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361)
00361 천계(天界) =========================================================================
용비천을 따라서 간 곳은 바로 산동의 빈주(濱州) 지역이었다. 예전에 내가 갔던 지역인 청도(靑島)일대와는 완전히 다른 장소라 나는 혼란스러웠다.
‘ 엥?’
왜냐하면 청도에 바로 산동성의 내성이 존재하며, 대룡표국을 포함해서 온갖 상회나 배가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빈주는 청도에 비하면 고려에서 멀었으며 해류도 불편한 장소였기에 항구는 있으나 청도에 비해서 한산한 편이었다.
그래서 내가 용비천에게 왜 산동 청도가 아니라 빈주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멍청한 놈! 청도는 이목이 많고 무림세력이 많지 않느냐. 우리는 밀행(密行)을 하는데 대놓고 청도에 가라고? 개방은 물론이고 온갖 잡놈들이 우리 정보를 수집할 것이다. 그래서 빈주에서 배를 타는 거다.”
“윽… 하지만 그럴거면 그냥 육로로 가도 되잖소.”
“닥치고 따라와라. 빈주에 가면 그런 소리는 쑥 들어갈 것이다.”
나는 내심 불평하면서도 용비천을 따라갔다. 대체 무슨 좋은 수가 있길래 빈주로 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신법을 이용해서 쉴새없이 따라서 달리자 용비천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과연 엄청난 내공이군. 장령곡에서 여기까지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렸는데 나를 쫓아 와?”
“흥! 떨어지길 바랬소? 안됐군.”
“다 왔다.”
용비천이 내려선 곳은 한산한 어촌 마을이었다. 청도에 비하면 벽촌 중의 벽촌이라 내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역시 큰 배나 상선은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사람 서너 명 타면 꽉찰 것 같은 조각배나 어선이 전부였다.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저런 작은 배로는 고려까지 갈 수 없소.”
용비천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갑자기 긴 휘파람 소리를 내었다.
휘이익 –
길고 낮은 휘파람소리는 한참동안 울렸다. 그러자 잠시 후 먼 바위섬 쪽에서 슬며시 커다란 배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헉.”
그 배의 크기는 예전에 내가 봤던 안현 부관의 군함보다 더 컸다. 흑색 돛을 달고 있었으며 상당히 빠른지 금새 이곳까지의 거리가 좁혀졌다. 이윽고 어촌에서 약 오십 장 떨어진 곳에서 배가 멈추고, 거기에서 누군가가 등평도수의 경공을 발휘해서 달려왔다.
사아앗
그 자의 경공은 가히 고절한 경지였다. 오십 장을 등평도수로 이동하는데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고 물보라는 커녕 파장조차 거의 일지 않았다. 내가 멸혼보로 등평도수를 써도 저 정도로 깔끔한 경공은 불가능했으므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등평도수로 우리 앞에 선 자는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버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포권하자 용비천은 흡족하게 웃었다.
“음. 가자꾸나.”
눈 앞에 서 있는 것은 바로 황산파 장문인이자 용비천의 아들인, 도룡신검 용중일! 그가 이 어촌마을에서 거대한 배를 이끌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배의 크기를 보자 기가 막혀서 말했다.
“군함보다 큰데… 저런 배를 건조하려면 엄청난 돈이 들었을텐데.”
그러자 용중일이 훗하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바로 새로운 뇌신류의 호법사자로군.”
“백웅이라 하오.”
“나는 풍신류의 용중일이라 하네. 자네의 물음에 대답하자면, 저 배는 풍신류의 순수한 자금력으로 만든 배지. 묵풍호(墨風號)라고 하네.”
“……”
용중일의 말에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 저걸 일개 문파의 힘으로 만들었다고?’
배를 만드는 건 엄청난 금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배의 크기가 조금만 커져도 두 배에 가까운 금액이 드는 건 물론이고, 저 배에는 온갖 장비가 갖춰져 있는 걸로 보였으니 가히 황금 수십 관을 넘어서서 수백 관에 가까운 금액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정도면 보통 사람이 평생 먹고살 금액을 수십 배나 넘는 수준이었다.
풍신류 또한 화신류 못지 않게 상당한 부를 축적해둔 모양이었다.
‘ 하긴 마도팔문 수라문은 물론이고 온갖 암흑가를 자기 것으로 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는 당연할지도…’
내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용중일이 씩 웃었다.
“듣던대로 무공이 고절하군. 앞으로 친하게 지내세.”
나는 그 말에 덤덤하게 대꾸했다.
“풍뢰불양립(風雷不兩立). 당신들이 뇌신류 퇴출 때 쌓은 원한이 얼만데 쉬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요?”
“후후. 그런 것 치고는 뇌신류에 대한 애착이 별로 크지 않아 보이는군.”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너무 날을 세우지 말게. 어차피 이번 일은 함께 해야 하는 일이니 잠시 감정을 접어두는 게 서로 현명한 일이겠지.”
타닷
용중일은 그렇게 말하고는 용비천과 함께 등평도수로 묵풍호에 날아갔다. 아마 묵풍호가 근처에 배를 못 대는 이유는 수심이 얕고 항구가 없어서인 듯 했다.
“……”
나도 별 수 없이 그들을 따라서 등평도수로 묵풍호에 타는 수밖에 없었다. 왠지 용중일이 내 심경을 읽은 듯한 찝찝함이 마음속에 남았다.
‘ 눈빛? 말투? 정보? 대체 뭘 읽은 거지? 아니면 그냥 찔러 본 건가?’
방금 전 용중일의 말투는 마치 내 마음속을 관통하는 듯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그냥 찔러본 건지 아니면 확신해서 그렇게 말하는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용중일이 굉장한 능구렁이라는 걸 순간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확실한 건 용중일이 풍신류의 후계를 잇기에 차고 넘치는 역량을 지닌 천재(天才)라는 사실이었다. 황산파의 장문인직을 겸임하고 있다는 것은 당연히 도가문파 황산파의 절학도 익혔다는 뜻인데, 아무리 풍신류의 무공이 사대무류의 하나라서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상이한 절학을 두 개나 동시에 익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둘 다 대성했다는 건 용중일의 재능이 대단하다는 걸 의미했다.
“출발!”
잠시 후 묵풍호가 빠르게 물살을 헤치기 시작했다. 나는 타고 있는 선원들 하나하나가 풍신류의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란 사실을 확인했고, 배의 속도도 예전에 탔던 군함보다 훨씬 빠르다는 걸 알아챘다. 이 정도면 거리가 멀어도 청도에서 출발하는 것과 비슷하게 도착할 거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백웅이라고 했나.”
내가 갑판 위에 서서 생각에 잠기자 용중일이 내게 다가왔다. 내가 그를 경계어린 기색으로 쳐다보자, 용중일이 훗하고 웃었다.
“확실히 묘한 자로군. 교주께서 흥미로워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네.”
“내게 함부로 말을 걸지 마시오.”
“별 일은 아니고 이번 임무의 정보를 공유할까 해서 말일세. 아버님께 여쭤보니 자네는 사전에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했다더군.”
내가 말없이 그를 응시하자 용중일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우리가 십이율주를 만나는 장소는 그의 본거지인 신단(神檀)이 아닐세. 그보다 더 가까운 장소인 심양(瀋陽)이지.”
“심양이라면…”
“요녕성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지.”
그렇게 대답한 용중일이 말을 이었다.
“사실 중원과 고려의 중립지역이나 다름없는 곳이지. 또한 십이율의 세력이 강성하게 퍼져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신단에서 만나는 것보다는 낫네. 만일의 경우 도주하기가 용이하니까.”
“그건 십이율주와 사전에 이야기한 결과요?”
“그렇네.”
용중일은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십이율주도 우리가 중원의 대세를 잡고 있다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네. 왜냐하면 낙양에 그가 심어둔 십이율의 특위(特位)가 시시각각 중원의 정보를 수집해서 보내기 때문이지. 그래서 이번 동맹임무도 순조롭게 끝날 거라고 예상하고 있는 중일세.”
십이율 특위!
그건 검마에게서도 한번 들어본 적이 있는 존재였다. 특위는 십이율주 직속의 삼사와 대등한 위치와 능력을 가진 자로서, 십이율 문주들을 감시하는 임무도 함께 지니고 있다고 들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만일 존재한다면 굉장한 고수일 가능성이 컸다.
나는 궁금해져서 물었다.
“어째서 당신은 천령단을 얻지 못했소?”
“음…?”
“내가 볼 때 당신은 엄청난 고수요. 무의 깨달음이라는 점에서는 저 용비천을 능가할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천령단의 주인이 되지 못한 거지?”
“……”
그 말에 용중일은 약간 당황한 듯 했다. 그의 천연덕스러운 능구렁이의 가면이 벗겨질 정도로 내 질문이 정곡을 찌른 듯 했다. 잠시 후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파악하기 어려운 친구군. 파악했다 싶으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니…”
“내 질문에 대답해 주시오.”
“자네가 파악한 대로, 나는 어떤 점에서는 아버님의 진경을 넘어섰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아버님이 지닌 천령단을 물려받거나, 또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지. 왜냐하면 교주께서는 각 무류의 힘의 균형을 위해 천령단 소유자를 한 명씩으로 정해두고 있기 때문이네.”
“음. 그 말은…”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용중일이 껄껄 웃었다.
“그렇기에 나는 자네가 좀 부럽군. 그리도 손쉽게 신의 힘을 얻을 수 있을 줄이야… 하하핫.”
신의 힘?
‘ 이 놈은, 천령단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어!’
나는 그 순간, 용중일이 천령단의 실체에 대해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천령단이 그저 무한의 내공경지라고 파악하고 있는 보통 무림인들과 달리, 신의 사도이며 단말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이건 굉장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는 질문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 이것까지 아는 척을 하면 용중일이 나를 크게 경계할 것이다.’
천령단이 신의 힘이라는 확증은 어떤 점에서 백련교 최대의 비밀이다. 용중일은 자력으로 알아냈는지 용비천에게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 비밀을 자신의 무기로 하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섣불리 아는 체 하지 말고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존재로 남아있는 편이 나았다. 나는 생각을 끝낸 후 용중일에게 말했다.
“내가 거기에 도착하면 해야할 일이 뭐요?”
“별거 없네. 그냥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아버님을 호위하면 되네.”
“용비천이 나보다 몇 배는 강한데 호위라니…”
“십이율의 삼사 또한 아버님과 대등한 강자들이니 말일세.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지.”
“……”
“도착까지는 대략 사나흘 정도 걸릴테니 쉬어 두게.”
용중일은 그 말을 끝으로 선내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갑판에 서서 한참동안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이후로 한 시진 정도를 더 서성이다가 안에 들어가서 쉬었다.
이윽고 우리가 심양 근처의 항구에 도착하자, 풍신류의 고수들이 부산하게 하선 준비를 했다. 약 한 시진이 걸려서 모두가 내리자 용비천이 말했다.
“너희는 퇴로를 확보해야 하니 이 항구에서 대기하도록.”
“존명.”
“중일이와 네놈은 나를 따라와라.”
쐐애액
싸가지없이 한마디를 툭 던진 용비천은 이윽고 풍신류의 풍백보를 이용해서 날듯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용중일과 함께 빠르게 뛰어서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용중일의 풍백보를 지켜본 나는 내심 감탄했다.
‘ 낭비가 없어.’
멸혼보만큼 빠르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무림의 신법에 비하면 굉장히 빨랐다. 또한 용중일의 보법은 최소한의 힘을 들여서 최대효율을 내고 있었고, 그것은 신법의 숙련도가 굉장한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뜻이었다. 비록 풍신류 소속이며 적이긴 하지만 그는 충분히 구파일방의 장문인이라 자칭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한참을 뛰어서 심양성 내부로 들어오자 우리는 웬 한적한 장원으로 향했다. 그 장원에는 문지기도 없었으며 꽤나 을씨년스러웠지만, 장원 내부로 들어서자 고요한 등불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조용한 건물의 내부로 들어가자 밝은 방이 나타났고, 그 장소에는 십이율주가 강아지 가면을 쓴 채 삼사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십이율주는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다.
“먼길 오느라 고생많았어~ 용비천.”
용비천은 그에게 예를 갖춰 포권하며 말했다.
“백련교주의 사자, 풍신류 호법사자 용비천. 동방무림의 지존이신 십이율주를 뵈오.”
“그래. 그쪽에 앉지.”
“사양하지 않겠소.”
우리 셋은 그 말에 탁자의 맞은편에 앉을 수 있었다.
‘ 굉장하군, 십이율주 하은천…’
나는 방금 전의 광경을 보자 새삼 십이율주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용비천은 천하에 두려운 것 없이 횡행하던 무적의 호법사자인데, 십이율주에게는 철저히 반존대를 하며 자신이 아래라는 걸 인정한 것이다. 그것은 백련교에서도 십이율주가 백련교주와 거의 동급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잠시 후 십이율주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래. 백련교가 우리와 동맹을 맺고 싶다고?”
용비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정확히는 교주께서 불가침조약을 맺고싶다 하셨소. 우리가 중원에서 충분한 세력을 얻는 동안에 십이율이 묵인해주기를 바라고 있으시오.”
“묵인이라. 우리 십이율이 너희를 공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군.”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만사가 불여튼튼이라, 상호신뢰를 더 깊게 하기 위하여 오늘 이 자리를 감히 부탁드린 것이오. 그걸 위한 댓가는 충분히 가지고 왔소이다.”
“댓가라… 어떤 댓가지?”
“황금과 성련(聖蓮), 그리고 백련교에서 수집한 훌륭한 신병(神兵)들이오. 충분히 일개 국가의 공물에 맞먹는 가치가 있다 생각하오.”
아마도 항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부하들이 지키고 있는 수많은 짐들이 그 ‘대가’일 것이다.
“흐응.”
용비천의 말에 십이율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한참동안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봐이봐… 신뢰. 너무 쉽게 그 말을 꺼내는 건 아닌가?”
“어떤 말을 바라시오?”
“솔직히 말하지. 나는 너희 백련교가 소교주의 괴질을 고쳐서 제약이 사라졌기에, 중원을 정복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
용비천은 물론 용중일도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이율주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너희를 좌시하면 중원무림은 그대로 먹혀버릴테고 백련교 천하가 되겠지. 그 후에 너희가 동방무림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지?”
“억측이시오. 그렇기에 상호신뢰를 다지는 것이 아니오.”
“후후후! 신뢰라!”
십이율주는 차갑게 웃더니 말했다.
“좋아. 그러면 네 아들인 용중일을 신단에 인질로 둬라. 그럼 신뢰를 가져 주지.”
“……!!”
“너희가 침공할 경우 네 아들의 목을 백련교주에게 선물로 보내겠다.”
나는 십이율주의 말을 듣는 동안 소름이 끼쳤다. 예전에는 의뭉스럽고 음흉하긴 해도 잔혹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아니, 이건 차라리 더러운 제안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백련교의 자존심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 가까웠다.
그러자 용비천은 노기를 참는 듯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대답했다.
“어찌 이야기가 그렇게 되오? 내 아들의 목숨으로 신뢰를 담보하겠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딨소?”
“충분히 말이 되지. 그는 호법사자의 애지중지하는 친아들이자 풍신류 미래의 동량이기도 하지. 그런 자의 목숨을 우리에게 맡겨 주는데 어찌 신뢰를 안 가질 수 있겠나? 네 말대로 상호신뢰가 마음속에서 펑펑 샘솟아나겠군.”
“크윽!”
능글맞게 이야기하는 십이율주는 더없이 사악해 보였다. 아마도 그는 사전에 풍신류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해놓고 압박제안을 하는 듯 했다. 그리고 용비천은 난데없이 정곡을 찔린 셈이었기에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중요한 회담이라고 하지만 용중일은 하나뿐인 아들이자 풍신류의 미래였다. 백련교가 향후 어떤 행보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용중일의 목숨을 적지에 맡기는 선택은 결코 할 수 없으리라.
그러자 용중일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율주께서 상호신뢰를 싫어하신다면 거래는 어떠시겠습니까?”
그 말에 십이율주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거래?”
“율주께서 원하시는 건 인간 무림세력의 다툼이 아니라 [옛 지배자]라고 불리는 신적 존재의 토벌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
“만일 이번 불가침조약을 맺어 주신다면, 저희는 호법사자 모두의 힘을 동원해서 해신(海神)의 토벌에 협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힐끔 용비천을 쳐다보았다. 그가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는 걸 보면, 처음부터 제안이 실패할 경우를 생각해서 제 2안을 준비해 왔던 모양이었다. 용중일의 제안을 들은 십이율주는 흥미로운 듯 말했다.
“천령단 소유자가 도와준다라. 그거 아주 대단한 위용이겠군.”
“받아들여 주시는 겁니까?”
십이율주가 껄껄 웃었다.
“웃기지 마. 필요 없어.”
“……!!”
“애초에 너희들은 무생노모의 법문을 해석해서 ‘힘’을 얻었을 뿐, 교주를 제외하고는 그 힘의 실체가 뭔지도 모르잖나? 그리고 [옛 지배자]와 인간의 관계, 삼황오제, 칠요 등등 너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병신들이지. 그걸 안다면 호법사자의 힘을 빌려준다느니 하는 헛소리는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으음…”
용중일이 침음성을 흘렸다. 아무래도 십이율주가 이번 제안도 거절할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용중일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만 그럼 원하시는 조건이 있습니까? 너무 허황된 게 아니라면 저희는 모든 걸 들어드릴 각오로 심양에 왔습니다. 부디 놀리지 말고 진지하게 말씀해 주시오, 율주.”
“진지하게… 흐음…”
그러자 잠시 후 십이율주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칠요(七曜)를 최소한 한 개 이상 찾아서 갖고 와서 바쳐라. 그러면 불가침조약을 맺어 주지.”
“칠요…?”
용비천과 용중일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용중일은 구파일방의 장문인이라서 그런지 칠요에 대해 약간 아는 듯 십이율주에게 말했다.
“설마 도가의 전설인 그 칠요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건 그저 전설일 뿐…”
“교주한테 내 이야기를 똑바로 전해라. 그럼 회담은 여기서 끝!”
“……”
덜컹
십이율주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용중일과 용비천이 동시에 일어섰다. 그들은 전신에 강한 기운을 일으키기 시작했는데, 이윽고 삼사가 그에 대척해서 기를 뿜어내자 순식간에 백중세가 이루어졌다.
기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직전의, 일촉즉발의 상황!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그 대치상황을 지켜보던 십이율주가 빙긋 웃었다.
“힘으로 해 보겠다는 건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용비천.”
그 말에 용비천이 움찔했지만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당신이 아무리 동방무림의 지존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오! 우리는 모든 성의를 다해 이야기를 하러 왔건만, 칠요니 뭐니 전혀 알 수 없는 트집을 잡으면서 이토록 본교를 무시하다니…!!”
그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하다못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라도 들려주시오! 이것은 너무나 무례한 일이오.”
“흠.”
용비천의 항의에 십이율주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너흰 너무 무식해. 무림따위 전혀 중요한 게 아닌데도 그걸 인식하지 못하잖아. 안목이 너무나 좁으니 향후 우리 발목을 잡을 게 뻔한데 뭐하러 동맹을 맺어야 하지? 이렇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고.”
“크윽…!!”
“아무튼 가 봐라? 거기서 더 까불면 목숨은 장담 못 한다.”
용비천은 치욕감 때문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나는 용비천이 저런 말을 듣고서도 참는다는 게 기가 막혔다. 설마 호법사자를 힘으로 겁박할 수 있는 존재가, 백련교주 말고도 있었다니!
‘ 칠요라. 교주는 아직 내게서 뺏어간 보물 중에 수요가 있다는 걸 몰라.’
나는 수요가 우연히 얻게 된 고대의 보물인데 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둘러댄 상태였다. 그렇기에 교주도 어지간해서는 수요를 자신이 갖고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교주에게 칠요가 있다고 한 마디만 하면 해결될 문제였기에 고민이 되었다.
과연 이 회담을 성사시키게 도움을 주는 게 옳을까? 아니면 내버려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