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aceful bullpen life RAW novel - Chapter 154
※ 154화. 트라우마
올스타전에 참전한 것, 올스타전에 등판해 좋은 성적을 남긴 것, 좋은 성적으로 퀘스트를 수행한 것, 퀘스트를 수행해 스탯을 올린 것, 심지어는 생전 처음으로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된 것까지.
“이기고 싶다는 게 그런 거란 말이지.”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겼고, 또 그걸 느꼈거든.
직구 스탯 +5. 구속으로 환산하면 약 2km 정도.
추가적인 뻥튀기를 얻기 위한 마지막 퍼즐은 생각보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기고 싶을 때.
이 불친절한 단어들 속엔 필수적으로 표기되어야 할 부분이 숨겨져 있었다.
이기고 싶을 때긴 한데, ‘내가 정말로 이기고 싶은 상대에게’ 이기고 싶을 때.
이기고 싶은 ‘상황’이 아닌, 이기고 싶은 ‘상대’. 말장난 같지만 엄연한 규칙성이 존재했다.
올스타전 때, 두 번째 타석에서 김석호를 보고 떠오른 생각은 아, 내가 이 타자만큼은 반드시 잡는다.
그 의식으로 인해 특성 ‘승부’가 발동되었고, 특성 ‘승부’의 효과 덕에 158km의 벽을 넘긴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다음 무엇을 생각해야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이기고 싶은 상대가 누구인가를 생각할 차례가 아닐까.
“…박해진.”
사실 말만 거창하지, 결국 한 명이다.
박해진.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의 길고 긴 여정의 출발 지점은 이 녀석이다.
라이벌?
혹자들은 나와 박해진을 라이벌 구도로 몰아가기도 한다. 1년에 고작 세 네 번 정도 밖에 못 만나지만, 경기 외적으로 서로 꽤나 언급하는 사이라 그런 거 같은데…….
라이벌은 무슨. 은인이지, 어떻게 보면.
만약 박해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상대 덕아웃에서 돌아다니는 박해진을 보고 있자면 그런 근본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혁준아.”
“예에에에, 무슨 일이십니까.”
그런 은인에게 보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
“오늘 적당히 9이닝 무실점 정도만 해라.”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장면에서, 최고의 모습으로 모든 걸 끝내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한국시리즈에서, 원하의 최대 위기 장면에서, 160km짜리 직구로 삼진을 잡아내는 것.
“형, ‘적당’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그럼그럼, 알지알지. 모를 수가 없지. 우리 혁준이한테 그 정도는 아주 적당한 정도지, 그럼.”
이를 위한 선행 조건. 원하 챌린저스라는 이 팀을 어떻게든 한국시리즈까지 올려둘 것.
“전혀 안 적당한데요, 형.”
“에이, 우리 노히트 노런까지 했던 대투수 황제혁준 님인데, 설마 안 되겠니. 상수라고 별 거 있냐, 그냥 다 작살내버려.”
아, 물론 그런 걱정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상수를 직접 저격한다면, 혹시라도 상수가 한국시리즈에 못 올라오는 경우가 생기진 않을까?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다.
적팀이지만, 상수는 강하다. 그리고 그 근본은 누가 뭐래도 박해진에게 있다.
상수는 어떻게든, 어찌됐든 이기고 또 이겨서 한국시리즈까지 올라올 거다. 올라와서 또 우리와 맞붙을 거다.
“아니, 형….”
“에에에에에에이, 설마. 설마 혁준이 그 정도도 못 하는 건 아니시게에에엤죠. 그럼 좀 실망인데에에에에요.”
“…그런 말투는 또 어디서 배워왔어요?”
“왜.”
“그, 왜 그런 말 있잖아요. 부장님들이 막 신입사원들이랑 같이 놀고 싶어서 요즘 애들 쓰는 말 이상하게 배워서 써먹는, 그런 거 같아요.”
“…….”
X발.
올스타 브레이크가 끝나며 각 팀별 선발진들이 재정비된 가운데, 우리 원하도 마찬가지로 혁준이가 다시금 선봉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
상수 타이거즈와의 게임차는 살짝 줄어들어 두 게임차. 이번 3연전에선 과연 어디까지 벌려둘 수 있을까.
최강상수!
상수 타이거즈의 팬덤은 본인들의 구호를 외치며 아예 이번 시리즈를 스윕하길 바랐다. 더불어 아에 순위까지 역전시켜주길 바랐다.
따악-!
하지만 어림도 없지.
“어어어! 훈이 나이쓰!!”
“나이쓰 캐치이!!”
좌익 선상으로 흘러나가는 이용호의 타구였지만 훈이가 몸을 날려 아웃 카운트로 변환시킨다든가,
따악-!
“어…어? 어! 어어어!!”
“갔다! 갔다아아!!”
바로 다음 이닝에 기성이가 결대로 밀어친 공이 담장을 넘어가버린다든가,
퍼엉-!
혁준이가 8회 말 공격을 삼진 세 개로 끝내버린다든가.
6 대 1로 깔끔하게 앞선 가운데, 꽤 여유가 많은 점수차에서 경기를 끝내기 위해 등판한 승진이까지 세 타자로 9회 말을 깔끔하게 막아내며 게임차는 다시 세 게임으로 불어났다.
최강원하!
현재 리그 1위를 달리는 팀이 왜 리그 1위팀인지 여실히 보여준 후반기 첫 경기였다 평가할 수 있겠다.
덤으로, 한 번 리그 1위를 잡은 뒤 한 번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은 원동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경기였다.
최소한 오늘까지는.
* * *
올스타 브레이크를 거치며 재배열된 선발진 순서 하에, 자연스럽게 후반기 두 번째 경기는 팀의 2선발인 규진이형의 몫이었다.
내가 팀의 주장이라면, 사실상 투수진의 조장 역할을 해주고 있는 규진이형.
나와 닮은 구석이 꽤 많아 멘탈도 강한 편이고, 선후배 대하는 것도 나와 매우 비슷한 사람이다.
올해 성적도 아주 좋다. 7승 3패, 평균자책점은 2.61. 볼삼비도 아주 좋은 편이고.
근데…….
“…멘탈 괜찮?”
“몰라.”
이 형 또 이러네.
상수 타이거즈가 항상 강팀으로 분류될 수 있는 원동력인 박해진, 그리고 그 박해진에게 상대적으로 극강이었던 규진이형.
덕분에 규진이형은 상수 나오면 쌩유, 이른바 상나쌩 클럽의 회장직을 역임하던 사람이었다.
규진이형이 데뷔하고부터 지금까지 기록한 완봉승 네 번 중 세 번이 무려 상수 타이거즈로부터 뺏어낸 기록이라는 점이 아주 대표적인 예시.
근데 올해는 영 좋지 않다. 고작 세 경기 뿐이긴 하지만, 대 상수전 기록이 무려 5점대.
시즌 평균자책점이 2점대 중반이라는 걸 생각하면 하주 언밸런스의 극치를 달린다 할 수 있겠지.
물론 이 언밸런스의 이유라고 하면…….
“아, 진짜 뚝배기 한 번 시원하게 맞춰버릴까.”
이용호 때문이지.
엔트리에서 바뀐 사람이라곤 사실상 한 명 밖에 없지만, 그 효과는 분명 거대했다.
아마…이용호가 기본적으로 3번타자에 고정된 탓에 무조건적으로 1회부터 녀석의 면상을 한 번 보고 시작해야되는 탓이 아닐까.
그런 거지, 시작부터 기분 잡치고 시작하는 느낌. 때문에 한 번 꼬이기 시작한 실타래가 시간이 지나며 점점 되돌릴 수 없을 정도까지 엉켜버리는 거.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아, 진짜 X 같다.”
“참어. 알아서 떨어져 나갈 놈이야.”
예전에 뚝배기를 맞추네 어쩌네 했던 소리는 단순히 농담조에 지나지 않았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요즘 규진이형의 기세라든지, 멘탈이라든지, 그런 점을 생각해봤을 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어보인다.
“아니면 규학이 미트에다가 이용호 사진이라도 붙여달라고 할까?”
“그러면 형 오늘 한 167km 던지겠다.”
그 정도로 지금 규진이형은 몰려있었다. 그게 대놓고 눈에 보였다.
시종일관 손가락을 떠는 모습이라든가, 자기도 모르게 신경질을 내는 모습이라든가, 공을 때리는 데에 있어 어깨에 과도하게 힘을 넣는 모습이라든가.
어떻게 하면 저 감정들을 덜어낼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경기가 시작하기 전 규진이형을 살짝 불렀다.
“형형.”
“왜.”
“우리,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뭘 단순하게 생각해?”
“형이 생각했을 때, 이번 시즌 원하가 몇 위 할 거라고 생각해?”
“우리?”
갑자기 뭔 개소리냐는 표정이면서도,
“…별 일 없으면 1위하겠지.”
꼬박꼬박 대답은 해준다.
“그럼 상수는?”
“쟤네야 뭐…어떻게든 아등바등거려서 2위는 하지 않겠나 싶은데.”
“그래서 한국시리즈에서 우리랑 어디가 붙을 거 같애?”
“우리랑 상수겠지.”
“그치?”
어느 정도의 빌드업은 마쳐놨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거든. 내가 야구선수 인생 사는 동안에 한 가지 목표 같은 거. 아, 내 그래도 야구선수인데 그래도 이런 거 하나 정돈 하고 은퇴해야지 않겠나, 같은 거.”
어디 한 번 계속 해봐.
규진이형의 표정을 읽고 계속 이야기했다.
“박해진한테 삼진 잡는 거. 근데, 이게 처음엔 단순했거든. 막연하게 박해진한테 삼진 잡아보고 싶다 정도였어.”
“지금은 다르고?”
“같아. 같은데 좀 더 구체화됐지.”
“어떻게.”
“한국시리즈 7차전. 8회 초 2사 만루에서 박해진한테 직구 세 개로 헛스윙 삼진 잡아내는 거야.”
그래서 뭘 얘기하고 싶은 건데?
계속 에둘러 가는 이야기에 규진이형은 얼굴에 짜증을 내비쳤다.
“형도 그렇게 생각해봐. 막, 어? 아마 7차전까지 가면 형이 그 날도 선발인데 말야. 9회 초에 막, 한 점차에 막, 만루인데 막, 어? 타자가 이용호야, 어?”
“…….”
“어때, 면상에 궁 박는 것보단 멋있게 삼구 삼진 잡고 와아아악 세리머니하는 게 더 멋있지 않겠어?”
그렇게 열변을 토했건만, 규진이형은 덜 떨어진 친구 하나 쳐다보듯 한 뒤,
“…알았다.”
한 마디만 남겨놓고 불펜을 나섰다. 무언가를 곱씹어보듯, 입술을 달달달 씹어대며 무언가를 생각하던 규진이형은 이내 연습투구에 착수했다.
직구, 커브, 체인지업, 세 가지 구종을 모두 테스트한 뒤 1번타자 고동욱에겐 2루 땅볼을, 2번타자 강대현에겐 3루 플라이를 뺏어냈다.
그리고…….
3번타자, 이!! 용!! 호!!
등장하는 개새끼.
이용호는 그래도 나름 정신을 좀 차렸는지, 타석에 등장하며 지금껏 보였던 그 특유의 껄렁껄렁함은 많이 사라진 상태다.
대신 진중함이라든지, 아니면 승부욕이라든지, 나름 긍정적인 에너지로 타석에 임하고 있다.
근데 그거 알지? 때린 놈은 잊어버려도, 맞은 놈은 죽을 때까지 기억한다는 거.
퍼엉-!
“스트라잌-!”
거기다 원래 갖고 있던 밉상이 많이 옅어졌다는 거지 그게 사라진 건 아니라서,
“…아, 지금이라도 그냥 뚝배기 맞추자 어쩌자 얘길 할까.”
바깥쪽으로 꽂히는 152km짜리 직구를 보고도 이용호는 묘하게 처웃고 있었다.
내가 이용호의 천적 자리를 공고히 해놔서 그렇지, 아마 지금 내가 규진이형의 입장이라면 앞뒤 없이 바로 뚝배기행이었을텐데.
규진이형은 장하게도 이용호에겐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고 포수미트와 포수의 손가락만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용호를 잡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하는지, 이용호를 잡을 수 있는 여러 방법들 중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어떤 게 있는지.
따악-!
멘탈을 완벽히 재정비하고 원래의 한규진으로 돌아온 뒤, 규진이형은 잘맞은 타구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맞았으면 맞은 거지. 맞았으면 다음에 잡으면 되지.
“어?!”
“아…이거 가는 거 같….”
파울-!
“어우.”
“방금 건 진짜 위험했는데요.”
“근데 규진이 쟤는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냐?”
만약 안 맞았다면,
부웅-!
“스윙, 아웃!”
넌 진짜 나한테 뒤진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예쓰, 예쓰!”
“규진이 나이스으!”
“굿굿!”
상수만 만나면 안 그래도 작은 사람이 더 작아보였는데, 지금의 규진이형은 평소 알고 있던 작은 거인과 같이 보였다.
1회, 4회, 6회.
이용호와 치른 세 번의 대결을 모두 삼구삼진으로 채워낸 규진이형은 분명 모든 것을 떨쳐낸 것으로 보였다.
비록 5회 말, 민종현에게 얻어 맞은 뜬금 투런포가 이 날의 결승 홈런이 되긴 했지만 원하 챌린저스 일원 중 그 누구도 이전과 같이 눈치보지 않았다.
“그러게 거기서 커브를 왜 던지냐?”
“아니, 오늘따라 커브가 눈 앞에 아른거리는 걸 어떡해요.”
“그래도 던지면 안 되지, 계속 직구에 밀리더만.”
“에이, 그러면서 크는 거죠. 그치, 형?”
“큰다 어쩐다 하지 마라, 진짜 뒤진다.”
오늘 기록지에 써있는 패전투수라는 네 글자는 분명 평소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