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12
12화>
첫 번째 미션 (1)
“내용은 이 정도면 합격. 그런데 말이야…”
보고서를 읽어보던 김민환이 의자에서 등을 떼더니 허리를 바로 세웠다.
“다음부터는 좌우 정렬을 제대로 맞춰줘. 읽는 사람이 보기 편하게.”
“좌우 정렬이요?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요?”
“하……. 좌우 정렬을 몰라?”
나를 천천히 올려다본 김민환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려운 거 아니면 도전해보겠습니다.”
“됐어, 관둬. 그냥 그대로 해.”
“감사합니다.”
“끝. 이제 가서 할 일 해.”
김민환이 나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하더니 컴퓨터를 보며 다른 일을 시작했다.
나는 대답 대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김민환이 그런 나를 흘끗 쳐다봤다.
“뭐해? 계속 거기 있을 거야? 할 일 없어?”
“그게, 팀장님의 도움이 필요해서요.”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던 김민환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참 나. 말해봐. 뭔지 들어나 보자.”
“두 갠데요.”
“많기도 하네. 하나씩 말해봐.”
“첫 번째는, 피피티 좀 만들어 주세요.”
“뭐 피피티?”
표정이 확 일그러진 김민환이 기가 찬 듯 되물었다.
“예. 제가 조만간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할 거 같은데, 제가 그런 걸 만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일단 그거 좀 부탁드리고요.”
“저기, 강현우 씨. 나는 당신 팀장이야. 팀장이 무슨 부하직원 피피티를 만들어주고 있어?”
김민환의 얼굴이 씩씩 붉어졌다.
그러든 말든 나는 내 할 말을 이어나갔다.
“대표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밖에 나가서 하는 모든 업무는 대표님과 회사를 대표하고 있는 거라고요.”
“뭐?”
“지금 부탁드린 일은 부하직원으로서 드린 게 아니라는 거죠. 대표님과 회사의 일을 부탁드린 겁니다.”
“하아…….”
“그리고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제가 만들어서 어설프게 프레젠테이션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뿐만 아니라 우리 회사 전체가 바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팀장님 입장에서도 그게 하늘에 침 뱉는 거랑 뭐가 다르겠어요?”
반박하고 싶으면서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김민환이 거듭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 또 하나는 뭔데?”
“버팔로즈 2군 감독하고 자리 좀 만들어주세요.”
“버팔로즈 2군 감독이면…… 이진원하고?”
“네.”
“그 사람하고는 왜?”
김민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직접 제안을 해보려고요.”
“자리 만들어주는 거야 어렵지는 않은데. 가서 무슨 얘기 하려고.”
“오석훈 선수를 신뢰하게 만들려고요.”
“참나. 현우 씨가 찾아가서 대화 몇 마디 나눈다고 감독이 신뢰해줄 것 같아?”
김민환이 나를 보며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아니면 트레이드 시켜달라고 하려고요.”
“뭐! 트레이드?”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는지 김민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 소속팀에서 선수한테 출장 기회를 안 주면 트레이드라도 추진해야죠.”
이어진 내 말에 김민환이 뒤통수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정말 못 살겠다. 혹시나 이번에 가서 대표 보고도 없이 그런 말 하면 진짜 큰일 나.”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거죠. 당장 그렇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자 김민환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아까 말한 프레젠테이션이라는 게 이진원한테 한다는 건가?”
“네. 맞습니다.”
“후……. 만만치 않겠네.”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자 김민환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무슨 내용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간단합니다. 오석훈이 우익수로 출전할 때 성적이 가장 좋다는 거, 그리고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내용만 잘 보여주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직접 이야기할 생각이라서요.”
“필요한 자료는 다 모아놨지?”
“그럼요. 다 가져왔죠.”
나는 가방에서 데이터 자료를 꺼내 김민환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자료를 한 장씩 넘겨보던 김민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뭐야?”
“뭐긴요. 발표에 쓸 자료죠. 정리하는 데 한참 걸렸어요. 그래도 꼼꼼하게 한 거니까 이 정도면 충분할 거예요.”
“그, 근데 뽑아서 적어둔 거 말고 엑셀 파일로 만들어 둔 것도 있지?”
“엑셀이 뭔데요?”
김민환이 입을 딱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설마…… 이 많은 거 직접 다 입력해야 하는 거야?”
“따로 입력을 해야 하는 건가요? 제가 그런 건 잘 몰라서요.”
“하아…….”
김민환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눈앞에 놓인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내일 아침까지는 받아볼 수 있죠?”
“야, 강현우!”
* * *
“으- 덥다 더워.”
뜨거운 여름, 오후 1시.
관중석에 앉아있기만 해도 얼굴과 등에서 땀이 줄줄 흐르는데, 뙤약볕 밑에서 경기를 해야 하는 선수들은 오죽할까.
규정상 2군도 경기 시각을 야간으로 옮길 수 있지만 실현되기는 어려운 규정이었다.
아예 조명 시설 자체가 없는 2군 경기장이 많았기 때문이다.
버팔로즈 홈구장에는 조명시설이 설치되어 있지만 다른 구장과 경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여전히 오후 1시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나는 관중석 구석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그런데 오늘 선발 라인업에선 오석훈의 이름을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난 경기에서 송구 실책으로 내준 점수 때문인 것 같았다.
실수하는 선수에겐 기회를 주지 않는 이진원 감독의 냉정한 스타일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라인업에서 빠진 오석훈과 다른 동료들이 캐치볼을 하며 몸을 풀고 있었다.
잠시 후 버팔로즈와 바이킹즈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최근 퓨처스리그(2군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두 팀이었다.
오늘 양 팀 선발 투수의 실력 차이가 크지 않아서 팽팽한 경기가 예상됐다.
볼넷.
볼넷.
하지만 버팔로즈 선발 투수가 초반부터 컨디션 난조로 흔들렸다.
불안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볼넷으로 상대 주자를 출루시키더니, 한 번씩 장타까지 허용하며 실점이 조금씩 늘어갔다.
딱!
“간다 간다!”
“와아아-”
바이킹즈 더그아웃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결국 3회 초에 바이킹즈의 유망주로 꼽히는 선수가 만루에서 대형 홈런을 터트렸다.
버팔로즈 선발투수가 경기장 밖으로 날아가는 공을 멍하게 바라보더니 결국 자리에 주저앉았다.
안 그래도 조금씩 벌어지던 격차가 만루홈런 한 방으로 단숨에 크게 벌어졌다.
그러자 이진원 감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더그아웃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3회가 끝났을 때는 이미 8점 차까지 벌어져 버렸다.
야구는 끝날 때까지 모른다고 하지만, 점수 차이가 크게 벌어진 상황에서는 전략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기회를 많이 받지 못했던 투수들이 하나둘 등판했다.
의외로 투수들이 실점을 잘 막아내고 타자들이 한 점 두 점 따라잡기 시작하자 조금씩 격차가 줄어들었다.
이제 역전의 가능성이 희미하게 보이자 이진원 감독이 코칭스태프를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다.
“설마 기회를 주려는 건가?”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오석훈은 이진원 감독의 선택지에 포함되지 못했다.
버팔로즈 선수가 마지막 아웃을 당하자 이진원 감독이 책상을 세차게 내려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커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결국 마지막까지 오석훈의 출전은 없었고, 역전에 실패한 버팔로즈도 패배하고 말았다.
* * *
“어깨 펴, 인마.”
“하……. 왜 이렇게 안 풀리죠.”
경기 후 만난 오석훈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기회는 곧 올 거야. 걱정하지 말고 훈련에만 집중하고 있어.”
“정말 기회가 올까요? 감독님이 저는 쳐다보지도 않는 것 같은데요?”
“걱정 마. 내가 다 해결해줄게.”
“휴……. 감사해요. 저도 열심히 해볼게요.”
오석훈이 땅이 꺼질 것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팀 분위기는 어때?”
“팀 분위기요?”
“선수들끼리 자주 하는 얘기나, 감독님이나 코칭 스태프가 선수들 모아 놓고 자주 강조하는 거라든지.”
“자주 하는 얘기요? 글쎄요.”
오석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고민했다.
“시즌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뭐 그런 말이 제일 많았던 것 같은데요.”
“그게 다야?”
“예. 요즘 팀이 잘 나가고 있긴 한데. 1위하고 게임 차를 줄여야 하는 상황마다 아슬아슬하게 못 이기고 있으니까요.”
이게 무슨 말이지?
“1위를 노리고 있다는 거야?”
“작년에도 우승했으니까 2년 연속 우승하고 싶은 거겠죠?”
퓨처스 리그에서도 승패에 따라 순위를 카운트하기는 하지만, 성적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퓨처스 리그 자체가 당장 눈에 보이는 성적보다는 1군 무대에서 활약할 선수들을 육성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위를 노리고 있다고?
“2군에서 우승하는 게 큰 의미가 있나?”
알다시피 2군은 선수 육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당장 눈앞에 있는 승리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선수 육성에 집중하기 위해 100패를 당하겠다는 목표를 세우는 지도자도 있었다.
“그러게요. 무슨 생각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긴 평소에도 이진원 감독의 경기 운영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았다.
위잉-
“잠깐만.”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김민환이 보낸 문자가 와있었다.
-약속 잡았다. 내일 오전 10시까지 감독실로.
바로 내일이라고?
성격이 급하다고 해야 할지 추진력이 강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으니까.
* * *
“후우- 후우-”
1군 데뷔전이나 에이전시 면접을 보던 날보다 오늘이 더 긴장되는 것 같았다.
‘이진원 감독을 그냥 만나는 것도 모자라 설득까지 해야 한다니…….’
어젯밤, 김민환이 보내준 자료를 수십 번도 넘게 살펴보며 밤늦게까지 연습했다.
그러나 내 설득이 먹힐지 안 먹힐지 알 수가 없으니 자꾸만 긴장이 됐다.
머릿속으로 어떤 말을 해야 가장 효과적일까 생각하며 시계를 보니 9시 57분.
약속 시간 3분 전이다.
딱 맞춰 들어가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기 위해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첫인사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자연스럽게 악수부터 건넬까.
아니다.
아무리 소속 선수 에이전시 입장으로 왔다지만 이진원 감독이 나보다 까마득한 선배이니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
처음 건네는 인사로 뭐가 좋을지 상상하며 직접 입 밖으로 뱉어봤지만 모든 게 조금씩 어색했다.
‘그냥 분위기에 맞춰서 인사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시계를 보니 정확히 오전 10시.
더 이상 머뭇거릴 순 없었다.
똑. 똑. 똑.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감독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안쪽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조심스럽게 문을 여니 자리에서 일어나 날 향해 걸어오고 있는 이진원 감독이 보였다.
“어? 이게 누구야.”
“감독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연습한 보람도 없이 이진원 감독과 인사말이 섞여버렸다.
“여기는 어쩐 일이야?”
“네?”
거기다 이진원 감독의 반응에 나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전혀 뜻밖이라는 표정과 말투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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