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aceful bullpen life RAW novel - Chapter 68
※ 68화. 아니시에이팅
거르진 않을까?
성현이가 타석까지 걸어가는 걸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2루엔 발이 빠른 주자. 아직 1아웃에 타석엔 팀에서 제일 잘 치는 타자. 그리고 다음 타자는 잘 치긴 하지만 발이 느린 타자.
“하잌!”
하지만 초구부터 몸쪽 깊은 스트라이크를 잡힌 걸 보며 마음을 놓았다. 동시에 의아함도 들었지. 나 같으면 걸렀을 텐데.
강성현! 강성현! 타격 깡패 강성현!
성현이가 어째서 깡패라는, 방송에 나갈 수 있나 없나 모를 정도의 별명을 얻게 되었나.
빠아악―!!
“갔……!”
공을 진짜 후드려 패는 게 깡패 같아서.
선수들에게 붙는 별명이라는 건 생각보다 단순한 이유였다.
“파울!”
진짜로 공이 박살 나지 않았을까 싶은 타구음이 들렸지만 파울에 그치고 말았다.
더불어 2스트라이크라는 카운트에 몰리기까지. 그러나 지켜보는 입장에서 썩 불안하지는 않았다.
안타 내놔.
딱―!!
밖으로 도망가는 슬라이더를 하나 골라낸 뒤 또 한 번 공을 박살 냈다. 밀어쳐서 우익수의 키를 넘겨버리는 장타!
훈이는 베이스를 밟고 있다 담장에 공이 맞는 것까지 확인한 뒤 뛰어도 홈에 여유롭게 도착했다. 박수를 짝짝짝 치며 2루를 밟고 있는 성현이를 가리켰다.
타격 깡패 강! 성! 현!
두 점 차에서 석 점 차로. 덧붙여 무사 2루의 찬스는 그대로.
여기서 점수를 더 내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 뒤 세 타자가 모두 범타로 물러서며 결국 추가점은 한 점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 괜찮아. 최은구 선배가 잘해 주겠지.
“쌰아!”
“은구 선배 날 가져요!”
잘해 주겠지.
무책임하다고도 할 수 있는 믿음은 통했다.
시작부터 만난 명규에게 볼넷을 허용하기는 했으나 뒤의 세 타자를 모두 직구만 가지고 삼진으로 처리하며 이닝 종료. 150km 아래로 떨어지는 직구가 없었다.
이후 7회 말, 우리 팀의 공격.
성훈이 형의 안타 이후 성문이가 볼넷을 골라 나가며 찬스를 잡았다.
하지만 규학이의 번트가 병살타로 연결되고 훈이의 잘 맞은 타구 또한 호수비에 막히며 그대로 이닝 종료.
그리고,
– Your love is a wildcard, Folding is the hard part―
와아아아―!!
팀의 와일드카드 등판.
불펜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내 등장곡이 구장에 울려 퍼졌다.
팀에서 제일 가는 미들맨. 아니, 믿을맨.
마운드에 당도해 로진을 들어 툭툭 치며 손을 새하얗게 분칠했다.
구석구석까지 새하얗게 화장한 오른손이 맘에 들자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쳐다봤다.
7번 타자 손민혁부터.
내 등장곡, 그리고 내 등장 영상이 끝나자 모자챙을 만지며 렌즈를 바라봤던 프로필 사진이 등장했다.
띠링―!
[연투!]– 포스트 시즌의 연투에서 1이닝 무실점하세요. (0/1)
– 보상 ― 전 구종 +1
그리고 내 얼굴 위에 덧씌워지는 미션. 또 전 구종 +1. 웬일로 퍼주는 걸까.
“좋지. 좋지. 좋지.”
혼자서 중얼중얼거리고 몸을 돌렸다. 글러브를 까딱거리고 공을 이어 던졌다. 규학이의 미트에서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몇 개를 던졌는지도 모르고 관성처럼 다음은 직구를 던져 봐야지, 하다가도 규학이가 번쩍 일어나 2루로 던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아, 끝났구나 싶었다.
집중력 좋은데.
시야가 좁다는 것을 에둘러 좋게 표현했다. 오늘이라면 cm 단위의 움직임도 가능하지 않을까, 좋게 생각했다.
플레이!
7, 8, 9번.
타격 생산성이 가장 떨어지는 세 명을 상대하게 될 입장에선 아무래도 부담이 덜하다.
마음 편하게, 다만 긴장은 유지하면서.
팡!
“하잌!”
가볍게 손민혁의 몸쪽 직구부터 찔러넣었다.
멀뚱히 지켜보며 인사이드 스트레이트를 얻어맞은 손민혁의 표정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어딘가 영점이 안 맞는 것 같은데.
“하이잌!”
그럼 하나 더.
똑같은 위치, 똑같은 곳. 복사한 뒤 붙여넣기를 한 것과 같은 타자의 표정까지도 똑같았다.
스트레이트 두 방 얻어맞았으면,
“하이아아앜!!”
다음은 슬로우 훅.
커브의 구속이 얼마나 나왔나, 뒤를 슥 보니 101km. 40km를 살짝 넘기는 편차가 더더욱이 마음에 들었다.
선두타자를 물리쳐내자 마음이 편해졌다.
대타, 이수준.
아.
그러나 이내 다시 불편해졌다.
성운의 응원석에서 커져 가는 환호를 받으며 이수준이 등장했다.
원래대로라면 명규가 지금 있는 3번 자리에서 치고 있어야 할 타자.
하지만 재작년인가, 시즌 중 무릎이 꺾이는 큰 부상을 당한 뒤 아주 긴 재활에 들어갔었다.
그러고 나서 복귀를 여기서, 하필 나와 만나게 되다니.
이수준에겐 딱히 좋은 기억이 없다. 상대했을 때의 마지막 기억을 딱, 내가 원래의 모습이었을 때인 16시즌 중간이었으니까.
이수준 본인 또한 그걸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리그의 불펜 에이스를 앞에 두고도, 그는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만만한 모습.
내가… 이 타자를 어떻게 상대했더라.
한 번, 두 번, 세 번, 규학이의 사인을 일부러 거절해 가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가 걸린 규학이의 손가락. 고개를 끄덕거리고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통하겠지.
딱―!
같은 손 타자의 몸쪽으로 던져보는 체인지업. 아주 제구가 잘 된 공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아주 잘 맞은 공이었다.
“파울!”
너무 잘 맞아서 라인 바깥에 떨어진 것만 빼면.
직구 계열을 노리고 있을 것 같아서 한 번 빙 돌아가기를 잘한 것 같다.
잘 맞은 타구를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파울이다. 아무리 잘 맞아봐야 파울이라면 의미는 없다.
의미가 있다고 하면,
“스윙―”
우리 쪽에 있지.
계속해서 빠른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 한 번 더 조금 전의 커브처럼 던져봤다. 성공적으로 헛스윙을 이끌어 냈다.
한 번 더, 한 번 더 느린 공을 던져 보고 싶다.
하지만 나오는 사인은 내가 원하던 공과 정반대의 공들이었다. 직구.
결국 사인을 정하지 못하고 발을 뺐다. 글러브를 벗고 공을 슥슥 닦아내고 플레이트를 밟았다.
동시에 다섯 손가락을 펴고 팔뚝에 가져다 붙였다. 이러면 알아듣겠지.
몸쪽 직구, 몸쪽 직구, 몸쪽 직구.
하지만 이어지는 사인들은 답답할 정도로 같은 사인의 연속들이었다. 대체 왜 그러는데? 싶은 마음에 노려보자 슬쩍 자기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벤치 사인.
그것 말고는 답이 없다. 확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뜻이 있겠지.
따악―
“아니…….”
제대로 얻어맞고 우중간을 가르는 타구를 보자마자 아니시에이팅이 육성으로 시전되었다.
2루에 서서 들어간 채 제 덕아웃을 보고 좋아하는 이수준에게서 눈을 뗐다.
반대로 우리 덕아웃을 보고 불편한 표정을 지을 뻔한 걸 힘겹게 참아냈다.
뭔 생각이 있었겠지.
그렇게 넘겨야 한다. 아니, 그러고서는 이다음도 똑같다. 아니, 더 아니 좋아질 것이다.
불편한 표정은 어떻게 감춰도 불편한 심기는 감출 수가 없는지 내뱉어지는 숨결의 강도가 거세졌다.
흐으음, 하고 크게 숨을 쉬고 강석영과 대결할 준비를 마쳤다.
이수준의 주력은 그리 빠르지 않다. 그리고 강석영은 좌타, 파워는 매우 부족하지만 발놀림은 나름 괜찮은 정도.
밀어치게 해야 돼.
구상까지 완료되자 규학이의 손이 움직이기도 전에 내 손이 움직였다.
앞선 상황이 있으니까, 벤치에서도 더는 개입하지 않겠지.
“스위잉!”
일단 백도어로 들어가는 슬라이더로 카운트를 잡았다.
여전히 내가 가진 구종들 중에서 부족함이 가장 큰 공이지만 현진이에게 배우고 난 뒤부터 달라진 변화는 타자들에게 생경함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볼!”
어떻게든 2스트라이크까지는 잡아야 하는데.
“보올―!”
바깥쪽으로 멀어지는 체인지업, 그리고 싱커.
두 공을 연속으로 골라내며 오히려 내 쪽이 불리한 카운트로 흘러갔다.
…커브?
오늘 커브의 움직임들이 좋았던 게 생각났다. 검지손가락이 내 좌반신의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스윙!”
발품을 팔았던 성과는 있었다. 말도 안 되게 빠른 배트의 스윙을 강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배트가 모두 돌고 나서야 바깥쪽에 커브가 떨어졌다.
밀어치게 하자. 아니, 밀려 치게 하자.
이쯤까지 오자 규학이의 마음도 나와 같아졌다.
사인을 내기 전 홈플레이트 앞으로 걸어 나오길래 서둘러 플레이트를 밟고 있던 오른발을 뺐다.
오른손과 미트를 이리저리 움직인 후 탁! 소리가 나게 사인을 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검지, 약지와 소지, 그리고 소지.
통했다. 마음이.
띡!
몸쪽, 너무 높지도 않으면서 너무 낮지도 않은 그런 곳.
정말로 원하던 곳으로 날아간 공을 배트의 목 부분에 걸쳐 맞고 나서 나에게 굴러왔다.
“1루!”
“보고! 주자 보고!”
맞을 때는 몰랐는데 맞고 나서 내게 가까워질 무렵에 이게 생각보다 느린 타구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오른손을 뒤로 빼고 땅바닥에서 글러브질만 잘해 공을 건져냈다.
뒤에서 소리친 성문이의 콜에 따라 2루 주자를 확인했다. 뛰려고 움찔거리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금슬금 2루로 돌아간다.
확인을 완료하고 빠르게 1루로 스냅 스로.
“아웃!”
애기들아 봤니? 투수 수비는 이렇게 하는 거야.
부디, 우리 팀 아기 투수들이 이 모습을 본받았으면 좋겠다. 방금 수비 좀 멋있었던 것 같으니까.
1번 타자, 최우석.
아씨.
흐뭇했던 마음은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다시 처박혔다.
‘그날’ 이후 나를 상대로는 제대로 된 타격을 해 본 적이 없는 녀석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존재감 자체가 다른 타자들과 남다르다.
최우석.
그 세 글자 이름이 주는 브랜드라는 것이 그러했다.
바깥쪽. 결국엔 바깥쪽이야.
녀석은 언제부턴가 바깥쪽은 낮은 곳을 버거워하고 있었다. 결국 똑같다. 그곳을 메인으로 잡자.
플레이트를 밟은 채 2루 주자를 확인했다. 별 이상은 없어 보였기에 안심하고 사인을 확인했다.
뒷문을 열고 들어가는 슬라이더.
규학이와 합을 많이 맞춰오며, 또 이 배터리로 우석이를 여러 번 상대하며 쌓인 데이터는 규학이에게도 유효했다. 대놓고 바깥쪽을 노리는 조합.
“볼!”
아.
잘 들어가기는 했지만, 아쉽게. 정말 아쉽게 공 한 개가 빠지면서 볼로 시작하게 되었다.
이어지는 바깥쪽 싱커.
“볼!”
한 번 더 볼.
이게 아닌데.
볼 두 개가 연속으로 들어가자 첫 단추가 크게 잘못 꿰였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우석이 얘가 아무리 바깥쪽에 약점이 생겼다고 해도, 그래도 최우석인데.
차라리 거를까.
다음으로 만나게 될 타자는 김성훈. 대타가 나올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석이보다는 상대하기 쉬울 거다.
생각이 정리된 이후의 결단, 그리고 결단 이후의 행동은 빨랐다.
오른손을 까딱거리며 규학이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 표시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마운드로 올라오려는 모습이 보이자 다시 손바닥을 보이며 막았다.
네?
그렇게 써 있는 눈알에 우석이를 가리키고 있는 내 오른손이 반사됐다. 그대로 드래그해 1루 방향을 가리켰다.
설마…….
그런 표정을 짓곤 덕아웃을 살핀다. 그에 나도 반사적으로 같은 곳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벤치의 표정은 난감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시 규학이를 바라보니 어물쩍거리다가 구심에게 다가가 뭐라뭐라 이야기를 한다.
고의사구입니다.
구심에게 이야기를 들은 우석이가 묘한 표정으로 장비를 풀 무렵 장내에 현재 상황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 팀 관객석은 환호를, 상대 응원석에서는 야유를.
우우우우―!
본인 팀 투수가 무료로 베이스를 내주는 모습을 보고 좋아할 팬은 그 누구도 없다.
자연스러운 알고리즘에 따라 환호보다 야유의 무게가 더욱 컸다.
괜찮아.
최면을 걸듯 중얼거리고 플레이트를 밟았다. 괜찮아, 수비하기도 더 쉬워졌다.
약간의 착잡함을 담고 사인을 다시 기다렸다.
“파울!”
김성훈의 몸쪽을 파고드는 싱커, 공의 윗부분을 맞고 하등 쓸모가 없는 각도로 공이 꺾여 나갔다.
초구에 카운트를 잡은 것에 우선 만족했다.
“볼.”
몸쪽 깊숙하게. 일부러 스트라이크가 아닌 곳으로 넣어보았다. 발을 쑥, 빼며 볼 판정을 받고,
“볼―”
같은 위치에 도착하는 싱커로 볼이 두 개가 되었다. 2-1. 다음 공은… 스플리터?
생각해 보니 오늘 스플리터를 한 번도 안 던져 봤다는 게 떠올랐다. 그렇다면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면 그다음 논제, 넣어서 카운트를 잡아야 되나? 빼면 휘둘러주려나?
사인을 보느라 숙여졌던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리는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오갔다.
글러브 안에서까지 고민이 이어지다가 결국 손바닥에 공을 살짝 문대며 손목을 내렸다. 간단하게 스플리터 그립이 완성되었다.
“스윙!”
존의 높은 곳으로 향하다가 존의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스플리터.
스윙이 나온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배트가 돌았던 지점, 그 지점을 확인했다.
거기를 보고 있구나.
그제야 다음으로 이어질 길이 보였다. 검지손가락이 다시 한번 내 몸 왼쪽을 훑으며 이정표를 만들었다.
글러브 안에서 약지가 아래로 떨어졌다. 팬들의 응원 소리 속에서도, 실밥이 글러브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모든 손가락이 접혀 있는 가운데 오직 검지손가락만은 꼿꼿하게 펴져 있었다.
그래, 난 저기로 던질 거야.
릴리스하는 순간까지 펴져 있는 검지손가락이 마치 그렇게 이야기하는 듯했다.
가운뎃손가락을 축으로 빠져나간 공은 강한 회전을 얻어맞고 높게 비행했다.
떨어져라, 떨어져라!
김성훈의 배트 노브가 보이자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붕―!
팡!
존의 낮은 라인보다도 공 몇 개는 낮았을 지역, 그곳으로 커브가 아름답게 떨어졌다.
“쌰아아악!!”
짝!
멋진 위기 탈출! 오른손이 제멋대로 글러브의 바깥면을 때렸다.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도 한 번 표출된 감정은 사그라들지를 않았다.
띠링―!
[연투!]– 포스트 시즌의 연투에서 1이닝 무실점하세요. (1/1)
– 보상 ― 전 구종 +1
제구 ― 최상
구위 ― 중
체력 ― 중
포심 ― 60+1=61
커브 ― 53+1=54
슬라 ― 41+1=42
스플 ― 42+1=43
체인 ― 49+1=50
싱커 ― 47+1=48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무실점으로 이닝을 완료한 것에 더불어, 미션까지 완료했으니 더더욱이.
“호오오오!!”
지금의 이 감정을 쉬이 떨쳐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