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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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오제 전욱이 말했다.
[ 돌아가라. 이 곳은 봉인지. 네가 설칠만한 곳이 아니다.]그 말에 폭왕은 컥컥거리며 웃다가 대답했다.
[ 나는 여행자. 기나긴 우주의 여정을 덧없이 보내긴 싫구나.] [ 어쩌자는 말인가?] [ 무엇이 봉인되어 있는지 말해달라.]폭왕의 요청에 전욱은 크게 불쾌해진 듯 기세를 발했다. 그러자 빙의해있는 서문혜의 몸에서 한도 끝도 없는 음기가 어둠과 함께 치솟았고, 소리소문없이 세계를 메워서 시꺼먼 흑암으로 변화시켰다.
스스스
여차하면 실력행사를 할 수도 있다는 말없는 압박이었으나 폭왕은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 그대들 삼황오제는 이 세계를 관리하고 있지… 허나 계시 이후의 거취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 ……] [ 계시 이후에 이 세계가 남아있을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그 말에 오제 전욱은 딱히 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흥미는 생긴 듯 더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고 멈춰섰다. 그 와중에 서문혜는 전욱의 내부에서 필사적으로 영혼이 끌려가지 않게 버티며 신격들이 하는 말을 전해듣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이 대화를 조금이라도 더 들어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욱이 말했다.
[ 괜한 걱정하지 말라. 우리는 너희 외차원의 지배자 밑으로 들어갈 정도로 궁벽하지 않다.] [ 그러나 새로운 영역다툼은 귀찮겠지. 그 때가 되면 내가 너희의 동맹이 되어주겠다.] [ … 그렇게나 이 봉인이 무엇인지 알고싶단 말인가?]폭왕의 눈이 묘하게 휘었다.
[ 창힐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소환에 응했으나 소환사가 죽어버렸지. 허나 소환사가 바친 공물이 제법 괜찮아서 나는 이 세계를 여행하기로 마음 먹었다. 체제할 수 있는 기간이 꽤 길다.]신시의 결전에서 뜻밖에 백련교주가 죽었으나 폭왕은 바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폭왕은 사실 그 동안 받은 백련교의 인신공양 덕분에 풍부한 인과율을 얻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세계에 머무는 김에 ‘장난감’을 움직이기로 생각한 것이다.
[ 쓸데없이 인과율을 많이 얻었구나.] [ 모든 게 심심풀이다. 이 세계의 태수여, 여행자의 유희를 충족시켜줄 아량은 없는가?] [ 흐음.]전욱은 폭왕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 여기는 대전(大戰)을 일으킨 반역자의 무덤이다. 그리고 나는 북방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내 영토에 그의 심장을 따로 덜어내어 봉인했다.] [ 왜 그래야 했지?] [ 너무나 강력해서 그의 사지를 찢어놓지 않으면 본체를 제대로 봉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끼던 창을 다섯 개나 봉인으로 써야 했다.] [ 호오… 그래… 말로만 듣던 그 자였군.]폭왕은 봉인된 자가 누구인지 눈치챈 듯 했다. 궁금증이 풀린 폭왕이 먼 발치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베루스를 쳐다보곤 말했다.
[ 굴레를 돌리는 능력이 있는 자. 네 주인이 시켜서 여기에 왔는가?]스으으
전욱 또한 베루스를 쳐다보았고, [옛 지배자] 두 명의 시선이 동시에 베루스를 향했다. 그 엄청난 압박감과 마력은 시공을 왜곡시킬 정도였으나 베루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 줌의 동요도 없는 눈빛으로 그를 마주보며 대답했다.
” 위대한 폭왕이여. 내 주인은 삿된 자가 아니니 지배자의 영역에 도전하지 않소. 또한 적대하지도 않소. 그대도 아실 일이오.”
[ 왜 굴레를 돌렸지?]
” 무릇 의뢰의 인과율이 내게 있었소.”
[ 큿크… 꺼져라. 너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 삼가 위언(危言)을 받아들이겠나이다.”
슈욱
베루스는 즉시 전이술을 써서 자리를 벗어났다. 전욱 또한 그에 대해서 별 말을 안 하고 그저 쳐다볼 뿐이었다. 베루스는 그들에게 있어서 벌레로 판단될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지배자들은 은근히 베루스의 뒤에 있는 존재를 신경쓰는 기색이었다.
전욱이 짜증스러운 듯 말했다.
[ 이제 너도 가라.] [ 가라면 가겠지만…] [ 또 무엇이 필요한가?]폭왕이 말했다.
[ 이 놈은 지배자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육체에 새겨진 단말의 소유주는 어떤 놈인지 알고 있나?] [ 그거 말이군.]전욱은 시시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 머나먼 세계의 입구를 지키는 놈이다.] [ 재밌군… 이 곳은…]폭왕은 끅끅거리다가 말했다.
[ 자아, 장난감은 그만 갖고놀까. 그럼 이만.]스르륵
잠시 후 무사시의 몸에서 검은 존재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옛 지배자] 폭왕은 이 세상을 유람할 생각인 듯 더 이상 무사시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듯 했다. 폭왕의 혼이 자리를 떠나자 무사시의 괴물 몸에서는 생명력이 사라졌고, 이내 짚인형처럼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전욱은 잠시 못마땅한 눈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 이번에는 넘어가겠지만 만일 또 굴레를 돌려서 내 봉인에 피해를 준다면 가만두지 않겠다.]전욱 또한 서문혜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그도 이런 뜻밖의 사소한 일에서 그리 힘을 쓰고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자 장내에는 을씨년스러운 침묵이 감돌았다. 무사시와 서문혜가 기절하듯 죽은 상태로 쓰러져 있는 황량한 침묵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 그 자리에 베루스가 다시 전이술을 이용해서 나타났다.
베루스는 쓰러진 서문혜의 등에 손을 얹고 물고기를 소환해서 불어넣었고, 서문혜는 잠시 움찔거리다가 생기를 되찾고 깨어났다.
” 아…”
” 영혼이 만귀전으로 끌려가기 직전이었군. 이제 괜찮소.”
” 정말 감사합니다.”
” 그런것보다.”
베루스가 한숨을 쉬었다.
” 전욱이 내게 경고했소. 되돌리기 껄끄러워졌군.”
서문혜가 의아한 듯 말했다.
” 되돌릴 필요가 없잖습니까? 다 살아났고 추적자인 무사시도 저렇게 죽어있는데.”
베루스는 반문했다.
” 저게 죽어있는 걸로 보이시오?”
” 네?”
” 저 자는 지금까지 [옛 지배자]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조종되고 있었소. [옛 지배자]의 혼이 떠나갔다고 해도 그 엄청난 마력은 아직도 몸 속에 휘돌고 있는 상태. 지금 저건 죽은 게 아니라 몸이 마력에 적응하는 중인 것이오.”
” … 설마.”
베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저건 곧 전무후무한 마물(魔物)이 되어 부활할 것이오. 그리고 그 전투력은 방금 전과 큰 차이는 없겠지…”
” 부활한 후에도 무사시의 의지가 살아있을까요?”
” 그건 알 수 없으나, 아마 그럴거라 생각하오. [옛 지배자]가 마력의 단말을 통해 빨려들듯 정신을 지배했는데도 무사시라는 자의 정신력은 살아있었소. 아마 저 자는 마(魔)로서 제 2의 삶을 살게 되겠지.”
” 그럼 여기서 모두 도망치는게…”
” 물론 [옛 지배자]가 조종하는 게 아니니 더 이상 마법은 쓸 수 없으니 그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이오. 하지만 저 놈에게서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쉴새없이 살의에 젖은 괴물에게 평생 쫓겨다니게 될 터.”
서문혜는 베루스의 말에 곤란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대로 도망치며 다닌다면 어떻게든 당장의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먹지도 자지도 지치지도 않는 괴물이 쉴새없이 따라온다는 건 또 다른 공포였다. 그녀가 할 말을 잃자 베루스가 말했다.
” 검마는 굴레를 되돌려달라고 했으나 진퇴양난이군. 지금 이 상황을 납득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소. 시간을 되돌린다 해서 지금보다 나은 결과가 찾아오리라는 보장은 없소.”
” ……”
” 어쩌겠소? 전욱이 경고했다 해도 당신들이 원한다면 마지막 굴레를 돌려보겠소. 물론 굴레를 돌리면 무사시에게 [옛 지배자]는 붙어있지 않겠으나 마물이 된 상태는 마찬가지일터. 느닷없이 싸우게 되는 건 마찬가지요.”
또한 베루스는 무사시가 괴물이 되면 이 자리에 또 와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왜냐하면 [옛 지배자]의 잔여마력의 농도가 너무 커서 [작은 굴레]의 영향력을 무시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서문혜는 고민했다. 베루스의 말대로 지금 이 상태가 최선일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번의 모험을 또 한다는 선택은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검마가 세운 계획이 뭔지 알고 있었고, 그 계획의 성공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 아버님이라면… 이렇게 선택했을 거야.’
그녀는 잠시 후 결정하고는 입을 열었다.
” 되돌려 주십시오.”
” 더 나은 결과를 내놓을 자신이 있소?”
” 네.”
서문혜의 눈이 빛났다.
” 아버님께선 해내실 겁니다.”
검마는 가부좌를 튼 채 인생 최대의 집중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인생을 살아오면 큰 고난을 부딪힐지언정 좌절한 적은 없는 검마 서문대룡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이야기가 달랐다. 딸의 목숨까지 걸려있는 건곤일척의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도박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누구도 결과를 보장하지 못하는 독자적인 이론만 가지고 실행하게 되었다.
검마의 머릿속에는 과거, 남쪽 대륙에서 진소청과 더불어 무예를 연마했을 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 검마 어르신. 아마 그 이론이 확실하리라 생각합니다.] [ 그저 내가 생각해 본 이론일 뿐인데 진지하게 들어준 건가?] [ 네. 저는 그 생각이 옳다고 봅니다.] [ 아마 제갈사나 망량이 들으면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하겠지…]쓴웃음을 짓는 검마에게 진소청이 고개를 저었다.
[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 자네도 해볼 생각인가?] [ 네. 앞으로 그럴 기회가 온다면.] [ 어느 쪽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아니, 만일 성공한다면 정말 큰 한걸음을 내딛는 것일 걸세.] [ 그렇기 때문입니다.]진소청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 그 기회는 시간으로 포착할 수 없습니다. 모든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상태가 되어야 할 것이고, 동시에 실재하는지 알 수 없는 특이점을 통찰할 수 있어야겠죠.] [ 새삼 내가 너무 꿈꾸는 소리를 했다는 게 실감나는군.] [ 건승을 빕니다.]그렇다 –
단 한 번의 기회일 뿐이지만, 그 기회는 반사신경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소리의 수백배나 되는 속도조차도 잡아낼 수 있는 게 고수의 신경과 감각이지만, 시간 그 자체가 움직이는 건 아무리 빠른 반사신경으로도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지한 순간 이미 바뀌어있을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은, 동시에 신에게 인간이 결코 대항할 수 없다는 한계 또한 말하고 있었다. 신이 시공간을 조작하거나 [굴레]를 움직여 버리면 설령 신에게 대항할 검술이 있다 해도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무(武)로는 신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일까?
검마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백웅의 기억속에서 무신(武神)의 존재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정말로 신에게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무신의 길을 열망할 리는 없다. 또한 진소청이 나인교주를 은하섬으로 쓰러뜨렸던 일 또한 그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고오오오오
검마의 머리카락이 올올이 흩날렸고 끝에서부터 백발로 변하고 있었다. 건장한 육신이 조금씩 앙상마르며 전신의 기가 축소되었다.
혈통에 의한 서문혜의 백발과는 달리, 그는 현재 모든 신경을 집중하여 필생의 힘을 끌어내고 있기에 반작용이 찾아온 것이다. 너무 큰 집중력이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다른 생각따위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력을 도야시켰다.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다.
지금 그가 시도하는 건 제정신으로 시도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이론상의 영역.
광기에 매몰되어 목숨을 걸 각오가 아니라면 결코 이뤄낼 수 없는 것이다.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무사시뿐만이 아니다.
스스로를 뛰어넘고, 격(格)을 뛰어넘어, 마침내 식(識)에 도달하는 것.
마음이 시야를 일으키면(若心起見)
분별하여 구할 다른 경계가 있다(有餘境可分別求)
그는 과거 읽었던 법경에서 보았던 구절을 떠올렸다. 본디 저 구절은 마음이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불러오면 정법이 혼란해진다는 구절이었으며 식을 설명하는 구절이었다. 그러나 무예경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이상하게 저 구절은 자신에게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이 돈오를 얻은 자는 선각자일지도 몰랐다.
삼무수겁(三無數劫)을 관통하는 정각(正覺)!
무명업상(無明業相)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찰나의 염심(染心), 그것은 불법에서 설명하는 것과는 다른 돈오였으며 그 자체로 의념절기였다. 아라야식이라고 표현하는 식(識)의 단계가 점차 깊어지면서 그의 정신능력도 차원이 다른 경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쩌저적
검마의 피부가 갈라지기 시작했으며 그의 이마 한가운데에서 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극도의 집중에 도달한 검마의 전신에서는 경계가 사라지며 육신의 기가 허공과 뒤섞여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검마의 몸 그 자체가 흩날리는 촛불이 된 것 같았다.
[ 궁극의 경지에서는 시간(時間)이 곧 거리(距離). 이 수천억 가지의 조합 속에서 흐름을 읽어내는 궁극의 거리를 감으로 터득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소. 그래서 나는 흐름의 아래위로 축이 있고, 또다시 연속되는 원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소. 원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간단하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흐름을 거슬러서 움직이면 그만인 것이오. 나는 오십 년 동안 궁극의 무(武)를 궁구(窮求)하던 중 이 원리를 깨달았소.] [ 잘 보시오. 허(虛)가 기(氣)를 낳았소.] [ 백웅 그대가 무예의 한계에 도달할수록 무한의 시간 속에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발현하고, 태허(太虛)가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오. 결국 무(武)란 혼돈에 반하는 태허(太虛)의 정수라고 할 수 있소. 무를 궁구함은 궁극적으로 태허, 궁극의 끈을 손에 넣어 인과율을 돌파하는 것… 그 신의 경지를 인간이 이해가능한 형태로 묘사한 것이 도가의 태극(太極)이오.]태허(太虛)
중요한 건 그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며 근본적인 속성은 혼돈(混沌)이었다. 빛과 어둠, 선과 악 같은 양가적인 구분은 혼돈 이후에 생겨났으니 그보다 근원적인 건 있을 수 없었다. 심지어 [옛 지배자]나 온갖 신, 우주홍황조차도 혼돈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백웅의 전생기억은 그 혼돈이 태허와 융합하여 사멸하게 되고, 혼돈 끝에 태허가 남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모순이었으나 달리 말하자면 혼돈의 속성에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건 전 우주에서 태허뿐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은 무엇인가?
검마의 관점에서는 시간 또한 혼돈에 속했다. 시간의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인과율과 신격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신들이 시간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건 혼돈에 속한 자들이 마치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치듯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미야모토 무사시는 신과 싸울 때 시공간의 단면을 벤 적이 있다. 그 말은 달리 이야기하자면 의념을 이용하면 혼돈조차 벨 수 있다는 뜻이었고,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여러가지 증거가 하나의 이론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태허(太虛)를 깨닫는다면 시간을 거스르는 게 가능하다!
물론 당장은 그럴만한 동력이 없는 데다 인간의 역량에 한계가 있기에, 스스로의 의지로 [작은 굴레]를 움직일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검마는 이론상으로 절대지경의 무인이라면 모든 집중력을 동원해서 시간이 회귀하는 순간에 저항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쿠구구구
검마의 두 눈이 투명하게 번득였고 가부좌를 틀고 있던 몸이 서서히 자리에서 떠올랐다. 그는 인생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중이었고 이 한 순간에 모든 게 끝장나도 좋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이 순간만큼은 혈육에 대한 정조차 머릿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언제’인가?
… 아니, 그런 건 의미가 없다. 그 단어 자체가 시간의 관념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이 사용하던 언어의 관념이 상상력과 가능성을 막는 역할이었을지도 모른다.
검마는 갈수록 정신능력이 상승하는 동안에, 자신이 마침내 굴레의 특이점을 인지하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도가 낳아 덕이 기른다(道生之德畜之)
물질이 형체를 이룬다(物形之勢成之)
특이점에서는 그 형이상학적인 변화가 직접 일어나고 있었다. 검마는 마치 홀리듯이 그 특이점을 응시했다.
파앗
그리고 다음 순간, 검마는 자신의 주변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면서 대지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그의 옆에는 베루스와 자신의 딸, 서문혜가 서 있었다. 베루스는 힐끔 검마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 어찌 머리카락이 백발이 되었소?”
검마는 대답하지 않고 고요히 미소를 지었다.
그는 [굴레]를 돌리는 혼돈에 저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검마는 조용히 전방을 바라보았다.
검마가 바라보는 방향에는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무사시가 있었다. 그의 몸에서 엄청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괴물의 몸뚱이는 더욱 꿈틀거리고 있었다. [옛 지배자]는 떠나갔지만 그는 여전히 마력에 지배받고 있었고 그 마력이 새삼 몸 속에서 깨어나는 중이었다.
검마는 무사시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거리가 정확히 일 장이 되었을 때,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을 휘둘러 베었다.
단지 검마의 검은 잔광조차 사라진 무형(無形)이 되어 있었고, 무사시의 검은 마력을 머금은 괴검(怪劍)이었다는 차이였다.
정적.
잠시 후 쩌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사시의 괴물 피부가 갈라지기 시작했고, 그의 상반신 전체에 거대한 참상이 일그러지듯 박혔다. 마치 나뭇잎이 쌓이듯 참격이 방향을 달리하여 계속 내려꽂혔고, 순식간에 수백 번의 상흔이 무사시의 상반신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검마의 일격은 무사시의 정신을 맑게 만들었다. 아메노하바키리의 신성한 힘이 마(魔)를 끊어내며 마력의 지배를 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 ……]무사시는 푸른 피를 흘리면서도 무릎은 꿇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일순간 마왕의 경지까지 올랐을 자신을 베어넘긴 검마의 실력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왜냐하면 같은 검객이기에, 검마의 모습만 보아도 그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마치 빛과 같은 그 속도.
마물의 장갑을 종잇장처럼 베어버리는 절대무비한 위력.
그건 결코 아메노하바키리의 위력이 아니었고, 순수한 검마만의 무력이었다.
무사시가 이족의 성대를 움직여서 천천히 말했다.
[ 무형(無形)… 검(劍)…. 진정한… 심검의 경지…] ” ……”[ 고맙다… 그리고… 미안… 하군…]
무사시는 왜 미안하다고 하는 걸까?
그건 무인으로써 패배했는데도 마력으로 되살아나서 다시 검마를 습격해 온 행위가 비겁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사시는 [옛 지배자]의 마력에 휘둘려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스스로에게 수치심을 느낀 것이다. 동시에 자신을 죽인 자 또한 곧이어 그 명이 다할 것이라는 안타까움도 담겨 있었다.
” 아버님!!”
” 오지 말거라, 혜아야.”
검마는 일격에 마물이 된 무사시를 베었으나 그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일순간 태허를 깨달은 효과로 절대지경의 경지를 올려서 무형검에 도달한 검마는 어떻게든 무사시를 토벌했으나, 무사시의 괴검을 피할만큼의 수준은 되지 못한 것이다. 그 때문에 검마의 가슴에도 무사시의 괴검이 남긴 참상이 길게 뚫고 지나가 있었다.
검마는 입가에서 피를 흘린 채 웃었다.
” 그 꼴로는 신을 벨 수가 없겠군.”
[ ……]
무사시는 그 말을 듣자 충격을 받은듯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리고는 마주 헛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 천하무쌍… 한 순간의 꿈이었구나.]파스스
무사시는 먼지가 되어서 사라졌다. 마왕의 경지에 근접했던 마력조차도 무형검에 베이자 멀쩡하지 못한 것이다. 무사시의 소멸을 확인한 검마 서문대룡은 이제 자신에게도 최후가 다가온다는 걸 알아챘다.
그는 문득 허무해졌다.
과연 이 기억과 경험을 백웅이 전해받을 수 있을까?
제갈사가 살아있다면 사역마를 통해 지금의 지식을 얻어내긴 했겠지만 그가 체험한 생생한 제 팔식(第八識)의 경험은 물려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전해듣는 제갈사 자체가 그걸 전해줄 수 있는 절대지경의 무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래도 계속 의지는 이어지겠지.’
그가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 제가 대신 전해주겠습니다.]바로 그 때 누군가가 그에게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걸어왔다.
” ……!! 그대는 설마! 살아있었…”
검마는 두 눈을 부릅떴고,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비로소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한참 후 겨우 실낱같은 웃음을 지으며 서문혜에게 말했다.
” 혜아야…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 아버님…”
” 이 죽음은 그저 한 순간의 헤어짐일 뿐. 너와 나는 다시 만나게 되지 않겠느냐?”
그 말에 서문혜는 왈칵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그렇지 않습니다.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 너는 또 만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 그 만남을 위안으로 현재의 죽음을 어찌 쉬이 넘길 수 있겠습니까?”
” 그것도 그렇군…”
검마는 서서히 쓰러지며 눈을 감았다.
” 난… 조금 쉬마.”
눈을 감은 검마 서문대룡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무사시에게 당한 상처가 너무 큰데다가 태허를 이용해 [작은 굴레]에 저항하면서 큰 체력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삶에 종언이 찾아왔으나 그는 자신의 혈육을 지켰기에 후회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