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Biopsy RAW novel - Chapter (93)
0093 ———————————————-
암천향(暗天鄕)
정철욱을 통해 십이율에 전달한 비무첩은 약 한 달이 지나서 답신이 되돌아 왔다. 거기에는 내 비무신청을 십이율 문주 전원이 수용했으며, 원할 때 언제든지 찾아오라는 대답이 적혀 있었다. 정씨 가문의 심부름꾼을 통해서 내가 그 비무첩을 전달받아서 읽고 있자 화서명이 말했다.
“백웅. 정말로 십이율과 부딪힐 생각이냐?”
“부딪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서로의 기술을 겨루어서 실력을 향상시킬 기회로 삼는 거죠.”
“번지르르한 말을 하지 마라. 내가 중원 하북의 의문(醫門)을 이끌었던 자인데 강호의 생리를 모를 것 같으냐? 지금 당장은 정철욱의 눈치가 보여서 네게 함부로 할 수 없겠으나, 정씨의 비호는 한계가 있다. 정철욱이 권력구도에서 밀려나거나 한다면 십이율은 결코 너를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적어도 십수년 이후의 일이겠지요.”
“물론 내가 말한 건 확률이 낮은 일이다. 십이율은 그리 소인배만 모여있는 집단이 아니니. 하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무공 경지를 높여야 하는 것이냐?”
화서명의 눈에는 걱정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의 친아들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화씨세가의 의술을 전수받는 직전제자였으므로, 내가 잘못되면 화씨세가에도 큰 피해가 오는 셈이었다. 나는 읽고 있던 의서를 덮으며 대답했다.
“저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습니다. 무예의 경지를 높이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지킬 수가 없지요. 저는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고, 이 길의 끝에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으음. 그렇게까지 생각한다면 더는 아무말 않겠다.”
그렇게 말한 화서명이 곰곰히 생각한 후 말을 이었다.
“너는 허기심(虛基心), 실기복(實基腹), 강기근(强基筋), 약기골(弱基骨)을 어느 정도나 이해하고 있느냐?”
“화타오금희(華?五禽戱)는 7년 전부터 꾸준히 수련하고 있어서, 지금은 왠만큼 알고있다고 생각합니다.”
화서명이 고민하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그러면 내가 그 응용법을 가르쳐 주겠다.”
“응용법이라고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지난 세월동안 의술을 전해받으며 화씨백팔침과 화타오금희를 배웠다. 그러나 화씨백팔침은 확실히 무공수법으로도 분류될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화타오금희는 건강체조에 가까운 도인술이었다. 무공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동네무관에서 가르칠 법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화서명이 열심히 익히라고 하길래 그동안 화타오금희를 매일같이 익히긴 했다.
화서명이 말했다.
“네 화씨백팔침의 수준이 좀 더 오르면 이야기해주려 했으나 어쩔 수가 없지. 사실 화타오금희에는 숨겨진 비기(秘技)가 존재한다.”
“비기라구요?”
화서명은 옆에 있던 단엽차를 들어서 잔에 따랐다.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차를 두 손으로 든 화서명이 말했다.
“너는 무림(武林)에서 의원이란 게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느냐?”
“그야 다치고 아픈 자를 치료해주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건 1차적인 모습일 뿐이다. 실제로는 의원이란 은원(恩怨)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태풍의 눈이다.”
차를 한 잔 마신 화서명이 말을 이었다.
“갑(甲)이란 자가 을(乙)과 싸우다가 치명상을 입고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의원을 찾아갔다. 이 경우 의원이 갑을 살려낸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 을과 싸우러 가겠죠.”
“그리고 만일에 갑이 을에게 복수를 성공한다면 을은 누구를 원망할까?”
“……”
“그런 것이다. 을에게 있어서는 갑보다는 되려 의원 쪽이 밉고 원망스러운 존재일 수 있다. 을 또한 자신의 목숨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해서 방어한 것일텐데, 의원이 갑의 목숨을 살려줌으로써 자신의 목숨과 가족이 위험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원수도 이런 원수가 따로 없지.”
내가 할 말을 잃자 화서명이 말했다.
“그래서 왠만한 의원들은 무림의 일에 절대 관여하지 않으려 든다. 하지만 무림인들도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으므로 필사적으로 의원을 찾아다닌다. 조금 실력있고 명성있는 의원이라면 무림인과 관계되지 않을 수가 없지. 무림인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한 번 받아보려고 얼마나 더러운 수를 쓰는지 알면 기가 질릴 게다.”
“으음…”
“그렇게 되자 은원관계에 휩쓸린 의원들이 무림인들의 눈없는 칼에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현재 무림에서 활동하는 의원들은 타개책을 찾아내었지.”
“그게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자기자신을 지키는 호신술을 개발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세력가를 찾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죽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
“화타오금희에는 호신술과 죽는 방법이 포함되어 있다. 화씨세가가 하북에서 오랫동안 의약명문으로 버티면서도 큰 참화를 입지 않고 버틴 것은 화타오금희의 묘용 덕분이었다. 나는 이제 그걸 네게 가르치고자 한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질문했다.
“죽는 방법이라니? 죽는 척을 한단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것이다. 사실 도가의 도인법과 양생술은 의가(醫家)의 그것보다 훨씬 뒤쳐진다. 호흡을 제대로 써서 자신의 육체에 존재하는 모든 불수의근(不隨意筋)과 내부구조를 통제할 수 있다면,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내고도 최소의 피해로 최대한 죽은 척을 하며 버틸 수가 있다.”
그렇게 말한 화서명이 빙긋 웃었다.
“꼴사나워 보이지? 그러나 화씨세가 역사 수백수천년 동안 화타오금희를 이용해서 자신의 목숨을 구원받은 인물이 수백 명도 넘는다. 최고의 구명절초(求命絶招)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진작 가르쳐 주셨어도 될텐데…”
“화타오금희의 비기를 시전하기 위해서는 화씨백팔침의 수준이 일정경지 이상 올라있어야 한다. 화씨백팔침에서 사용하는 진기와 혈맥의 흐름을 이해해야 사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동안은 네 의술이해가 높아지기를 바라며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군요.”
“네가 십이율과의 대련에서 어떤 결과를 얻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화타오금희의 비기를 익힌다면 절대 큰 부상을 입지 않고 안전하게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약 반 년에 걸쳐서 화서명에게 화타오금희의 비기를 전수받았다. 화서명의 말대로 화씨백팔침을 모른다면 아예 터득할 수 없는 비기였다. 나는 그 이후에야 십이율에게 비무를 신청하기 위해 나설 수가 있었다.
첫 번째 비무대상은 창룡문(蒼龍門)이었다.
쏴아아아 –
나는 비오는 날, 목조 건물의 커다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창룡문의 처마 밑에 서 있던 문지기가 비무첩을 받아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창룡문의 내부 대련장으로 향할 수가 있었다.
후두둑
바깥에서는 창문을 통해 차가운 습기와 물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가끔 벌레소리도 크게 울렸다. 그러나 실내는 더없이 조용했고, 약 십여 명의 창룡문 제자들이 정좌하고 앉아서 대련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내 앞에는 창룡문주가 나와 있었다. 그는 호쾌한 인상을 지닌 중년인이었는데 자신의 허리춤에 거도(巨刀)를 장착하고 있었다. 십이율에서 거도를 다루는 문파 창룡문의 주인이 눈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창룡문주가 말했다.
“언제 올까 싶어서 기다렸는데, 나를 십이율 비무 첫 대상으로 해 주다니 감격스럽군 백웅.”
“창룡문의 창룡도법(蒼龍刀法)은 천하일절이라고 들었기에 꼭 견식해보고 싶었습니다.”
“우하하, 그건 누가 말한 건가? 괜히 금칠을 해 주다니 민망한걸.”
“정 가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대답에 창룡문주가 눈을 약간 가늘게 떴다. 그의 눈에는 기쁨과 동시에 의심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정말인가? 그거 참 영광스럽군…”
“이 자리에서 몸을 사리고자 거짓을 말하는 일은 없습니다.”
“후후후. 자넨 나이답지 않게 머리를 많이 쓰는구만.”
“창룡문주님과의 대련은 제게 큰 복(福)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빈틈을 보여주지 않자 창룡문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그래. 그럼 어디 비류문주가 감탄했다는 중원의 천재아(天才兒)의 실력을 좀 볼까?”
끼잉 –
창룡문주의 거도와 내 창(槍)이 거의 동시에 기음(奇音)을 내며 뽑혀 나왔다. 기실 뽑는 소리 자체는 거의 나지 않았으나, 창룡문주와 나의 기(氣)가 충돌하며 생긴 현상이었다. 잠시 허공에 충격파가 생겨나자 주변의 창룡문 제자들 중에서 내상(內傷)을 입고 각혈을 하는 자가 나타났다.
“커헉.”
“이런! 진기를 추슬러라.”
“면목 없습니다.”
창룡문주가 미간을 좁히며 말하자 제자들이 부상자를 부축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좀 더 먼 곳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거의 건물 밖의 처마에서 비를 맞다시피 하면서 관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창룡문주가 거도를 자신의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른 것인가? 자네의 내공은 엄청나다고 들었는데 마치 내부에 꽁꽁 뭉쳐서 잠재되어 있는 것 같군.”
“반박귀진은 그리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지요. 편의상 기술을 써서 봉인해두고 있을 뿐입니다.”
“솔직해서 좋군. 그럼 한 번 놀아보세!”
콰과광
격돌이 시작되었다. 나는 창룡문주 또한 초절정고수라는 걸 직감했기에 탐색전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고수인 게 확실하므로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서 승기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내 창이 명동(鳴動)하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을 머금은 찰(刹)을 뿜어냈다.
창룡문주는 손쉽게 그 공격을 걷어내려다가 눈을 홉떴다.
까앙!
“……!!”
창룡문주의 거도가 두 쪽으로 부러지더니, 그의 몸뚱이가 붕 떠서 뒤로 날아가버린 것이다. 그에게 큰 충격은 없었으나 크게 놀란 듯 했다. 그는 허공에 발을 붙여서 다시 천근추의 경공으로 땅에 내려앉았다. 창룡문주는 부러진 자신의 거도를 보더니 경악하며 말했다.
“이건 정련된 청강(靑鋼)으로 만든 것인데 대체 무슨 내공인가…?!”
“엄살부리지 마십시오. 막을 수 없다면 흘려내면 된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뭐 그렇군… 그럼 이대로 해 볼까.”
부러진 도를 가지고 나와 싸워보겠다는 말인가?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재차 공격해 들어갔다. 이번에는 뇌영보 천주살을 공격에 쓰면서 여러번 굽어치듯이 창을 여러 방향에서 내질렀다. 변화무쌍한 공격이 이어지자 창룡문주는 부러진 거도를 휘두르며 방어에 나섰는데, 내 공격이 모두 흘려지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키기깅
‘ 이 자도 괴물같은 실력이군… 저 무겁고 투박한 거도로 화경을 쉽게 쓸 줄이야.’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왠만한 실력자라고 해도 내 내공을 담은 창격을 흘리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러나 창룡문주는 내 공격의 흐름을 모두 파악하고 일일이 버드나무처럼 흘릴 수 있는 것이었다. 단순히 내공의 우위로는 판가름을 낼 수 없는 초절정고수라는 뜻이었다.
잠시 후 창룡문주가 반격을 개시했다. 그는 자신의 도를 크게 휘둘러서 내 란(欄)의 수법을 쳐내고는 반탄력을 이용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어깨에 도를 얹은 포복세(匍匐勢)를 취하고는 점점 빠르게 회전(回轉)하기 시작했다.
위위위윙…
기경한 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지더니 풍압이 창룡문주 근처로 끌려들어갔다. 그러더니 그의 몸은 회전에 감싸여서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갑자기 튕기며 옆으로 쇄도해 왔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으므로 공격을 막을 수 있었으나 무려 여섯 개나 되는 도염(刀炎)이 연속으로 날아오자 경악했다.
“윽…!!”
도염을 급히 쳐내는 동안에도 창룡문주의 회전력은 계속되었다. 그는 왼발을 축으로 중심을 잡으며 균형을 잡았는데, 마치 연무장을 빙빙 돌듯이 이동을 계속했다. 나는 수십 명이나 되는 적에게 갇힌 듯한 압박감을 느끼며 창을 세게 잡았다. 나는 창룡문주의 공격에 맞서서 이번에는 뇌영보 천주살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파앗!
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뇌영보 천주살로 최초의 공격은 수월하게 피할 수 있었지만, 결국 회전에 뒤따라 끌려오는 도염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가만히 있다가 반격하는 것만 못했기에 나는 팔과 허리에 생긴 도상(刀傷)을 어루만지며 긴장했다.
‘ 이게 말로만 듣던 전륜도(轉輪刀)인가?’
서장의 무공에서나 볼 수 있다는 회전하는 도법이 창룡문주에게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창룡문의 무공특징이 이런 거라고 알고 오긴 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더 강력했다. 특수한 내공심법으로 회전을 이끌어내서 상대방에게 자동으로 연속공격을 가하는 전륜도는 일반적인 무인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죽음의 도법이었다.
당황하지 말자.
당황하면 필패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생각했다.
‘ 허기심. 실기복. 강기근을 거쳐 약기골.’
화타오금희는 단순한 진기도인술이 아니라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십이정경(十二正經)의 하나로써 가슴속에서 시작하여 심포(心包)에 속하고 횡격막을 지나 내려가 삼초(三焦)에 속하는 부분이었다. 보통의 무공수련자는 그저 진기가 통하는 길로만 활용할 뿐이었으나, 화타오금희는 더욱 나아가서 각 세혈의 특수한 능력을 시전자에게 부여하는 게 가능했다.
‘ 엄지손가락은 폐(肺). 검지는 대장(大腸). 중지는 심포(心浦), 무명지는 삼초경(三焦經), 새끼손가락은 심경(心經)…’
속으로 화타오금희의 주된 요결을 외우는 동안에 속이 타들어갔다. 집중력이 마치 불붙인 촛농처럼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간에는 혼이 머물고, 폐에는 백이 머문다. 혼은 눈동자이고, 백은 부릅뜨는 곳에 붙어 있다.’
파앗!
왔다.
나는 화타오금희의 비기가 제대로 발동하는 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바람을 부수며 창룡문주의 회전 도법이 몰아쳐 왔고, 나는 창두(槍頭)을 기민하게 움직이며 거기에 대응했다. 이번에도 똑같이 뇌영보 천주살을 펼치면서 그의 공격에 맞선 것이다.
창룡문주가 비웃는 듯 전음을 보내 왔다.
[ 어리석은!]그의 말마따나, 창룡문주의 회전도는 내 방어를 마음대로 뚫는 연속된 도기(刀氣)의 중첩이었다. 게다가 창룡문주는 도염을 익혔기에 상대를 더욱 쉽게 회쳐버리는 게 가능했다. 지금의 나처럼 대응해서는 상반신이 잘 다져진 고깃조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과과광!!
“커허허헉!!”
창룡문주가 비명소리를 지르며 날아가더니 목조건물의 벽을 뚫고 훨훨 날아가서 건물 외벽에 부딪혔다. 무너진 돌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대포의 그것과 다름없는 거대한 폭음이었기에 창룡문 제자들이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기도 했다.
쏴아아아…
나는 비를 맞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무너진 벽에 풀썩 기대어있는 창룡문주는 전신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의 거도는 반쪽으로 부러진 수준을 넘어서 이제 손잡이만 남아 있었다.
그렇다.
마지막 합에서 내가 휘두른 창은 그대로 창룡문주의 도를 파괴해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순조롭게 내 거대한 공력을 흘려내던 창룡문주는 갑작스러운 일격에 회피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역전타를 맞아버린 셈이었다. 치명상은 없는 듯 했으나 창룡문주가 상당한 부상을 입은 건 확실해 보였다.
창룡문주가 주저앉은 채로 자신의 얼굴에 묻어있는 피를 닦으며 말했다.
“으하하… 이거 참 꼴좋게 당해버렸군. 허실(虛實)에 꼼짝없이 농락당했어.”
나는 뺨에 흐르는 빗물을 닦으며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문주께서 무기를 새걸로 교환하셨다면 알 수 없었을 겁니다.”
“아닐세. 설마 그 내공을 더욱 응축(凝築)해서 한 점에 모을 수 있다니…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어.”
쓴웃음을 지은 채 창룡문주가 돌무더기 속에서 일어섰다.
“마지막의 그 수법은 무엇인가? 자네 문파의 비전인가?”
“그렇습니다.”
“최후의 한 수를 숨기고 가짜약점을 내보이며 끌어들인다라… 자네는 전투경험이 정말 많은가보군.”
기가 질린 듯 말한 창룡문주가 말했다.
“이건 내 패배일세. 실전이었다면 나는 이미 죽었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한 수를 숨기고 있지 않으십니까?”
“후후, 겸손하군. 자네가 마음만 먹었다면 아까 응축된 힘을 더욱 확산시켜서 내 상체를 분쇄시킬 수 있었을 텐데…”
“……”
“그건 단순히 예절로 배운 겸양이 아니군. 모르긴 해도 자네는 아수라장을 겪어온 게야.”
나는 아직까지 정상적인 무공교환으로 초절정급 고수를 이기는 게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뇌명이라도 쓰지 않는 한은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그를 지척까지 끌어들인 후, 화타오금희의 수법을 써서 격퇴시킨 것이다.
화타오금희로써 전신의 세맥을 통제하고 고유효과를 낼 수가 있었는데, 이번의 내공응축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원래 내공을 통제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집중과 분산을 잘 하지 못했는데, 화타오금희의 요결을 이용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내공을 한 점에 모아서 증폭시키는 게 가능했다. 즉 원래대로라면 내 내공을 흘려낼 수 있는 자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하하하… 십이율 문주와 싸운다길래 허세인 줄만 알았는데 과연 승산이 있어서 덤빈 거였군. 하지만 말이지,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게.”
“네?”
“내가 보기에 자네의 한계는 최대 5승까지야. 그 이상을 하려 들면 자네는 죽어.”
“……”
창룡문주가 씁쓸하게 말했다.
“짐작한 것 같지만 십이율 문주 사이에서도 무공 편차가 꽤 큰 편일세. 특히 삼강(三强)이라 불리는 십이율주, 사울아비, 조의선인(早衣仙人)은 격이 다른 존재들이야. 너무 무리는 하지 말게.”
무리라고 하는 것은 내가 섣불리 승리를 거두려고 발악하다가 그들의 심기를 거슬러서 살해당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 같았다. 행간을 알아차린 내가 말했다.
“겁 주는 겁니까?”
“내가 자네에게 겁을 줄 이유가 있겠는가? 나는 자네가 젊은 나이에 너무 큰 벽을 느끼고 좌절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 뿐일세…”
“조언 감사합니다.”
“잘 가게.”
나는 창룡문을 걸어 나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 뇌명을 쓰지 않고도 작전을 잘 짜면 초절정고수에게 이길 수 있다.’
그리고 얻은 것도 많았다. 실전에서 화타오금희의 비전을 응용했을 뿐만 아니라 전륜도법이란 게 무엇인지도 알 수가 있었다. 이 기세로 십이율 전원과 겨루게 된다면 틀림없이 큰 성과를 얻게 될 것이다.
어차피 전승(全勝)을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겨루면서 내 무공을 발전시키는 것 그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호국동맹(護國同盟)이었다.
호국동맹(護國同盟)의 맹주(盟主)인 여명(麗明)은 창룡문주와 달리 고려 귀족의 복식을 입고 있는 자였다. 또한 그가 머물고 있는 것은 흔한 무림문파의 건물이 아니라 고려의 왕족만이 거할 수 있다는 대전(大殿)이었다. 옥빛 태사의에 앉아서 내 대면을 허락한 여명이 말했다.
“백웅.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 호국동맹은 고려를 암중에서 수호하는 수호대장의 역할을 맡고 있다. 나 또한 고려의 귀족이자 왕족이다. 그래서 자네의 비무첩지를 받았으나, 내가 자네를 직접 상대하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왕족의 혈족은 함부로 대련이나 비무에 자신의 몸을 노출시킬 수가 없었다. 왕족의 피는 드물고 고귀했기에 법으로 정해져 있는 일이었다. 물론 여명의 무공도 초절정에 이르러 있는 듯 했으나 그런 본신의 무공과 상관없는 일로 보였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내 대표자를 대신 내보내지. 마침 그 아이도 자네와 다시 겨루고 싶다고 벼르고 있었네.”
스윽
호국동맹주 여맹의 뒤쪽에서 한 사내가 걸어나왔다. 그는 내가 익히 본 적 있는 사내였다.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자륜.”
“간만이오, 백웅. 나는 8년 전 그날 이후로 당신과 다시 겨루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소.”
그는 내가 고려에 처음 왔었을 당시에 내 비무상대로 올라왔었던 호국동맹의 후기지수, 자륜이었다. 그와는 이야기를 거의 해보지 못했으나 함께 서경 구미호 토벌에 참전했던 인연도 있었다. 그 당시부터 꽤 시간이 지나있어서인지, 자륜의 외견은 어느덧 30대의 모습이 완연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 원한을 갖고있는 건가?”
“그럴 리가. 물론 어린 소년이던 당신에게 처음 졌을 때는 울화가 치밀었으나, 그건 전적으로 내가 불민해서였소. 나는 그 이후 호국동맹의 비급을 익히며 성실하게 무공을 수련했으니, 당신은 이번에야말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오.”
옆에 있던 호국동맹주 여명이 거들었다.
“자륜의 실력은 현재 나를 뛰어넘는다. 호국동맹 최고의 고수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렇겠지요.”
나는 납득했다.
애초에 20대의 나이에 절정고수에 올라서 대문파 장로급 실력을 지니고 있던 수재가 자륜이었다. 그런 그가 설욕을 하려고 십여 년 가까이 용맹정진했다면 초절정의 벽을 뚫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나도 그 동안 무공수련을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지금와서 보니 약간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대결이 시작되었다.
나는 자륜을 상대로 약 칠백 초를 싸우다가 패배하고 말았다. 자륜은 창룡문주보다 도리어 한 수 위의 실력인 듯 했고 검염을 자유자재로 시전했으며, 환검(幻劍)에 있어서 일대종사나 다름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뇌명을 쓰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화타오금희를 최대한 응용했는데도 패배했으니 변명할 길이 없었다.
자륜이 비무에서 승리한 후 검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오랜 한이 풀어진 기분이오.”
“이제 속이 시원한가?”
“하하… 그럴 리가.”
자륜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이겼는데도 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당신의 소식을 전해듣고 있었소. 그간 의술만 배우면서 무공을 거의 수련하지 않았다던데 이 정도라니… 당신의 내공은 정말 비상식적이오.”
“으음.”
“하지만 긴장하시오. 앞으로 10년 후에 다시 만나면, 나는 그 때야말로 당신을 압도적으로 이기고 말겠소.”
나는 그 말을 듣자 속으로 생각했다.
‘ 10년?’
어느 새 그렇게 긴 시간을 말할 수 있는 때가 된 건가.
나는 내가 정말로 오래 살아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바로 진짜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
십이율과의 마지막 대결이 찾아왔다.
나는 반 년 동안 십이율 각지를 찾아다니면서 차례로 비무를 했고, 이제 남은 것은 십이율의 지존이라고 불리는 십이율주와 싸우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십이율주를 만나기 위해서 장백산 고미 지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나는 한적한 산길에 앉아서 쉬며 탄식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창룡문주, 정말 안목 하나는 뛰어나군. 나는 정확하게 5승을 했소.”
승리한 문파는 창룡문, 거련부, 풍원류, 허검류, 비류문.
패배한 문파는 해동밀천, 호국동맹, 사울아비, 조의선인, 불종, 북해문.
내가 승리한 창룡문주에서부터 비류문주까지 5명의 실력은 비슷비슷했다. 그들은 초절정의 초입에서 막 넘어가려는 수준이었고, 그 정도는 내 압도적인 내공과 작전, 화타오금희의 응용으로 어찌어찌 승리할 수 있었다. 호국동맹의 자륜에게 패배한 것은 순수하게 경지에서 밀렸으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해동밀천과 불종의 수장들은 그들보다 다른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상급의 술수를 시전하면서 술법으로 압박하자 도저히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내가 술법을 더 익히지 않으면 상대할 수 없는 부류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사울아비와 조의선인, 북해문 3대문파의 수장들은 지금의 내가 어쩔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서 살아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으로써, 그들은 십이율이자 동시에 요동의 패자(覇者)급 존재들이었다. 북해문이 북해빙궁(北海氷宮)이라고도 불린다는데서 그 위상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번 비무행에서 내가 얻은 것을 되새겨 보았다.
‘ 화타오금희를 실전에서 완벽하게 쓸 수 있게 되었고, 덤으로 내공의 응축과 확산이 더욱 쉬워졌다.’
십이율의 최고수들이 어떤 수준인지 파악하게 되었고 수를 겨뤄봤다는 게 중요했다. 이 경험은 나중에 초절정으로 올라갈 때 굉장히 요긴하게 작용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십이율 최강이라고 불리는 십이율주와 겨루게 되면 이 비무행도 끝날 것이리라.
장백산까지 와서 고미 유역을 찾아서 험난한 산맥을 넘나들다보니 십이율주가 있다고 짐작되는 장소가 보였다. 나는 장백산 초입에 존재하는 큰 마을을 향해 걸어들어갔다. 아마 이 마을이 십이율의 본단이라고 불리는 신단(神檀)일 것이다.
신단에 들어오자 왠 강아지탈을 쓰고 있는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와서 말했다.
“여어 반가워 백웅. 오느라 힘들었지?”
“당신은?”
“내가 십이율주야.”
“……”
강아지 탈에, 강아지 전신인형탈을 쓰고 있는 괴인(怪人)의 자기소개에서, 나는 이번 비무행의 마지막이 순탄치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