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31
31화>
첫 연봉 협상 (3)
퇴근길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니 겨울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어느덧 익숙해진 집 앞에 자동차를 세워두었다.
트렁크에 열어 미리 보자기에 싸서 준비해온 선물과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들고서 건물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딱 한 번 와 봤을 뿐인데도 어색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띵동.
나는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현관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강현웁니다.”
-선배 오셨어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잠금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 뒤로 밝게 웃고 있는 최정환이 나를 맞아줬다.
“선배 오시느라 고생하셨죠? 어서 들어오세요.”
“정환아 잘 지냈지?”
얼마 전에 다이내믹한 사건을 함께 겪은 이후라 그런지 훨씬 친밀하게 느껴졌다.
나는 최정환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집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어머니, 잘 지내셨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최정환의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지난번에 흘리듯 말씀하셨던 식사 초대를 받았다.
의례적인 인사말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최정환을 통해 여러 번 말씀하시다 보니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맛있게 드세요.”
나는 들고 온 선물을 최정환의 어머니에게 건넸다.
“아이고. 무슨 이런 거를 사 왔어요. 그냥 편하게 오지.”
“마침 잘 아는 고깃집에서 오늘 좋은 게 있다고 해서요.”
“다음부터는 편하게 와요. 정말로.”
“네. 알겠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앉으세요. 배고플 텐데.”
집안은 온통 맛있는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나는 최정환과 어머니를 따라 식탁으로 걸어갔다.
“우와!”
음식으로 가득 채워진 식탁을 보자마자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차린 게 얼마 없어서. 입맛에 맞는 게 있을지 모르겠네요.”
차린 게 없다니…….
식탁의 빈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음식이 가득한데.
게다가 내가 선수 시절에는 몸 관리를 한다는 이유로 먹지 못했던 음식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의자를 꺼내 앉으면서도 음식을 보느라 눈이 돌아가서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어서 먼저 드세요.”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김치찌개를 시작으로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을 가리지 않고 빠짐없이 먹었다.
음식의 맛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보통의 요리 솜씨는 아니신 것 같았다.
한참 허겁지겁 먹으며 금방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저기…… 얼마 전에 소식 들었습니다.”
“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지?
“정환이가 나쁜 길로 안 빠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거요? 저는 그냥 옆에 있었을 뿐이지, 정환이가 다 한 겁니다.”
“그리고…… 우리 정환이가 강현우 선생님께 드린 것도 없이 매번 죄송스러운 상황만 만드는 것 같아서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어머니가 말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고개를 숙이시는 바람에 나도 급하게 따라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씀을요. 아닙니다.”
“갑자기 은퇴하신다고 들었을 때는 정환이 어미 된 입장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엄마…… 좀.”
최정환이 어머니를 말리는 듯한 제스처를 취해보지만 소용없었다.
주변 사람들이라면 최정환 때문에 내가 은퇴를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최정환 덕분에 믿을 수 없는 능력을 얻을 수 있었다.
“부상 때문에 은퇴한 건 아닙니다. 저 스스로도 오래 고민해 보니 부족한 실력으로 선수 생활을 억지로 더 하는 게 의미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제가 에이전트가 되고 싶어서 그만둔 겁니다.”
냉정하게 현실을 짚어 보자면, 그날의 부상이 없었다고 해도 강현우라는 선수가 계속 프로 무대를 밟고 있을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에이전트 강현우가 평가하는 선수 강현우는 분명히 그랬다.
“어머니께서도 그렇고, 정환이도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저에게도, 두 분을 위해서도 좋으니까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하네요.”
그러다 문득 내가 최정환에게 전해주려고 가져온 것이 떠올랐다.
“혹시 정환이랑 잠깐 따로 이야기 좀 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배. 그럼 방으로 들어갈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최정환이 나를 방으로 안내해 줬다.
방으로 가던 길에 이제 막 집에 들어오는 최정환의 누나와 마주쳤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어색한 눈인사만 나눴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는 게 뭐예요?”
“일단 이거 받아.”
나는 서류 봉투를 최정환에게 건넸다.
“이게…… 뭐죠?”
“곧 연봉 협상해야 하잖아. 단장님 만날 때 이거 가지고 가서 어필하면 도움이 될 거야.”
“연봉 협상에서요? 지금 열어봐도 돼요?”
“그럼 열어 봐.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이 자리에서 바로 물어보고.”
최정환이 조심스럽게 서류 봉투를 꺼내 열어봤다.
안에 들어있던 몇 장의 서류를 확인하고는 첫 페이지부터 읽어갔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거 선배가 만드신 거예요?”
“이게 내가 하는 일인데 뭐.”
“우와. 저도 모르고 있던 부분까지 다 알고 계시네요?”
감탄사를 연발하는 최정환을 보니 자연스럽게 어깨가 으쓱했다.
“근데…….”
갑자기 최정환의 표정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무슨 일이지?
“정말 감사하긴 한데. 실력이나 연봉이나 지금 정도 수준에서는 에이전시를 둔다는 게 너무 먼 얘기처럼 느껴져서요. 현실적으로 당장 수수료가 부담스러운 것도 있고요…….”
뒤로 갈수록 최정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걱정하지 마. 내가 그냥 도와주는 거니까.”
“네?”
최정환이 잠시 그대로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내가 그냥 도와줄게. 정말 조금도 부담 갖지 않아도 돼.”
“그래도 그건 좀…….”
아무런 보상도 주지 않고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을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했다.
“대신에 성적 좋아지고 연봉도 많이 올라서 에이전시가 필요해지면 나랑 계약해 줘.”
아직 연봉이 아주 많은 것도 아니고, 확실한 팀의 핵심 선수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머지않아 팀의 에이스이자 리그 에이스가 될 만한 잠재력을 가진 선수라는 건 분명했다.
“제가…… 선배랑요?”
“에이전시랑 매니지먼트 계약 맺는 상황에서는 무조건 나랑 먼저 협상하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10년 15년짜리 노예 계약을 제안할 리는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 말의 의도가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지 최정환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당장은 내가 네 에이전트로 등록돼있는 건 아니라서 협상장에 직접 들어가 줄 수는 없어. 그래도, 이 정도 자료만 들고 가도 원하는 결과는 얻을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그리고…… 선배 조언대로 해서 연봉 많이 받으면 제가 수수료로 드릴게요.”
“됐다니까 그러네. 나는 몇 년 뒤에 네가 FA 계약할 때 한몫 제대로 땡길 테니까.”
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최정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 * *
최정환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김규상 더블즈 단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 정환이구나. 어서 들어와.”
“단장님 잘 지내셨죠?”
김규상이 최정환을 눈빛으로만 흘끗 보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예.”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최정환과 눈을 마주쳤다.
“연봉 협상하러 온 거지?”
“네.”
한참을 기다리게 해놓고도 김규상이 사과 한마디 없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최정환은 애써 입꼬리를 올려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올해 고생 많았어. 한 시즌 동안 부상 없이 선발 로테이션을 지켰다는 건 대단한 일이니까.”
“감사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김규상의 칭찬에 최정환은 긴장감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지난 시즌이 연봉이 4천 5백만 원이었지?”
“네. 맞습니다.”
김규상이 자기 앞에 놓인 서류 더미를 뒤적이더니 구석에 있던 한 장짜리 종이를 들어 올렸다.
“이번 시즌에 많은 경기를 소화해 줬으니 연봉 인상에는 이견이 없어.”
김규상의 호의적인 반응에 최정환의 얼굴에 조금씩 화색이 돌았다.
“그래서 우리 구단 고과 기준으로 산정한 연봉은…….”
최정환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김규상이 할 다음 말을 기다렸다.
“33% 인상해서 6천만 원.”
“아…… 네.”
“성적만 놓고 보면 대량 실점에 조기 강판당한 경기도 적지 않아서 부족하긴 한데, 90이닝 넘게 소화해 줬다는 점에서 이 정도가 적정한 것 같은데. 동의하지?”
김규상은 6천만 원이 적힌 계약서를 건넸다.
계약서를 건네받은 최정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어제 강현우를 만나지 않고 이 자리에 왔다면 아마 지난 연봉 협상처럼 군말 없이 바로 도장을 찍고 나섰을 것이다.
“단장님, 근데…….”
“뭐 더 할 말 있어?”
“이거 좀 봐주실래요?”
“이게 뭔데.”
최정환은 김규상에게 들고 온 자료를 건넸다.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고개를 갸웃하던 김규상이 자료를 건네받았다.
“이번 시즌 지표만 보셔도 아실 수 있겠지만, 제가 이번 시즌 평균자책점이나 이닝당 출루 허용률 같은 지표가 평균적으로 아쉬운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
김규상이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기 강판당한 경기과 그렇지 않은 경기를 구분해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던데요. 출전한 경기의 절반 정도는 우리 팀 에이스 투수급 활약을 펼쳤다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느낌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 들고 계시는 자료를 보시면 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김규상이 자료를 다시 내려다보더니 눈이 커졌다.
“그, 그래서.”
“그렇다고 해서 연봉을 올려달라는 말은 아닙니다. 자진 신고를 하긴 하지만, 시즌 중에 불미스러운 일에 엮인 건 사실이니까요.”
최정환이 깊은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구단에서 제안해 주신 연봉에 사인하겠습니다. 다만 저의 가치만큼은 제대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최정환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하고 싶었던 마지막 말까지 시원하게 던졌다.
그러고는 한 방 맞은 듯 멍해진 김규상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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