보내는 건 그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늘상 내게 사파(邪派)의 기질이 있다고 말하고 다녔고, 그런 추악한 진흙탕 싸움에 익숙하다는 걸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독한 기질과 잔머리가 금의위 출세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다음 날 낙양으로 떠났다. 삼절 이광은 쪼잔하지 않아서 무려 여비를 은자 80냥이나 주었고, 나는 돈쪼들릴 걱정을 하지 않고 느긋하게 여행을 할 수가 있었다.
‘ 아, 맞다. 들릴 곳이 2군데 있군.’
나는 먼저 [인신공양의 참극]이 일어났을 마을을 방문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은 방화가 일어나서 전소(全消)되었고, 사람이 살았던 폐허의 흔적만 산속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참혹한 시체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흑의인들이 뒷처리를 철저하게 해놓은 모양이었다. 심지어 비밀통로나 우물조차도 전부 토사로 막아놓았다.
근처에 있던 태정관을 찾아보았으나 태정관 또한 사라져 있었다. 나는 근처에 사는 촌민에게 태정관의 행방을 물어 보았다.
“태정관의 현천도인님이요? 아, 그런 분이 있으셨쥬.”
“거기에 도인님과 여러 무당파 제자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5년 전에 저 옆마을이 갑작스레 큰 화재가 나서 다 타버린 일이 있었쥬. 그 때 마침 함께 종적을 감추셔서 잘은 몰라유. 그냥 저희는 도인님이 다른 곳으로 가버리셨나 싶었쥬…”
“……”
즉, 태정관에 살던 무당파 현천도인과 그 제자들의 행방은 묘연하다는 뜻이다. 어쩌면 무당파 본산으로 대피했을 수도 있고, 현천도인이 끝끝내 인신공양을 막으려다가 죽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간에 뒷맛이 씁쓸했기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 어쩔 수 없어. 내겐 그때 힘이 없었다.’
내 인생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들을 구한다는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이기적이고 못된 놈일지는 몰라도 그게 현실이다. 흑의인들과 척지면서 내 기회를 날려버리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현천도인만은 살아남았기를 바라면서 계속해서 낙양으로 여행을 했다.
그리고 또 한군데 들를 곳이 있었다.
나는 진랑곡에 들러서 망량이 사는 곳으로 다짜고짜 올라갔다. 망량은 이 시기에도 마을에서 망량선사로 영업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의 망운진은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퍼석하고 부숴져 버렸고, 나는 손쉽게 망량의 집 앞에 올 수 있었다.
이번에 망량은 여자와 떡치고 있지는 않았다. 대신에 나무그늘 아래에 마련된 상에 누워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보쇼. 망량. 일어나 보시오.”
나는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린 채 자고 있는 망량의 어깨를 흔들어서 깨웠다. 망량은 멍한 눈으로 일어나더니 나를 발견하자 화들짝 놀랐다.
“흐엑?! 엑?! 다, 당신 누구여?!”
“진정하시오. 난 당신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온 거고, 해칠 생각은 없으니.”
망량은 한참 후에야 마음을 진정시키고, 의관을 단정하게 썼다. 그는 허리춤의 부채를 들어올리며 뒤늦게 신비감을 조성하려는 듯 했다.
우우우
그의 몸 주변에 검은 구름이 몰아쳤다.
[ 나는… 진무대제의 영통력을 받은… 망량선사다… 그대는… 내게… 무슨 일인고…?]나는 피식 웃었다.
“기문둔갑 변성술(變聲術)과 흑운술(黑雲術)이군. 그렇게 애를 쓰지 않아도 되니 편하게 이야기합시다.”
“헉…”
그는 내가 기문둔갑을 알고 있자 뻘쭘한 얼굴로 술수를 거두었다. 기문둔갑의 술법 중에서는 특별한 신통력이 없어도 사용할 수 있는 간단한 것들이 있었는데, 방금 사용한 변성술과 흑운술이 거기에 속했다. 망량선사와 내가 3년 동안 처박혀서 공부할 적에 그가 생계유지를 위해서 점을 칠 때가 있었는데 사람들을 상대로 신비감을 조성하려고 자주 쓰던 술법이었다.
망량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보아하니 당신도 기문둔갑을 깨나 익힌 관계자인 거 같은데 여긴 무슨 일이오? 이 진랑곡에서는 내가 장사를 하고 있으니 쉽게 양보해 줄 수 없소.”
“당신 장사를 방해할 생각은 없소. 단지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을 뿐이오.”
“뭔데 그러오?”
나는 품 속에 늘 재봉해서 넣고 다니던 천암비서를 슬며시 꺼냈다. 그리고는 망량에게 내밀었다.
“이걸 해석해 주시오.”
“이, 이건!”
이후의 전개는 전생의 법칙에 따라 거의 동일했다.
망량은 천암비서의 괴어(怪語)에 놀라며 무명제사서가 있어야 이걸 해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나는 그걸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 다 들었던 얘기군.’
나는 거기까지 들은 후 이제 망량에게서 다른 정보를 얻기로 했다.
“망량. 당신은 이 천암비서나 무명제사서 자체에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오?”
이건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다.
그러자 망량은 약간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했다.
“이건 술법서(術法書)가 아니오. 좌도방문의 술법사들이 신통력(神通力)을 담아서 신이(神異)한 힘의 행사가 가능한 술법서와 달리, 이런 책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힘이 없소이다. 나도 황궁에 있던 시절에 무명제사서를 무수히 붙잡고 있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소.”
그래. 바로 이게 이상한 것이다.
나는 죽음 직전에 천암비서를 집어서 새로운 생을 얻었다. 시간역행 자체가 천암비서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천암비서와 거의 동류의 괴어(怪語)가 적혀있는 무명제사서를 무수히 접촉했던 망량은 아무런 능력도 얻지 못한 것이다.
천암비서와 무명제사서는 다른 용도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능력의 발동방식이 다른 것일까?
그렇다면 어째서?
어쩌면 망량이 특수한 능력을 손에 넣어놓고도 시치미떼고 있을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너무나 낮았다. 애초에 그럴거면 무명제사서를 자기가 황궁에서 가지고 나와도 되는 것이고, 3년동안이나 집착하며 내게 공부를 가르칠 이유도 없다.
나는 또 다른 질문을 했다.
“혹시 경하강 주변에 있던 마을이 5년 전에 불에 타서 사라졌다는 걸 들어본 적 있소?”
“물론이오. 나도 그때 여기서 장사를 하고 있었으니.”
“음… 당신은 혹시 이런 괴물을 본 적이 있소?”
나는 잠시 후 지필묵을 가져와서 그림을 그렸다. 나를 4번째로 죽였던, 무시무시한 덩치의 눈깔괴물이었다. 망량은 전신에 수백 개의 눈과 촉수가 달린 채 일렁이는 괴물의 모습을 확인하자 깜짝 놀랐다.
“이, 이걸 대체 어디서 보았소?”
“……?”
이어진 말에 나는 크게 경악했다.
“무명제사서의 3번째 장에 수록되어 있는 그림이 바로 이 마물(魔物)이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