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20
20화>
은밀한 유혹 (1)
더블즈와 엔젤스의 경기를 보러왔다.
최정환이 선발 투수로 출전하는 날이었다.
몇 주째 버팔로즈 경기만 보다 보니 다른 팀 경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요즘은 시즌이 후반을 향해가면서 현실적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이 어려워진 팀은 신인 선수들에게 출전 경험을 주며 내년을 위한 준비에 돌입한 경우가 많았다.
이미 포스트시즌 진출 가능성이 희박해진 엔젤스도 그런 팀 중 하나였다.
아직 실전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을 상대할 테니 최정환 입장에서도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오늘은 다행스럽게도 테이블이 있는 좌석으로 구할 수 있었다.
그라운드와 가깝다는 점도 좋았지만, 널찍한 테이블 덕분에 자료를 펼쳐 두고 보기에도 편했다.
“조용하고 좋네.”
경기가 시작하려면 두 시간 정도 남은 시각이라 관중석은 아직 텅 비어있었다.
경기 전에 최정환이 몸 푸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컨디션은 어떤지 직접 미리 보고 싶었다.
타자들이 그라운드에서 훈련하고 있었다.
몇몇은 캐치볼을 하며 몸을 풀었고, 배팅 케이지에서 스윙하며 타격 훈련을 하는 선수도 있었다.
관중석에 홀로 앉은 나는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벌써 그립네.”
선수들이 열심히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경기를 뛰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참 동안 나 혼자만의 감상에 젖어있는 사이.
경기장 구석에서 몸을 풀기 시작하는 최정환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그의 머리 위에 무언가 새로운 내용이 보이지 않을까 기대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봤다.
오늘 최정환과 직접 신체 접촉을 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업데이트됐을 가능성이 희박하긴 했다.
하지만 업데이트 여부를 확인하는 건 둘째치고 거리가 너무 멀어서 글씨를 읽는 것도 불가능했다.
“에이. 아깝네.”
그냥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워밍업을 하는 과정에서는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불펜에서 공을 던지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관중석에서 가려진 곳이라 볼 수가 없었다.
“어? 강현우 선수 아니에요?”
더블즈 모자를 쓴 남자 팬이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맞는데요.”
“우와. 팬이에요!”
나와 눈이 마주친 팬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감탄사를 연발하다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혹시 사진 한 장 찍어주실 수 있어요?”
“그럼요.”
팬들과 사진을 찍어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 팬이 손짓을 하며 일행으로 보이는 누군가를 부르더니 스마트폰을 건넸다.
“잘 나오게 찍어줘.”
나는 팬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여러 번 찍어본 것처럼 자연스러운 척하려고 했지만, 손의 위치는 물론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시선까지 어색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었다.
“자. 찍을게요.”
하나, 둘, 셋, 찰칵.
“한 장만 더요.”
찰칵 소리가 한 번 더 들리고 나서야 내 손과 시선이 자연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이거 SNS에 올려도 되죠?”
“그럼요. 대신에 뽀샤시한 보정 살짝만 해주세요.”
진지하게 답하는 내 모습이 웃겼는지 팬이 웃음을 터트렸다.
“오석훈 선수도 응원할게요.”
“감사합니다.”
사진을 보며 즐거워하는 팬의 모습을 보니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야구도 잘하고 팬들도 많은 선수는 얼마나 행복할지 궁금했다.
이런 팬 서비스가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이라도 비슷한 경험을 해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팬과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보니 경기 시작 시각이 가까워졌다.
나는 잠시 붕 떠 있던 기분을 내려 앉히고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3승 6패 5.21
9이닝당 삼진 8.7개, 볼넷 5.3개
이번 시즌에 최정환이 보여주고 있는 성적이었다.
지난 경기까지 거의 90이닝을 던졌다.
투수에게 규정이닝(144이닝)을 채웠다는 건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한 시즌 동안 선발 로테이션에서 살아남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선발 투수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뜻이었다.
이제 시즌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올해에는 규정 이닝을 채우기에 무리가 있었다.
부상 없이 한 시즌을 소화하고 있기는 했지만, 조기에 강판당하는 경기가 여러 번 있다 보니 생각보다 이닝 수는 적었다.
하지만 한 시즌 동안 꾸준하게 선발투수 로테이션을 지키면서 활약했다는 점만큼은 긍정적이었다.
더구나 이제 22살 프로 3년 차 투수라는 걸 고려한다면 더욱 그랬다.
“플레이 볼!”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됐다.
볼.
볼.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는지 최정환이 던진 공이 대부분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났다.
상대 첫 타자부터 볼넷을 내주고 말았다.
노아웃에 발 빠른 타자를 내보냈다는 건, 투수에게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최정환이 모자를 벗었다 다시 쓰며 집중력을 찾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등 뒤에 있는 주자가 신경 쓰였는지, 이어진 두 번째 타자와의 승부에서도 제구가 안정되지 않았다.
겨우 공 하나가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을 뿐 결국 이번에도 볼넷으로 주자를 내보냈다.
무사 주자 1, 2루 상황이 되었다.
결국 포수가 마운드로 올라가 최정환과 무언가 대화를 나누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포수의 말을 듣던 최정환이 하늘을 보더니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펑
153km.
“스트라이크 아웃.”
펑
155km!
“스트라이크 아웃!”
투구 수가 점점 늘어나자 조금씩 몸이 풀려가는지, 자신의 가장 큰 강점인 패스트볼을 시원시원하게 던졌다.
그 결과 상대 팀의 3, 4번 중심 타자를 상대로 삼진을 잡아내더니 5번 타자에게는 땅볼을 유도해 아웃시켰다.
스스로 만든 위기를 스스로 해결해낸 셈이었다.
“잘했다고 하기도 그렇고, 못했다고 하기도 그렇고…”
어찌 되었건 무실점으로 엔젤스의 1회 초 공격을 막아냈다.
경기는 3회까지 0:0으로 진행됐다.
최정환의 패스트볼의 제구가 초반보다 안정되어가는 데다, 더블즈 수비수들의 좋은 도움까지 받으며 위기를 극복해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신인급 선수였던 엔젤스의 선발투수도 상대 팀 공격을 나름 잘 막아내고 있었다.
팽팽하던 승부의 균열은 4회에 벌어졌다.
4회 초 엔젤스의 8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최정환이 집중하며 공을 던졌다.
스윽-
변화구를 던졌지만 공이 제대로 감기지 않으며 상대 타자의 팔에 맞았다.
변화구를 던지려고 했던 터라 구속이 빠르지도 않았고, 타자가 착용하고 있던 보호대에 스치듯이 맞은 덕분에 타자의 몸 상태에는 문제가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요즘 타격감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몸에 맞은 공으로 출루할 수 있게 돼서인지, 1루로 달려가는 동안 타자의 입가에 미소가 슬쩍 걸렸다.
반면, 마운드에 서 있던 최정환은 굳어버린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찾은 최정환이 모자를 벗어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인사하고 상대 타자도 웃으며 손짓하는 것으로 헤프닝이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변화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최정환이 던지는 공은 중심이 사라진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볼.
볼.
볼.
아까와는 전혀 다른 투수로 바뀌어 있었다.
상대 타자가 넘어지면서 피해야 할 정도로 몸쪽을 향해 날아간 공도 있었다.
타임아웃을 요청하고 투수코치가 포수와 함께 마운드로 올라가 흔들리는 최정환을 진정시켜보려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운 좋게 아웃 카운트 한 개를 잡아냈지만 투구 수가 엄청 많아진 데다, 세 명의 주자가 출루하며 만루가 되어있었다.
아직 실점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확실한 투수 교체 타이밍이었다.
또 타임아웃.
결국 주심에게 투수 교체를 요청한 투수코치가 새로운 공을 받아들고 마운드에 올라가 최정환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4회를 마치지 못한 최정환이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고개를 숙이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더블즈 관중석에는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고요했다.
야유를 보내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후-“
경기를 보던 나는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한 선수의 인생에 내가 너무나도 큰 영향을 끼쳐버린 것 같았다.
내가 그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최정환의 뒤를 이어 올라온 투수가 두 명의 주자를 불러들이고 나서야 4회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오늘 최정환의 기록은 3.1이닝 2실점이었다.
다행히 더블즈 타자들이 상대 투수를 공략해내며 5:3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팀은 웃을 수 있었지만, 최정환의 표정은 어두웠다.
물론 내 표정도 밝을 수 없었다.
* * *
경기가 끝나고 최정환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실내가 어두컴컴한 호프집이었다.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들어가다 보니 가장 깊숙한 곳에서 최정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근데 누구지?’
최정환 앞에는 처음 보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 남자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최정환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오늘 경기가 잘 안 풀렸으니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다가가자 나를 본 최정환이 손을 들고 흔들었다.
그 앞에 앉아 있던 남자도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야릇함과 기름진 느낌 때문에 왠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스타일이었다.
“아, 강현우 씨! 요즘 제일 유명하신 분을 다 만나보네요.”
내가 다가가자 광택이 느껴지는 셔츠를 입고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와 악수했다.
“감사합니다. 정환이랑 선약이 있으셨군요. 제가 조금 이따가 올까요?”
“아니요. 저는 이제 막 가려던 참이라서요.”
“그럼 다행이네요.”
그 순간이었다. 그의 머리 위에 정보창이 떠올랐다.
동시에 내 입가의 미소가 사라졌다.
-최근 비밀리에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을 시작했다.
-최정환에게 1회 몸에 맞는 볼을 던져달라고 부탁했다.
프로 스포츠에서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 행위.
바로 불법 도박과 승부 조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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