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35
35화>
무엇이 선수를 위한 걸까 (2)
“나준호 선수, 이쪽으로 앉으세요.”
임예지가 손으로 자신의 반대편 자리를 가리켰다.
나준호를 보는 임예지의 시선은 마치 든든한 아들을 보는 엄마 같았다.
“경기에 집중해야 하는데 불러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오늘은 경기 없는 날이기도 하고, 저한테는 이것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나준호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웃으며 답했다.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는 마지막으로 나준호 선수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서예요. 이미 시즌 중에도 여러 번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 사이에 혹시 생각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임예지가 나준호와 눈을 마주치며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반드시 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협상이라는 게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진행된다는 보장은 없는 거니까요.”
임예지의 말을 들으며 나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준호 선수가 이번 협상에서 원하는 조건이 있나요?”
“사실 메이저리그에서 좋은 제안이 온다면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부분에 대해서 가족들과 충분히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요.”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준호가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대신에 국내에 잔류하게 된다면 다른 팀으로 가는 것보다는 드래곤즈에 남고 싶다는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임예지가 방금까지 고개를 끄덕이던 것과 다르게 이번에는 멈칫했다.
“같은 조건이면 잔류를 하고 싶다는 거죠?”
“그렇기도 하고. 혹시 계약 조건에서 크게 차이 나는 게 아니라면 그냥 남고 싶습니다.”
-드래곤즈 최초의 영구결번 선수가 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나준호가 드래곤즈에 잔류해서 남은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무난한 성적만 거두더라도 영구결번 선수가 되는 데에는 전혀 걸림돌이 없었다.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적도 없었고,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국제 대회에 출전해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기도 했다.
창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영구결번이 없는 드래곤즈에서 자신의 등 번호를 구단 최초의 영구결번으로 만들 수 있다면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일 것이다.
나였어도 마찬가지로 웬만해서는 잔류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생각이 같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음……. 그렇군요. 참고하겠습니다.”
나준호의 답변을 들은 순간 임예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러고는 무언가 깊은 고민에 빠진 듯 생각에 잠겼다.
잠시 대화가 멈추자 실내 공기에서마저도 어색함이 느껴졌다.
내가 끼어들어야 하는 타이밍인 건가.
“선배님, 혹시 지금 몸 상태는 어떠세요?”
“몸에는 전혀 문제없습니다.”
“무릎도…… 괜찮으신 거죠?”
나는 조심스럽게 나준호의 오른쪽 무릎을 가리켰다.
“이제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최근에 경기하는 모습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수비나 주루에서 불편한 것도 전혀 없고요.”
말하는 내내 나준호의 표정에서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데이터는 분명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구단 차원에서 관리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커리어 내내 매년 도루를 15개 이상 성공했던 것과 달리 부상 이후로는 도루 시도 자체를 거의 하지 않아서 이번 시즌에는 고작 2개가 전부였다.
외야 수비는 물론이고 주루플레이에서도 적극성이 떨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행스럽게도 경기력에 크게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직도 무의식 속에 두려움이 남아있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그게 무슨 심정인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나준호 선수. 만약 이적할 팀을 선택해야 한다면 우선하고 싶은 조건이 있나요?”
“이적할 때…… 조건이요?”
다시 시작된 임예지의 물음에 나준호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팀을 이적하게 되는 상황이 올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연봉에서 차이가 없다고 한다면 어떤 조건을 가진 팀을 우선하고 싶은지를 확인하는 거예요.”
“그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긴 한데…….”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지역도 있을 수 있고요. 우승을 노려볼 수 있을 만한 전력을 가진 팀이어야 한다거나. 뭐 이런 게 있을 거 같은데?”
원하는 답을 듣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기세로 임예지가 끈질기게 질문을 던졌다.
“음……. 조금 더 고민해 보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바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인가요? 그럼 어쩔 수 없죠.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려면 아직 시간이 좀 있기는 하지만, 최대한 빠르게 알려주세요. 나준호 선수 의견도 어느 정도 반영해야 하는 부분이니까요.”
대답하기 어려워하는 나준호를 보며 임예지가 실망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내 마음 구석에는 불편함이 자리 잡았다.
선수 의견도 ‘어느 정도’ 반영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물론 협상 과정에서 모든 것을 선수 의견대로만 진행한다면 에이전트가 존재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선수를 도와주는 에이전트라면 다른 무엇보다 선수 본인의 의견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소한 부분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걸리는 말이었다.
“하실 말씀 끝났으면 이제 일어나 봐도 될까요? 팀 훈련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요.”
나준호가 시계를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바쁜데 시간 많이 뺏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임예지와 인사를 나눈 나준호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한국시리즈 끝나고 나면 필요할 때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네.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나준호가 밖으로 나가자 회의실에는 다시 나와 임예지 둘만 남게 되었다.
“현우 씨. 아까 우리가 어디까지 얘기했죠? 이어서 해보죠.”
“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 게 느껴졌지만 임예지의 표정이 아까보다 어두웠다.
그녀의 표정을 본 내 머릿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 * *
나와 오석훈, 박성주는 소파와 거실 바닥에 각각 편한 자세로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이번 시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드래곤즈가 3승 1패로 앞선 상황이었다.
오늘 경기에서 이긴다면 드래곤즈는 창단 첫 우승을 페넌트레이스와 포스트시즌 통합 우승으로 장식할 수 있었다.
하루빨리 우승을 확정 짓고 싶은 드래곤즈와, 어떻게 해서라도 승부를 6차전까지 이어가려는 울프즈가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벼랑 끝 한판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페넌트레이스 1, 2위 팀답게 경기는 초반부터 팽팽했다.
오석훈과 박성주가 사 온 거대한 TV 화면으로 경기를 보고 있으니 현장에 와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우리도 내년에는 한국시리즈에서 뛰어볼 수 있을까?”
TV를 보는 박성주의 눈빛에는 부러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년 목표는 일단 포스트시즌 정도로 잡아야지.”
언뜻 듣기에는 소박한 목표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석훈의 얼굴에서는 은근한 자신감과 결연함이 느껴졌다.
“내년에 너희 둘이 풀타임 출전하기만 하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우리가 풀타임을 뛸 수 있을까요?”
자신도 확신이 없는지 오석훈이 나를 보며 물었다.
“너희가 컨디션 관리만 엉망으로 안 하면, 출전시키지 않을 감독이 어디 있겠어?”
“하긴 그래도 우리가 올라와서 잘하긴 했어요. 그렇죠?”
박성주가 어깨를 으쓱하며 여유 넘치는 표정을 지으며 다리를 뻗었다.
“잘한 건 사실인데, 대신 자만하지는 마. 올해 잘했다고 내년에도 잘한다는 보장은 없는 거니까. 게다가 풀타임을 소화하다 보면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으니까”
“그렇죠. 긴장하고 열심히 해야죠.”
다시 현실로 돌아온 박성주가 다리를 급하게 다시 접었다.
그 모습을 보자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우와아아아!
그때 TV 중계에서 캐스터의 샤우팅과 관중들의 엄청난 환호성이 들렸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경기 화면을 향했다.
-호오오옴런! 8회 말에 나준호의 결정적인 홈런이 터집니다. 드래곤즈가 창단 첫 통합우승에 한 발 더 다가갑니다!
-나준호! 나준호! 나준호!
“우와. 저렇게 낮게 던진 공을 그냥 들어 올려서 넘겨버리네.”
“스윙이 진짜 대박이다.”
방금 나준호가 홈런을 친 장면을 리플레이로 보여줄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저런 경기에서 홈런 치면 어떤 기분일까?”
박성주가 팬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내야를 돌고 있는 나준호의 모습을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스윙하는 자세를 취하며 자신이 홈런 치는 순간을 머릿속에 그리는지, 표정에는 황홀함이 느껴졌다.
“타구 각도를 높이려고 어퍼스윙에 가깝게 스윙하는 거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정확하게 공을 맞히죠?”
오석훈이 나준호의 스윙 자세를 분석하듯이 유심히 지켜봤다.
경기는 계속 진행됐고, 나준호의 결정적인 홈런을 기점으로 팽팽하던 경기 분위기를 드래곤즈가 완전히 가져갔다.
-떴습니다. 높이 뜬 공!
-드래곤즈의 우익수 나준호가 이번 시즌의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아냅니다!
-와아아아아-
-드래곤즈의 창단 첫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입니다!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드래곤즈 더그아웃에 있던 선수들이 모두 뛰어나와서 한데 엉켜 우승의 기쁨을 나누었다.
날아갈 듯이 뛰어다니며 기뻐하는 선수도 있고, 그동안 힘들었던 시간이 스쳐 가는지 다른 동료 선수와 부여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선수도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눈시울이 붉어진 나준호가 돌아다니며 눈물을 흘리는 선수들을 하나하나 안아주고 있었다.
경기장에서 응원하던 팬 중 일부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드래곤즈의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번 시즌이 모두 끝났다.
한 시즌을 마무리하는 것과 동시에 내년 시즌을 위한 스토브리그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라운드에서 벌어지는 경기는 끝났지만 프로야구의 시계는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자격을 충족한 선수들이 FA를 신청하고, 야구협회가 승인하고 공시하는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당연히 나준호도 FA 선수 자격을 승인받았다.
이제 나준호를 포함해 FA 자격을 승인받은 선수들은 기존 소속팀을 포함해 모든 구단과 협상을 진행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다.
경기장 밖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리그라고 불리는 스토브리그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내 핸드폰이 잠시도 쉴 틈 없이 울려댔다.
FA 시장 분위기를 살피려는 구단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흥미로운 기삿거리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취재하는 스포츠 매체 기자들까지.
늦은 밤에도 편하게 쉬기 어려워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화장실도 마음 편하게 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