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471)
00471 암천향(暗天鄕) =========================================================================
나는 눈 앞의 광경을 보자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고 망량의 계책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연 대장군은 무공을 익히긴 했으나 일류 수준에 턱걸이하고 있었으며 지금으로서는 가족이 다 연금되고 죽을 위기에 처해있던 노인에 불과했다. 그런데 황궁이나 화신류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강대한 유림세력의 대표격이자 초절정고수인 등곽이 황연을 보자마자 쩔쩔매며 당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으로 지어내는 것도 아니었고 진심으로 황연을 어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황연을 본 한백령도 급히 포권을 했다.
“구국의 영웅 황 대장군을 간만에 뵙니다.”
한백령까지?!
내가 더더욱 놀라고 있을 때 황연은 자리에 앉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이 늙은이가 갑작스레 나타나서 자네들이 많이 놀랐겠군.”
“……”
“내가 몇 마디 해도 되겠나?”
“하시지요.”
등곽도 한백령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쑥쓰러움이나 당황따위는 거의 없었고 온당히 그럴만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어제 내게 망량이 이야기했던 걸 떠올렸다.
[ 백웅. 당신 생각 이상으로 황연 대장군은 거물이오. 그러니 걱정 안해도 되오.] [ 어찌 걱정을 안하겠소? 한백령이나 등곽이 수틀리면 무력행사를…] [ 그럴 걱정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요.] [ ……?] [ 과거 당신의 전생에서 ‘나’ 망량은 황연 대장군을 손에 넣은 순간 반역이든 궐기든 마음대로 일으킬 수 있었소. 마치 조조가 천자를 얻은 것과 같은 일이었던 것이오. 왜냐하면 그는 대명제국 역사상 제일가는 천하대장군 중 한 명이기 때문이지.]어제의 나는 그런 망량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자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징성만으로도 황연은 낙양의 그 어떠한 고위인사라 해도 압도하는게 가능하다!
무력행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눈 앞의 황연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이란 게 섣불리 자기 손의 무력을 쓸 수 없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용하거나 다루기에 따라서 천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물에게 섣불리 손을 댈 정도로 무모한 자가 있을까? 더욱이 등곽이나 한백령같은 두뇌파라면 결코 그런 모험을 하지 않으리라.
게다가 두 사람은 모두 황연을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다. 그런 이성적인 권모술수 이상으로 황연이라는 인간 자체를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내심 감탄하고 있자 황연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대들은 대명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갑작스럽게 생뚱맞은, 하지만 지금의 주제와 분명히 연관이 있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등곽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세상의 중심입니다.”
시선이 한백령에게로 옮겨지자 그녀는 다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의 나라지요.”
두 사람의 말에는 분명한 온도차가 있었다. 등곽에게 있어서 대명제국이 반드시 지켜야만 할 대상이라면 한백령에게 있어서는 그저 지배자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러자 황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두 맞는 말이지. 그리고 나는 한 마디를 덧붙이고자 하네.”
“무슨…”
“중화(中華)를 이루고 있는 만민(萬民)의 영토. 그것이 대명제국이 아니겠나?”
“……”
두 사람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황연의 정의 또한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두 사람이 지니고 있는 견해와는 온도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야기한 의미는 통상적인 충(忠)과는 달랐다.
등곽이 말했다.
“백성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씀이신지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였으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게 아닐세. 우리가 지위를 지니고 대명제국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하는 건 황권(皇權)이 아니라 백성이라는 말이지.”
“장군께서 제 생각을 이해해 주시는군요.”
등곽은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황연은 한층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허나 나는 이번에 금의위에 의해 대뢰옥에 납치당하면서 한층 생각이 달라졌네.”
“……!!”
“그 곳에서 내가 본 것은 형언할 수 없는 이족(異族)과 사악한 존재들이었네. 그들 앞에서 인간이 지닌 도덕, 지혜 따위는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말더군… 그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이나 가치관과 완전히 동떨어진 관계였고, 그들 앞에서 우리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고 말았네.”
쿠웅
황연의 주먹이 은은하게 탁자를 쳤다. 좌중의 시선이 그를 향하자 그는 불꽃같은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존(生存)!”
“생존…?”
“우리가 대면한 것은 황제가 타락했다느니 탐관오리나 환관을 물리쳐야 한다는 문제가 아닐세. 이 문제는 권력관계를 떠나서 우리 모두의 생존과 직면해 있네. 또한 그 생존에는 중화를 이루는 만민도 포함된다 생각하네.”
“……”
등곽은 뭔가를 깨달은 듯 한숨을 쉬었고, 한백령은 얼굴이 크게 굳어져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생각하더니 황연에게 말했다.
“이족이 도성의 인간을 말살시킬거라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 정도가 아닐세. 그들을 내버려두면 얼마 지나지않아 모든 인간이 나락으로 떨어지겠지.”
“흐음…”
“한백령 자네는 백련교의 고수라 했지. 그래서 지금 내 이야기가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네. 허나 황궁을 잠식한 어둠이 백련교를 물들이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백련교 또한 인간인 건 마찬가지일텐데.”
한백령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굳어진 것으로 보아 황연의 이야기는 평소에 그녀가 염려하던 부분을 찌른 듯 했다. 등곽이 팔짱을 낀 한백령에게 말했다.
“어르신의 이야기는 모두 옳다. 손을 쓸 수 있을때 써두지 않으면 결국 주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말은 잘 하는군. 네 녀석도 백성걱정보다는 유림세력이 정권을 잡는 문제에 더 집착하고 있었을텐데?”
한백령이 비아냥거렸지만 등곽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도리어 당당하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모두를 지킬 수 있으면 된 게 아닌가? 미래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힘을 쓰자는 게 뭐가 나쁘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 흐음…”
한백령은 깊은 탄식을 하며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런 한백령을 보면서 지금의 회담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서 검마에게 전음을 보냈다.
[ 이대로 괜찮을까요?] [ 물론일세. 문제없네. 나는 되려 어르신이 너무 잘해줘서 감사할 정도네.] [ 그렇습니까?] [ 당장이라도 파국으로 치달을 것 같던 회담분위기가 일신하고 한백령이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네. 이런 일은 황연 대장군 외에는 이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어. 한백령도 구국의 영웅이 진심으로 이야기하니까 듣는 것일세.]검마의 말대로였다. 잠시동안 생각을 거듭하던 한백령이 자신의 긴 담뱃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좋다. 화신류도 협력하겠다.”
“잘 생각했다.”
그리고 한백령은 나와 검마 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또한 너희는 황연 대장군을 여기까지 데려오게 된 경위를 말해줘야겠다.”
당연히 나올 질문이었으므로 검마가 나서서 차분하게 설명했다. 거기에는 황연 대장군을 대뢰옥에서 구출한 이야기, 대뢰옥에 있던 달의 짐승, 그리고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가 다 담겨 있었다. 검마의 말솜씨는 논리정연했으므로 등곽이나 한백령은 별 불만 없이 이야기를 듣는 기색이었다.
한백령은 등곽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 뭐, 아무래도 좋다. 그래서 어떻게 궐기를 할 생각이지? 당장 군(軍)을 일으켜서 황궁에 쳐들어갈 생각인가? 아니면 고수들을 선발해서 황제부터 암살할 생각? 계획이 있으면 설명을 해 봐라. 이제 같은 배를 탔으니 설명할 수 있겠지.”
한백령이 질문하자 등곽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동창과 금의위부터 해치운 후 새 황제를 추대할 생각이다. 황궁진입은 너희 화신류가 도와줘야겠지.”
“적의 전력(戰力)도 모른 채 맨땅에 머리를 박기는 싫다. 그놈들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대로 말해라.”
“그러지.”
한참동안 논의가 이어진 후, 한백령은 그제서야 화신류가 전면에서 싸우는 일에 동의한 기색이었다. 등곽은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거사는 바로 내일 시행하는 걸로 하지.”
“번갯불에 콩 볶아먹는군.”
“이런 중대사를 오래 고민해봤자 기밀이 누설될 가능성이 더 커질 뿐이다. 너희 화신류의 힘이 충분하니 한시라도 빨리 쳐버리는게 낫지 않은가?”
“알았다.”
회담은 오래지 않아 끝났다. 황연 대장군은 등곽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서 그를 따라갔는데, 아무래도 등곽과 더불어 사후처리를 이야기할 생각인 듯 했다. 황연이 배신할 사람도 아닐뿐더러 등곽이 그에게 섣부른 짓을 할 리가 없었기에 우선은 보내 주었다.
우리는 한백령과 함께 나왔고, 한백령은 이윽고 우리를 이끌고 한씨세가로 향했다. 한씨세가의 가주실로 향한 한백령이 말했다.
“무영련주 검마. 너는 네 부하와 함께 내일의 싸움에 선봉에 서라.”
검마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종주(宗主), 궁금한게 있소.”
“무엇이냐?”
“이번 일에 백련교의 다른 무류나 본단은 끌어들이지 않을 생각이오?”
한백령이 훗하고 웃으며 담뱃대를 늘어뜨렸다.
“그런 건 네가 알 바 아니다.”
“중요하오. 사정도 모른 채 개죽음당할 순 없소.”
“흥… 건방진 놈.”
그녀는 내뱉듯이 말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미 교주께 상신했다. 그래서 내일의 싸움에는 조력자가 딱 한 명 도착할 예정이니 걱정 말아라.”
“그 자는 얼마나 강하오?”
“내가 걱정말라 했을 텐데?”
한백령이 진심으로 신경질적으로 내뱉자 검마라 해도 더 캐물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채찍과 당근을 쓰듯 느긋하게 검마에게 말했다.
“무영련주. 네가 자신의 야망을 위해 우리 화신류에 복속하고 문하제자로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으나 나는 네 능력과 재능을 높이 평가한다. 이번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성실히 노력한다면 1년 내에 당주(當主)급으로 올려주마.”
당주라 함은 화신류의 장로 바로 아래에 위치한 것으로 화신류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이는 행동대장 역할이었다. 한백령의 제안은 내가 알기로 화신류 내에서 파격적인 신분상승이나 다름없었다. 화신류에서 나고 자라서 수십년간 무예를 갈고닦은 달인이라 해도 당주가 되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한백령에게 물었다.
“등곽을 믿으십니까?”
“후후! 어설픈 질문이군. 이런 관계에서 신뢰라는 걸 논하다니.”
한백령은 고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더 할 이야기는 없다. 너희는 내일 묘시(卯時)까지 나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황연 대장군처럼, 준비할 게 있으면 더 준비해와도 좋다.”
그녀는 은근히 오늘 황연 대장군을 데려온 선택을 높게 평가하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돌렸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거사에 참여할 확신을 주었기 때문인 듯 했다. 우리는 한씨세가에서 나와서 근처의 객잔에 대기하고 있던 망량과 만났다.
망량은 차를 후룩 마시며 말했다.
“무영검제도 불러올 필요 없소. 그냥 우리 셋이서 참전합시다.”
“역시 그게 낫겠지?”
“전력을 최대한 숨겨야 하니까 말이오. 게다가 한백령이 교주에게 보고해서 새로운 조력자를 데려온다면 10할의 승산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니, 그 자는 틀림없이 호법사자급일 것이오.”
“그렇겠지.”
검마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중요한건 황궁을 부수는 게 아니오. 내일의 목표는 다른 거요.”
“어떤?”
“반드시 연금술사를 포획하시오!”
망량은 강한 의지가 담긴 눈빛이었다.
“지금껏 그 어떤 전생에서도 그 자를 붙잡아서 상세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소. 황궁의 위력이 강해서 어떻게든 격멸하는데 급급했지. 하지만 지금은 제갈유룡과 제갈부, 실질적으로 황궁을 이끄던 쌍두마차가 실종된 상태이니 그 자를 붙잡는게 보다 용이할 것이오.”
“그 자는 듣기로 대마도사인 것 같던데 마법을 써서 도주하려 하면…”
“그건 내가 막겠소.”
망량은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며 말했다.
“지금까지의 사건에 비하면 이정도는 일도 아니오. 연금술사를 붙잡으면 그 자가 황궁에 어떤 흉계를 품었는지, 어떤 연유로 초상기인을 제작하게 되었는지 등을 모두 알 수 있소. 이걸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한백령이나 등곽이 끼어들기 전에 그 자를 확보합시다.”
“알았소.”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묘시가 되어 우리는 한백령이 이끄는 화신류의 고수들과 합류했다. 화신류 고수들은 염령을 통해서 본단에서 알짜배기만 골라왔는데 하나같이 상당한 고수들이며 장로급이었다. 총 서른 명으로 이루어진 화신류 정예들의 힘은 익히 알 수 있었다.
한백령은 무리를 이끌고 등곽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그 곳에는 등곽이 복면을 쓴 백여 명의 인물들을 데리고 와 있었는데, 역시 화신류 정예보다는 훨씬 무공이 처지는 듯 했다. 그래서인지 한백령이 등곽에게 핀잔을 줬다.
“흥. 지금까지 황궁에 쪼그라들어 있었던 이유를 알 만도 하군.”
“마음대로 말해라. 우리는 본디 유생, 싸우는 일에는 맞지 않으니.”
“그런 내공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슨 헛소리냐?”
“나머지 사후처리 준비는 다 되어 있으니 너희만 믿겠다.”
파바밧
이윽고 백수십명의 인원은 일시에 황궁의 내성으로 들어갔고, 경비병들을 미리 구워삶았는지 그들은 일체의 제지를 하지 않았고 못본 척 했다. 내성에 도착하자 등곽이 말했다.
“그럼 우리는 계획한 대로 동창을 치겠다.”
“알았다.”
“제압이 완료되는대로 합류하겠다.”
등곽을 포함한 유림 인물들은 미리 파악해 둔 동창의 은신처로 향하는 듯 했다. 화신류가 해야할 일은 금의위를 제압함과 동시에 황궁까지 쳐서 황제를 잡는 것이었다. 한백령은 힐끔 전력을 겨눠보더니 말했다.
“금의위는 내당과 장로들이 쳐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존명.”
“너희 둘은 나를 따라와라. 황궁을 친다.”
파앗
화신류의 전력 대부분이 한꺼번에 금의위의 비밀기지를 치러 투입되고 한백령은 고작 우리 둘을 데리고 황궁으로 돌격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이없는 지휘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나는 한백령이 우리 둘의 힘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확실히 호법사자가 있으면 지금의 황궁제압 정도는 식은죽먹기…’
그나마 우리 둘을 데려가는 건 확실하게 때려부수기 위해서이리라. 황궁에 도착하자 한백령은 복잡한 계책이나 잠입을 생각지 않고 곧장 자신의 쌍검을 들어서 황궁의 정문을 향해 겨누었다.
“하앗!”
무극용왕검(無極龍王劍)!
화신류의 비전이자 대표무공이 한백령의 절대적인 내공과 함께 뻗어나왔다. 의념을 싣고 용의 머리형태가 되어 치솟은 검강은 이윽고 찬연한 빛을 토해내며 높이가 삼 장은 되는 거대한 문짝에 틀어박혔다.
꽈과광!
마치 대포를 맞은 듯 황궁의 정문이 산산이 터져나갔다. 근처에 있던 경비병들은 혼비백산하여 아수라장이 되었으나, 나는 저것도 한백령이 진짜 힘을 쓴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의 파괴력보다 열 배 이상을 낼 수 있으리라.
철컹 철컹
황궁 내부에 진입하자 곧이어 여기저기에서 황궁을 수호하는 병사들이 몰려드는 기색이 느껴졌으며, 그녀는 말없이 쌍검을 거머쥐었다. 그녀는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날파리같은 것들.”
그러자 옆에 있던 검마가 급히 한백령에게 말했다.
“다 죽일 셈이오? 제발 손속에 자제를…”
“어차피 대역죄를 범한 건 마찬가지인데 무슨 자제를 말하느냐? 저 놈들을 해치우는데는 일 다경도 걸리지 않는다.”
한백령의 말은 허세나 장난이 아니었다. 그녀가 천령단을 이용해서 십이무극용왕참을 흩뿌리면 순식간에 황궁부지의 절반이 반파되고 인간들이 강기에 휩쓸려서 육편이 되고 말 것이다. 수만의 병사가 있다 한들 수십 수백장 크기의 강기를 무한으로 퍼부을 수 있는 한백령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저 병사들은 아무 죄도 없소! 그저 명령받은대로 할 뿐이오.”
“흥.”
한백령은 재미있다는 듯 웃더니 말했다.
“그리 생각한다면 어디 너 혼자 감당해 봐라! 그러면 네 신념을 인정해 주마.”
“알았소.”
파밧
한백령은 화영미리보를 써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황궁 내전까지 날아가 버렸다. 아무래도 그녀는 황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죽여버릴 생각이었겠지만 검마에게 그 역할을 넘긴 듯 했다.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검마에게 말했다.
“저런 미친 소리에 따를 필요 없습니다. 같이 황궁으로 가시죠.”
“자네 혼자 가 보게.”
“무슨 소립니까? 황궁에 주둔하는 병사는 수만 명이나 됩니다. 천령단이 아닌 이상 그들 모두를 없애는 건 혼자서는 무립니다.”
검마의 무예경지가 고절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내공이 유한한 이상, 사용할 수 있는 체력과 무공은 한정되어 있었다. 지금의 검마라면 무장한 정예병 천 명이나 이천 명 정도는 상대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이 되면 무공의 싸움이 아니라 내공과 체력의 소모전이었다. 나는 그런 상황을 숱하게 겪었으므로 알 수 있었다.
비록 검마에게 내가 가진 흑백련과 성련을 먹여서 내공을 강화시켰다지만 마찬가지다. 수만 명과 단신으로 싸운다는 건 호법사자가 아닌 이상 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러자 검마가 말했다.
“내가 그녀의 억지를 무시한다면 그녀 또한 앞으로 나를 무시할 걸세. 그녀는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하는 부류를 가장 혐오하는 인종이야. 그러니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도록 하겠네.”
“하지만 그건…”
“염려 말게. 수만 명을 이길 수 있을거라고는 나도 생각지 않아. 자네와 한백령이 황제를 없애고 연금술사를 붙잡을 때까지만 버티도록 하겠네. 그리고 망량도 있지 않은가?”
“……”
“황궁병사 수만 명이 학살당하는 미친 살겁을 막는 댓가라 생각하겠네.”
“… 알겠습니다.”
쐐쇄쇄쇄
사방에서 궁사들이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동시에 검마의 검은 유려하게 원(圓)을 그렸는데, 실제로는 무시무시한 쾌검 속에서 원의 흐름을 취하는 과정이었다. 원은 검마의 의념을 실은 채 태극(太極)의 형상이 되었고 무려 십여 장 범위에 검막을 만들어 내었다. 검막은 수천 개의 화살을 무효화시키며 궁사들의 경악성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쿠구구구
여기저기에서 철갑을 입은 병사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내공을 실어서 한방 먹이려 하자 검마가 외쳤다.
“이런 데 기력을 쓸 필요 없어! 나 혼자 할테니 어서 가게.”
나는 검마가 걱정스러웠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신형을 옮겨서 자리를 물러났는데, 내 앞을 가로막는 놈들에게 칠성폭뢰지를 시전했다.
“비켜!”
퍼버벙
“크아아악.”
칠성폭뢰지의 위력은 단순하지만 강렬했다. 삽시간에 병사들로 우글대던 일면이 뚫리고 수백 명의 병사들이 기절하거나 날아간 것이다. 그나마 위력을 자제해서 망정이지 제대로 했다면 최소한 백 명은 죽였을 것이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리 검마의 무공이 높아졌다지만 저 인원을 상대로는 장담할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황궁을 제압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황궁의 내전에 도착하자 이미 피박살이 난 시체더미가 여기저기에 있었다. 한백령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조금도 용서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입구쪽에서는 인간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약 백여 장을 진입하자 묘하게도 이족 괴물들의 시체가 굉장히 많아졌다.
‘ 뭐야? 이족이 이렇게…’
내가 좀 더 앞으로 가자, 그 곳에는 한백령이 또 하나의 시체더미를 만들고는 화염의 기운을 솟구쳐서 불태워버리고 있었다. 그 순식간에 또 엄청난 숫자를 죽인 모양이었다. 한백령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이 곳은 등곽의 말마따나 악의 소굴이구나. 이제는 인간을 볼 수 없다.”
“그렇군요.”
한백령의 말대로였다. 한백령이 토벌한 적들은 모조리 기괴한 생김새를 지닌 이족이었고 악마같은 놈들이었다.
‘ 연금술사가 황궁의 인간들을 다 이족화시킨 건가…’
나는 내심 씁쓸했으나 그 놈에게 시간을 준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금술사가 금의위 수장인 백호에게 이족의 씨앗을 심어서 이식수술까지 할 정도로 거침없는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제갈유룡과 제갈부가 실종된 상태에서 자신의 안위를 추구하기 위해 인간에게 몹쓸짓을 할거라는 사실은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백령에게 말했다.
“옥좌의 방으로 가시지요. 그 곳에 황제나 연금술사가 있을 겁니다.”
나 혼자 갈 수도 있지만 혹시나 적의 전력이 강할지도 모른다. 한백령을 같이 데려가는 편이 안전했다.
“잘 알고 있군.”
“미리 조사했으니까요.”
“안내해라.”
“네.”
나는 한백령을 데리고 과거 몇 번이나 들렀던 옥좌의 방으로 왔다. 그 곳에는 연금술사와 황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백령을 쳐다보았다.
“한씨세가의 가주…? 네가 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냐?”
“꼭두각시에게는 흥미없다.”
한백령이 단호하게 말하자 황제가 당황했다.
“뭐, 뭣이!”
한백령의 시선은 연금술사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녀는 그를 조용히 노려보며 말했다.
“쓰레기같은 놈들! 여기서 모조리 없애주마.”
그러자 연금술사가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우둔하고 눈먼 ‘아버지’의 옥좌에서 힘을 빌려온 자여… 그 댓가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힘을 휘둘러대는구나. 네 선택은 극히 어리석은 것이니 앞으로 영겁토록 후회하게 될 것이다.”
콰과광
이야기하는 도중에 나와 한백령은 기다려줄 이유가 없었기에 계속 공격을 했다. 그러나 놈은 뭔가 술수로 대비를 했는지 엄청나게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었고, 금이 가긴 해도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연속공격에 놈이 쳐둔 보호결계가 깨지려는 순간이었다.
우드득!
“크악.”
갑자기 연금술사가 옆에 서 있던 황제 후총의 목을 잡아서 꺾어버렸다. 황제가 맥없이 즉사하자 연금술사는 광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절대 죽지 않는 자… 모든 진실을 알게 될 자… 궁극의 현자가 될 지고의 존재, 생 제르맹이다!! 제물을 암천향에 바치노니…”
푸콰콱
“그 혼은 어둠을 부르리라!!”
자칭 생 제르맹이라 한 연금술사의 몸뚱이가 피덩어리가 되어 터져나가며 그 안에서 검붉은 촉수가 뻗어나와 마치 나무처럼 땅에 뿌리박혔다. 그리고 옆에 있던 후총의 몸에서도 마찬가지로 촉수가 미친듯이 뻗어나와서 얽히기 시작했다. 그 광기어린 장면을 본 한백령은 어이가 없는 기색이라서 공격을 하기 주저하는 듯 했다.
그럴만도 하다. 아무리 백전노장인 한백령이라 해도 이런 미친 광경을 상상이나 했을까? 이윽고 촉수는 계속 뻗어나오더니 천정을 뚫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하는 촉수를 향해 한백령이 천령단의 힘을 모아서 공격했다.
콰과광!!
“뭐야?!”
한백령이 깜짝 놀랐다. 분명히 그녀가 힘을 다해서 무극용왕참을 썼는데 촉수덩어리는 조금 불탔을 뿐 금새 재생되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위험했기에 나는 한백령에게 말했다.
“피합시다!”
나는 재빨리 한백령과 그 자리를 피했다. 촉수는 기하급수적으로 팽창을 시작하더니 황궁의 내전을 삼켜버리기 시작했고, 촉수로 이루어진 거대한 줄기가 땅에 뿌리를 박기 시작했다. 나는 저것과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기에 침음성을 흘렸다.
“수호자…”
월요의 수호자, 이자나기노미코토의 화신!
저 모습은 그것과 흡사해 보였다. 어떤 사법(邪法)을 썼는지는 몰라도 저 연금술사 놈은 강력한 이족의 힘을 소환한 듯 하다. 한백령은 계속해서 구름을 향해 기세좋게 촉수를 뻗는 그 괴이한 걸 지켜보더니 말했다.
“저건 대체 뭐지?”
“검마를 데려오겠습니다.”
나는 검마가 있던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검마가 수만 명의 대군을 상대로 다소 여유롭게 버티는 걸 확인했다. 나는 검마를 도와서 주변 병사들을 크게 진각으로 물리치고는 외쳤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런 것 같군. 가 보세.”
나는 검마와 함께 몸을 옮겨서 수만 대군의 포위를 다시 한 번 뚫었다. 그리고 한적한 곳으로 왔는데 으슥한 건물 뒤편에서 망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지금까지 숨어서 술법으로 검마를 돕고 있었다.
“실패했구려.”
나는 면목이 없어서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하오. 놈이 마지막 발악으로 자신과 후총을 죽이고 저런걸 소환했소.”
“……”
망량은 하늘에 수백 장의 줄기와 가지를 뻗치고 있던 ‘나무’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우선 등곽부터 데려와 주시오.”
“저 놈을 해치울 수 있을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만…”
망량이 한숨을 쉬었다.
“백련교에서 온 조력자가 얼마나 강한지에 달려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