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29
29화>
첫 연봉 협상 (1)
직업으로서 국내 프로야구 선수는 특이한 존재다.
프로 구단과 입단 계약을 체결한 뒤로 8-9년 정도 후에 FA(자유계약) 선수가 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기 전까지는 다른 팀과 계약할 수 없다.
구단과 연봉 협상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 없었다.
만약 퇴단을 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 없었다.
결국 구단의 협조가 없다면 이적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이 말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협상 결렬을 선언하는 가장 강력한 카드를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따라서 아무리 뛰어난 활약을 펼쳐도, 모든 팀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FA 요건을 갖춘 상황이 아니라면 선수는 철저히 ‘을’일 수밖에 없었다.
팀의 대체 불가능한 에이스가 아니라면, 에이전시 없이 선수 혼자 힘으로 계약을 진행해서 자신의 가치를 온전히 연봉으로 인정받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직 나준호의 FA 협상이 시작되기 전이라, 나는 우선 김민환을 도와 연봉 협상에 참여하기로 했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버팔로즈는 시즌이 빨리 끝난 만큼 연봉 협상도 빠르게 진행하게 됐다.
내가 에이전트로 첫 연봉 협상을 하게 된 선수는 바로 오석훈과 박성주였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그런지 무척이나 긴장됐다.
더구나 오늘 나의 한마디가 연봉을 결정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부담감도 상당했다.
누군가 나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필요한 데이터를 줄줄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했는데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잠시 머리를 식혀보려고 창밖을 내다봤다.
여유도 잠시 협상 테이블에 앉아있을 내 모습이 떠올랐다.
“후-”
“왜, 긴장돼?”
“조금 떨리긴 하네요.”
“이것도 하다 보면 익숙해져.”
김민환이 나를 보고는 웃음을 피식 터뜨렸다.
“그런데 말이야. 석훈이야 전혀 문제가 없는데, 오늘 성주 연봉 협상까지 진행하는 건 무리가 있을 거 같은데……. 우리 에이전시랑 계약한 지가 얼마 안 돼서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어서 말이야.”
박성주 자료를 들어 올린 김민환이 나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제가 석훈이 경기 보면서 성주도 자주 지켜보기도 했고, 꾸준히 성적 체크도 해뒀거든요.”
“그래? 그럼 성주 연봉 협상도 오늘 진행할 수 있다는 거지?”
“네.”
“……확실한 거 맞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감 넘치게 대답하는 내가 못 미더운지, 김민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원래 박성주랑 친분이 있었나?”
“저요?”
김민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석훈이 만나게 되면서 친해졌는데요?”
“그전부터 서로 알고 지냈던 건 아니고?”
단순한 물음이 아니라 취조하듯이 캐묻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두 사람이 각별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질투하는 건가?
덩치에 안 어울리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혹시 버팔로즈 최민성 단장 스타일은 좀 알고 있나?”
“아뇨. 직접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어서요.”
“하……. 그 사람, 협상에서만큼은 철저하게 비즈니스야. 구단 상황이 갑인지 을인지에 따라서 자세가 완전히 달라지지.”
“그래도 버팔로즈 단장이 일처리 하나는 확실하다고 들었는데요.”
“그것도 맞는 말이야. 특히 FA 선수 영입할 때만큼은 모기업에 강력하게 요청해서 확 지르는 스타일이지. 그 대신 평소에 선수 연봉을 깎을 만큼 깎아서 실적으로 인정받기도 하고. 아마 구단주가 보기에는 실력 있는 단장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야.”
기억을 되살려보니 맞는 말이었다.
팀에 필요한 FA 선수가 시장에 나오면 과감하게 지갑을 열어 영입하는 구단이었다.
“의견 차이가 크게 안 났던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적은 몇 번 없었어. FA 협상도 아닌데 세 번 넘게 만나도 전혀 좁혀지지 않던 적도 많았고. 물론 작년에는 쉽게 해결했지만 말이야.”
“그건 어떻게 쉽게 한 건데요?”
김민환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귓속말로 말했다.
“FA 계약을 여기서 이용하는 거지.”
“네? FA는 협상 시작하려면 아직 멀었잖아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김민환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
“버팔로즈에서 FA로 풀리는 선수가 우리 회사 소속이면 그해 연봉 협상은 너무 편해지는 거지. 사실 그럴 때는 우리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아. 그쪽 사람들이 우리 사무실로 짐 싸 들고 오지.”
“아하…….”
내 고개가 자연스럽게 끄덕여졌다.
“근데 문제는 올해 버팔로즈에서 FA로 풀리는 소속 선수가 없다는 거야.”
방금까지만 해도 신나 보였던 김민환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럼 이번에는 무슨 전략으로 가야 할까요?”
“별수 없지, 어쩌겠어. 일단 오늘은 거기서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는지 들어봐야지. 두 번 정도는 더 만날 각오하고.”
“그럼 우리가 책정한 적정 연봉 정도를 받으면 성공한 건가요?”
한숨을 푹 내쉰 김민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리 계산해 본 적정 연봉 데이터를 다시 한번 살펴봤다.
* * *
“오늘이 저연봉 선수들 맞지?”
“네. 최저연봉 선수들입니다. 이따 10시에 투수들부터 만나기로 했습니다.”
“오늘만큼은 수월하게 끝내봅시다. 내일부터 본게임 시작인데 그전까지는 체력 좀 아껴놔야지.”
최민성 버팔로즈 단장이 깍지를 끼더니 팔을 쭉 늘어뜨렸다.
“단장님. 여기 선수별로 고과 반영해 본 자료입니다.”
운영팀장이 단장에게 서류 한 장을 건넸다.
서류를 눈앞까지 가져온 최민성은 진지하게 내용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폈다.
“오늘은 고과 기준으로 연봉이 인상될 만한 요인이 있는 선수가 거의 없어서 금방 끝날 것 같은데요. 마지막에 오석훈 선수 정도만 신경 쓰면 될 것 같습니다. 아! 박성주 선수도 있네요.”
“뭐? 오석훈이 있어? 하……. 벌써부터 머리 아파지네.”
최민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여러 번 강하게 눌렀다.
“오석훈 선수가 올 시즌 후반에 콜업돼서 경기력이 좋긴 했는데, 1군 출장 경기 수 자체가 적어서 판단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음……. 그리고 우리 팀이 포스트시즌에 떨어졌으니까 크게 인상해달라고 하기는 어려울 거야.”
최민성의 말을 들은 운영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적었다.
“올해 선수단 연봉 축소하기로 한 거 알고 있지? 오석훈한테는 우리가 책정해둔 연봉에서 일단 20% 깎고 시작해.”
“20%나요……? 아무리 첫 제안이라도 해도, 작년 연봉에서 인상 폭이 너무 적은데 그걸 납득할까요?”
“납득 못 하면 어쩔 거야. 시즌 초반에 부진했던 것도 감안해야지. 그리고 FA 되려면 한참 남았잖아.”
난감해하는 운영팀장과 달리 최민성이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근데 이번에 나준호 선수 FA로 풀리면 컨택 해봐야 할 텐데, 지금 타이밍에 YJ 에이전시랑 얼굴 붉혀서 좋을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아……. 나준호가 YJ 소속이었지? 골치 아프네.”
최민성이 한숨을 푹 내쉬며 테이블을 때리듯 서류를 내려놓았다.
“에이전트 얘네들 때문에 연봉 협상이 너무 힘들어졌어. 그냥 직접 하면 되지, 에이전트는 무슨 에이전트야.”
인상을 찌푸리며 최민성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근데 박성주는 소속 회사 없지 않아?”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두웠던 최민성의 얼굴에 미소가 희미하게 걸리더니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박성주 연봉에서 좀 깎아. 얘도 1군에서는 몇 경기 안 뛰었잖아. 내년에 잘 챙겨준다고 하면 많이 달라는 말은 못 할 거야. 오석훈한테 더 줘야 하는 상황이면 여기서 주면 되지.”
“단장님, 그래도…….”
빨간 펜을 집어 든 최민성이 줄을 찍 긋더니 박성주의 연봉을 다시 적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겠어?”
최민성이 앓던 이를 뽑은 것처럼 시원해 보이는 것과 달리, 운영팀장의 표정에는 어두움이 내려앉았다.
* * *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나는 김민환과 함께 버팔로즈 사무실로 들어갔다.
김민환이 익숙하게 직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김 팀장님, 어서 오세요. 어? 현우 씨도 같이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나를 알아본 직원이 반갑게 웃으며 들어가자는 손짓을 했다.
나는 김민환과 함께 직원을 따라 안으로 걸어갔다.
버팔로즈 구단 사무실에 들어와 본 건 처음이었다.
걸어가는 동안 보게 되는 벽면에는 버팔로즈의 역대 우승 순간에 찍은 사진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우승이 결정된 순간을 함께하는 선수들에게는 어떤 감정이 들지 궁금했다.
회의실 앞에 있는 동그란 테이블에 도착하자 직원이 우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앞에 선수들 협상이 아직 안 끝나서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그러죠.”
나와 김민환은 들고 온 가방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마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걸 보니 안에서 협상하고 있는 이들이 누구일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잠시 후, 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열 명 정도 되는 무리의 선수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손에 계약서로 보이는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어깨가 축 처진 채로 걸어 나오는 그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밝지 못했다.
얼굴을 보니 모두 최저연봉을 받고 있는 2군 선수들이었다.
올해도 1군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으니 이번에도 연봉에 변화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대화의 여지가 없는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나로서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실 그건 협상이 아니라 통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했다.
“들어가자.”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김민환이 나에게 손짓했다.
나는 김민환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나와 김민환이 회의실로 들어서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최민성 버팔로즈 단장과 운영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맞아줬다.
나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꽤 많은 선수들과 협상을 진행했을 테니 지쳐 보이는 게 당연했지만, 그들의 얼굴을 보니 전혀 지친 기색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김 팀장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별말씀을요.”
김민환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단장이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강현우 선수를 여기서 보니까 느낌이 또 다르네요. 아니지, 이제 에이전트라고 불러야지. 하하하.”
“잘 부탁드립니다.”
단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와 악수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그 옆에 있던 운영팀장과도 악수를 할 수 있었다.
“서로 좋은 협상 결과를 만들어냈으면 좋겠습니다.”
단장이 마지막 한마디를 던지고 앉으며 우리에게도 앉으라고 손짓했다.
자리에 앉은 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단장과 운영팀장에게로 향했다.
빙고!
두 사람 위로 보이는 정보를 확인하자 내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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