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545)
00545 암천향(暗天鄕)
연정홍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서 봉황조각을 만지작거렸다. 한참이나 살펴보던 연정홍이 말했다.
“있는 것 같네.”
그 순간, 나는 내심 기뻐서 뛸 정도가 되었다.
중원 전체를 다 뒤져야 할 줄 알았는데 벌써 단서가 나타나다니!
연정홍은 차를 한 모금 음미한 후 말을 이었다.
“어렸을 적 가문의 서책에서 본 것 같은데… 그래, 내 기억으로는 단혈산(丹穴山)의 봉황을 묘사한 조각이라 했네. 그리고 한 조각이 아니라 두 개의 조각이었지.”
조각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러자 연종휘가 놀라워했다.
“이상하군요. 저 또한 그런 책을 본 것 같습니다. 설마 대대로 전승되어오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음… 내가 소싯적에 그 책을 유심히 봤지. 그리고 그 책을 우리 둘 모두가 본 이유는, 아마 연씨 왕가가 한때 소유했던 보물이기 때문일 걸세. 왜냐하면 그 책 자체가 역대 왕가가 소유했던 보물에 대해 기록한 책이었거든.”
“아아…”
“혈족은 흩어졌지만 중요한 정보를 담은 서책은 각 가문에 전승된 걸세.”
“그 책은 혹시 갖고 있으십니까?”
“갖고 있네. 원한다면 주지.”
뭔가 이야기의 실마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연정홍은 다시금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그 봉황조각을 어디서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한때 국보로까지 취급되었던 물건이라 생각하네. 그렇다면 기록이 없을 리 없고, 소유한 자도 분명히 봉황조각의 가치를 알고 있겠지.”
“그 말씀은.”
“아마 열심히 찾다보면 나오겠지만, 소유자가 순순히 내놓을 리는 없단 말이지. 그 사실을 유념하고 찾아보게나.”
나는 봉황조각에 대한 정보를 얼추 얻은 걸 느끼고는 연정홍에게 말했다.
“궁금한 게 있소만, 당신의 검술은 구파 장문인 중에서도 특히 고명하다고 알고 있소. 그것은 종남파의 검술을 극성으로 순수하게 익혔기 때문인 것이오?”
움찔
연정홍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다소 사나운 말투로 내 말에 대꾸했다.
“내게 듣고싶은 대답이 있나보군. 연씨 왕가의 검술을 섞었다는 말이 듣고 싶은가?”
나는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소.”
“반로환동의 고수인 듯 하여 내심 존경했건만 물어보는 수단이 치졸하군.”
연정홍은 다소 화가 난 듯 했다. 표정에는 경멸마저 섞여 있었다.
나는 상황이 안 좋자 급히 고개를 숙이며 둘러대었다.
“미안하오. 나는 근자에 검술을 참오하며 모든 신경을 쏟고 있기에 타 유파의 것이라 할지라도 크게 관심을 갖게 되었소. 실례가 되었다면 사과하겠소.”
“좋소, 사과를 받아들이겠소.”
연정홍은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 연씨 왕가의 검술은 소싯적에 모두 터득했소. 그 후 십이 세에 종남파에 입문했는데, 내가 원래 익혔던 무공이 경지상승에 도움이 된 건 사실이오.”
“역시 검술을 융합했다는 말이오?”
“그렇지 않소. 종남파의 검초와 오의는 온전히 본질적인 것… 내가 타 유파의 무공을 섞었다면 장로들이 옛날옛적에 알아봤을 거고 나를 결코 장문인으로 추대하지 않았겠지.”
그는 손깍지를 꼈다.
“나는 원래 왕가의 무공보다 우리 종남파의 무공이 더욱 정심하고 강력하다 생각하오. 혹자는 우리 문파가 화산파나 무당파같은 검문보다 떨어진다 하지만 나는 그리 생각지 않소. 다만 인재와 재질이 차이날 뿐, 우리는 언제든 천하제일의 검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생각하오.”
“……”
나는 연정홍의 자신감있는 대답을 들으며 그가 완전히 종남파 문인의 삶을 택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그는 죽을 때까지 종남파 장문인이구나.’
아마 그는 연종휘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자신이 연씨 왕가 출신이라는 걸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살았으리라.
나는 혹시하는 마음에 연정홍에게 말했다.
“우리가 봉황조각에 대해 질문한 건 함구해주시오. 부탁이오.”
“당연한 일…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면 여기서 떠나주시오.”
연정홍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오두막 한켠에 있던 조그마한 서책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아무래도 이게 은빛 봉황조각과 연씨 왕가가 소유했던 보물의 목록을 담은 비록(秘錄)인 듯 했다. 이런 걸 거침없이 주는 걸 보면 정말로 연정홍은 보물에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알았소.”
파앗
우리는 연종휘에게서 떠나서 장령곡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은빛 봉황조각에 대해 알게된 걸 제갈사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영 소득이 없는 건 아니군. 연씨 왕가는 고대의 왕조이고 발해는 후대의 왕국이지. 연씨 왕가가 봉황조각을 소유한 적이 있다는 말은, 적어도 은빛 봉황조각은 발해에서 제작한 게 아니라는 소리다.”
“고대의 유물이라는 소리인가?”
“발해도 팔백 년 전에 세워진 왕국이지만 아무래도 그 이상의 고대인 것 같군. 그리고 지난번에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또 하나 흥미로운 게 있다.”
“뭔데?”
“이 은빛 봉황조각… 언뜻 은으로 제작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전혀 다른 금속이야. 굉장히 충격에 강하고 유연하지. 고대의 야금술로 특수제작된 거라고 하기에는 너무 수준이 높아.”
제갈사는 내게서 연정홍의 책을 받아들고는 말했다.
“이 정도면 됐어. 〈보리〉와 이 책을 참고로 해서 나머지는 우리가 최대한 봉황조각을 찾아보지. 너는 이제 다시 수련을 하러 가.”
“알았어.”
나는 이청운에게로 갔다. 이청운은 연무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말했다.
“백웅. 아마도 다음 움직임은 봉황조각을 찾고 난 다음이 될 가능성이 높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네가 검뢰를 얻었다지만 아직까지 갈 길이 멀어.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대련을 좀 해 보지.”
까가강
까강
이청운과 다시 수준을 맞춘 대련을 대략 오백 초 정도 나눴다.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서라기엔 꽤 대련이 길어져서 의아해 하고 있을 때 이청운이 자신의 창을 거뒀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고 있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뾰족한 수가 없군… 자네가 검사(劍士)로서 한꺼풀 거듭난건 사실이지만 아직 그것만으로는 뇌신지혼의 요결을 전수할 수 없어.”
“전수할 수 없다고요?”
“자네에게 억하심정이 있어서가 아니네. 자네도 알다시피 고급심득 수십 개가 응축된 게 뇌신지혼이라서 괜히 자네를 심마(心魔)로 이끌 뿐.”
“음, 그렇군요.”
“앞으로도 쭈욱 돈오(頓悟)보다는 점수(漸修)가 될 것이라 생각하네. 자네에게 권이나 창, 잡기를 더 가르치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역시 아직은 시기상조군…”
“괜찮습니다.”
나는 자신있게 말했다.
“묘예의 역을 수련하다보면 뭐든 되겠지요.”
“좋네. 오늘부터 수련을 시작하지.”
나는 검뢰를 얻기 전부터 했던 것처럼 이청운에게서 뇌신류의 온갖 기술을 연계하고 응용하는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독고성에게 가기 전에는 마치 억지로 몸을 뒤틀듯이 배웠는데, 검뢰를 익히고 나자 초식의 이해도가 급상승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 성취가 나아지는 게 궁금해서 이청운에게 질문하자 그는 흔쾌히 말했다.
“당연하지. 검뢰를 성취했다는 건 단지 검에서 번개를 뿜어낸다는 말이 아닐세. 자네는 뇌신류 역사상 손꼽히는 검호가 된 것이니, 당연히 검의 깨달음이 높은 만큼 응용기나 연계기도 쉽게 이해되지 않겠나?”
“그렇군요!”
“흐름이 좋아. 이대로 자네가 다음 경지를 바라볼 때까지 역량을 키워 봅세.”
끼기긱
까강!
그렇게 대략 일 년을 수행했을까?
나는 뇌신류 무예에서 더욱 현묘한 경지로 가라앉는 걸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경지가 도야한다기 보다는 지금까지 배웠던 것들이 무게를 지니고 나를 자연스럽게 가라앉히는 느낌이었다. 자연스럽게 무공의 연계도 매끄러워지고 더욱 빠른 발동이 가능해졌다.
이따금씩 제갈사는 크게 고뇌하는 기색이었다. 그 고민의 기색을 알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가 말했다.
“네가 줬던 그 〈보리〉…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더군. 그래서 파고들지 말지 고민중이다.”
“망설이지 말고 해버려.”
“크크. 망량과 상의해 보마.”
제갈사는 그 날 이후 더 이상 〈보리〉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단지 망량과 의논해본 결과, 지금은 봉황조각에 더욱 집중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또 다시 석 달이 지났다.
그때쯤 망량에게서 소식이 들려왔다.
“백웅. 드디어 은빛 봉황조각의 남은 한 쪽을 찾았소!”
“정말이오!”
“강호에 펼쳐두었던 반천맹의 정보원 중 하나가 결국 소유주를 알아냈소. 연정홍에게서 받은 책 덕분에 위치를 추적할 수 있었소.”
나는 일이 무난하게 잘 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슴이 뛰는 걸 억제하지 못하고 말했다.
“그럼 이제 문을 열 수 있겠군.”
“음 그게…”
망량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 돈이 부족하오.”
“……?”
“그걸 가진 자가 좀 특별한 인물이라서… 돈이 많이 필요하오. 지금 제갈사 숙부와 함께 고심중이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돈이라면 해적들에게서 털어온 보물도 있을거고… 하여간 엄청 많지 않소?”
“그렇소. 백웅 당신이 그간 전생을 하면서 엄청난 재산을 벌었지. 지금까지 장령곡과 진랑곡을 운영하면서 강호의 정보단체를 이용하고 반천맹을 성장시키는데는 그 돈을 썼소. 하지만… 그 돈으로도 은빛 봉황조각을 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소.”
“대체 뭔 소리요?”
망량은 꺼지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마두(利瑪竇)의 상단(商團)에서 그걸 보유하고 있소. 그래서 문제요.”
“이마두?”
“이마두는 중원에서 그가 임의로 쓰는 이름이고, 그는 사실 서양 사람이오.”
“응? 서양 사람?”
내가 황당해서 대꾸하자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마테오 리치. 그가 광동성(廣東城)과 다두왕국(大?王國)에 자신의 세력을 뻗쳐서 거대 상단을 형성하고 있소. 또한 화란인(和蘭人)과 그 함대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유력자인지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소.”
“……!!”
나는 그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그 자는 예전에 우리가 황궁을 치러 갔을 때 나타났던…”
“그렇소. 신이 강림해서 백련교주를 죽였던 바로 그 전생에서, 당신과 이광 앞에 나타났던 서양인이지. 그 때 한 번 본 적이 있소.”
망량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마테오 리치에 대해서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대단한 자였소. 그는 서양의 종교를 광동성 근처에서 포교함과 동시에 상단을 꾸려서 광동성과 다두왕국의 상권을 모두 장악했소. 원한다면 그가 광동성주와 친왕을 부추겨서 대명제국에 반란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원동력이 있소.”
“다두왕국?”
“아, 백웅 당신은 잘 모르겠군. 상당한 벽지니까.”
그는 헛기침을 한 후 설명해 주었다.
“남해 인근, 광동에서 더욱 동쪽에 거대한 섬이 있소. 섬이라고는 하지만 웬만한 나라에 준할 정도로 커다란 땅이지. 그 섬에는 중원의 문명이 거의 발달하지 않아서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이 자립적으로 문명을 발달시키다가 근자에는 서양인들이 그 땅을 점거하고 있소. 그걸 다두왕국이라고 부르오.”
“처음 들었소.”
“명 제국에서 그들을 언급하길 꺼려하기 때문이오. 명목상 명에 복속되어 있긴 하지만 거의 성주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장소이기도 하오. 보통 사람은 잘 모르는 땅이지.”
나는 전후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을 하기 위해 팔짱을 꼈다.
“흐음. 서양의 종교인이지만 동시에 상인이란 건가?”
“현 황제와도 관계가 좋고 심지어 지원도 받고 있소. 황제는 마테오 리치를 통해 서양과 교류할 생각도 갖고 있는 듯 하니.”
망량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는 정보원에 따르면 그 자가 봉황조각의 가치를 알고 있는 것 같소. 그래서 자신들의 고향에 그걸 갖고가려 할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
“……”
봉황조각이 서양으로 가 버리면 문제가 심각하다. 또한 봉황조각의 가치를 알고 있다면 섣불리 그걸 팔거나 내어놓으려 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만한 대상인이 요구하는 돈은 어마어마할 게 분명했으니 망량이 곤란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의견을 내었다.
“그럼 마테오리치의 본진을 알아내서 몰래 훔쳐 옵시다.”
“당연히 그 방법도 생각했소. 하지만, 그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어디에 봉황조각이 있는지는 모르오.”
“그럼 마테오리치를 납치고문해서…”
“그건 완전히 살인강도의 발상이지 않소. 그가 뭔 죄를 지었다고.”
“……”
할 말이 없다. 납치해서 고문해본 적이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사고가 이런 쪽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망량은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당연히 제갈사 숙부가 먼저 그 제안을 했소.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그만한 거물을 건드리게 되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소. 억지로 그의 세력을 박살내거나 그를 고문 납치하면 봉황조각을 얻을 수 있기야 하겠지만, 틀림없이 세상은 급변하게 될거고 우리 세력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오. 그를 건드린다는 건 다두왕국과 서양열국을 건드린다는 것과 같은 뜻이오.”
“즉, 그냥 거래를 해서 사들이는 게 낫다는 말이오?”
“바로 그렇소. 그렇게 해야 후환도 적고, 당신이 수련할 시간을 벌어줄 수 있소.”
망량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돈이 필요하오. 적어도 황금 수십 관! 그러기 위해서는 백웅 당신이 움직여줘야 하오.”
“알겠소!”
나는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정도 쯤이야 금방 벌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