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36
36화>
무엇이 선수를 위한 걸까 (3)
가장 먼저 우리를 찾아온 구단은 나준호의 기존 소속팀 드래곤즈였다.
시장 분위기를 살펴보려는 다른 팀들과 다르게 드래곤즈는 최대한 이른 시간에 미팅 약속을 잡아달라고 요청했다.
버팔로즈와 우선 협상을 약속했기 때문에 일정을 조절해 보려고 했지만, 임승진 드래곤즈 단장의 의지가 너무나 강력했다.
무슨 일을 해서라도 나준호를 잔류시키려는 구단의 의지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른 시간에 드래곤즈 단장과 운영팀장이 직접 우리 사무실로 찾아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드래곤즈의 연고지가 서울에서 먼 지방 도시이다 보니,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고 해도 우리 사무실까지 완전히 도착하려면 5시간 정도는 걸렸을 것이다.
지금처럼 오전 10시가 되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아침 5시보다 더 이른 시간에 출발해야 했을 것이다.
얼마 전에 김민환이 했던 말처럼, 칼자루를 쥐고 있으니 이런 부분에서 편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임예지가 사무실 입구까지 나가 밝은 미소로 버팔로즈 단장과 운영팀장을 반겼다.
나도 그 옆에서 함께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별말씀을요.”
우리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악수를 하고 회의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단장과 운영팀장의 머리 위로 정보가 보였다.
-최대한 빠르고 확실하게 나준호와 계약을 마무리하고 싶다.
-어제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오늘 새벽부터 출발해서 오느라 굉장히 피곤하다.
“푸훗.”
두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진 운영팀장에게서 현실적인 내용이 보이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졌다.
“켁켁.”
회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하자 헛기침을 하는 척했다.
“괜찮으세요?”
“잠시 사레가 들러서요. 죄송합니다.”
급하게 둘러대고 나서야 겨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영팀장 눈 밑에 있는 다크서클을 보니 다시 웃음이 터질 뻔했다.
시선을 급히 돌려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웃긴 일인데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웃지 못한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얼마 전에 나준호 선수랑 식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임예지의 한마디에 단장의 눈이 살짝 움찔했다.
“저희 구단이 창단했을 때부터 함께하기도 했고, 올해 우승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해준 선수니까요. 이번 계약과는 별개로 고생했다는 의미에서 식사 한 번 했던 자리였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여쭤본 건 아닙니다. 저희 선수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예지가 웃으며 답하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나준호 선수는 우리 구단이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해준 선수입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그럼요. 좋은 결과로 마무리되면 좋겠네요.”
여전히 임예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조금 전과는 다르게 눈빛에 날카로움이 더해졌다.
“저희 팀 에이스와 협상하는 데 줄다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가 제안할 수 있는 최대 액수로 바로 제안 드리겠습니다.”
단장의 표정에서는 결연함마저도 보였다.
드래곤즈의 첫 제안이자 최대 액수라고 말한 금액은 과연 얼마일까.
나는 기대 반 긴장 반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4년 계약에 계약금 55억 원, 그리고 연봉 10억 원 제안 드립니다.”
4년 총액으로는 95억 원.
아…….
나는 혼자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옅은 탄식을 내뱉었다.
임예지도 잠시 아무 말 없이 고민에 잠긴 걸 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음…….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확실하게 만족스러운 제안은 아니네요.”
조심스럽게 입을 연 임예지가 표정과 말투에서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총액 100억 원 정도는 무난하게 넘길 거라는 시장의 평가가 쏟아지는 상황에 비추어보면 무리한 반응도 아니었다.
“저희도 나준호 선수가 지금 시장에서 어느 정도 평가를 받고 있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수 입장에서 완벽하게 만족스러울 만한 조건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저희 구단에서 제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는 충분히 보여줬다는 점은 충분히 전달됐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단장이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번 시즌에 저희 팀에서 자유계약으로 풀리는 선수가 3명이나 더 있습니다. 올해 우승 전력 유지를 위해서는 반드시 모두 잡아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고요.”
“결론은 여기까지가 최대치라는 말씀이신 거죠?”
“그렇습니다. 대신 어떠한 옵션 조항 없이 전부 보장금액입니다. 게다가 계약금 비중도 절반 이상이니 선수 입장에서도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부분이 클 겁니다.”
계약된 조건을 완수해야 연봉이 지급되는 옵션 조항이 없다는 건 선수에게는 상당한 메리트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FA 계약이라고 하더라도, 국내 프로야구 연봉 제도에서는 부상이 아닌 이유 때문에 2군으로 내려간다면 계약된 연봉의 50%만 지급하도록 하는 조항이 있었다.
따라서 선수 입장에서는 옵션 조항이 없고, 연봉보다는 즉시 지급받을 수 있는 계약금의 비중이 높은 계약이 유리했다.
드래곤즈에서는 나준호가 시장에서 평가하는 만큼의 연봉을 주지는 못할 것 같으니 선수가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액수를 높여주려는 전략이었다.
“좋은 제안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래곤즈에서 나준호 선수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것은 충분히 확인했습니다.”
“저희 드래곤즈는 나준호 선수만 잔류해 준다면 내년에도 충분히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춘 팀입니다.”
단장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자신감과 절박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총액에서 아쉬움이 남기는 했지만, 옵션 조항 없이 보장액이 높다는 점과 내년에도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을 갖춘 팀이라는 건 긍정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다른 팀들의 조건과 비교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바로 다음으로 협상을 진행한 팀은 버팔로즈였다.
최대한 빠르게 미팅을 잡느라 힘들었다.
“임 대표님, 요즘 여러 구단 만나고 다니시느라 바쁘시죠? 드래곤즈는 당연히 달려들었을 테고, 다른 팀에서도 적극적으로 노리고 있던 거 같던데요.”
최민성 버팔로즈 단장이 임예지를 향해 살짝 떠보듯이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워낙 좋은 선수니까요.”
“역시나 그렇겠죠. 나준호가 필요하지 않은 팀이 있겠습니까?”
언제쯤 본론으로 들어가려나.
“나준호 선수의 시장 가치를 어느 정도로 보고 계신가요?”
이제는 제안을 할 줄 알았더니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건 단장님께서 얼마를 제안해 주시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임예지도 호락호락하게 휘둘리지는 않았다.
버팔로즈 단장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서 나와 임예지를 번갈아 바라봤다.
“4년 120억 원 어떠십니까? 계약금 25억 원, 연봉 15억 원에 옵션 35억 원입니다.”
헉.
옵션 조항이 있는 데다 계약금의 비중도 적었지만 드래곤즈의 제안보다 총액 25억 원이나 높은 제안이었다.
의외로 적극적인 배팅이었다.
나는 떡 벌어지려고 하는 입을 겨우 다물었다.
“그런데 옵션이 35억 원이나 되네요. 어떤 내용이죠?”
“조건이 그리 까다롭지는 않습니다.”
임예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버팔로즈 운영팀장이 우리에게 서류를 건넸다.
“출장 경기 수와 타석 수, 타점과 홈런 수로 잡아봤습니다. 나준호 선수가 여태 해온 것처럼 출전해서 경기를 펼쳐 준다면 충족시키는 데 크게 문제가 없을 겁니다.”
나와 임예지는 건네받은 서류를 보며 구체적인 조건을 살펴봤다.
단장의 말대로 나준호가 이제까지 해왔던 대로만 한다면 무난하게 충족시킬 수 있을 만한 조항들이었다.
“저희 측에서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이적한 선수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좋지는 않을 것 같아서, 성적과 관련된 조건은 여유 있게 잡아두었습니다.”
“버팔로즈의 생각은 잘 알았습니다. 논의해 보고 연락드리죠.”
“그리고 또 하나 더. 우리 버팔로즈는 수도권 팀입니다. 나준호 선수도 이왕이면 수도권에서 생활하는 게 여러모로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 부분은 나준호 선수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버팔로즈 단장의 표정과 몸짓에서는 당당함이 느껴졌다.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거액의 제안일 거라는 자신감과, 수도권 팀이라는 이상한 자부심까지.
얼마 전 연봉 협상에서 쩔쩔매던 단장의 얼굴과 대비되자 얄미웠다.
* * *
드래곤즈, 버팔로즈와의 협상을 마무리하고 나와 임예지는 두 구단이 제시한 자료를 꼼꼼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현우 씨 생각은 어떤가요?”
임예지가 들고 있던 자료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드래곤즈 쪽으로 마음이 가긴 하는데요.”
“드래곤즈요? 이유가 뭐죠?”
“나준호 선수가 드래곤즈에 애착이 크기도 하고, 보장금액만 놓고 보자면 드래곤즈에서 제안한 조건도 나쁘다고 할 수도 없으니까요.”
내 말이 끝나자 임예지가 팔짱을 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저랑 완전히 다른 부분을 고민하고 있었군요.”
“그럼 대표님은 어떤 부분을 보고 계셨는데요?”
“지금 상황에서 드래곤즈의 제안을 고민할 가치가 있나요?”
“네?”
조금의 고민도 없이 이야기하는 임예지의 말을 듣고 나는 당황스러움을 숨기기 어려웠다.
“반대로 물어보죠. 드래곤즈의 제안에서 어떤 점이 경쟁력을 가지고 있죠?”
“그야 나준호 선수 본인이 가장 원하는 팀이기도 했고, 드래곤즈 단장과 대화를 나눌 때도 느껴졌지만 나준호 선수를 진심으로 필요로 한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나준호 선수가 드래곤즈 팬들에게 확실한 사랑도 받고 있고요.”
나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내 생각의 이유를 설명했다.
“지금 현우 씨는 너무 휴머니스트예요.”
휴머니스트?
임예지의 말에 내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프로는 자신의 가치를 연봉으로 이야기한다고 하죠. 우리도 다르지 않아요. 소속 선수에게 얼마나 좋은 계약을 안겨 줬느냐가 에이전트로서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그 이외에 다른 말은 아무리 합리적이어도 변명일 뿐이고요.”
좋은 계약…….
그럼 어떤 계약이 선수에게 좋은 계약인 걸까?
“하지만 그 선수의 생각과 감정도 중요한 부분이지 않을까요?”
“감정이라……. FA 계약을 진행하면서 많은 선수들과 대화를 나눠봤지만, 처음부터 이번 기회에 팀을 옮기고 싶다고 말한 선수는 한 명도 없었어요. 팀에 애정이 크든 작든 결국 선수도 사람이라, 급격한 변화보다는 지금 상황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죠.”
임예지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버팔로즈의 제안서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서 천문학적인 거액이 오가다 보면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이번이라고 다를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드래곤즈의 95억 원과 버팔로즈의 120억 원의 차이는,
25억 원.
대부분의 사람이 살면서 한 번도 만져보기 힘든 거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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