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3
3화>
잊지 못할 1군 데뷔전 (3)
내 앞쪽에 떨어진 공이 잔디를 밀치며 데구루루 굴러오고 있었다.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멍하니 한참을 서 있었다.
야구공을 보니 그날의 기억이 더욱 선명해졌다.
왜 이러지?
조금 전 나를 향해 날아오던 공은 단순한 야구공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나를 삼킬 듯 다가오는 괴물 같달까.
두려운 수준을 넘어 바라보고 있는 것조차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아저씨, 혹시 무슨 문제 있어요?”
어느새 다가온 아이가 내 발 앞에 떨어진 공을 주우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눈이 부셔서.”
“그랬구나. 난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요.”
“미안. 놀랐지?”
나는 애써 표정을 숨기며 피식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헤헤. 아까는 볼이 빠졌거든요. 야구 선수 앞이라 긴장했나 봐요.”
아이가 날 따라 웃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저씨, 이번에는 저쪽에서 던질게요. 저기는 눈 안 부시죠?”
“어……. 그래.”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가 신나게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조금 전에 멀리 던지지 못했다는 걸 의식했는지 아까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멈춰섰다.
“아저씨 던질게요!”
아이가 공을 들어 올리며 준비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어.”
나는 아무 문제 없는 척하며 손을 흔들었다.
다시 와인드업 자세를 취한 아이가 공을 던졌다.
나는 글러브에서 빠져나올 공에 정신을 집중했다.
혹시 공이 또 두렵게 느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휙!
아이가 던진 공이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날아왔다.
“억!”
이번에도 그 순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배트를 들고 있던 그날과 달리 오늘은 글러브를 끼고 있었지만 여전히 두려웠다.
펑!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다행히 공은 글러브에 얌전히 들어와 있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해 주는 아이가 아니었다면 두려움에 몸을 피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이 앞에서 망신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감사했다.
그나저나 놀라운 점은 아이의 제구력이었다.
아직 파워는 부족했지만 공이 마치 글러브로 빨려들 듯 날아왔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잡을 수 있었던 걸까?
나는 아이에게 다시 던져주려고 글러브에서 공을 뺐다.
그런데 갑자기 손가락에 힘이 빠지면서며 공이 바닥으로 툭 굴러 떨어졌다.
왜 이러는 거지……?
내가 오른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아이가 달려왔다.
“아저씨, 괜찮아요? 혹시 어깨가 안 좋은 거예요?”
아이가 깜짝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응. 그런 것 같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직 캐치볼은 좀 힘들 것 같아. 미안한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면 안 될까?”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야구 선수의 어깨는 중요하니까요.”
“고마워.”
왠지 모를 고마움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하지만 아이의 표정에서 묻어나는 아쉬움을 보니 괜히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실망을 준 것 같아 미안했다.
“아저씨, 잠깐만요.”
“응?”
“아직 가시면 안 돼요. 저 금방 다시 올게요.”
“그래, 기다릴게.”
아이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글러브까지 내게 맡기고는 갑자기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헐떡거리며 다시 돌아왔다.
“아저씨, 제 글러브에 사인 좀 해주세요.”
아이가 내민 건 매직펜이었다.
“사인?”
아직까지 그 누구도 사인을 해달라고 다가온 적이 없었다.
당연히 사인이라는 걸 해본 적도 없고, 만들어 두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인 요청을 받게 될 줄이야.
어린 시절의 나도 경기장에서 만난 프로선수에게 사인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 배트를 며칠이나 끌어안고 잤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물론 어린 시절의 나는 당시 최고의 슈퍼스타에게 사인을 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짧은 찰나에 멋진 사인이 생각날 리 없었다.
그래서 내 이름이나마 공들여서 써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알았어. 근데 네 이름도 아직 안 물어봤네. 이름이 뭐야?”
“저요? 최우진이요.”
“오! 이름 좋으네.”
최우진.
오직 아이를 위해 사인한다는 의미로 가장 위에 이름을 적어주었다.
그리고 내 이름을 공들여 멋지게 휘갈겼다.
마지막으로 힘을 줄 수 있을 만한 한 마디를 고민했다.
‘그라운드에서 다시 만나자!’
그렇게, 내 생애 첫 번째 사인이 완성되었다.
내게서 글러브를 건네받은 아이는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처럼 즐거워했다. 무명이나 다름없는 내 사인을 받고도 말이다.
“아저씨, 나중에 저 야구선수 되면 아저씨 꼭 찾아갈게요.”
“그래. 반드시 찾아와.”
“네. 그때 이 글러브도 들고 갈게요.”
“좋아. 기대할게.”
아이들이 흔히 하는 말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최우진의 눈빛이 매우 진지했다.
나중에 어디선가 정말 다시 만날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최우진이 글러브를 꼭 안은 채 꾸벅 인사하고 멀어져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뒤돌아섰다.
내 글러브라도 하나 챙겨줄 걸 그랬나…….
누군가에게 처음 사인을 해준다는 설렘에 빠져 깜빡하고 말았다.
나는 뒤늦게 고개를 돌려 최우진을 찾았다.
하지만 이미 멀리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려보니 병원에서 나온 부모님과 함께 차에 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우진을 태운 차가 병원을 빠져나갔다.
야구용품이라도 하나 줬다면 덜 미안했을 텐데…….
멀어서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머리 위에도 뭔가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 *
혼자 벤치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야구 선수가 아닌 나를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최고의 스타로 성공할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날아오는 공조차 받지 못하다니…….
공을 무서워하는 야구 선수가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만약 더 이상 야구 선수를 할 수 없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야구 이외에 해본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다른 일을 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답답한 마음으로 한숨을 쉬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구나?”
“누구세……?”
무심코 고개를 돌린 나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
“그래. 그동안 잘 있었어?”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학 시절 나를 지도해주셨던 유성환 감독님이었다.
유성환 감독님은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선수 분석 능력이 뛰어나신 분이었다.
실제로도 감독님에게 가르침을 받고 나서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프로에서 활약하는 선수들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선수 육성이 필요한 프로팀으로부터 감독 제안을 매년 끊임없이 받고 있었다.
하지만 감독님은 프로팀 감독보다는 아마추어 선수들을 육성하는 일이 더 좋다며 거절하고 있었다.
그런 감독님의 갑작스러운 등장만으로도 놀랐지만, 악수를 하자마자 최정환에게서 봤던 것과 똑같은 화면이 감독님 머리 위에도 떠올라 더더욱 놀랐다.
-캐치볼을 보고 나서 강현우에게 후유증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너 깨어났다는 소식 듣고 병실로 찾아갔는데 없더라고.”
“그게…… 답답해서 바람 좀 쐬러 나왔어요.”
“그래? 몸은 좀 괜찮고?”
“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
“…….”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캐치볼을 보고 나서 강현우에게 후유증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감독님. 다 보셨죠?”
유성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속마음을 감출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 차라리 잘됐다…….
혹시 감독님이 내 고민의 해결책을 찾아주실지도 모르지.
대학 시절에도 고작 몇 경기만에 내 강점과 약점을 정확히 지적해주신 분이었으니까.
“사실 많이 두렵습니다. 오랜만에 공을 만진 탓인지 아니면 그날의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건지 알 수가 없어서요…….”
나는 감독님께 내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묵묵히 들으시고는 잠시 생각을 하시더니 갑자기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괜찮다면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 잠깐 나갔다 와도 되지?”
“어디요?”
“가보면 알 거야.”
나는 유성환 감독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나섰다.
* * *
감독님과 함께 30분 정도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실내 야구 연습장이었다.
“감독님 여기는 왜……?”
“가서 한번 서봐.”
“네?”
케이지 안쪽을 가리키던 감독님이 무언가를 준비하고 계셨다.
“100km/h부터 시작해보자. 그리 빠르진 않을 거야.”
감독님께 배트를 건네받은 나는 엉겁결에 배팅케이지 안으로 들어갔다.
“준비되면 시작할 테니까 천천히 준비해.”
배트를 들고 타석에 서니 캐치볼을 할 때와는 압박의 차원이 달랐다.
저 기계가 정말 공을 정확한 곳으로 던질 수 있을까?
혹시 또 내 머리 쪽으로 날아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후- 모르겠다. 일단 해보면 알겠지…….
“감독님. 준비됐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데뷔전 그날보다 더 떨리는 것 같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들어 보였다.
“자. 시작한다!”
“예!”
나는 배트를 들고 타격 자세를 취했다.
진짜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아닌가?
직접 휘둘러서 맞출 생각을 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위이잉.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면 저 구멍에서 공이 튀어나올 거다.
퉁-
“헉!”
배트를 휘두르기는커녕, 공이 눈에 보이는 순간 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펑!
공은 오차 없이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왔다.
저 기계는 믿어도 된다.
나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정말 피하지 않을 거다.
그다음 공이 튀어나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퉁-
그러나,
“억!”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날의 공포가 또다시 나를 덮쳤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현우야!”
내 모습을 본 유성환이 케이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감독님…….”
“현우야, 괜찮아?”
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유성환을 바라봤다.
어느새 내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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