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627)
2년 하고도 반 –
여동빈은 정확히 일천 마리의 마(魔)를 쓰러뜨렸다.
쏴아아아
핏빛으로 물든 대지 위에서 여동빈은 검을 잡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한때 ‘인간’이라고 불렸던 것들이 불쾌한 형상으로 변해서 죽어 있었다. 아니, 죽어있기나 한 걸까? 저걸 ‘생명’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현재 여동빈은 극도로 지쳐 있었다. 그것은 단지 전투 직후의 피로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를 실감했기 때문에 찾아오는 피로였다.
이족(異族).
본디 실감하지 못했던 그 존재들 – 형언할 수 없는 사악한 존재들이 다른 세계에서 은밀히 쏟아져 들어오며, 요괴보다 더 극악하고 무시무시한 참극을 일으키고 있었다. 수백 명이 죽는 정도는 우스웠고 때로는 인간목장이나 생지옥도 펼쳐지고 있다.
정말로 두려운 점은 이족들은 요괴보다 더 교활하고 강력했기 때문에 퇴치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요괴를 퇴치해야 할 도인이나 도사들이 이족의 앞잡이가 되어있는 경우마저도 있었다.
본디 여동빈은 무림인이나 요괴와 싸울 때는 거의 지는 일이 없었지만, 모험이 궤도에 들어서며 고위이족이나 강력한 사역마와 싸우는 일이 많아지자 큰 부상을 입고 물러나는 일이 잦아졌다. 물론 그 부상은 화룡신검에 있는 화룡진인이 치유해줘서 회복되었으나 그 때마다 여동빈은 크나큰 무력감을 느꼈다.
보통 인간이라면 이족과 십여 회 싸웠을 때 모든 걸 포기하리라. 그 압도적인 외계(外界)의 사악한 절망 앞에서 미쳐버리는 게 정상이었고, 아무것도 못 본 걸로 하고 조용히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도저히 상식으로 용납할 수 없는 사악한 존재들이 활보하며 인간을 장난감 취급하고 있다는 현실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 여동빈은 어쨌든 버텼다.
그는 전례가 없는 독종이었기 때문이다.
이족에게 패배한 다음에는 뼈와 살이 분질러지는 고통을 겪는 한이 있어도 목숨걸고 싸워서 복수해서 이겼다. 이족을 물어뜯고 자폭하듯 몸을 던지는 한이 있어도 이겼다. 여동빈은 처절하기 그지없는 싸움을 수백 번이나 거듭했으며 그의 엄청난 투쟁본능이 일천 회에 이르는 퇴마행을 가능하게끔 한 것이다.
지금도 여동빈은 사천의 한 고을을 유린하고 있던 강력한 고위이족과 싸워서 그를 하루 내내 싸워서 간신히 쓰러뜨렸다. 그래서 마을을 참극에서 해방시켰지만, 이미 이족에게 잡아먹히거나 알을 낳는 부화장의 제물이 된 자는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크윽…”
여동빈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무릎을 꿇었다.
조그마한 풀잎장식.
자신이 며칠 전에 마을 앞에서 보았던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줬던 선물이었다.
[ 도사님! 우리 마을을 구해주러 오신 거예요?] [ 도사님! 이거 받아요. 행운을 줄 거예요.]그 아이가 줬던 풀잎장식이 행운을 줄 거라는 근거는 없다. 그 아이는 이미 고위이족의 한끼 식사가 되어서 잡아먹힌 지 오래였다. 식인요괴는 그다지 인간을 괴롭히지 않고 먹기위해서 먹지만 – 고위이족은 즐기기 위해서 사람을 먹는 사악한 족속이다.
그 아이는 지옥의 고통을 겪으며 죽었으리라.
여동빈은 생각했다.
도대체 아이가 처절하게 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극악무도한 죄인이 거열형을 받아서 사지가 찢긴다 해도 그 꼬마아이보다 무도하고 처참하게 죽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참혹하고 무참한 현실은 도대체 어째서 생기는 것인가!
주르륵
여동빈은 자신의 뺨에 흐르는 게 빗물인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으으으… 으아아아…”
그는 소리없이 오열하며 풀잎장식을 꾹 말아쥐었다. 여태껏 그저 이족에게 지기 싫다는 귀면상 특유의 투쟁본능으로 싸워왔으나 – 이제서야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행복한 삶.
부귀공명과 명예.
자신이 추구해왔던 그 속세의 삶은 – 자신이 고아로 태어나서 험하게 살아왔던 삶을 보상받으려는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미쳐버린 세상에서 그 삶은 공허하기 짝이 없을 뿐이며, 결국 자신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통받으며 투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 것이다.
바꾸고 말겠다.
이 미친 세상을 바꾸겠다!
그 이후 여동빈의 마음과 자세는 달라졌다. 목숨걸고 이족과 싸우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의 검에는 새로운 흐름이 깃들었다. 위압의 기세보다는 청명하게 앞을 밝히는 맑은 흐름이었다.
화룡진인은 그 사실을 깨닫고 물었다.
[ 여동빈. 너의 천둔검법이 변화하고 있다.]“그렇습니다, 스승님.”
[ 너는 천둔검법을 패왕(覇王)의 검(劍)이라고 생각지 않느냐? 왜 변화시키려 하느냐?]그 질문에 여동빈은 대답했다.
“패왕의 검으로는 인간을 구할 수 없습니다. 힘만을 추구하여 힘의 화신이었던 초패왕은 결국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고 천계에 틀어박히고 말았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조차 지키지 못한 검입니다.”
[ 그렇다면 패왕의 검보다 더 강한 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천하(天下)의 검입니다.”
쿠콰콰쾅
여동빈의 뒤에서 거대한 누각이 폭발했다. 거대이족이 누각 전체를 침식해서 본거지로 삼고 있었지만 여동빈이 새로운 검기(劍技)를 발현해서 놈을 일격에 죽여버린 것이다. 여동빈의 눈에는 강렬한 의지가 타올랐다.
“나는 천하를 담는 구세(求世)의 검이 될 것입니다!”
이후 여동빈의 천둔검법은 하루가 지날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96초로 이루어져 있던 강력한 검술초식이 하나하나 뭉그러지며 형태를 잃어갔고, 때로는 여동빈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초식을 발현하는지 잘 모르기도 했다. 하지만 형태가 쇠했다 하여 여동빈의 검이 약해지지는 않았고 도리어 나날이 강해져가기만 했다.
여동빈은 그로부터 다시 일 년이 지난 후, 자신이 추구하는 검이 육의(六意)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지해풍운우(天地海風雲雨)
거기에 초식은 없으며 오로지 뜻(意)만이 존재했다. 여동빈은 자신이 펼치는 게 무형검(無形劍)인가 생각했으나 세간에서 말하는 무형검기와는 많이 달랐다. 자신이 자연의 의지를 형상화하면 그 순간 거기에 맞춰서 검이 펼쳐진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여동빈이 급격한 성장을 거듭하면서 그의 퇴마행은 더욱 더 가속화되었다. 여동빈이 절대지경을 뚫으면서 쓰러뜨릴 수 있는 고위이족의 숫자가 늘어났고, 갈수록 천둔검법과 여동빈의 명성은 천하에 널리 퍼졌다.
설혹 여동빈 혼자서 쓰러뜨리기 힘들 정도의 고위이족이 나온다 해도 그때는 그의 동료인 팔선(八仙)이 힘을 합쳐서 싸웠다. 여동빈은 술법을 거의 쓰지 못했지만 다른 동료들은 술법의 천재들이었으므로 그를 충분히 보조해줄 수 있었다. 팔선이 힘을 합치게 되자 쓰러뜨릴 수 없는 요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여동빈은 홀로 조그마한 마을을 구원하러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을 향해서 가던 중 그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오랜만이구나, 여동빈.”
“당신은… 상관완아.”
과거 여동빈을 전쟁터에서 여산으로 보냈던 상관완아가 난데없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동빈이 그녀를 경계할 때 상관완아가 말했다.
“나는 네가 장래에 무림 최고의 검귀(劍鬼)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마성(魔性)이 끓어올라 요괴가 되면 내 부하로 만들려 했는데… 너는 이 혼란의 시대를 특이한 방법으로 극복하려 하는구나.”
“당신은 이 세상의 혼란을 원하시오?”
“혼란과 동시에 균형을 원하고 있지. 적당히 우리가 개입할 수 있을 정도의…”
상관완아의 눈이 번득였다.
“너도 짐작하고 있지 않느냐? 네가 설령 이 땅의 모든 고위이족과 대요괴를 쓰러뜨린다 한들, 그건 일시적인 평화에 불과하다. 진정한 [지배자]들은 이 세상을 뚜껑처럼 여기며 선악을 초월해서 멸망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지.”
“……”
“내 주인께서는 그 시대에 처참하게 멸족하게 될 인류(人類)를 구하려 하신다. 그 분의 뜻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정의이며, 황제 공손헌원에게 인정받은 인간의 왕이시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려.”
그 때 화룡진인이 환영을 내보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 개소리 하는구나! 창힐의 개니까 당연한 일인가?]“화룡진인.”
[ 내 제자는 결코 그런 개소리에 말려들지 않는다. 썩 꺼져라.]그러자 상관완아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천계가 위선덩어리이며 가장 음흉한 자들이란 건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당신 제자가 천계에 오르는 게 과연 우리에게 오는 것보다 낫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 ……]화룡진인이 그 말에 잠시 머뭇거리자 여동빈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말이오?”
“여동빈. 우리의 동료가 되어라. 그러면 내 주인께서 너에게 우리에 버금가는 권능을 내려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거절하겠소.”
“아쉽군…”
콰과광
여동빈은 이윽고 화룡신검의 힘을 돋우어 상관완아와 부딪혔다. 상관완아가 그냥 보내주지 않을 뜻을 확고히 하며 투기를 끌어올리자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동빈은 싸우면서 상관완아가 숨겨둔 힘이 엄청나다는 걸 깨달았고, 이대로라면 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퍼버벅
“크으윽.”
아니나 다를까 여동빈은 싸우던 도중 상관완아가 은밀히 소환한 요괴떼에 몸을 물려서 마비되고 말았다. 급히 요괴를 떼어내기는 했지만 이미 치명적인 빈틈이 생긴 여동빈은 상관완아의 손에 당해서 땅바닥에 눕고 말았다.
쿠궁
패배한 여동빈은 이대로 죽는건가 생각했지만, 상관완아는 그를 끝장내지 않고 말했다.
“그 정도 힘으로는 우리 행사를 방해할 수 없다. 너는 절망의 굴레에서 쓰잘데기없이 인간을 구하다가 죽거라.”
조롱섞인 목소리였다.
상관완아에게 패배한 여동빈은 그 후 몸을 추슬러서 계속해서 요괴들을 없애며 모험을 거듭했다. 그리고 퇴마행이 십여 년이 다 되어갈 무렵, 그는 요괴들이 날뛰는 세상을 만들어낸 사악한 마도사들이 한 존재의 소환을 꾀한다는 정보를 접했다.
“용?”
팔선(八仙)이 모인 자리에서 다들 의아해했다. 난데없이 용이 소환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용은 본디 신령스럽고 선한 존재였기에 용의 소환이 무슨 뜻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자 팔선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며, 현재는 지선에서 더 승급을 거쳐서 대라신선 바로 아래가 된 장과로가 침중하게 말했다.
“천계의 정보에 따르면 그 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천룡(天龍)과는 다른 존재. 이 세상을 멸망시켜 회귀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종말(終末)의 거룡(巨龍)이라 했네.”
팔선 한상자(韓湘子)가 의아한 듯 물었다.
“마도사 놈들이 그걸 왜 소환하는 거죠?”
그녀는 팔선 중에서 가장 막내였으며 현재 여동빈의 제자이기도 했다.
“… 그걸 잘 모르겠네. 아마도 우리가 그동안 퇴마행을 하면서 마(魔)의 세력을 많이 퇴치했으니 세력을 되살리려 하는 걸지도.”
그 때 옆에 있던 팔선 조국구(曹國舅)가 자신의 옥판을 두들기며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낙양에서 들은 정보에 따르면 그 마도사들이 무측천(武則天)의 지원을 받는다 하오. 무측천과 큰 관련이 있을 것이오.”
“정말인가? 무측천은 현재 중원 최고의 권력자이거늘…”
“흐음. 그래봤자 인간세상의 권력일 뿐이거늘 마도사처럼 위험한 자들과 뭐하러 손을 잡았는지 모르겠구려.”
팔선들이 모두 고심하며 무측천과 마도사, 거룡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여동빈만큼은 생각이 달랐다.
소환될 거룡은 틀림없이 상관완아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전례없이 강대한 엄청난 존재일 것이다.
지금 팔선들이 느끼고 있는 위기의식 정도로는 이야깃거리도 안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모두, 부탁이 있소.”
그리고 여동빈은 이대로라면 진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팔선들에게 제안했다.
“거룡이 소환되기 전에 내가 육의성천도(六意聖天圖)를 완성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그리고 백련교에도 도움을 요청해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