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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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정천맹의 신표를 이용해서 역참의 말을 공짜로 빌려탈 수 있었다. 그가 내어 준 금표(金標)는 정천맹의 중요간부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는데, 차후에 정천맹에서 돈을 내어주겠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이 신표를 이용하면 대부분의 관원들이 검문을 넘겨주거나 호의적으로 대해주고는 했다.
그 덕에 나는 별반 어려움 없이 산동 땅으로 넘어와서 절곤(截坤) 땅을 무리없이 지날 수 있었다. 절곤을 지나고나면 험한 지형이 드물었기에 오래 지나지 않아서 교역항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교역항 앞에 도착해서는 개방도들의 도움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들은 사전에 천룡개에게 연락을 받았는지, 나를 발견하자 대뜸 정보를 내놓았다.
“고려로 가는 배는 스무 날에 하나씩 있으며, 오늘부터 열흘 뒤에 출발하오. 그리고 교역을 주도하는 상단은 대룡상회(大龍商會)와 서궁표국(西窮?局)이며, 무역을 담당하는 관리는 정 6품의 관리인 정기태(鄭機兌)라는 자요. 이번에 운송하는 주 물류는 세공품과 철기(鐵器), 은(銀)이오. 그리고 이것은 이 교역항 청도(靑島)의 지도요.”
나는 상세한 정보와 함께 지도를 받아들자 감탄했다. 이 정도의 정보를 객잔이나 각종 표국을 뛰어다니며 모으려 하다가는 열흘이 다 지나버렸을 것이다. 나는 이제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적당히 배에 탈 방법만 알아보면 되는 일이었다.
“고맙소.”
덤으로 그 개방도가 왠 시꺼멓고 조그마한 피리를 내게 내놓았다. 검은 이유가 때 때문은 아닌 걸로 보였다.
“그리고 만일 소협이 본 방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 오적(烏笛)을 부르시오. 이것은 천룡개께서 직접 내리신 개방의 신표이니, 오적을 듣는다면 청도에 있는 모든 개방도들이 소협을 도우러 올 것이오.”
“알겠소.”
생각보다 천룡개는 꼼꼼하게 도움을 준비해 준 모양이었다. 나는 오적이 일반적인 피리가 아니라 인간에게 잘 안 들리는 고주파를 내뿜는 특수한 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 개방도들이 익히는 내공에는 오적의 소리를 감지하는 능력이 있으리라. 나는 신기한 눈으로 오적을 살피며 청도 내부로 들어갔다.
와글와글…
청도항은 번화한 도시였다. 이 곳은 고려와 활발하게 교역하는 무역항이기 때문인지 곳곳에 고려의 복식을 입은 사람도 많이 보였다. 나는 고려인을 처음 보기 때문에 슬며시 지나치면서 그들의 말을 들었는데 확실히 중원의 말과는 달라 보였다. 나는 문득 한 가지 문제점을 깨달았다.
‘ 아… 나는 고려 말을 잘 모르는데 어떻게 하지?’
한자로 대충 의사소통은 할 수 있다고 해도 말이 통하지 않으면 괴로울 것이다. 하물며 고려 어딘가에 있을 해인(海印)이라는 보물을 찾으려면 소통은 필수다. 나는 여태껏 생각도 안 했던 문제에 부딪히자 잠시 혼란을 느꼈다.
그러나 곧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래, 통역사를 고용하자.”
이 곳은 교역항이니 반드시 한어(漢語)와 고려말을 모두 유창하게 구사하는 자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표국에는 반드시 있을 것이다. 나는 돈을 마련해서 통역사를 구한 후, 그와 함께 고려 땅을 돌아다니며 단서를 찾아보면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우선은 교역을 주도한다는 대룡상회와 서궁표국을 차례로 방문했다. 그들은 어린 소년인 내가 찾아오자 어이없다는 기색이었으나, 정천맹주에게서 받은 금표를 보여주자 태도가 달라졌다.
찾아온지 한 식경도 되지 않아, 대룡상회의 회주(會主)가 기름진 얼굴을 푸들거리면서 응접실에 나를 모실 정도였다. 커다란 상회를 이끄는 자답게 전신에 부귀스러운 복색과 장식이 가득한 자였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으허허… 금표를 지니고 계신 걸 보니 정천맹의 뛰어난 후기지수이신가 봅니다! 저희 대룡상회를 어쩐 일로 방문하셨는지?”
“다름이 아니라 이번 고려행에 함께 가고 싶소. 그리고 통역사를 따로 고용하고 싶소.”
“어렵지 않습니다. 소협에게 특급 귀빈실을 내어드리지요. 그리고 통역사는 음…”
대룡상회주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만 만일 고려땅을 여행하실 생각이시라면 남는 통역사가 없습니다. 이건 저로써도 어쩔 수가 없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돈 문제가 아닙니다. 최근 교역량이 급격히 늘어나서, 저희 상회는 물론이고 관(官)에서도 큰 배를 여러 척 건조 중입니다. 고려말을 능숙히 하는 통역사는 귀한 인재이기 때문에 함부로 내어드릴 수가 없습죠.”
즉 고려와의 교역이 호황이기 때문에 통역사라는 인재는 저절로 고급인력 대우를 받는 듯 했다. 그것도 돈을 받아도 내어줄 수 없을 정도로 통역사 부족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뭔가 방법이 없겠소?”
“서궁표국이나 관아 쪽에 가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쪽에서도 안된다고 하면 현지(現地)에서 인재를 찾으시거나 직접 고려말을 배우시는 수밖에 없죠.”
“상회주께서는 고려말을 잘 하십니까?”
“허허. 저야 직책상 수십년동안 배워야 했으니 할 줄 알지요. 허나 고려말은 중원의 말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익숙하게 구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흐음…”
나는 대룡상회주에게 포권을 하고는 대룡상회를 빠져나갔다. 덤으로 열흘 후에 출발할 귀빈석의 예약까지 된 것이다. 하지만 역시 통역사의 문제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 서궁표국에도 없을 것 같은데…’
예상대로였다. 서궁표국주도 금표의 힘을 빌려서 쉽게 만날 수 있었지만, 그 또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 우리 표국에 있는 전문통역사가 총 3명인데, 그들 모두 이번 교역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오. 나도 그들과 함께 정신없이 일해야하겠지.”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이미 대룡상회에서도 비슷한 말을 듣지 않았소이까? 대룡상회의 규모는 우리 표국보다 몇 배나 거대한데 그쪽에서도 사람이 안 남는거면 방법이 없소. 괜히 관아를 찾아가봐야 헛수고요. 괜히 괘씸죄만 묻게 될 거요.”
하지만 그의 말만 듣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되든 안되든 일단 정기태를 만나기 위해서 관아로 향했다. 관아는 상회나 표국과 달리 금표를 보고도 바로 반응하지 않는 기색이었고, 잠시 후 위사장이 금표의 존재를 확인한 후 위에 보고를 올리러 갔다.
정 6품의 관리, 정기태는 약 한 식경 후에 느적느적 걸어나왔다. 그는 신경질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정천맹주의 위세로 관아에서 사람을 오라가라 하는 거냐? 너희 무림 놈들은 대체 관아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는 상당히 화가 나 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아마도 정천맹주의 금표를 무시할 수 없어서 오긴 했는데, 관과 무림의 관계 때문에 잔뜩 약이 올라있는 듯 했다. 나는 일이 꼬일까봐 황급히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인(大人). 용서해 주십시오. 대인께 위세를 부리려는 게 아니라 급한 일이 있는지라 대인의 도움이 없으면 헤쳐나갈 수 없는 겁니다.”
내가 적당히 이야기를 넘겨버리자 정기태의 안색이 조금 풀리는 듯 했다.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백웅이라고 했나? 용건이 있으면 서둘러 말하라. 나는 지금 바쁘다.”
“다름이 아니라 통역사를 좀 구할 수 있겠습니까? 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통역사? 그런 건 이 청도에 얼마든지 있을텐데…”
“제가 원하는 것은 고려땅에서 함께 여행할 수 있는 자입니다.”
내 말뜻을 이해한 정기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런 자를 왜 관에서 찾는 거냐?”
“대룡상회와 서궁표국에서 사람이 부족하다고 해서 피치못하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흥… 그 말은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도 그런 자를 빌려줄 수는 없겠군.”
그렇게 말한 정기태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데 그 전에, 너는 타국(他國)을 그리 쉽게 여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네?”
“고려 땅을 여행하고 싶다면 그쪽 관원과 이야기가 되어야 하고, 정식으로 여행을 하겠다는 방문허가를 받아야 하며, 그 보고가 위에 올라가서 결제를 맡아야 하고, 고려의 귀족들과 조율이 되어야 한다. 여기까지 최소한 한 달은 걸리거늘 너는 덮어놓고 고려땅을 여행하겠다고 하는 것이냐?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타국의 침범이니 그 자리에서 참수(斬首)되어도 할 말이 없는 죄이다.”
“……!!”
“흐흥. 보나마나 상회놈들 배에 섞여들어가서 몰래 내려서 고려땅의 민가에 숨어들어갈 생각이었겠지. 무림 놈들이 할만한 생각이로다.”
투덜대던 정기태가 별안간 말했다.
“잘 알아둬라. 나도 꽉막힌 놈은 아니라서 너희 무림인들이 몰래 돌아다니는것까진 뭐라 하지 않겠다. 나한테 쓸데없이 일거리를 주지 마라.”
“네?”
정기태의 눈에 갑자기 불똥이 튀었다.
“그러나 할 거면 안 걸리게 해라. 만일에 걸릴 경우, 네놈은 물론 네놈에게 금표를 준 정천맹주까지 엮어서 감옥에 처넣고 말겠다. 절대 나만 죽지는 않아!”
“……”
나는 정기태의 엄포를 듣고 관아를 나오면서 후회가 되었다.
‘ 서궁표국주 말을 들을걸. 관아는 안 가느니만 못하구나.’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든 느낌이다. 안 갔으면 모르되, 이제 정기태가 내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나중에 뒷목 잡을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다음부터는 섣불리 관아에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며 밖으로 나섰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별 수 없이 개방을 찾아가야했다. 정보력이 빠른 개방이라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개방도들이 모여있는 청도 분타를 찾아가자, 내게 입구에서 지도를 건네 준 개방도가 보였다.
“소협 무슨 일이오?”
“문제가 생겼소.”
내가 현재의 문제를 그에게 털어놓자, 그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소협 대체 왜 그런 짓을 하셨소? 관과 무림이 불침(不侵)이라는 건 서로를 위한 조약이오. 괜히 관아에 고려에 불법침입하겠다고 예고한 것밖에 더 되오?”
“할 말이 없군. 미안하오.”
“뭐 그 일은 됐고… 통역사라. 그건 소협이 직접 발로 뛰면서 고려말에 능통한 사람을 알아보는 수밖에 없겠구려. 청도 어딘가에는 고려말을 아주 잘 하면서도 전문직종에 종사하지는 않는 자가 분명히 있을테니.”
“뭔가 단서라도 주시오. 열흘밖에 남지 않았는데 다짜고짜 찾기는 좀 힘드오.”
“으음… 나는 잘 모르겠군. 알아서 하시오.”
그들은 더 이상의 간섭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하긴 천룡개의 명령이 내려와서 나를 돕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세세한 문제까지 생각해 줄 정도의 의리는 없는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이 객잔으로 돌아와서 방에 드러누운 채 생각에 잠겼다.
‘ 어떻게 해야할까?’
물론 꼭 열흘 안에 통역사를 찾아야 하는 건 아니다. 정 뭣하면 고려 땅에 상륙한 후, 중원말을 할 줄 아는 고려인을 찾는게 더 나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상당한 위험부담을 감수하는데다가 그 자를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고려말을 할 줄 아는 한인을 고용해서 몇 달만이라도 데리고 다니는 편이 나은 것이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어쩔 수 없군… 그냥 가서 배우자.”
내 결론은 일단 고려에 가서 주민으로 눌러앉던가 귀화(歸化)를 해버리는 것이었다. 고려에 사는 고려인이 되어버리겠다고 해버리면 그쪽 말을 더 자세히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괴어나 갑골문과는 달리 그런 타국의 말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분명히 터득할 수 있는 종류의 언어였다.
무엇보다도 서왕모의 축복 때문에 내게는 시간이 썩어날 정도로 있는 상태였다. 나는 말을 배우는 데 몇 년 단위의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단 말을 한 번 익혀두면 앞으로 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열흘 후, 나는 고려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쏴아아아 –
바깥에서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특급 귀빈실에 앉아서 조용히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나는 요즘들어 생각하는 버릇이 많아졌는데, 내 폭급한 성정을 조금이라도 다스리려는 노력이었다.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한번 더 차분하게 생각하면 길이 생긴다는 걸 요즘 느꼈기 때문에 더더욱 명상을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 배멀미라고 해도 진동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어지럽지 않군.’
배멀미를 할 정도로 균형감각이 약하지 않다. 나는 조용히 대룡상회의 상단행에 섞여서 며칠동안 배 여행을 즐겼다. 생전 처음으로 보는 푸른 바다의 수평선을 보는 기분은 상쾌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항해를 떠난지 약 6일이 지났을 때였다. 갑판 위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악! 해적이다!”
뭐라고?
내가 급히 갑판 위로 올라가자, 저 너머에서 흑색 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상단의 배는 총 다섯 척이었는데 저쪽의 배는 세 척이었다. 숫적으로는 이쪽의 배가 많았지만, 만일에 저게 해적선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해적선 위에는 당연히 무장한 해적들이 타고 있을테니 한바탕 일전이 벌어지면 상단 측이 무조건 손해를 보게 되어 있었다.
대룡상회주가 허둥대다가 나를 발견하자 말했다.
“아 소협! 잘 오셨소!”
“무슨 일입니까?”
“저 자들은 황해(黃海)에서 큰 악명을 떨치는 혈도단(血刀團)이라는 해적들이오. 소협은 상당한 무공을 지닌 것 같은데 제발 저 자들과 맞서싸워 주시오!”
나는 대룡상회주가 아무리 금표를 보여줬다지만 승선비 하나도 안 받고 나를 특급 귀빈실에 태워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차하면 이럴 때 나를 내보내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상단의 배가 침몰하거나 나포되면 곤란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했다.
나는 물끄러미 다가오는 혈도단의 배를 보며 말했다.
“저 자들도 무림인인가?”
“그렇소. 표위급 이상의 무공을 가진 자도 많다 들었소. 소협 제발 부탁하오.”
“알겠소.”
꾸웅!
배의 우현에 해적의 배가 한 차례 들이박았다. 나는 뭔가 대포같은 것도 변변히 쏴보지 못하고 이렇게 쉽게 충선을 허용한 게 기가 막혔지만, 생각해보니 상단의 배에 대포같은 걸 많이 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은 육박전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해적놈들이 하나둘씩 갑판으로 기어올라오는 게 보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검을 들었다.
“하아… 별로 싸우기도 싫은데.”
왠지 이번 싸움은 그렇게 내키지 않았다. 그것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 몸은 번개처럼 날아서 해적들의 수급을 베기 시작했다. 선명한 천뢰인이 하늘을 갈랐다.
내 인생 최초의 해전(海戰)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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