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15
15화>
첫 번째 미션 (4)
탁. 탁. 탁.
어제 경기를 보며 노트에 적어 두었던 내용을 컴퓨터로 옮기는 중이었다.
가끔 노트북을 들고 가긴 했지만, 워낙 독수리 타법이어서 당장은 손으로 직접 적는 게 훨씬 더 편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손으로 쓸 수 없는 노릇이니 힘들어도 타이핑에 집중했다.
탁. 탁. 탁.
“하아…… 도대체 언제 다하지.”
한참을 키보드와 씨름한 것 같은데 여전히 해야할 게 더 많이 남아있는 아이러니라니.
느려터진 내 타이핑 속도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옆에 앉은 다른 직원들의 현란한 손가락 움직임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한숨을 쉬며 얼마나 작업했을까.
어깨가 아파 잠시 고개를 젖히며 몸을 풀고 있을 때였다.
“현우 씨. 나한테 혹시 할 말 없어?”
누군가가 부르기에 고개를 돌려봤다.
퀭한 눈으로 커피를 홀짝이며 다가오는 김민환이었다.
“아! 팀장님 오셨습니까.”
김민환과 눈이 마주친 나는 거의 90도로 인사했다.
“어제 보니까 석훈이가 우익수로 뛰던데……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내가 밤새 만든 자료가 도움이 되기는 했나 보네.”
“아…… 그럼요. 정말 큰 역할을 했죠.”
차마 김민환에게 당신이 만들어준 자료를 이진원 감독이 찢어버렸다, 라고 말할 순 없었다.
“그런데 아직 완전히 확정됐다고 보기는 어렵고요. 경기 결과 보면서 조금 더 얘기를 해봐야 할 거 같아요. 어쨌든 팀장님 자료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래?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애써 쿨한 척했지만 김민환의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근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커피를 한 모금 더 홀짝인 김민환이 고개를 돌려 내가 보고 있던 화면을 살폈다.
“아, 특별한 건 아니고요. 어제 경기 보면서 기록해놨던 것들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음, 잘하고 있네. 이따가 내가 대표님께 보고 들어가는 거 알고 있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꼼꼼하게 확인해서 보내줘.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안 되니까.”
“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검지를 세워 키보드를 누르기 시작했다.
몸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가던 김민환이 내 타이핑 모습을 보고는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왔다.
“현우 씨, 오늘 몇 시에 나가야 되지?”
“12시 전에는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럼 혹시…… 나가기 전까지 마칠 수 있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회심의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다.
“일단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더욱 천천히, 더듬더듬 키보드를 눌렀다.
“아, 진짜! 그렇게 해서 언제 끝내겠다는 거야? 이따 대표님께 보고해야 된다니까!”
아니나 다를까. 김민환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내 타이핑 속도를 보니 도저히 못 끝낼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든 모양이었다.
“염려 마세요. 최선을 다하고 있다니까요. 음… 어디까지 쳤더라? 아, 여기구나. ‘그. 래. 서. 저. 희. Y. J…… 아, 한영키는 어떻게 바꾸지? 대문자는 또 어떻게 바꾸더라?”
“으아! 됐어, 됐어! 관둬!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백 배는 더 빠르겠다.”
“정말요?”
“그래! 현우 씨, 이번 달까지 타이핑 속도 안 올리면 진짜 나랑 원수 질 각오해!”
씩씩거리며 자료를 확 빼앗아가는 김민환이었다.
그의 다크 서클은 오늘도 더 짙게 흘러내릴 예정이었다.
* * *
버팔로즈 2군 경기력은 일주일 사이에 눈에 띌 정도로 좋아지고 있었다.
특히 오석훈과 박성주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이 찬스 때마다 불붙은 타격감을 발휘하자 아슬아슬하게 2위를 달리던 팀 순위가 결국 1위로 올라갔다.
“요즘 팀 성적이 잘 나오고 있어서 아주 좋아. 다들 고생이 많아.”
“이게 다 감독님 덕분입니다.”
“다들 자기 역할을 해줘서 가능한 거지. 하하하. 오늘 경기도 잘해보자고.”
코치의 말 한마디에 더욱 기분 좋아진 이진원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감독님,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요청사항이 있습니다.”
김용민 타격 코치였다.
“김 코치. 뭔데 말해봐.”
“최근에 석훈이 성적이 좋습니다. 오늘 경기부터는 중심 타순에 배치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석훈을?”
오석훈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이진원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이 사라졌다.
“최근 일주일 동안 타율이 3할 5푼도 넘고 있는 데다, 특히 득점권에서는 타율이 거의 4할에 가깝습니다. 7번 타순에 두기보다는 3번이나 5번에 배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음……. 다른 사람들 생각은 어때?”
이진원이 다른 생각을 말하라는 듯 옆에 있던 코치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요즘 보여주는 성적만 놓고 보면 7번 타순에 놓기에는 아깝지 않을까요?”
“가지고 있는 타격 기술이나 스피드가 뛰어난 선수라서, 충분히 자기 역할은 해줄 것 같습니다.”
회의실에 있던 코치들이 하나같이 오석훈에 대해 긍정적인 말을 하자 이진원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근데 오석훈을 중심타선에 두기에는 좀 약하지 않나?”
“최근 페이스를 보면 장타력도 충분하고, 타점도 꾸준하게 올려주고 있습니다. 중심 타자로 전혀 흠잡을 곳이 없습니다.”
김용민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최근 기록만 보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요즘 반짝 잘하고 있는 걸 수도 있고.”
“제 생각에는 단순히 운이 좋다기보다는 자기한테 잘 맞는 타격 자세를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선수 중에서 석훈이보다 나은 성적을 내는 선수도 없습니다.”
“음…… 그래? 그럼 당분간은 기회를 줘봐. 시켜봤는데 도저히 실력이 안 된다 싶으면 바로 교체하고.”
“교체요? 네, 알겠습니다.”
김용민이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의아한 표정은 감추지 못했다.
“그럼 수비 포지션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수비요? 요즘 석훈이가 우익수 수비도 나쁘지 않게 하고 있는데 굳이 변화를 줄 필요가 있을까요?”
박치호 수비 코치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도 다양하게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해줘야 좋지 않아?”
“경험을 주는 거야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요즘 3루에서는 성주가 너무 잘해주고 있어서 뺄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흐음……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이진원의 찡그린 눈에는 옅은 실망감이 담겨있었다.
“다른 특이사항 없으면 이제 그만 나가서 경기 준비해.“
이진원의 말에 코치들이 가볍게 인사하며 감독실을 나갔다.
모두 나가고 혼자 남게 되자 이진원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고민에 잠겼다.
“기분 나쁘게 그 자식 말대로 되어버렸단 말이야…….”
이진원이 찌푸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를 바라봤다.
* * *
“환상적이네.”
경기 시작 전, 라인업을 확인한 내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3번 타자 우익수 오석훈
-4번 타자 3루수 박성주
오늘 라인업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당분간 둘을 라인업에서 제외하기는 힘들 거라고 예상했지만 중심 타선까지 차지할 줄은 몰랐다.
“최근에 팀이 좋은 성적을 내는 이유를 이진원 감독도 알고 있을 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
평소 이진원 감독의 스타일이라면, 오석훈을 당장 라인업에서 빼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2위와 아슬아슬한 차이로 1위를 하고 있으니 그런 선택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좋은 성적을 내어 또 한 번 우승 커리어를 쌓고 싶다는 본인의 욕망도 한몫했을 터.
자존심 상하지만 어쩔 수 없이 라인업에 올려놓고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을 이진원 감독을 상상하니, 내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오늘도 경기는 정시에 시작됐다.
야구는 분위기 싸움이라는 말이 있다.
팀이 좋은 분위기를 타면 선수 개개인의 경기력도 좋아지기 때문이다.
최근의 버팔로즈가 그랬다.
오석훈과 박성주가 공격에서 중심을 잡아주니 다른 선수들이 부담감을 내려놓고 마음껏 플레이 할 수 있었다.
투수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타자들이 충분한 득점 지원을 해주니 자신감을 가지고 투구에 임했다.
1회부터 버팔로즈 선발투수는 상대 타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꽁꽁 묶으면서 무실점 행진을 이어갔다.
그리고 타자들은 시원시원한 안타로 차곡차곡 점수를 쌓아갔다.
물론 중요한 상황에서의 안타는 대부분 팀의 중심 타자인 오석훈과 박성주에게서 나왔다.
그러다 5회 말이 끝나고 6회 초를 준비하는 시점이었다.
클리닝 타임이 되자 관리인들이 운동장의 상태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뭐야? 교체라고?”
갑자기 버팔로즈 라인업에서 오석훈과 박성주의 이름이 동시에 사라졌다.
아무리 5점차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야구에서 그 정도는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점수 차이였다.
게다가 아직 4이닝이나 남아있었다.
“중심 타자를 교체하기엔 너무 이른 타이밍이잖아?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아무리 다른 타자들도 감이 좋다고 해도 중심 타자를 두 명이나 교체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매일 이기는 경기를 하려고 드는 이진원 감독의 성격을 생각해 봐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결정이었다.
‘그렇다면……?’
문득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부상인가?’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머릿속에서 자꾸 그런 상상이 떠올랐다.
컨디션이 너무 좋아도 부상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나는 급히 짐을 챙겨 오석훈과 박성주를 만나러 달려갔다.
그러나 선수 라커룸을 비롯해 물리치료실과 실내연습장까지, 그 어디에도 오석훈과 박성주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거는 순간.
“형!”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가방을 멘 오석훈의 모습이 보였다.
“석훈아. 너 무슨 일 있어?”
나는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갔다.
혹시 몸에 이상이 있나 싶어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의 표정이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형. 저희 1군 콜업이에요!”
“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라 나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금 바로 서울로 오래요.”
“1군 콜업이라고? 진, 진짜야? 그럼 성주는 어떻게 된 거야?”
“성주도 같이 가요!”
“같이 간다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오석훈 혼자만 가는 것도 아니고 박성주까지 1군으로 간다니.
직접 들은 말인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거짓말 아니지?”
“정말이에요, 선배. 저도 콜업이에요!”
짐을 챙겨 나오던 박성주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오석훈 선수, 박성주 선수 빨리 오세요. 지금 바로 가야 해요!”
밖에서 기다리던 스태프가 그들을 재촉했다.
“형 이따가 봐요. 오늘 경기 보러 올 거죠?”
“그, 그럼. 당연히 가야지.”
오석훈과 박성주가 두 손을 흔들며 소풍을 떠나는 아이처럼 구단 버스로 향했다.
같이 손을 흔들어 주던 나는 한참 동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만 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