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377)
00377 천계(天界) =========================================================================
[ 혈계라고?]제갈사가 귀찮은 듯 설명했다.
[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혈계의 어떤 지역을 통째로 결계로 막아놓은 다음에 현세를 곧장 연결해놓았다. 그래서 이 통로를 통하면 마치 공간이동 하듯이 중원의 엉뚱한 지역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 잘 이해가 안 가는데…] [ 실제로 어려우니까 한 번은 이해해주마. 쉽게 말하자면 공간을 접어서 이어붙였다는 말이다. 네놈의 비등과는 다른 원리야.] [ 흐음.]쉬익!
나는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고 몇 걸음 걷지 않아서 웬 시꺼먼 건물 안에 도착해 있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사방에는 먼저 도착한 ‘손님’들이 여기저기의 편한 자리나 의자에 앉아서 무대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곳이 어떤 장소인지, 중원의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는 반라의 미녀들이 돌아다니면서 ‘손님’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주거나 혹은 희롱당하고 있었다. 또한 밝은 빛이 비치는 무대 한켠에서는 경매대상으로 보이는 노예들이 철창에 갇혀있는 것도 보였다.
노예들의 면면은 매우 다양했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다. 내가 신기해서 이 장소를 훑어보고 있자, 웬 키 작고 등이 굽한 노인이 내게로 다가와서 손을 비비며 말했다.
“흐흐… 초대장을 갖고 계시는군요. 실례지만 성함이…?”
나는 전해들은 가명을 억양없이 대답했다.
“상관정(上官正)!”
그러자 노인이 놀란 듯 말했다.
“오오… 명가 상관가의 귀한 분이셨군요. 그럼 여기 귀빈석으로…”
웅성
상관정이라는 이름이 울리자 주변에 있던 ‘손님’들이 힐끔거리며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손님’들은 하나같이 미리 가면을 준비해 와서인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몇몇은 경악하거나 당황한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물론 나 또한 가면을 쓰는 중이었기에 그들에게 얼굴이 들킬 걱정은 없었다.
‘ 왜 이런 반응이야?’
왠지 단숨에 이목을 모은 듯 하다. 내가 불편한 기색으로 귀한 좌석에 앉자 제갈사가 킬킬거렸다.
[ 상관 가문은 전설의 기인 상관완아(上官婉兒)때부터 이어져 오는 고명한 가문이지. 역사로 치면 한씨 가문에 뒤지지 않는다. 교주가 대단한 신분을 준비해 줬구만 그래.] [ 제길! 이건 잠입임무인데 뭐하러 눈에 띄는 신분을…]나는 옆에서 반라의 미녀들이 슬며시 다가와서 내 몸을 만지작 거리자 손을 휘적거리며 물러나게 했다.
[ 글쎄? 너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 뭐?]내가 제갈사에게 으르렁거리자 그가 딴청을 피웠다.
[ 곧 경매가 시작하겠군. 집중해라.]이윽고 경매무대에 별다른 개회사도 없이 한 명의 노예가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노예를 본 나는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
구파일방(九派一幇) 화산파(華山派)의 도복!
나이가 약 20대로 보이는 그 화산파 문인은 여자였다. 팔목과 발목에 철그렁거리는 족쇄를 찬 채, 마치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나는 급히 그녀의 기를 감지해 봤는데 확실히 명문대파의 제자다운 내공을 보유하고 있는지라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 저 정도 내공을 지니고 있는데 탈출하지 못한다…?’
사회자로 보이는 가면의 사내가 무대 위로 올라와서는 크게 외쳤다.
“화산파의 후기지수인 화영일검(花榮一劍) 사우희(査雨姬)! 잡아들이는데 꽤 많은 고생을 한 노예입니다. 한때 무림의 미녀 중 하나로 손꼽혔으니 소장가치가 매우 높다고 저희 주최측에서 장담합니다! 모쪼록 귀한 선택을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장내에 앉아있던 손님 중에서 하나가 크게 말했다.
“무림고수라면 두려운걸! 섣불리 데려갔다가 탈출하려고 주인을 공격하는게 아닌가?”
“하하하, 당연한 걱정이군요! 저희는 그 점을 깊이 생각해서 오늘 이 날까지 사우희를 철저히 조교했습니다.”
껄껄 웃은 사회자가 갑자기 사우희 앞에 가더니 뭔가를 귀에 속삭였다. 그러자 사우희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울먹거렸다. 그리고는 난데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고, 장내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오오!”
사우희는 알몸인 상태로 무대에서 네 발로 기어내려오더니 의혹을 제기한 손님에게 가서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손님이 만족한 표정을 짓는 걸 봐서는 탁자 밑에서 어떤 걸 하는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추하다. 마치 삼류 도색소설을 보는 듯한 어이없는 전개였다.
나는 황당해서 고개를 저었다.
“미쳤군.”
마치 광기가 집결된 장소 같았다. 어찌 구파일방의 일류 후기지수였던 화영일검 사우희가 저런 엽기적인 행위를 명령 한 마디에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손님들은 그 광기에 전염되었는지 즐거워하며 이후에 나오는 ‘경매품’에도 신경을 쓰며 가격을 부르거나 온갖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거래되는 것은 성노예 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무림의 고수들까지 경매품으로 나와서 호위역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심지어는 부자(父子)나 모녀(母女)가 함께 나와서 따로따로 팔려나가는 광경도 있었으며 색목인(色目人)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비통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지며 남편과 아내가 생이별하는 광경도 보였다.
노예가 팔리는 것도 비인간적이었지만, 그걸 태연하게 물건처럼 사 가는 ‘손님’들은 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으아아아!!”
“저 놈 잡아!”
간혹 노예들이 반항을 하자 여기저기에 대기하고 있던 무인들이 달려들어서 노예의 손발을 잘라버리거나 목을 날려 버렸다. 무인들의 솜씨는 상당해 보였다.
“……”
불쌍하다. 그렇다고 해서 어설프게 구해내려고 하다가 일을 망칠 순 없지.
나는 광기 속에서도 정신을 통제하며 차분하게 거래광경을 지켜보았다. 벌써 경매가 시작된지도 두 시진이 다 되어가는데도 내가 아무런 거래도 하지 않자, 아까 나를 자리로 안내했던 왜소한 노인이 다가와서 말했다.
“히히… 손님께서는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으십니까?”
나는 짐짓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귀한 물건을 사러 왔소. 구파일방 후기지수니 색목인이니 금발서시니 곤륜노니 전직 고관의 혈육이니… 이런 건 흥미가 없소. 시장의 수준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요?”
그러자 노인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손님은 정말 눈이 높으시군요… 저희 단골 손님들도 오늘의 품목에는 대만족하고 있으신데… 그러면 어떤 물건을 원하시는지요?”
“가장 비싸고 귀한 것!”
나는 단호하게 말하며 슬며시 운을 띄웠다.
“세상에 둘도 없다 자부할 수 있는 걸 가져오시오. 가격은 얼마든 상관없소.”
승부수를 띄운다.
어차피 평범한 물건을 사서는 주최측이 결코 꼬리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비싸고 귀한 걸 사려고 해야 풍신류나 황궁과의 연결고리가 눈에 보일 게 분명했다. 어차피 내 돈이 아니니까 맘대로 쓸 수 있다는 것도 그 생각에 한몫 더했다. 그러자 노인은 침음성을 흘렸다.
“잠시만…”
그는 어디론가 사라져서 한 식경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내게로 돌아와서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침 딱 하나 있습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좋소. 나를 만족시킬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나는 노인을 따라서 경매장에서 벗어나서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자 경매장이 한두군데가 아니라 무려 여섯 개 이상이 설치되어 있으며, 동시진행되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곳은 임야라기엔 상당히 폐쇄되어 있는 공간으로 보였다.
나는 노인을 따라가다가 불안감을 느꼈다.
‘ 그놈의 조력자는 언제 나오는 거야?’
조력자는 처음부터 노예시장에 잠입해 있으며, 나를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즉 지금도 어딘가에서 조력자가 나를 발견해서 따라오고 있어야 정상인 것이다. 하지만 아까부터 기감을 상승시키고 있는데도 그 조력자가 어디쯤에 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노인은 가장 깊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웬 방으로 안내받았는데,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폐쇄되어 있는 암실이었다. 혹시 함정인가 싶어서 힐끔 노인을 쳐다보자 노인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손님께 해가 가는 일은 없습니다. 부디 천천히 감상하시길…”
“못 믿겠군. 나를 저기에 감금시키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지?”
“으음… 너무 귀한 물건이라 저희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정 그렇다면 당신도 나와 함께 들어오시오.”
“으… 알겠습니다.”
우거지상이 된 노인과 함께 암실에 들어가서 앉자, 유리벽 너머로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빛이 비추는 대상은 바로 구슬프게 우는 한 명의 미녀였다.
“흐흐흑…”
용모가 매우 아름답고 미색이 고아했다. 다만 내가 보아왔던 최고의 절세미녀들에 비하면 약간 떨어지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귀한 복색을 하고 있으니 귀한 신분이라고 짐작되었으며 그저 울고만 있었다.
“저 여인은…”
“모르십니까? 상관정 공자시라면 아실거라 생각했는데…”
상관정이면 알 거라고 생각했다고?
내가 의아해하자 제갈사가 머릿속에서 말했다.
나는 황당해서 멍한 기분이 들었다.
공주!
그것은 황실의 적손이라는 뜻이었으며 만족(萬族)중에 가장 존귀한 황족의 일원이라는 뜻이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낮았으나 공주라는 지위는 그 모든 걸 무시할 정도로 높았으며, 왕이나 제후의 아내로 가는 경우가 많을 정도였다. 귀비의 딸이 공주로 책봉된 건 꽤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그런 걸 차치하고라도 대단히 높고 존귀한 여인인 건 틀림없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서… 설마 효성공주님이오?”
“역시! 명문 상관가의 자제다우십니다.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어찌 공주가 노예시장에…”
내가 당혹해서 묻자 노인이 클클대며 말했다.
“그녀의 남편인 하남의 영회왕(榮灰王)이 아주 큰 실수를 저질러서 황제께 문책받을 일이 있었지요. 그 일을 무마하는 대신에 영회왕은 자신의 아내를 내놓았고, 지금 그의 곁에는 진짜 효성공주 대신 가짜가 있습니다. 저희는 진짜를 보유하고 있지요.”
“……”
세상에 자기 아내를 파는 황족이 있었단 말인가?!
나는 당황한 척 말했다.
“이… 이건 좀 아니군. 황족이자 공주를 내 노예로 삼았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이런 위험한 거래는 할 수 없소.”
“흐흐… 소장가치는 최고입니다만… 사실 다른 손님 중에서 몇몇 분이 눈독 들이시는 걸 억지로 물리치고 소개시켜드린 거라서…”
“진짜요?”
“네. 황족에게 자기 자식을 낳게 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정말로 공주를 노예로 삼으려는 미친 놈이 존재한다는 건가!
나는 경악의 연속을 느꼈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여자가 아니오.”
“으음… 그럼 처음부터 말씀해 주셨어야 할진대.”
“무기나 기진이보는 없소?”
노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물론 있습니다만, 저희로서는 이제 약속을 받아야겠습니다.”
“무슨 약속?”
노인이 힐끔 유리벽 너머의 효성공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공주의 일도 사실 극비에 속하는 것입니다. 초행이신 상관정 공자를 저희가 쉽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허나 저희로서는 단골을 어떻게든 확보하고 싶기에, 입막음이나 협박따윈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약속해주셔야 할 것은, 이 다음에 보여드리는 물건을 반드시 사 주셔야 겠습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강매인가.”
“아니지요. 물건만 보고 가시는 게 어찌 되겠습니까? 의리상 사 주셔야 하는 겁니다. 단, 물건은 몇 번이든 만족하실 때까지 보여드릴테니 걱정 마시길…”
“……”
전형적인 뒷골목 장사치의 흥정수법이었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받아들일 경우 덤터기를 쓸 확률이 높았다. 원래라면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어도 받아들이지 않을 제안이지만, 나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왔으므로 망설이는 척 하다가 승낙했다.
“… 알았소.”
“그럼 다른 물건을 계속 보여드리지요.”
이윽고 노인이 수신호를 하자 몇몇 사람이 들어와서 효성공주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휘황찬란한 예기를 머금은 한 자루의 검(劍)이 거치대에 놓인 채 유리벽 너머에 나타났다. 나는 그 물건을 보자 눈썹을 꿈틀거렸다.
“명검?”
“그렇습니다. 그것도 보통 명검이 아니지요.”
노인은 클클대며 말했다.
“저 잠잠하고 검푸른 빛… 주인을 가리는 최고의 검입니다. 그 이름을 담로(湛盧)라 합니다.”
“……!!”
담로!
그것은 천하의 유수한 명검 중에서도 전설적인 것으로 월나라의 장인 구야자가 직접 제작했다고 알려진 것이었다. 특히 담로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왕검(王劍)으로서의 내역이었는데, 오직 왕만이 소유할 수 있으며 천하를 제패하게끔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 저 검은 평범한 게 아냐!’
나는 무수한 세월 동안 무예를 단련해 왔으며 영안도 트이기 시작했으므로 알 수 있다. 저 검이 뿜어내는 힘은 보통의 장검과는 격이 달랐다. 저게 담로라는 게 사실이라면 예전에 한씨세가에서 보았던 용연(龍淵)과 대등한 절세명검이리라.
“저것을…”
나는 무사로서의 욕심에 나도 모르게 사겠다고 할 뻔 했다. 하지만 제갈사가 직전에 끼어들어서 내게 말했다.
[ 안 돼! 언제까지 명품 구경이나 할 셈이냐?] [ 뭐가.] [ 효성공주니 담로니 하는게 중요한 게 아니다. 네가 이 자리에서 달라고 할 건 딱 하나 뿐이니까.] [ 그게 뭔데.] [ 잘 들어라. 그건…]이어진 제갈사의 말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 이 자식은 말은 개같이 하는데 늘 맞는 소리만 하는군…’
이번 계책에도 따르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이거 정말 안 되겠군. 내가 원하는 건 따로 있소.”
“음… 어떤 걸…?”
“정말 내 말을 못 알아먹는건가?”
이어진 내 말에 노인이 눈을 부릅떴다.
“마도서(魔道書)나 마도구를 내놓으시오. 난 처음부터 그걸 사러 온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