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63)
0063 ———————————————-
복마전(伏魔殿)
나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우선 마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광장쪽으로 가면서 혹시 수상한 낌새가 없는지 살펴보았다. 이후로도 약 두 시진 가량 마을을 배회하며 살펴보았지만 수상한 일 같은건 없었다.
“……”
너무나 평화롭다.
나는 혼란을 느끼고는 객잔에 앉아서 고민했다. 이 마을은 금의위가 주술사와 합심해서 인신공양의 의식을 벌이게 되는 ‘첫 번째 장소’이다. 그래서 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당연히 불타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없다니!
‘ 뭔가 이유가 있어. 이유가 있으니까 달라진 거야.’
나는 전생(轉生)의 법칙을 알고 있다. 아무런 변인(變因)도 없다면 한번 일어났던 일은 반드시 다음에도 일어난다. 변화가 생겼다면 그건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곰곰히 머리를 감싸쥐며 내가 이번에 어떤 변화를 시도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 칠요(七曜)의 비보(秘寶)로 짐작되는 보물을 황산에서 찾았고, 그걸 망량에게 맡겼어.’
그게 가장 큰 변화였다. 그거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천암비서를 얻고 천년설삼을 먹었던 일은 늘 하던 일이기 때문이 변화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은 그저 거미의 방해를 뚫고 고대의 보물을 찾아나온 것 뿐인데, 그게 어떻게 금의위의 인신공양계획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너무 상관관계가 없는 일이라서 혼란스러웠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된 이상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
“가 봐야겠군.”
나는 마을에서 가장 큰 저택으로 향했다. 우물의 비밀통로가 부엌까지 통해있는, 이 마을에서 가장 크고 번영한 곳이었다. 그리고 금의위에게 습격당했던 전생에서는 어른아이할 것 없이 모조리 몰살(沒殺)당한 불행한 가문이기도 했다.
저택 앞에는 경비무사가 네 명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을 힐끔 쳐다보며 생각했다.
‘ 억지로 들어갈까 아니면 천천히…?’
내가 이 저택으로 들어가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이 마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권력을 지닌 가문이야말로 가장 큰 비밀과 정보를 독점하고 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지난 3년동안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동향이 흐르고 있었는지는 이 저택의 주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고민하다가 경비무사들에게 정면으로 다가갔다. 경비무사들은 나를 보자 창을 치켜세우며 경고했다.
“멈춰라! 너는 누구냐?”
“저도 경비무사가 되고자 찾아왔습니다.”
“네 이놈, 여기가 화씨(華氏)의 땅이라는 건 알고 하는 말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가 정주현(鄭周縣) 태경촌(太境村)에서 가장 부유한 화씨집안이란 걸 알기에 찾아왔습니다.”
이 참극의 마을 이름은 태경촌이다. 이전까지는 그다지 쓰지 않았으나 객관화시키다보니 명칭을 쓰게 되었다. 또한 이 저택의 주인은 화씨(華氏)로써, 일대에서 가장 부유한 재력을 가진 유지였다. 광물산업과 각종 상업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자 화씨 가문의 경비무사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이 가문이 어중이떠중이가 고용해달라고 하면 누구든 고용해주는 곳인줄 아느냐? 너처럼 어린 놈을 받아들일 자리는 없다!”
“그걸 결정하는 게 당신 권한은 아닌 듯 한데…”
“이놈이…!!”
경비무사가 막 화를 내며 덤벼들려고 할 때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죠?”
“아, 아가씨.”
저택 안쪽에서 화사한 미모(美貌)를 지닌 묘령의 여인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고급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상당한 기품이 느껴지는 걸로 봐서, 화씨 가문의 여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이는 이제 막 20대 쯤으로 보였다. 경비무사가 쩔쩔매며 말했다.
“저 떠돌이 놈이 갑자기 경비무사로 받아달라고 해서…”
“흐음…?”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예전에 봤던 사공린이나 모용연처럼 절세(絶世)의 미녀는 아니었으나, 길을 가다가 다들 한번씩 뒤돌아 볼 정도의 미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양이상에 묘한 염기를 풍기고 있었으니 태경촌 내에서는 아마 제일가는 미인일 것이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소협은 무림인인가요? 자신의 무술에 자신이 있어 보이는군요.”
나는 적당히 둘러대었다.
“네. 사실 여행을 하던 중에 돈이 떨어져서, 경비무사로라도 먹고살 길이 필요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미안하지만 신분을 확인할 수 없는 떠돌이를 함부로 가문의 경비로 채용할 수는 없어요. 실력문제가 아니라 신용의 문제랍니다. 소협께는 미안하게 되었군요.”
여인은 정중하고 우아하게 내게 축객령을 내리는 듯 했다. 확실히 사리에 맞는 말이라서 뭐라고 대꾸하기도 민망했다. 게다가 저 여인의 화씨가문 내 위치도 상당한 것으로 보였기에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사실 3년 전에 이 마을에 한번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아주 평화롭고 좋은 마을이었습니다. 무사수행을 다니다가 이런 곳에서 지내면 좋겠다 생각해서 다시 들렀건만 인연이 아니었던 것 같군요.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나는 포권을 하고 물러서기로 했다. 화씨 가문에서 직접 고급정보를 알아내는 게 욕심이라면 이제 마을에서 수소문을 하며 알아볼 수밖에 없다. 내가 물러서려고 할 때였다.
“잠깐 기다려요. 소협은 정말로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이 있나요?”
“……? 네.”
나를 불러세운 여인은 살포시 웃더니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태경촌 근방에서 횡행하고 있다는 청마사흉(靑魔四凶)을 토벌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처리해 주신다면 우리 가문의 경비무사로 고용해 드리지요.”
그러자 옆에 있던 경비무사 대장이 깜짝 놀랐다.
“아가씨! 그 자들은 관아에서도 손을 놓은 흉악한 사파놈들인데 어찌…”
“그러니 확실하지 않나요? 저 분의 의협심과 실력을 동시에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으음… 아가씨의 뜻이 그러시다면…”
나는 새로운 의뢰가 들어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즉 이 근처에서 날뛰고 있는 사파 4명을 족치고 온다면 화씨 가문의 경비무사로 받아들여주겠다는 뜻이다. 마침 수련의 성과를 시험해볼 필요가 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쪽 분의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
“여인의 성명을 먼저 묻다니 무례하시군요. 소협의 성명부터 밝혀 주세요.”
딱부러지게 말하는 걸 봐서는 성격이 강단있어 보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백웅(白雄)이라고 합니다.”
“제 이름은 화련(華蓮)이라고 해요. 그럼 나중에 찾아오시길.”
화련은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고 나서 한참 뒤 경비무사 대장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봐 백웅이라고 했나? 어디 무관에서 무술 몇 년 익힌 애송이같은데 관둬.”
“무슨 소립니까?”
“청마사흉은 마도팔문(魔道八門) 혈마중(血魔衆)에서 떨어져나온 마두(魔頭)들이야. 산적들을 규합해서 커다란 산채를 만들어서 행인들에게 노략질을 하는 중인데, 워낙 세력이 커서 관아에서도 고심하는 놈들이란 말일세. 그런 것들을 혼자 토벌하는 건 불가능하니 포기해.”
마도팔문 혈마중!
그들은 암살을 주업으로 하는 흑야문과 달리 독특한 혈기(血氣)를 이용하는 무공을 사용하는 무투파 집단이었다. 아마 청마사흉이란 놈들은 혈마중 출신의 고수일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것도 산적들을 대량으로 규합할 정도라면 그 무공이 일개 표위 수준은 훨씬 넘어설게 분명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은체만체하면서 질문했다.
“그쪽은 이 화씨가문에 고용된지 오래 되었습니까?”
“엉? 내가 그걸 왜 알려줘야 하지?”
퉁명스럽게 말하던 경비무사 대장이 마뜩찮은 듯 말을 이었다.
“그래. 나와 이 친구들은 5년째 여기서 일하고 있다. 뭐 떫냐?”
“그동안 이 태경촌과 화씨가문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습니까?”
“웃기는 놈이군. 별다른 일이 있었으면 이렇게 경비를 설 수 있겠나? 개소리 말고 꺼져 이 자식아!”
“네 그러죠.”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서 화씨가문 앞을 빠져나왔다.
그 후 두 시진 동안 나는 태경촌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에게 다시 확인할 겸 물어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가 있었다.
‘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3년 동안.’
내 전생의 기억만 아니면, 이 태경촌은 현재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마을인 것 같았다. 광신도가 날뛰고 인신공양의 피빛이 흘러넘칠만한 곳이 아니다. 즉 주술사가 등장하기는 커녕 금의위가 얼쩡거리며 간을 본 일도 없었다는 소리다. 애초에 접근하지 않았다는 가정이 옳을 것 같았다.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중얼거렸다.
“우선 현천도인을 찾아가 볼까.”
내가 태정관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저물고 있었다. 뉘엿뉘엿 지는 석양을 등지고 태정관 앞에 서자, 태정관의 제자들이 나를 힐끔 발견하고는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저는 관중 청룡무관의 백웅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관주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멀리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관중? 거기서 여기까지 왔단 말이오?”
“네.”
“관주께선 현재 명상 중이시니 반 시진만 기다리시오.”
나는 태정관 제자들의 안내에 따라서 접객실에 앉아서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반 시진이 아니라 한 식경 후에 현천도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예전과 같이 정기넘치는 안색에 탈속한 도인의 기풍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갑소. 본도가 현천이라 하오.”
현천도인이 내 기(氣)를 확인하자 놀란 듯 도호를 외웠다.
“… 무량수불… 천하의 기재(奇材)구려. 혹여 반로환동하신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약간의 기연이 따랐을 뿐입니다.”
“허허, 오늘 백웅 소협을 보며 개안(開眼)을 하는구려.”
달그락
현천도인이 따뜻한 차를 찻잔에 따르고 있을 때 나는 질문했다.
“혹시 근 3년간 이 근방에서 사기(邪氣)가 느껴지거나 수상한 무리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흐음… 무슨 의도로 묻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본도의 기억에는 없소. 무당파를 떠난지 꽤 시간이 지났으나 이 곳은 한없이 평화로운 곳이라오. 자연을 벗삼아 수행하기에 좋은 곳이지.”
현천도인의 태정관은 근방에서 산적들이나 야적들이 날뛰는 걸 억제하고 있었고, 그 자신도 사악한 무리들이 돌아다니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현천도인까지 이렇게 말한다면 태경촌은 정말로 무사무탈하게 존재해 왔다는 뜻이리라.
“이 근처에 청마사흉이란 자들이 날뛴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근처는 아니오. 여기서 50리를 더 가면 큰 계곡이 나오는데 거기서 세력을 일구고 있다고 들었소.”
“도인께서는 그들을 토벌하지 않으십니까?”
현천도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자들을 처단하고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내 모든 행동은 무당파의 명예와 관련되어 있소. 만일 실패하게 될 경우 그 사파놈들이 마을사람들이나 태정관 제자들에게 해꼬지를 하려 드는 걸 감당할 수가 없구려.”
“그렇군요.”
“허허… 이거 부끄러운 이야기만 하게 되었군…”
현천도인이 씁쓸하게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혹시 도인께서는 칠요(七曜)의 비보(秘寶)라는 것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야 알고 있소. 그것은 팔선(八仙)에 못지 않은 도가(道家)의 전설이니.”
“도가의 전설?”
“허허허. 하지만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할 리가 없지 않겠소? 차라리 동해에 간 서복이 불로초를 캐어왔다는 말을 믿는 게 나은 수준이라오.”
껄껄 웃는 현천도인에게서는 칠요의 비보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색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망량선사나 망량이 칠요의 비보를 ‘실제’로 취급하며 다루던 것과는 대조적인 자세였다. 아마도 좌도방문을 직접 다루는 기환술사들과 달리 우도의 도인들은 내공수련과 자기수양에 좀 더 치우쳐져 있는 것이리라.
“제가 아는 어떤 술법사는, 그 칠요의 비보를 손에 넣는다면 술법의 문외한이라도 힘을 얻을 수 있다 했습니다. 그게 사실일까요?”
“어허… 전설일 뿐이거늘. 으음…”
약간 당황하던 현천도인이 생각을 정리하더니 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칠요라 함은 월요에서 일요(日曜)에 이르는 천지자연의 근간을 상징하는 것이오. 칠요의 비보는 달, 불, 물, 나무, 금속, 토지, 태양의 힘을 불어넣은 것일지니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을 것이오. 허나 고대부터 칠요의 전설은 전해져 오지만 그 누구도 그걸 진지하게 믿거나 찾아다니려 하지 않았소.”
“어째서입니까?”
“너무 허황되기 때문이오. 특히 화요(火曜)의 비보에는 염제(炎帝) 신농(神農)의 힘이 깃들어 있어서 세상의 남쪽 끝에서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걸 누가 진지하게 믿고 찾아다니겠소?”
“신농이라고요?”
“그렇소.”
현천도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쓴웃음을 머금었다.
“칠요의 비보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힘이 숨겨져 있다는 구전(口傳)도 포함되어 있소. 그리고 신화(神話)나 다름없기에,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조차도 칠요의 비보가 설화에 불과하다고 단정지은 일이 있다오. 진지하게 생각할수록 좋지 않은 일이외다.”
“……”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쫙 올라왔다.
‘ 삼황오제의 힘…’
세상사람들은 몰라도 나만큼은 그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초월급의 술법사이자 반신(半神)적 존재인 망량선사가 칠요의 비보의 존재를 긍정했으며, 나는 실제로도 칠요로 짐작되는 보물을 얻어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만일에 칠요의 비보에 삼황오제의 힘이 숨어있는 게 사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앞으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칠요의 비보를 찾아다녀야 한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현천도인에게 말했다.
“현천도인. 그럼 마지막으로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오?”
“제가 아까 말했던 청마사흉을 토벌하고자 하는데 힘을 빌려 주십시오.”
“……!!”
“혼자의 힘으로는 힘들겠지만 같이 하면 충분히 악한 놈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현천도인은 뛸듯이 기뻐하며 내 손을 맞잡았다.
“허허, 물론이오! 소협과 힘을 합친다면 그런 악한들쯤 문제 없소이다.”
그가 청마사흉을 껄끄러워하며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아무리 절정고수라고 해도 산적 수십 명을 규합하며 본거지에 웅크리고 있는 일류급 고수들을 치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인간인 이상 혼자 나서게 되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볼 때 절세급 내공을 지니고 있는 내가 도와주게 된다면 여유작작하게 청마사흉을 토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리라.
“바로 출발합시다.”
“좋소! 강호의 정의를 바로 세우겠소.”
나와 현천도인은 대화가 끝나자마자 장비를 챙겨서 청마사흉이 기거한다는 청마산(靑魔山)으로 떠났다. 약 50리의 길이었으나 절정의 경공을 발휘하자 반 시진도 되지 않아서 도착할 수가 있었다.
파밧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리고 산 위쪽에는 제대로 지어진 산채가 보였고, 횃불의 빛이 여기저기에서 이글거렸다. 횃불의 숫자로 볼 때 쫄따구 산적의 숫자는 최소한 100여명이 넘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정말 산적떼가 많군요. 외곽에만 숫자가 이 정도면 안쪽에는 배 이상 있을텐데.”
“아마 수백 명이나 될 것이오. 관군이 껄끄러워하는 이유가 있소.”
“하지만 청마사흉만 처리하고 나오면 나머지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으음, 소협을 믿겠소.”
“그럼 갑시다.”
쉬쉭
나와 현천도인의 신형이 빠르게 청마산채를 향해 달려나갔다. 난데없이 쏜살같이 달려오는 우리를 발견한 산적들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침입자ㄷㅏ……”
그러나 놈들이 경보나 경적을 울리기도 전에 이미 내 검이 놈들의 목을 긋고 지나갔다. 현천도인 또한 마찬가지로 무당파의 절학을 이용해서 산적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처리하고 있었다. 산채를 돌파해서 문 안쪽으로 뛰어넘는데까지는 채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 저 쪽이군.’
나는 산채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강력한 기를 찾아내었다. 숫자가 총 4명이라서, 놈들이 청마사흉이라는 걸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가 앞장서며 뇌영검법으로 산적들을 베어나가자 현천도인이 뒤따라오면서 길을 마저 뚫었다.
쿠웅
청마사흉이라고 짐작되는 네 명의 험상궂은 사내들이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 하나하나는 일류급 고수로 보였고, 외부의 소란을 알아챘는지 저마다 병장기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 중 깡마른 인상의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이, 이 놈들 무슨 짓이냐?”
“……”
나는 놈들이 알몸으로 무기만 들고 서 있으며, 장내에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는 걸 알아챘다. 청마사흉의 뒤편에는 알몸의 여인들이 백탁액에 능욕당한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근처의 민가에서 잡아온 여염집 여인이거나 여행자들일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신들의 성욕을 풀고자 납치해왔으리라.
타앗
뒤이어 도착해서 내려앉은 현천도인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금수같은 놈들!”
“현천도인. 내가 저 두 놈을 처리하겠으니 나머지 놈들을 처단해 주십시오.”
“물론일세.”
위잉
내 검에서 천뢰인이 감돌았고 현천도인의 검에서 검기가 치솟아 올랐다. 청마사흉은 우리가 절정급 고수라는 걸 깨닫자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으헉…”
그들의 실력으로는 넷이서 힘을 합쳐야 하나를 상대할까말까였는데 두 명씩이나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눈치를 살피던 그들 중 한 명이 억울한듯 외쳤다.
“어디서 온 분들이오?! 우리가 모은 금을 줄 테니 제발 한 번만 봐 주시오.”
“나는 염라국에서 왔으니 얌전히 목이나 내놔라.”
파앗
나는 청마사흉을 조롱하며 뇌영보 비기 천주살을 응용해서 청마사흉의 면전으로 짓쳐들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면전에서 검을 휘둘러서 상단을 베어가는데도 상대는 반응을 못하는 기색이었다.
슈콱!
그대로 검로(劍路)가 흐르며 사흉 중 한 명의 목을 베어넘겼고 유혈이 터져나왔다. 나는 내 순간속도가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현천도인도 지지 않았다. 그는 철퇴를 들고 있던 놈에게 덤벼들었는데, 현천도인의 검이 겨우 두세 번 움직이자 철퇴를 들고있던 놈의 손목이 잘려나갔다.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학살(虐殺)이 벌어졌고, 그로부터 채 이십 초가 지나지 않아서 청마사흉은 모두 검하고혼(劍下孤魂)이 되었다.
칼에 묻은 피를 땅에 떨쳐내던 현천도인이 감탄한 듯 말했다.
“백웅 소협의 실력은 과연 대단하구려. 무림의 홍복이오.”
“별말씀을… 그보다 졸개들이 이제 찾아올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하는게 좋겠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피바다 속에 널려있는 청마사흉 중 한 놈의 모가지를 잡아서 들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정도 규모의 산적들이 두목을 잃었으면 통제를 잃고 민가에 마구잡이로 약탈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뒷처리를 충분히 해야한다고 봅니다.”
“으음… 그 말은…”
“도인께서 살계(殺戒)를 범하기 껄끄러우시다면 여인들을 데리고 내려가 주십시오. 저 혼자 하겠습니다.”
그러자 현천도인이 한숨을 쉬었다.
“어찌 어린 소협에게만 부담을 지우겠는가. 오늘 각오를 했으니 끝까지 함께 하겠네.”
“좋습니다. 그럼 시작하지요.”
그리고 나는 산적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날듯이 달려가서 놈들 한가운데에 청마사흉의 대가리를 던져버렸다. 살기등등한 채 대기하고 있던 산적들은 난데없이 머리통이 날라오자 기겁했고, 그게 자신들 두령의 머리라는 걸 알아채자 안색이 새하얘졌다.
“히이이익!”
나는 사자후를 내질렀다.
[ 청마사흉은 죽었다! 네놈들이 싸워봤자 의미가 없다!] “으아아아아!!”“도망쳐!”
그러자 산적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더니, 이윽고 몰려있던 자들이 마치 썰물처럼 흩어졌다. 개 중 부두령급으로 보이는 자들이 소리를 치며 잡아두려 하는 것 같았지만, 이미 상황은 늦어져 있었다. 저 자들에게는 청마사흉을 위해서 목숨걸고 싸울만한 의리가 없었기에 이렇게 간단한 행위로도 조직이 붕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도망치는 산적들을 따라잡으며 천뢰인을 전개해서 미친듯이 썰어버리기 시작했다.
슈콰곽
슈캉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산적들의 사지가 잘려나가고 목이 날아갔다. 나는 피로 만들어진 길을 만들면서 반 식경도 되지 않아서 무려 백여 명 가까운 인간을 학살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피는 거의 묻지 않았고 묵묵히 척살만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갈수록 재미와 흥미를 느끼며 열심히 인간을 베기 시작했다.
‘ 사실 핑계일 뿐이지만.’
나는 딱히 화씨 가문의 경비무사로 취직할 생각도 없고, 강호정의를 위해 청마사흉을 꼭 쓰러뜨려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단지 기왕 무예를 배운 김에, 흑야문과 싸우기 전에 연습해 볼만한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다.
베어죽여도 누구도 뭐라하지 않는 게 산적이었기 때문에 천뢰인과 천주살을 열심히 구사하면서 실전훈련을 하는 계기로 삼으려 한 것이다. 물론 내 옆에서 같이 살계를 열고 있는 현천도인은 그런 사실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촤악
약 백 오십여 명째를 베었을 때 산적들은 거의 장내에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피칠갑이 된 손등을 천옷으로 닦으며 중얼거렸다.
“재밌어. 천주살 연습이 좀 되는걸.”
산채를 전멸시켰다는 기록은 딱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건 아니지만, 흑야문과 겨루기 전의 좋은 연습상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손을 다 닦았을 때쯤 현천도인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백웅 소협. 그럼 본도는 여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겠소.”
“부탁드립니다.”
나는 오늘의 산적토벌이 끝난 것을 느끼며 바닥에 풀썩 앉았다. 피바다와 잘린 사지, 시체를 바라보면서도 내 눈은 냉막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뭔가 내 안에서 부숴져있다는 걸 짐작했지만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 망량에게는 가지 않겠어. 아직 약속했던 것처럼 강해지지는 못했어.’
내 눈이 빛났다.
‘ 이 기세를 살려서 바로 흑야문에 도전하러 간다.’
흑야문과 비무를 겨뤄서 승리하고 나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왠지 손이 근질거렸다.
나는 손에 떨리는 감각 속에서 미묘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천천히 부정해 나갔다.
이걸 인정하는 순간 – 뭔가 변해버릴 것 같았기에.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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