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184
184화>
힘겨운 성장통 (5)
나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최정환을 만나기 위해 집 앞으로 찾아갔다.
블론세이브라는 것을 처음 겪고 나서 멘탈이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역전 끝내기 홈런이었으니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나준호의 극적인 끝내기 홈런이 반가우면서도 왜 하필 최정환을 상대로……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는 없었다.
마무리 투수에게 블론세이브는 언젠간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인 데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따라다닐 거라는 건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블론세이브를 했다고 해도 다음 경기에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털고 일어날 수 있어야 했다.
물론 혼자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해낸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겪는 일을 잘 이겨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내가 이곳에서 늦은 밤임에도 기다리고 있는 이유였다.
그렇게 최정환의 아파트 입구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니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오는 최정환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어깨는 축 처져있었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나는 재빨리 차 문을 열고 나가 최정환을 향해 다가갔다.
“정환아!”
“어, 대표님?”
나라는 것을 확인한 최정환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좀 늦게 나왔네?”
“경기장에서 잠깐 쉬다가 왔거든요.”
평소처럼 경기장을 떠나기가 어려웠겠지.
“정환아, 우리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올까?”
“지금이요?”
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기색이었다.
“내일 휴식일이잖아. 팀 훈련도 없지 않아?”
“그렇긴 하죠…….”
“그럼 됐지 뭐. 더 늦기 전에 빨리 가자.”
“어디로 가는 거예요?”
“글쎄……. 가보면 알 거야.”
나는 최정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함께 차에 올랐다.
* * *
밤이 늦은 시간이라 도로가 한산해서 교통 체증 없이 시원하게 달릴 수 있었다.
“멀리 가는 거예요?”
“이왕 가는 거, 제대로 쉬다가 와야지.”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최정환을 바라봤다.
“대표님 덕분에 이런 경험도 해보네요.”
“이렇게 밤에 멀리 떠나본 적 없어?”
“홈경기 때는 바로 집에 가고, 원정 경기 때는 그냥 호텔에서 쉬거든요.”
“사실 나도 그래. 밤에 이렇게 가본 건 정말 오랜만인 거 같아.”
“저랑 비슷하시네요.”
“그래서 잘 맞나 보다.”
나는 최정환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2시간쯤 지나자 내 눈앞에는 동해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쏴아아-
쏴아아아- 철썩.
차에 내리자마자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와 최정환은 편의점에서 음료수와 가벼운 먹을거리를 사들고 해안가를 걸었다.
“정환아, 여기 앉자.”
“네.”
우리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바다를 보며 앉았다.
깜깜한 밤이라 지평선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파도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숨을 깊게 들이쉬니 맑은 공기가 온몸에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직은 바닷바람이 차갑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답답한 마음을 털어버리기에는 오히려 좋았다.
“시원하다 그치?”
“그러네요. 오랜만에 와보는 거 같아요.”
“바다 좋아해?”
“네, 시즌 끝나면 가족들이랑 항상 한 번은 와요.”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잘 지내시지?”
“네. 안 그래도 뉴스에 강 대표님 나오실 때마다 보고 싶어 하시더라고요.”
“정말? 또 한번 찾아봬야겠는데.”
마지막으로 뵌 게 에이전트가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으니,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오시면 엄청 좋아하실 거예요.”
“누나도 잘 지내시고?”
“그럼요. 요즘에 매일 야구 보니까 거의 전문가 돼가는 것 같아요.”
가족 이야기를 하자 마음이 편해졌는지 이제야 최정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마무리 투수라는 게 쉽지 않지?”
“네……. 정말 쉽지 않네요. 선발 투수랑은 느낌이 또 다르네요. 소화하는 이닝이 짧으니까 전력으로 던지면 훨씬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처럼 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깊은숨을 내쉰 최정환의 표정에는 깊은 걱정이 느껴졌다.
“마무리 투수는 처음 해보는 거잖아. 어떻게 처음부터 잘하겠어.”
“작년 올스타전 때도 그렇고, 포스트시즌에서도 불펜으로 던진 경험이 있으니까. 그냥 하는 것보다 훨씬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환아, 너는 최고의 마무리 투수가 될 잠재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
“정말 그럴 수 있겠죠?
“그럼.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권유했을 리도 없었겠지.”
“…….”
여전히 최정환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지난 경기 기억은 바다에 다 버리고 가자. 이미 지나간 거잖아.”
“그래야죠, 후…….”
나는 최정환과 함께 고개를 돌려 잠시 바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쏴아아아-
쏴아아아- 철썩.
바다를 보며 멍 때리고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새벽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숙소까지 출근길 교통 체증을 피해 도착하려면 슬슬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그럼 이제 다시 숙소로 돌아가 볼까?”
“선배, 갈 때는 제가 운전할게요.”
최정환이 내가 손에 쥐고 있는 키를 가져가려고 손을 뻗었다.
“걱정하지 마. 나는 낮에 자면 되니까.”
“그래도 너무 장거리 운전하시는데…….”
“어차피 아침쯤 도착할 거 같은데 오랜만에 숙소로 가는 건 어때? 잠깐 눈도 붙이고.”
“그럴까요? 우리 에이전시 식사도 그리웠는데.”
“그래. 어서 가자.”
나는 에이전시 숙소를 향해 차를 몰았다.
다행히 오는 길도 밀리지 않아서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동안 최정환은 피곤했는지 잠시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시 숙소로 돌아온 나와 최정환은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최정환을 데리고 훈련장으로 내려갔다.
최정환과 대화를 하면서 그의 무거운 마음을 풀어주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었다.
경기장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될 해결책을 제시해 줄 필요도 있었다.
사실 지금 최정환에게 필요한 부분은 명확했다.
구위가 좋은 최정환은 굳이 무리해서 공을 코너로 던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국내 최고 마무리 투수인 오승수와 같은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구위뿐만 아니라 스트라이크 존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정교한 제구력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지금처럼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에서 높낮이를 조절하는 피칭 정도가 아니라, 몸 쪽과 바깥쪽을 오고 가는 공도 던질 수 있어야 했다.
“정환아, 내가 서 있어줄 테니까 공 한번 던져봐.”
“네? 선배가요?”
최정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보다는 내가 서 있는 게 가장 확실하지 않을까?”
“아니 근데…… 사실 선배가 서 있으면 제가 공을 던질 자신이 없어서요…….”
“아예 못 던지겠어?”
“후……. 생각만 해도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요?”
최정환의 손을 보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잠깐만 기다려봐.”
솔직히 나도 다른 선수가 아닌 최정환의 공을 그대로 마주할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미리 준비해둔 게 있지.
나는 미리 준비해둔 소품을 가져왔다.
바로 내가 선수 생활을 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 만든 입간판이었다.
급하게 만드느라 조금 어설프기는 했지만, 실제 키는 물론이고 내가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유니폼에 장비 색까지 정확하게 반영해서 만든 거라서 아주 언뜻 보면 선수 시절의 나처럼 보이기는 했다.
나는 내 입간판 옆에 서서 최정환을 바라봤다.
“이 정도면 내가 서 있는 거랑 거의 비슷하지 않아?”
“그러네요. 선배랑 똑같아요.”
최정환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웃겨 보이기는 하지만 최정환의 트라우마를 서서히 없애기 위해서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오히려 내가 진짜 타석에 서 있다면 그의 말대로 공을 던지는 것조차 힘들 테니까.
“이거 여러 개 만들어뒀으니까 얼마든지 맞춰서 부숴도 돼.”
그러고 나는 내 입간판을 타석 가운데쯤에 세워두었다.
“네.”
씩씩하게 답한 최정환은 몸을 움직이며 워밍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공의 스피드와 회전수를 측정하는 기계를 세팅했다.
잠시 후, 최정환은 공을 쥐어 들고는 투수판을 밟고 섰다.
그리고 피칭이 시작됐다.
펑!
“나이스 볼!”
148km/h.
펑!
“미쳤다, 지금 공 너무 좋아.”
150km/h.
나는 그가 공을 하나 던질 때마다 여느 불펜 포수들처럼 호들갑을 떨며 리액션을 했다.
펑!
151km/h!
펑!
153km/h!
확실히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구속은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다만,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고는 있지만 거의 대부분 바깥쪽이었다.
그나마 스트라이크 존 가운데가 가장 몸 쪽과 가까운 코스였다.
“정환아, 오늘 던지는 공은 정말 좋아. 그리고 이제부터는 의도적으로 몸 쪽으로 던지려고 해봐. 맞춰도 아무 문제없잖아.”
“네.”
고개를 끄덕인 최정환이 다시 피칭할 자세를 취했다.
펑!
펑!
조금씩 몸 쪽으로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수월하게 진행되는 듯했는데,
파악!
공에 맞은 입간판이 굉음을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헉.”
깜짝 놀란 최정환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후.”
나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만약 내가 정말 서 있었다면 최소 시퍼런 피멍이 들었겠지.
표정은 애써 감췄지만 상상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정환아 괜찮아. 입간판은 많이 있어.”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부서진 조각들을 치우고 새로운 입간판을 세웠다.
“후…….”
“그리고 위치 조금만 옮겨볼게.”
나는 입간판을 스트라이크 존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두었다.
“후…….”
타자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다 보니 최정환은 더 긴장한 듯했다.
“정환아, 이번에도 맞춰도 돼. 걱정하지 말고 과감하게 던져봐.”
“네.”
몇 번이나 심호흡을 내쉰 끝에 피칭을 시작했다.
펑!
펑!
공이 조금씩 몸 쪽 가까운 코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일단 다행인 건 더 이상 입간판을 맞추는 볼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펑!
완벽한 코스로 들어갈 때까지 훈련을 돕고 싶었지만, 지금은 정규 시즌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시기였다.
투구를 너무 많이 한다면 다음 경기에 지장 줄 게 분명했다.
“정환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조금 아쉬운데, 더 던져보면 안 될까요?”
어느새 최정환의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내일 등판해야 할 수도 있잖아. 더 던지면 무리일 것 같아.”
실전 경기에서 던지는 것보다 체력 소모는 덜했겠지만, 벌써 30구나 던졌으니 결코 적은 투구 수는 아니었다.
“그렇긴 한데…….”
“다음 주 휴식일에 와서 또 하자. 준비해 줄게.”
“네, 알겠습니다.”
“밥 먹을 때 됐다. 어서 가자, 배고프다.”
나는 최정환과 함께 1층으로 올라가 식사를 했다.
오늘의 훈련이 조금은 효과를 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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