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aceful bullpen life RAW novel - Chapter 128
※ 128화. 임호택
올해는 우리, 즉 원하가 상수보다 잘한다.
고심 가득했던 말을 생각없이 내뱉은 파장은 생각보다 빠르게 나타났다. 당장 상수 타이거즈의 팬덤에선 내가 죽일 놈 비슷한 게 돼버렸거든.
그리고 장작을 계속해서 지피는 건 나, 혹은 원하에 대한 헤이터들이었다. 상수의 팬덤은 그들의 선동에 휘말려,
[원하 같은 쩌리가 상수한테 덤빌 자격이나 있음?] [그래도 상수가 우승이지 ㅋㅋㅋㅋ] [어우상 ㅇㅇ]꽤나 시니컬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니컬한 반응? 그래, 시니컬한 반응.
그들이 고작 그 정도에서 더 엇나가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분명 존재했다.
1. 원하 챌린저스 21승 9패
2. 상수 타이거즈 19승 10패
…….
8. 가야 퍼펙터스 9승 20패
이유가 뭐긴. 실적이지.
원하는 계속해서 승리를 쌓아갔다. 정규시즌 1위를 향해 쭉쭉 달려나갔다.
상수 타이거즈를 한 게임 반 차이로 따돌린 채 맞이한 화요일. 야구선수의 입장에서 한 주의 실질적인 출발은,
따악-!
“달려, 명진이 달려어!!”
“나이쓰 배앳!”
명진이의 우전안타로 시작되었다.
리그 중위권, 비스코 러너즈의 홈 구장인 인천 문학구장으로 처들어와 우리는 당당하게 손바닥을 내밀며 승리를 요구했다.
이후 성현이가 번트를 대어 명진이를 진루시키고, 기성이의 적시타로 한 점을 뽑아냈다.
진형이가 삼진을 당한 뒤 승주가 2루타로 다시 불씨를 지피긴 했지만 뒤이어 성훈이형이 3루 땅볼로 물러나며 이닝은 그대로 종료.
1회 초 공격부터 여섯 명의 타자가 나서서 한 점 밖에 뽑아내지 못 했다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퍼엉-!
“아, 혁준이 가자!”
“혁준이 뽈 좋아악!”
괜찮아. 어차피 혁준이가 점수를 안 주면 이기는 거잖아.
야구는 반복의 스포츠다. 지금까지 축적된 데이터 중 승리에 최대한 가까운 레퍼토리가 있다면 무한정 끌어다 써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라는 게 선발진의 호투와 타선의 지원, 그리고,
“한울이, 9회 마무리 가자.”
“아, 제가 마무리요?”
“어어.”
“네.”
믿을맨 가득한 불펜진의 압력 정도.
참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팀의 승리가 많다는 건 계속해서 좋은 불펜진들을 소모했다는 이야기와도 같다.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
월요일 하루 휴식을 취하긴 했지만, 직전 주말 시리즈 3연승 기간 동안 내내 세이브를 기록했던 경석 선배 대신 오늘은 내가 마무리로 나서게 되었다.
투수코치님의 지시에 따라 옆 난간에 걸쳐있던 글러브를 곧장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전광판을 확인하니 지금 우리팀이 낸 점수는 1회 초, 기성이가 쳐낸 한 점이 전부인듯하다.
그럼에도 ‘마무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걸 보니 혁준이는 8이닝 동안 허용한 실점이 0이라는 것과 같고.
“오늘따라 좀 답답하게 흘러가네.”
“그러게요.”
투구 전 어깨쪽을 쭉쭉 늘려주며 뱉은 혼잣말에 옆에 있던 지호가 대답했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데.
혁준이가 비스코의 점수판을 0이라는 숫자로 쭈욱 잇고 있다는 점은 분명 환영할만 이야기지만, 우리도 1을 한 번 기록한 뒤 그 뒤로 계속 0을 진행시킨다는 건 썩 좋은 일은 아니다.
“오늘 저기 임호택 선배님도 공이 엄청 좋네요.”
“그러게….”
8개의 각 구단에서 1선발들을 내세웠을 때 정해지는 8명의 1선발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을 임호택.
38살, 야구선수로서는 황혼에 접어든 시기지만 각종 변화구와 제구, 변형 패스트볼 등을 앞세워,
딱-!
“마이, 마이, 마이!”
우리 챌린저스의 타선을 농락하고 있다.
지금, 9회 초까지 임호택이 뺏어낸 삼진은 단 세 개. 하지만 피안타 또한 1회 초에 허용했던 세 개가 전부.
저게 연륜이지.
나이 먹으면 저 선배처럼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실질적으로 내가 나이 먹고 구속이 떨어졌을 때 모습과 가장 비슷한 선배기도 하고.
그 때문인가,
“싱커!”
“아이, 싱커!”
스트레칭과 캐치볼을 완료한 뒤 시작한 불펜 피칭의 초구는 변형 패스트볼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싱커였다.
뻐엉-!
“어우, 형 그립 바꿨어요?”
“아니? 그대론데 왜, 별로야?”
“아뇨아뇨. 좋긴 한데 각이 너무 커요.”
“아, 그래? 오케.”
힘이 좀 들어갔나.
손의 감각을 되살려보기 위해 눈 앞에 공을 쥔 손을 두고 이리저리 꺾어봤다.
아, 오케.
“싱커 한 번 더.”
“아이, 씽카!”
기본적으로 싱커는 각이 큰 변화구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손가락 사이의 거리나 손목의 각도 등으로 각을 키우거나 아래로 떨굴 때도 있긴 하지만,
“읍!”
퍼엉-!
싱커의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아이, 이거 좋다!”
작게, 대신 빠르게.
“한울이, 올라가자.”
“예!”
싱커에 어지간히 심취해있던 탓인지 불펜피칭 내내 싱커만 던진 느낌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듯,
띠링-!
[땅볼러]– 내야 땅볼로만 3아웃을 잡으세요 (0/3)
– 보상 – 싱커 +2
이닝이 시작하기도 전 등장한 퀘스트는 대놓고 싱커를 언급하고 있었다.
연습투구를 위해 플레이트를 밟은 채 기성이의 머리 위를 잠시 응시했다. 텍스트의 내용을 확인한 뒤 공인구를 살살 만지며 손가락에 대한 감각을 키웠다.
“싱커라….”
굳이 땅볼을 잡기 위해서 싱커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커브도, 스플리터도, 하다못해 직구도 잘못 치게 만들면 곧 땅볼을 양산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읍!”
퍼엉-!
그래도 싱커는 못 따라오지.
연습투구 동안에도 계속해서 싱커만을 던지며 최대한 땅볼을 양산해낼 기획서를 제출했다.
2번타자, 김!! 욱!!
포수가 기획안의 내용을 확인할 동안 장내 아나운서는 홈 팀 타자의 등장을 알리며 시간을 잠시 벌어주었다.
“플레이!”
아까 보내줬던 기획서가 꽤나 마음에 들었나.
“끅!”
우리 포수님께서는 초구부터 싱커를 요구해오셨다.
딱!
“파울!”
KBO 최단신인 김욱의 입장에선 더더욱이 멀어보일 공은 배트 끄트머리쪽으로 도망가버리며 파울이 되었다.
타자의 반응을 한 번 확인한 규학이는 다음 공 역시 싱커를 요구했다. 초구와 완전히 똑같은 사인.
“흡!”
딱히 검지에 조금 더 힘을 넣는다든지, 아니면 회전에 신경을 쓴다든지의 머리 아픈 짓은 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잡고 있는 그립을 따라 공이 알아서 회전하겠지. 그렇게 날아가다보면 알아서,
딱―
땅볼이 나오겠지.
“세컨 대시!”
“런닝으로, 바로 쏴야돼!”
당겨치라고 준 공을 정말로 당겨쳐버리면 웬만해선 좋은 결과가 나오기 힘들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빵!
“아웃!”
첫 바운드가 살짝 큰 탓에 1루에서 타이밍이 조금 애매하기는 했지만, 성문이는 센스껏 앞으로 대시하며 빠르게 끊어던졌다.
덕분에 1루에서도 비교적 여유가 느껴지는 아웃 카운트 하나를 적립.
호수비를 마친 이후 해맑게 웃으며 볼을 돌리는 성문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그저 흐-뭇해졌다.
띠링-!
[땅볼러]– 내야 땅볼로만 3아웃을 잡으세요 (1/3)
– 보상 – 싱커 +2
그리고 카운트가 올라간 퀘스트의 현황을 보면서도 마음이 흐-뭇해졌다.
“아, 성문이 나이스!”
“형도 나이스요!”
짜식.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고선,
3번타자, 방!! 은!! 민!!
다음 타자에게 다시 초점을 맞췄다.
방은민…땅볼…….
싱커를 던져서 땅볼을 유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는 게 먼저 아닐까.
“흐음.”
홈 플레이트서부터 적당한 거리를 벌린 채 투구를 대기하고 있는 방은민의 모습이 보였다.
좌우에 대한 큰 약점이 없는 방은민이기에 오히려 이 계획이 먹혀들 가능성이 크지만, 이 계획을 위한 사전 작업 하나는 필요하다 느꼈다.
바로 타자를 홈 플레이트쪽으로 붙여둘 것.
일단 바깥쪽으로 직구 하나를 던져놓자.
“윽!”
뻐엉-!
“…스트라이잌-!”
심판의 콜이 살짝 늦게 나온 걸 보니 내 특기와 규학이의 특기가 제대로 먹힌 모양이다.
그리고 다음 사인. 몸쪽 직구, 몸쪽 싱커, 떨어지는 스플리터, 모두 거절한 뒤 내쪽에서 사인을 보냈다.
바깥쪽에서 더더욱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슬라이더.
고작 공 두 개지만 일단 신경을 바깥쪽으로 몰아둘 명분은 충분하겠다는 마음으로 횡적인 움직임을 표현해봤다.
뻥!
“볼!”
배트가 움찔거리긴 했지만 돌았다고 판정하기엔 정말 어림도 없다.
괜찮아.
볼이 되었지만 괜찮아. 여기서 바깥쪽으로 직구 하나를 빠지도록 던진다면,
퍼엉-!
“볼-”
또 하나의 볼이 생성되지만 이 또한 괜찮다.
엄지랑 검지.
봐봐. 타자의 스탠스가 홈 플레이트쪽으로 조금이나마 붙었잖아.
규학이는 타자의 좌표를 확인한 뒤 몸쪽으로 슬금슬금 붙어앉았다.
“읍!”
연습투구 때 싱커만 주구장창 던져서 암묵적인 사인을 보낸 보람은 분명히 있었다.
따악―
“성훈이형, 천천히! 천천히!”
“아이, 1루!”
갑작스러운 몸쪽 공, 그것도 몸쪽에서 더욱 몸쪽으로 붙어 파고드는 공에 타자는 오른손의 통증을 듬뿍 느끼고 있었다.
1루로 전력질주를 해도 될까말까인데 조금이라도 덜 아파보겠다고 오른손을 탈탈 털면서 뛰면 절대로 좋은 속도를 낼 수 없다.
그럼 뭐,
빵!
“아웃-!”
1루에서 아웃 당하는 거지.
직전 김욱 때의 타구와 거의 비슷한 첫 바운드를 기록했지만 조금 더 빠르고 훨씬 가까이서 잡힌 덕에 성훈이형은 한껏 여유롭게 아웃 하나를 더 잡아냈다.
띠링-!
[땅볼러]– 내야 땅볼로만 3아웃을 잡으세요 (2/3)
– 보상 – 싱커 +2
이렇게 투 아웃.
새삼 우리 내야진 수비 좋네, 하는 생각을 하며 로진을 만지작거렸다.
“볼 좋다. 계속 이대로 가자.”
“옙.”
라운딩의 마지막을 장식한 성훈이형은 공을 던지지 않고 직접 내가 있는쪽까지 다가와서 내 글러브 안에 공을 넣어주고 갔다.
성훈이형의 이 마음을 담아서,
4번타자, 배!! 덕!! 현!!
마지막 땅볼 하나만 얻어낸다면 이닝도 종료, 게임도 종료, 퀘스트도 종료된다.
자, 우타자인 방은민을 타석에 붙여서 땅볼을 유도했다면 반대로 좌타자인 배덕현은 타석에서 멀어지게 할 필요가 있겠지.
뻥!
“볼!”
떨어져라, 떨어져라, 그 마음으로 몸쪽에서 더 깊게 들어가는 슬라이더를 하나 던졌다.
비록 볼이 되기는 했지만, 어차피 땅볼로 잡을 생각이기에 볼 카운트에 대한 아쉬움은 이미 집어던진 지 오래다.
그렇다면 조금 더 나대도 괜찮겠지.
퍼엉-!
“보올-.”
상하에 대한 관심을 저 멀리 버려둔 후 철저하게 좌우놀이만을 고집했다.
그에 대한 아웃풋은 한 번 더 던진 몸쪽 직구로도 충분히 표현이 가능하다.
“아씨.”
하지만 본인 정도나 되는 타자라면 자기만의 스탠스를 고집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배덕현의 자리는 여전히 굳건하다.
볼 카운트에 대한 미련이 아무리 없다고는 하지만, 볼 두 개를 먼저 허용한 상황에서 또 볼을 던지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으음….”
바로 플레이트를 밟지 않고, 플레이트 뒤에서 공을 살살 굴리며 생각했다.
2-0의 카운트, 투수는 당연히 카운트를 잡고 싶어한다.
카운트를 잡기 쉬운 공은 아무래도 직구다.
근데 상대 배터리는 그 김한울과 그 문규학이다.
굳이 직구만 고집해서 카운트를 노리진 않을 거다.
앞에 보니까 싱커 많이 던지던데, 아마 똑같이 싱커로 카운트를 잡지 않을까.
“오케.”
관심법으로 타자의 마음을 읽어낸 후 새끼 손가락부터 손가락 세 개를 펴고 규학이에게 사인을 보냈다.
타자가 직구와 싱커 중 싱커에 마음을 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도저도 아니지만 싱커에 가까운 공을 선택했다.
그건 바로,
“으윽!”
체인지업.
따악-!
“한울이형!”
“타이밍 보고, 기성이 타이밍 보고!”
투심의 그립을 잡고 던지는 싱커와 같은 회전, 그리고 거진 비슷한 방향이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두 가지가 속도, 그리고 낙폭.
바깥쪽의 체인지업을 있는 힘껏 잡아당긴 타자가 1루로 출발함과 동시에 나 또한 1루를 향해 전력으로 뛰어갔다.
“페어-!”
1루에서 살짝 벗어나있는 기성이가 본인쪽으로 뛰어가는 나를 보며 오른팔을 계속 움찔거리고 있었다.
움찔, 움찔, 그렇게 나에 대한 타이밍을 맞추다가 1루 베이스에 도착했을 때쯤 스냅 스로로 툭 공을 던졌다.
나는 이걸 받고 베이스를 밟기만 하면,
“아웃!”
그렇게 쓰리 아웃, 이닝 종료와 게임 종료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
띠링-!
[땅볼러]– 내야 땅볼로만 3아웃을 잡으세요 (3/3)
– 보상 – 싱커 +2
제구 – 최상
구위 – 상
체력 – 중
포심 – 89
커브 – 83
슬라 – 82
스플 – 83
체인 – 83
싱커 – 82+2=84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덤으로 퀘스트 종료까지!
또 하나의 승리를 적립했다는 기쁨에 원하 챌린저스 팀원들이 모두 그라운드로 나왔다.
원정구장까지 와서 우리를 응원해준 원하 팬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네고, 박수를 짝짝짝 치며 집에 갈 준비를 마쳤다.
“어우, 오늘 경기 되게 빨리 끝났네.”
“투수전이면 이게 아무래도 좋죠.”
“그치.”
저녁 6시 30분에 시작한 경기가 끝난 건 겨우 9시 2분쯤.
그만큼 퇴근이 빨라졌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흥얼흥얼거리며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자니,
“야, 한울이니?”
“아,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아까 문득 내가 롤모델로 삼고 싶다 생각했던 임호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