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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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아닌데?!
난 그냥 인간인데?!
‘뭔 개소리야!’
내가 신의 화신일 리가 있냐!
나는 십이율주의 말에 황당함을 느꼈지만 십이율주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미 세계는 정해진 운명에서 많이 뒤틀려버렸어. 더 이상 놈의 의도대로 끌려가면 모두가 파멸하게 될 것이다.”
[네가 십이율주인가. 증거는?]
백련교주가 십이율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눈앞의 저 백웅이 혼돈의 화신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그야 뭐, 딱히 없지?”[…….] “왜 없는지는 당신도 알 거야. 그 존재는 전 우주에서 가장 간교하고 영리한 자, 우리를 어떤 식으로든 농락할 수 있는 이상 검증은 의미가 없다는 걸. 도리어 검증하려 들다가 몇 배로 당하곤 하지….”
[웃기는군…. 겪어보기라도 했나?]
십이율주가 움찔하다가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글쎄다. 크큭.”
[그 말은 틀리지 않으나 그렇다면 딱히 백웅을 혼돈의 화신으로 볼 이유도 없지 않은가?]
“이유는 있어.”
십이율주는 힐끔 나를 보았다.
“‘저 놈’의 모든 말과 행동은 양자세계의 궤적(軌跡)을 거스른다. 파우스트 박사의 이론에 따르면 있을 수가 없지. 동역학적 특성과 체계를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아예 프랙탈 우주의 시원(始原)을 통과한 초월존재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그런 존재는 [혼돈] 그자체인 외신(外神) 뿐이야.”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알아듣게 설명해라.]
“뭐, 쉽게 말하자면 말이야…, 너희가 혹했던 모든 떡밥은 결코 이 시대에 존재할 수 없는 건데 알아내버렸다는 거지. 저 놈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어.”
[흐음….]
“백웅을 잡아. 저 놈이 흉수다. 적어도 [기어오는 혼돈]과 큰 관계가 있을 게 분명하다.”
백련교주는 십이율주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심지어 아수라는 아까부터 고민되는지 팔짱을 낀 채 그저 장내의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제 그들의 선택에 따라서 내 명줄이 결정될 상황인지라, 나는 제갈사에게 전수받은 21가지 자살법을 빠르게 떠올렸다.
‘제일 안 아프게 죽는 방법이 뭐더라….’
그리고 이윽고 백련교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느 쪽도 믿을 수가 없겠군. 그렇다면 나는 믿고 싶은 쪽을 믿을 테니, 십이율주 너는 이 자리에서 꺼져라.]백련교주가 내 편을 들어줬다!
‘휴, 딱히 변명하러 나서지 않아도 되겠군.’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자리는 내게 운이 따라주는 것 같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말에 십이율주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수상쩍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저 놈의 말을 믿겠다는 건가?”
[적어도 이것저것 따질 여유는 없으니까…. 네 말대로 해봤자 상황은 나아지지 않으나 백웅 말을 따르면 희망이 있다.]
그렇게 말한 백련교주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미 천지천상의 인과율과 균형은 붕괴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졸개가 당했으니 머지않아 흉신이 중원에 직접 손을 뻗겠지…. 지금은 인간끼리 섣불리 싸울 때가 아니다.]십이율주는 불신 가득한 말투로 반문했다.
“정말로 사대신기를 찾아서 그 힘을 손에 얻겠다는 말인가? 꿈도 크군.”
[그것까지 얘기해 줄 이유는 없지….]
“그럼 차라리 백웅을 잡아서 정보를 토해내게 하자. 그게 더 편하고 빠를 것이다.”
[그대는 너무 단순하고 성급하군.]
백련교주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나는 아직도 백웅의 밑천이 어디까지인지 모른다. 여기 있는 세 명이 합공해도 그를 잡을 보장이 없다고 판단되니, 하지 않겠다.] “…….”[백웅과는 앞으로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겠지….]
아무래도 백련교주는 내 동료들의 힘과 내 역량을 크게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정면승부라면 몰라도 내가 도망치는 것까지 잡을 순 없다고 여긴 듯 했다. 그래서 내게 협력하기로 마음먹은 게 분명했다.
“겁쟁이로군.”
[멋대로 지껄여라.]
“좋아…, 알았다고. 금요는 포기하지.”
십이율주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등을 돌리고는 삼사와 함께 장내에서 사라졌다.
“백웅. 우린 머지않아 다시 보게 될 거다….”
스스스
십이율주는 삼사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백련교주가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아수라에게 말했다.
[거대한 존재여. 그대는 무신의 행방을 찾는 듯한데, 사대신기를 찾으려는 이해가 우리 백련교와 일치하는 것 같군. 이 자리에서 셋이 손을 잡지 않겠는가?] […….]아수라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좋아. 나쁠 것 없겠지. 너희와 한 배를 타겠다.]순식간에 백련교주와 아수라가 아군이 되었다!
나는 갑자기 일이 술술 풀리자 너무 기쁜 마음이 들었다. 늘 이런 고비에 놓이면 내가 공박당하다가 일이 막 꼬이곤 했는데 제대로 일이 굴러가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흐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운을 중첩시켰나?”
“그게 아니오, 백웅.”
옆에 있던 진소청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 상황은 당신의 실력으로 입증한 것이오. 어찌 운으로 천하의 백련교주와 아수라를 한 편으로 만들 수 있겠소? 당신은 이제 세계의 구원자가 될 자격이 있소.”
“…고맙소.”
나는 진소청의 말이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느꼈다.
그래, 이 정도로 실력을 쌓았다면 이미 일국의 왕이 될 만큼의 역량을 쌓은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나 노력했는데도 절대지경은 내게 길을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나, 설마 무신한테 미움 받은 건가?’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백련교주가 땅에 떨어져 있는 해방 금요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해방 금요를 그대가 가지겠다면 본교도 동의하겠지만…, 한 가지 약속해주지 않겠나.] “조건이란 말이군요.”[사대신기와 신녀, 진공가향 등 그대가 아는 모든 정보를 본좌와 공유해 달라. 그러면 앞으로도 본교는 그대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호법사자를 그대 부하처럼 쓸 수 있게끔 해주고, 반천맹에도 최선을 다해 지원하지.] “음…, 그거야.”
솔깃한 조건이다. 나는 딱히 손해 볼 것도 없었으므로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려 했지만 그 순간 제갈부가 내게 육합전성을 보내왔다.
[백웅, 동의하지 마라! 교주는 아직 잠재적인 적이다. 너무 마음을 풀지 말라고. 흑요석도 아직 줄 때가 아니다!] [뭐? 지금 그의 제안이 위험하다는 소리냐?] [당연하지. 저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너는 필연적으로 흑요석을 줘야 할 거다. 교주는 이미 흑요석의 존재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나? 그가 흑요석을 요구했을 때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이 없어. 그 순간 백련교도 적으로 돌아선다.] [아!] [아직 흑요석을 줄 만큼 믿을 수 없어. 교주 본인이 말했던 ‘진짜 조건’을 잊어버린 거냐? 다름 아닌 본인의 입에서 나온 조건이었으니 그걸 충족시키지 않는 한 그는 여전히 우리 뒤통수를 칠 가능성이 높다.] [……!!]나는 그 순간 머릿속에 과거 백련교주의 유언이 떠올랐다. 24회차에 제갈사와 내 동료들이 신시대결전 당시에 교주의 역린을 쳐서 쓰러뜨렸을 때의 기억이었다.
망량이 목숨을 걸고 명경을 전달해준 덕에 그 당시의 기억을 직접 체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알고 있다. 그 당시 백련교주는 진소청을 통해 내가 전생자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고, 죽을 때가 되어서야 모든 망집을 놓고 자기 자신을 영입할 수 있는 조건을 알려준 것이다.
‘사대신기의 획득. 그리고 신녀의 예언을 증명하는 것.’
언뜻 보면 나는 그 2가지의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백련교주에게 구체적인 정보를 털어놓지 않았고, 아직도 우리 사이의 관계는 암중모색(暗中摸索)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백련교주 입장에서는 내게 복종하기 보다는 기회를 봐서 정보를 얻어낸 후, 자기 자신이 사대신기를 얻으려고 주도적으로 나서려고 하지 않겠는가? 신녀의 일족이자 그 후예를 자처하는 백련교주가 의문의 외부인에게 사대신기를 섣불리 넘겨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백련교주에게 뒤통수를 맞을 확률이 적기는커녕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셈이다! 제갈부는 내가 생각지 못했던 점을 즉시 짚어내 준 것이다.
동시에 나는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난데없이 십이율주가 끼어들어 내게 어깃장을 놓으려 하는 걸 적극적으로 막아주고 내 편이 되어줬기에 백련교주를 믿으려 했지만, 사실 그것조차도 위장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정보를 모두 공유하는 건 다소 이른 것 같군요. 교주께 금요를 양도하는 한이 있어도 그것만큼은 안 됩니다.”
[후, 이만큼이나 배려해줬는데도 자기 좋을 대로만 하려고 하는가? 염치없어 보이는군.]
“우선 사대신기에 대해 제가 아는 최대한의 정보를 두 분께 공유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습니다.”
[뭐가 걸린단 말이지?]
…딱히 할 말이 생각 안 난다.
‘에라이. 이거나 말해볼까?’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일단 아무 말이나 던져보기로 마음먹었다.
“창힐이 소멸된 지금, 예지능력이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거죠.”
[음….]
백련교주가 흠칫했다. 아수라 또한 의외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을 둘러보다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신녀의 일족이며 대대로 초상능력을 얻어서 태어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초상능력의 정체는 점술을 이용한 예지(豫知). 백련교주 당신은 그 예지능력이 적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 예지능력을 강하게 타고난 존재가 수신류 내에 있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본래 그 예지능력은 세계의 판도를 바꿀 만큼 강력한 거였겠지만 창힐은 과거 거룡의 강림 당시에 적극적으로 인과율에 개입해서 예지능력을 쓸모없게 만들었습니다. 아마 신녀 또한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지 말라고 후세에 알려뒀겠죠.”
[…….]
“그러나 이제 창힐만큼 인간 세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신격이 없다면, 예지능력은 충분히 강대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창힐이 독특한 경우였을 뿐, 보통의 [옛 지배자]는 인간세상을 하찮게 보기 때문에 웬만하면 예지능력을 신경도 안 쓸 테니까요.”
[내가 예지 능력자를 이용해서 사대신기의 위치를 선점하려 할 거란 말인가?]
“그 뿐만이 아니죠. 제가 모든 정보의 윤곽을 흘리는 것만으로도 저와 아수라님이 백련교주님의 손아귀에서 조종당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윤곽만 알아도 나머지를 예지로 알아 맞출 수도 있죠.”
[…….]
“이쪽 입장도 이해해 주십시오.”
물론 이건 억측이고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능력자가 있었다면 진즉에 백련교주가 써먹었을 것이다. 지금 한 말은 그저 정보공유를 거부하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백련교주가 약간의 격정을 담은 억양으로 말했다.
[예지능력자 따위 없다. 신녀의 핏줄이 그렇게 강하게 이어졌다면 내가 교주가 되려고 그렇게 고생했을 리가 없지. 내게 그 초상능력만 있었다면 이청운 따위는…. 크크, 그대는 나를 화나게 하는군.] “…….”[하지만 의심할 만 하겠군. 정 그렇다면 그 얘기는 나중으로 넘기도록 하지.]
위잉
백련교주가 원영을 뻗어서 허공으로 해방 금요를 들어 올린 후 내게 던졌다. 내가 해방 금요를 받자 백련교주가 살기를 담은 채 말했다.
[금요는 그대가 가져라. 허나…, 본교의 성의를 너무 무시한다면 그대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역시 너무 얌체처럼 굴었나?
나는 찔끔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선은 이 장내를 정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사후처리는 빠르게 이뤄졌다. 나는 팔괘자수선의를 비롯한 보패와 해방 금요를 얻었고, 이윽고 아수라는 새벽의 명성을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 그리고 교주는 내게서 팽조의 보패를 몇 개 얻었고, 마도사들을 생포했으며, 마도병기를 모두 가져갔다. 흉신의 후예로 개조당한 번데기들은 치료를 위해 우리 쪽에서 가져가기로 했다.
우우웅
천우진을 비롯한 술법사들이 도시 곳곳에 박혀 있던 마핵(魔核)을 파괴하고 주술을 시전하자 도시에 자욱하게 깔려있던 혈무가 사라졌다. 그리고 남해의 상황을 확인했는데, 인간이 본래 인구의 6할 이하로 줄어든 모양이었다. 서양 함대가 1년간 남해를 점거한 동안에 무수한 인간이 살상당하거나 마도병사로 개조당한 것이다.
사후처리가 끝나자 나는 백련교에 사흘 후에 찾아가기로 약속한 후 동료들과 모였다.
이 자리에는 아수라가 동석해 있었는데, 그는 내게서 사대신기로 향하는 비밀을 알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떼놓을 수 없을 듯 했다. 제갈사는 호문클루스의 몸뚱이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회의 자리에서 입을 열었다.
“아수라님. 먼저 당신이 아는 사대신기의 정보를 듣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파순이라고 불러라. 나는 상태에 따라 칭호를 구분한다.”
“그러죠.”
아수라, 아니 현재는 인간인 파순으로 변신해 있는 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도 천 년 전 거룡이 어떻게 강림하려 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지. 그 당시에 야차는 측천무후를 승천시켜 하급 신으로 만드는 임무를 담당했고, 그와 동시에 사대신기를 회수하는 임무 또한 진행했다.”
“사대신기는 외우주의 혼돈, 물질조차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허차원이 가득한 곳으로 떨어졌습니다. 또한 무한이나 다름없는 공간이기에 암천향보다 더한 지옥일 수도 있는데…, 설마 야차가 외우주를 직접 뒤졌단 말입니까?”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가 사대신기를 회수하려고 노력했다는 건 확실하다.”
그렇게 말한 파순이 말을 이었다.
“임무의 결과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이후 그녀는 모든 보고를 창힐 님께만 했고 동료인 우리에게도 경과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사대신기를 얻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야 그럴 것이다.
창힐이나 야차가 사대신기처럼 강력한 보물을 손에 넣었다면 틀림없이 팔부신중에게 장비시켜서 전력의 강화를 꾀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태껏 전생하면서 창힐의 밑바닥까지 다 들여다봤는데도, 사대신기를 꺼내는 기색은 없었다. 창힐과 야차는 끝까지 사대신기를 얻지 못한 것이다.
제갈사는 그 말을 주의 깊게 듣다가 말했다.
“야차의 행방이 중요하겠군요. 그녀를 붙잡아서 모든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그녀는 북방의 아라사 제국으로 갔다. 그 곳의 수도에서 천인(天人)과 합류하기로 했지.”
“…….”
제갈사가 뭔가 생각난 듯 기묘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우리와 함께 아라사 제국으로 가서 야차를 붙잡는 일에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그녀만 붙잡으면 웬만한 건 다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
“아! 옛 동료를 치는 일이 껄끄러우시다면 저희끼리 야차를 잡아도 됩니다만.”
“하겠다. 동료라 해도 내 목표보다 중요하진 않아! 필요하다면 그녀를 죽일 수도 있어. 나는 창힐님께 충성을 바칠 뿐 다른 놈은 알 바 아냐. 하지만….”
단호하게 대꾸한 파순이 우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사대신기가 무신을 향하는 단서라는 말…, 그게 사실이라는 증거를 내게 내놔라. 일전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근거가 있으니 한 말이었겠지?”
“이유는 그 때 전부….”
“그저 입 발린 말일 뿐. 내가 믿을만한 증거를 내놓으란 말이다. 증거가 없다면 옛 동료를 칠 수는 없다.”
파순의 눈빛이 서서히 혈광에 물들기 시작했다.
“내놓지 못한다면, 내 이름을 걸고 네놈들 모두 이 자리에서 죽여주마.”
삽시간에 공기가 얼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자리에는 반천맹의 모든 동료들과 내 전생동료가 모여 있었지만 파순 한 명에게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에 무림 최고수라 할 수 있는 진소청이 있고, 최강의 술법사인 천우진이 있다고 해도, 어차피 인간에 불과하기에 강대한 마왕을 상대로는 승산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상황을 잘 모르는 다른 반천맹 간부들도 파순의 힘을 직감하는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제갈사가 말했다.
“백련교의 시조 달마가 과거에 무생노모의 법문을 제작한 사건을 알고 계십니까?”
“물론 알고 있다.”
“그 사건 이후 백련교주 달마는 소멸한 것으로 추정되고, 법문은 세상 곳곳으로 퍼졌지요. 그러나 달마의 사후 백련교는 주술사나 술법사 집단으로 발전하지 않고 무예를 숭상하며 그 근간을 사대무류로 여겼습니다. 달마가 인간역사상 최강의 마도사라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요.”
“사대무류가 무신과의 연결점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사대신기와 사대무류 유파의 극의는 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각 유파의 최종오의인 신의 혼(神之魂)은 무언가를 담는 ‘그릇’의 역할을 합니다. 또한 그 그릇이 담는 건 바로 사대신기로 끌어낼 수 있는 무한의 힘이지요.”
“…….”
“이건 기존의 무예가들이 지니고 있던 관점이나 무술이론과는 상이합니다. 혼의 그릇을 따로 수양하여 법구에 의존하는 경지를 따로 만들어냈다고도 할 수 있죠…. 수천 년 동안 무예를 수련해 온 파순님이라면 이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알고 계실 겁니다.”
“흐음…, 흥미롭군. 처음 듣는 얘기야.”
파순은 진심으로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제갈사가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크크…. 신의 힘에 이르는 신의 그릇…. 사대무류의 최초 창시자들은 무신에게 계시를 받아 무(武)가 신역(神域)에 도달하는 지름길을 창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武)는 인간이 죽으면 그저 흐름으로 전해질 뿐, 구체적인 증거를 남기지 못하지요. 하지만 사대신기는 보패에 상응하는 보물이니 천여 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증거가 남을 수밖에 없겠지요?”
“음!”
“원하시는 것처럼 구체적인 증거는 보여드릴 수 없으나…, 백련교의 번영과 사대무류 무공 자체가 그 증거이며, 어차피 사대신기를 찾으면 알게 될 문제일 겁니다. 이 세상에 많은 무예의 달인이 있으나 ‘물증’이 남은 건 사대신기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파순은 크게 혹한 듯 했다. 아니 저 정도면 이미 설득된 거나 다름없다.
이윽고 파순이 말했다.
“좋다. 야차의 위치를 알려주겠다. 더불어 그녀를 붙잡을 때 나도 힘을 보태지.”
“큰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너희는 사흘 후 백련교와 만나러가겠다 했으니, 난 미리 가 있겠다.”
슈웅!
파순의 모습이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파순이 사라진 후 전생동료끼리만 모여서 2차 회의를 시작했다.
나는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제갈사에게 물었다.
“제갈사! 정말이냐? 대충 지어낸 얘기인데 정말로 사대신기에 무신에 도달할 단서가 있는 걸까?”
“글쎄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만, 이따금 난 네 녀석이 핵심을 관통할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일리 있는 가설이야. 은근히 생각은 해 봤지만 늘 상황에 쫓겨서 시도해 볼 여유가 없었기에 말을 안했을 뿐이고.”
제갈사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근데 아닐걸? 난 아니라고 본다.”
“…왜?!”
“그냥…, 느낌이 그래. 무신이란 놈도 나만큼이나 성격이 나쁜 놈일 것 같으니까.”
“…….”
뭔 소리야.
“뭐 어쨌든 아수라와 백련교를 잠시 아군으로 얻었으니 상황은 크게 유리해졌어. 일단은 이대로 야차를 포획하는 데 집중하자. 사대신기를 찾아내면 이후의 전생에서 백련교주를 완전한 동료로 만들 수 있으니 회차가 크게 줄어들 테니까.”
“내 전생에 끼어든 놈을 찾는 건 어떻게 하지?”
내 질문에 제갈사가 말했다.
“어차피 이제 흉신이 나서게 되면 지상은 크게 망가질 거고 세상 또한 극단적으로 변하게 될 거다. 그리고 아무것도 살지 못하게 될 정도의 말세(末世)가 되면 그 변인이자 전생에 끼어든 놈도 모습을 드러낼 확률이 없겠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지금으로서는. 아오키가하라 수해에 가봤자 ‘적’을 찾는단 보장도 없고 시간만 낭비할거다.”
“너무 무력하잖아…. 제길.”
나는 한탄했다. 전생의 수레바퀴에 끼어든 존재가 내게 어떤 악영향을 줄지 모르는 상태에서 가만히 발 뻗고 잘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한탄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제갈부가 말했다.
“내게 한 가지 방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