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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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세키가하라의 전투.
그것은 동영을 둘로 나눠서 전국시대 최후의 패권을 겨루는 싸움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장악했을 때 중앙보다 토고쿠에 눈을 돌려 일대의 세력 확장에 집중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 그는 자신의 영지가 히데요시의 심복들에게 갈가리 찢겨서 빼앗기던 때도 참고 미래를 도모했다.
그러던 중 기존 동영의 1인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급사(急死)했다. 그는 강대한 고려에 원정을 꾀하지도 않고 국내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죽은 것이다. 그가 죽은 장소는 후시미 성이었는데 당시 기이한 빛이 하루 종일 성 위에서 일렁였고 먹구름이나 선형으로 몰아쳤다는 이변(異變)의 소문이 세상을 흉흉하게 만들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외적으로 그를 모시던 오대로(五大老)를 모아서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후견을 맡겼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죽음이 워낙 갑작스러웠던 데다가, 정작 오대로들은 한동안 혼란에 휩싸인 듯, 제대로 된 정치적 행보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몇 년이 지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갑자기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어머니인 요도도노를 자신이 머무는 슨푸에 데려오고는 신막부의 출범을 주장했다.
이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행보에 오대로 중 일부는 반발했고, 그들은 전국 다이묘들과 연합하여 도쿠가와의 세력과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그리하여 동군과 서군이 나누어진 세키가하라 전투라고 하는 대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본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굴복하긴 했으나 야망을 품고 있었던 간웅이었으므로 결코 히데요시의 자식인 히데요리와 정치적으로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둘 다 서로를 미워하기에 팽할 수밖에 없는 관계 –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들 사이에 동맹이 성립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마각을 드러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차후 장성한 히데요리가 겨룰 거라고 생각했으나 전혀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기에 전국시대의 성주인 다이묘들은 한동안 어느 편에 붙을지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나, 후마슈(風魔衆)의 수장인 후마 코타로(風魔 小太郎)는 쥬고쿠(中國) 120만석의 대영주이자 오대로의 한 분이신 모리 데루토모(毛利輝元)의 의뢰를 받아서 이 전장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행보를 염탐하려고 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손을 잡을 수 있었는지 알아봐야 했으니!”
미야모토 무사시는 귀를 후볐다.
“…….”
“그러니 이것 좀 풀어줘, 소년.”
흑영복(黑影服)을 입고 있는 20대 초반의 청년이 나뭇가지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간절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후마 코타로, 후마슈라고 불리는 동영 최고수준의 닌자 단체의 수장이었다.
까악 – 까악 –
해가 지고 있다.
주변에는 시산혈해가 가득한 전장이었다. 산중에서 접전을 벌인 동군과 서군의 부대가 격렬하게 전투를 한 결과, 무려 수백 구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인간의 시체 위로 까마귀들이 한두 마리씩 내려앉아서 눈알을 쪼아 먹고 있었고, 시체 썩는 냄새와 대소변 냄새도 났다. 참혹한 전장의 흔적에서 살아서 숨 쉬는 자는 오로지 후마 코타로와 미야모토 무사시 뿐이었다.
스앗
후마 코타로는 미야모토 무사시와 눈을 마주치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걸 느꼈다.
‘무…무시무시한 눈빛.’
그는 믿기지가 않았다. 그는 겉보기에는 경박해 보여도 닌자 단체 후마슈에서 혹독하기 그지없는 수련을 소화해낸 상급 닌자였으며 후계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눈앞의 소년은 동군과 서군이 부딪힌 전장에서 적을 쉴새 없이 베어내면서 계속해서 강해지는 듯 했고, 종래에는 은신해 있는 후마 코타로를 찾아내서 50초 만에 제압해버린 것이다.
최소한 백인참(百人斬)을 달성했다!
게다가 저 눈빛은 도대체 무엇인가?
살면서 난다 긴다 하는 수많은 무사를 보아온 후마 코타로였으나, 무사시의 눈빛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순수하기 그지없는 살기가 마치 인간의 마음을 부숴버릴 것만 같았고 한 줌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백전노장도 많이 보아왔으나 저런 눈빛을 본 적은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다.
철검을 든 채 침묵하고 있던 무사시가 말했다.
“그런 건 알 바 아니야.”
무사시의 칼끝이 서서히 앞으로 내밀어지자 후마 코타로는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잠깐, 잠깐! 나는 상급 닌자다. 나 한테서 정보를 얻을 생각은 없냐?”
그는 직감적으로 상대가 아무런 진영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동군(東軍)의 머리띠를 하고 있으나 저런 건 아무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무사시는 적아군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베어버렸고, 후마 코타로는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무사시는 벼슬을 목표로 참전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무사시는 미친놈이었다.
적아 할 것 없이 학살을 해버리다니.
그리고 아무 욕심이 없는 적은 닌자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대다. 자신의 정보에 욕심이 없는 적은 망설임 없이 목을 베어버릴 것이고, 어떻게든 연명해서 임무를 최후까지 수행 해야 하는 닌자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제기랄! 이 임무는 일족의 명운이 걸린 특급임무다. 끝낼 때까지는 죽을 수 없어….’
그렇기에 후마 코타로는 ‘크윽, 죽여라’같은 상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주저 없이 목숨구걸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무사가 아니라 닌자였기 때문이다.
“정보….”
무사시가 멈칫했다.
“그래, 정보! 나는 핫토리 한조만큼은 아니지만 웬만한 건 다 알고 있다.”
“…….”
무사시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원월천살법에 대해 알고 있나?”
“…….”
후마 코타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자마자 무사시의 칼이 올라갔고 후마 코타로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잠깐, 잠깐! 알 것 같기도 하고….
왜 그리 성급한가, 소년! 당장 생각이 안 날수도 있지 뭐가 그렇게 급해!”
“핫토리 한조라고 했었지. 그 놈은 너보다 많이 알고 있나?”
“그냥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 나도 마음만 먹으면 뭐든 알아낼 수 있어.”
“원월천살법에 대해 알고 있나?”
“그러니까, 음, 사실 처음 듣는다만!”
크게 당황하던 후마 코타로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그래. 내가 들어본 적 없다면 아마 전설의 고류(古流) 문파나 검술이겠지? 그렇다면 내가 그쪽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전문가를 알고 있다. 그 자를 소개시켜 주마.”
“고류?”
후마 코타로가 급히 말했다.
“혼간지(本願寺) 죠노신(丈之進). 혼간지의 법주(法主)다. 전대 법주인 혼간지 켄뇨의 아들이 쿄뇨인데, 쿄뇨의 숨겨진 동생…. 켄뇨의 사생아! 그 놈은 온갖 잡지식을 알고 있으니 네게 도움이 될 거다. 그러니까 이거 풀어줘!”
“…….”
혼간지라면 승려단체를 말하는 거군.
지식을 떠올린 미야모토 무사시는 뚫어져라 후마 코타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일검을 휘둘러서 그를 묶은 포승줄을 베었고, 후마 코타로가 낙법으로 빠르게 굴렀다. 그는 천재닌자답게 일순간에 전신의 관절을 빼서 충격을 줄임과 동시에 밧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실 포승에 묶여서 나무에 거꾸로 매달렸어도 충분히 혼자 힘으로 나올 수 있었으나 – 지금까지 무사시의 간격에 있었기에 빠져나오는 순간 반 토막 나서 베여 죽을까봐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냉막하게 말했다.
“나를 그 법주란 놈에게 안내해라.”
“뭐? 지금 말이냐?”
“당장.”
“으으으으.”
후마 코타로는 울상이 되었다. 안내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세키가 하라 대전 중에는 한 시진이 아까웠다. 조금이라도 빨리 정보를 수집해야 할 마당에 언제 혼간지까지 가서 되돌아온다는 말인가?
그러자 미야모토 무사시가 말했다.
“귀찮게 구는군. 네놈의 임무란 게 뭐냐?”
“윽… 아까 말했잖나.”
“그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속마음을 알면 되는 건가?”
“뭐 그렇지. 그걸 위해서 전장을 염탐하고 있다.”
“가자.”
“……?”
저벅
미야모토 무사시가 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 뒤를 쳐다보던 후마 코타로가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외쳤다.
“자, 잠깐! 설마 지금….”
“닥치고 따라와라.”
미야모토 무사시의 눈에서 흉광(凶光)이 번쩍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한테 간다.”
“……!!”
“속내는 네가 직접 그놈한테 들어라.”
정말 미친놈인건가!
현재 천하통일에 가장 가까운 1인 자이자 대영주에게 간다고?! 그것도 이 거대한 세키가하라 대전투 속에서?! 최소한 10만 대군이 호위하고 있을 그 존재를?
후마 코타로는 입맛을 쩝쩝 다시다가 외쳤다.
“알았다!”
저 건방진 꼬마 놈이 혼란을 일으켜주면 나야 좋지!
그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미친 소리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자신이 풀려났다는 게 중요했으며 일단 풀려난 이상 언제든지 도주할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무사시가 검을 휘두르는 걸 보자 그는 경이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츄와아악
“크아아악!”
“끄아악!”
혈풍(血風)이 비산(飛散)했다. 무사시의 검은 아무런 형식도 없이 막 휘두르는 것 같았으나 휘둘러질 때 마다 은은한 검기를 머금고 오랜 전국시대의 전투로 단련된 정예병을 모두 1초 만에 쓰러뜨렸다.
실로 전장을 지배하는 자!
보통 동영의 전쟁에서는 일개 병이나 하급무사 10여 명이 모여서 일개 대(隊)를 형성하는데, 그 아시가루(足軽)들은 상당히 전쟁에 익숙해 있었기에 아무리 숙련된 무사라도 아시가루 3개 병대를 마주치면 후퇴하기 마련이었다. 숙련된 아시가루 병대는 일개병사라기 보다는 뛰어난 용병에 가까웠다. 그들은 전쟁에 이골이 나 있었기에 멋모르고 병사라고 얕보고 덤볐다가 허무하게 사망하는 상급 무사도 꽤 많았다.
그러나 무사시는 아시가루 병대를 마주치자마자 무조건 달려들었고, 그때마다 그들이 장비한 철모(鐵帽)인 진가사와 함께 모가지가 하늘을 날았다. 그 누구도 무사시의 검술에 일 초도 견뎌내지 못했다.
투둥! 투둥!!
여기저기에서 아시가루들이 조총을 쏘며 무사시를 맞추려 했으나 기이하게도 무사시는 조총이 날아오기 전에 이미 사로(射路)를 읽었는지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냈다. 심지어 등 뒤에서 날아오는 총알까지도 간단히 피해내는 걸 보자 멀리서 지켜보던 후마 코타로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심안(心眼)….”
동영의 날고 긴다는 검호(劍豪)들 중 극히 일부만이 터득했다는 전설적인 경지! 그제야 후마 코타로는 아까 그와 50초를 겨룰 때 그 어떤 암기술이나 철추, 슈리켄을 써도 무사시에게 긁힌 상처도 못 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놈은… 방금 전보다 더 강해졌다. 전쟁 속에서 살육을 겪으며 강해지고 있다!’
그렇다. 무사시는 전쟁에 처음 뛰어들었을 때는 이렇게 강하지 않았으나 싸우면서 알 수 없는 흐름에 몸을 맡기면서 계속해서 자신을 도야시켰다. 전쟁에 참전한지 고작해야 육 일째에 불과했으나, 그 동안 무사시는 밤낮없이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끊임없는 살육에 몸을 담갔고, 그 극한상황은 무사시를 또 다른 경지로 이끈 것이다.
귀면상이 개화한다.
이윽고 무사시가 일대 전장을 돌파 했을 때, 동군과 서군은 적아를 가리지 않고 그가 만들고 간 혈로(血路)를 멍청히 쳐다보았다. 방금 전 까지 무사시에게 학살당하고도 자신들이 어떤 존재를 마주했던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후마 코타로가 뒤늦게 무사시를 쫓아가고 있을 때였다.
흠칫
후마 코타로는 강렬한 기운을 느끼고는 재빨리 은신했다. 그리고 전장에 우뚝 서 있는 한 상급무사가 예리한 살기를 뿜어내며 무사시의 뒷 모습을 좇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 무사의 얼굴은 후마 코타로가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칠본창(七本槍) 오노 지로우에몬 타다아키(小野 次郎右衛門 忠明)!!’
저 괴물이 여기에 와 있었단 말인가?!
이 또한 특급정보였다. 왜냐하면 저 오노 타다아키야말로 전국시대 최강의 검호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었으며, 다른 칠본창이 그저 명성으로 그 자리를 차지한 것과는 달리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절대적인 실력자였기 때문이었다. 광검(狂劍)이라는 별칭마저 있는 저 괴인이 어찌나 강력한지, 한때 오노 타다아키를 염탐하던 닌자 단체가 괴멸한 적도 있었다.
그 혼자서 일천의 병사에 필적한다는 대검호!
타닷
이윽고 칠본창 오노 타다아키가 마치 구름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것은 체계화된 무가의 병법이었으며 정밀한 보법이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사시가 간 방향이었다.
‘흐흐흐…’
후마 코타로는 두근거림을 느끼면서 천천히 그들의 뒤를 쫓았다.
광검과 소악귀.
잠시 동안 그가 후마슈의 임무를 잊을 정도로 흥미로운 만남이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