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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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설삼(千年雪蔘)
다음 날 나는 촌장에게서 노잣돈 스무 냥을 받고 관중 청룡무관으로 떠나게 되었다. 금만재는 네깟놈이? 하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촌장의 아내, 첩, 첩의 자식도 비웃는 시선이었다. 나는 실룩이는 표정을 애써 관리하면서 길을 떠났다.
‘ 흥. 예전보다는 낫군. 그때는 땡전 한푼 없이 표국으로 갔었는데.’
촌장은 따로 묻지도 않았으나 나는 표국의 표사로 살아왔던 경험 덕에, 어떻게 하면 관중으로 빠르게 갈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걸어서 보름은 걸어야 하고 도중에 산적을 만날 위험도 있지만, 표국운행에 잘 끼여가면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근처에서 가장 그럴듯한 표국은 삼송표국(三松?局)이었다.
내가 오십여년간 일하던 표국은 삼송표국과 비슷한 규모인 매화표국(梅花?局)이었다.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긴 했으나 표국끼리 아웅다웅해서 별로 좋을 일도 없었으므로 소 닭보는듯한 사이였던 걸로 기억했다. 삼송표국에는 제법 뛰어난 실력의 표사들이 많다고 들어쓰므로 삼송표국의 표행에 섞여가면 비교적 편하게 갈 수 있을 것이다.
하루나절을 걸어서 시내에 도착하자 날이 지고 밤이 되어 있었다. 도시의 밤은 불량배가 출몰하고 야적(夜敵)들이 횡행하는 곳이었으므로, 나는 재빨리 여립소(旅立所)로 향했다. 여립소는 여행객을 위해서 임시로 마련해둔 곳으로 위병이 경비하고 있는 장소였다. 여행객은 여기서 딱 하룻밤을 머물수 있지만 도적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여립소에는 두세 명의 여행객들이 둘러앉아서 말 한마디 없이 웅크려서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쿰쿰한 썩은내가 침상에서 났다. 나 또한 물끄러미 달을 한 차례 바라본 후 물건을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삼송표국으로 갔다. 삼송표국의 현판이 걸려있는 대문에는 대낮부터 표행을 준비하는 표사들과 동행하는 일꾼들로 부산했다. 나는 삼송표국의 중년표사 한 명에게 말을 걸었다.
“표행에 따라가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어? 너는 누구냐?”
“건넛마을에 사는 백웅이라고 합니다. 촌장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표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허… 어디까지 가는데?”
“관중까지 갑니다.”
“너같은 어린애가 관중까지… 돈은 있느냐?”
“아뇨. 잡심부름이나 밥짓기와 짐나르기를 잘 할 수 있습니다. 꼭 따라가게 해주십쇼.”
표사는 자기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잠깐 날 따라와 봐라.”
그는 나를 데리고 표위(?衛)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표위란 10여명의 표사를 통솔하는 대장같은 위치로, 보통은 경력있는 표사가 중간관리자 역할로 근무했다. 그런만큼 보통 표사보다는 훨씬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삼송표국의 표위는 마치 말같은 관상을 지닌, 하관이 길쭉한 사내였다. 그는 앉아서 문서를 읽고 있다가 힐끔 나를 바라보았다.
“어이, 그 어린애는 뭔가?”
“표위님. 이 꼬맹이가 잡일을 하면서 표행에 따라가고 싶다 합니다. 건넛마을에 사는 백웅이라는데.”
“흠…?”
표위는 나를 요리조리 훑어보다가 말했다.
“뭐 기골도 있어보이고 야무져 보이는군. 안될 건 없으니 자네가 알아서 관리하게.”
“넵.”
표위는 굳이 내 정체나 가는 곳 따위를 일일이 묻지 않았다. 그런 건 중년표사의 담당이 된 것이다. 그런만큼 나는 표위의 허락 그자체보다는 중년 표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굳이 귀찮은 일을 떠맡아준 셈이기 때문이다.
나는 표사를 따라서 밖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딱 너만한 아들이 있거든.”
표사는 씨익 웃더니 말했다.
“근데 우리는 관중까지 가지는 않고 도중에 꺾어서 양온(梁蘊) 지방으로 간다. 너는 유월곡(柳月谷)에서 알아서 길을 찾아가야할텐데 할 수 있겠느냐?”
“네 괜찮습니다. 거기까지 같이 가주시는것만 해도 감사하죠.”
“그래. 니가 할 일은 식사준비, 설겆이, 등짐지기다. 좀 있다 알려주겠다.”
“네.”
곧 표행이 출발했다. 나는 별다른 탈 없이 표행에 섞여가게 되자 순조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은 대략 여섯 시진 동안 걸었다 쉬었다를 반복하며 산을 넘었고, 점심과 저녁식사 때가 되어서 온갖 잡일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몇 년이고 해본 적이 있었으므로 표사가 딱히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잘 했다.
그러자 표사가 놀랐다.
“일 잘하는 놈이구나! 너 이번 표행 끝나고 표국에서 잡일이나 해보지 않겠느냐?”
언뜻 무례한 질문으로 보였으나 좋은 제안이었다. 보통의 농촌마을에서 사는 아이들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며칠씩 굶기 일쑤였다. 표국에서 잡일하면서 제때 먹을것을 얻어먹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삶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나는 일단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 볼일이 끝나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그래.”
우선은 관중의 청룡무관에 가서 현재의 내 능력을 시험해봐야 했다.
과연 전생에 40년간 갈고닦았던 육합검법과 삼재심법으로 청룡무관의 문하생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당연히 된다고 생각했기에 억지로 마을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수련한 시간과 짬밥이 있는데 같은 10대 또래 소년들보다는 훨씬 나을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청룡무관에서 곧 일류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기대때문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렇게 표행을 따라다니기를 약 십 주야였다. 별다른 산적도 나타나지 않았고 사고도 없이 무탈했다. 삼송표국의 표행은 이제 유월곡에서 양온 지방으로 향하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도중에 나와야 했다. 관중으로 따로 가야 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잠깐 이리 와 봐라.”
중년표사는 내게 몰래 은자 두 냥을 주었다. 생각외로 큰 돈이라서 내가 놀라고 있자, 그는 기름진 내 머리카락을 벅벅 긁으며 웃었다.
“하하하하. 어린애가 혼자서 관중까지 가는게 얼마나 힘들겠냐. 만일 산적이나 비적을 만나면 그 돈을 바쳐라. 그럼 왠만하면 살 수 있을 거다.”
“…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약간 코끝이 찡했다. 나도 표사일을 수십년 해봤기에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이 돈을 줬는지를 알고 있었다. 은자 두 냥은 일개 표사에게는 꽤 큰 돈이었다. 아마 아들같은 느낌이 들어서 일부러 자기 돈을 털어서 준 것이리라.
게다가 산적이나 비적들은 어린아이를 만났을 경우 귀찮아서 죽여버리기 일쑤였다. 혹은 노예로 잡아서 팔기도 했지만 그건 되려 운이 좋은 경우였다. 적어도 은자를 도적들에게 헌상한다면 노예로 팔릴지언정 다짜고짜 죽음을 당할 일은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도적들이라고 해도 대개는 화적민이나 도망노비였으므로 최소한의 인정은 있었다.
즉 이 은자 두 냥은 내 노잣돈이 아니라 생명줄같은 것이다.
나는 코를 약간 훔치고는 말했다.
“저기 여태껏 성함도 여쭤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삼송표국의 장철(長鐵)이다. 나중에 찾아오너라.”
“네. 꼭 그렇게 하죠.”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중에 힘을 얻어서 부와 명예를 손에 쥔다면, 장철에게 오늘 받은 은혜를 열 배로 갚아줄 것이다.
유월곡은 완만한 계곡 곳곳에 조그마한 마을이 세워져있는 곳이었다. 깡촌마을이 여러개 흩어져 있었는데, 여기 농민들이 자경대라도 만들고 있는 건지 산적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유월곡 근처에서 하루 야숙을 한 다음 꾸준히 관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산적이 안 나오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관중까지 하루 거리를 남겼을 때 갑작스럽게 일이 터졌다.
쏴아악
산길을 걷던 내 앞에 풀숲을 헤치고 산적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환도(環刀)를 들고있는데다 허리춤에 동물뼈로 만든 장식을 달고있는 걸 보면 녹림(綠林)의 산적들이었다. 나는 아차싶어서 뒷걸음질을 쳤는데, 깡마른 인상의 산적이 히쭉 웃으며 말했다.
“애새끼가 걸렸군. 이걸 어쩔까?”
옆에 서 있던 애꾸눈 산적이 가슴털을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가진거 다 뺏고 놔주자. 요즘 소채주(小寨主)가 피 보기를 싫어하신다.”
“뭐… 애새끼 죽여봐야 꿈자리가 뒤숭숭하지.”
깡마른 산적은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등짐 다 놓고 상의 벗어라! 얌전히 있으면 살려 준다.”
“넵…”
별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얼마 되지도 않는 재산을 지키려고 정식 녹림채의 산적 2명과 싸우는 건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 내 무공으로 감당이 안되는 건 아니지만 별로 승산이 높지 않다. 정식 녹림채의 산적들은 표사들처럼 체계적으로 무공을 전수받기 때문에 어쩌면 전생의 나보다 더 강할수도 있는 것이다.
목숨걸고 싸우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느니 순순히 말에 따르는 게 나았다. 게다가 지금 나는 무기도 없어서 너무 불리했다. 하다못해 칼 한자루만 있었어도 이렇게 굴욕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산적들은 내 봇짐에 있던 은자 두 냥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야, 이거 돈이 꽤 많은 놈이었네!”
“걍 보내 줘. 수지맞았네 이거.”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크크… 옷 입고 가라.”
깡마른 산적이 내 뒤통수를 장난스럽게 한 대 때리고는 상의를 건네줬다. 나는 꾀죄죄한 옷을 급히 추스리고는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 제길… 분하다.’
만일 10대 아이의 몸이 아니라 하다못해 10대 후반의 몸이었어도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공이 몸에 들어있는 것과는 별개로 근골이 아직 덜 자라서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힘이 가지고 싶다.
천하를 오시할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좋다.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힘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
짐과 돈을 모조리 빼앗겼으므로 나는 이제부터 쫄쫄 굶으면서 야숙을 하면서 관중까지 가야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하루거리였으므로 열심히 걷기만 하면 됐다. 관중의 성문을 통과해서 시내가도로 들어오자 겨우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 야숙을 했다.
야숙은 지금까지도 해 왔지만 굶어서 그런지 새벽의 찬바람이 유난히 춥게 느껴졌다. 나는 바위 밑으로 들어가서 땅을 파고 억지로 누웠다. 땅 밑은 온도가 약간 따뜻했기에 밤을 나기가 좋았다.
‘ 이제 관중 청룡무관에 가서 일류무공을 배우고, 수련하고, 힘을 가져서 황산에서 천년설삼을 먹으면 돼. 지금 이 고생은 아무것도 아냐.’
미래의 계획이 현재의 추위를 달래 주었다.
다음 날 나는 물어물어서 관중 청룡무관으로 찾아갔다. 관중에서도 손꼽히는 이름높은 무관답게 벽이 일 장이나 되었고 현판도 고명한 붓글씨로 크게 쓰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개무관인 주제에 문 앞에 문지기가 서 있었다.
문지기라기보다는 아마 하급 문하생일 것이다. 그들은 청룡무관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자 말했다.
“얘야, 아침부터 여기서 뭐 하냐? 동냥이나 구걸은 안 되니까 썩 물러가라.”
“……”
나는 내 꼬라지를 보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거지소년으로 착각하는 게 무리가 아닐 정도로 꾀죄죄하고 때에 절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억지로 용기를 내며 말했다.
“청룡무관에 입관시험을 치러 왔습니다.”
“입관시험? 크하하하, 웃기는 놈일세.”
문지기들은 껄껄대며 나를 비웃었다. 하지만 내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애매모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개 중 한 명이 말했다.
“꼬마야. 너는 혹시 관중의 육대가(六大家) 출신이냐?”
“아니오.”
“그러면 어렸을 때부터 내공의 기초를 다졌느냐?”
“네.”
“허어…”
살이 찐 문지기가 잔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거, 후배가 되실 꼬맹이의 내공이나 시험해 볼까?”
“살살 해라.”
쿠웅
살찐 문지기가 과시하듯 땅바닥에 강한 진각(震脚)을 내질렀다. 그리고는 자신의 솥뚜껑같은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꼬맹아. 내 손을 잡아 봐라.”
손을 마주잡자, 살찐 문지기는 진득하게 웃으며 자신의 발과 내 발을 옆으로 맞대었다. 그러자 한쪽이 옆으로 넘어가게 되는 팔씨름같은 형상이 연출되었다.
“니가 나를 상대로 반 각이라도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다면 바로 관주님께 가서 말씀드리마.”
“이기면 어떻게 됩니까?”
“크하하하! 이긴다고? 그러면 내가 엎드려서 절이라도 해 주마.”
“네.”
쿠우우우
“……!!”
팔씨름이 시작되자 살찐 문지기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삼재심법의 내공이 모이면서 그의 완력을 압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마에 혈관이 맺힐 정도로 집중하다가 한번에 그를 옆으로 밀어내 버렸다.
꾸웅!
“어… 어어…”
살찐 문지기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한번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옆으로 쓰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나도 쉽게 이긴 건 아니라서 전신에서 땀이 나고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절은 됐고 관주님께 말이나 잘 해주십쇼.”
아무리 내가 익힌 게 삼재심법이라고 해도 수십 년을 익혔다. 청룡무관의 일개 문하생에게 내공으로 딸릴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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