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38
38화>
무엇이 선수를 위한 걸까 (5)
“저, 저요?”
나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 말까지 더듬었다.
“어서 올라오세요.”
기자 여럿이 나에게 오라는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 홀린 듯이 임예지가 서 있는 포토존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나가서 발표하라는 것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떨리는 걸까.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임예지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려는 순간,
“현우 씨, 저는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 충분히 시간 보내고 들어오세요.”
임예지가 나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던지고는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헉. 뭐야.
이렇게 그냥 들어간다고?
나는 임예지의 뒷모습만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강현우 씨. 이쪽 좀 봐주세요.”
기자들의 재촉에 나는 최대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방향을 돌렸다.
찰칵. 찰칵.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빛의 공격에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내가 거의 눈을 감고 있는데도 플래시는 줄어들 기미가 없어 보였다.
제대로 찍히고는 있는 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리며 여유 있는 척했다.
마음과는 다르게 손끝이 조금씩 떨려왔다.
뉴스에서만 보던 장면을 내가 직접 경험하고 있었다.
진짜 톱스타라도 된 기분이었다.
“손 하트 한 번 만들어주세요.”
“파이팅 하는 자세도 해주세요.”
기자들의 요구사항도 하나둘 추가됐다.
나는 양손을 들어 손 하트를 만들고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파이팅을 외쳤다.
이것도 하다 보니 은근히 재밌었다.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노하우가 생기고 조금씩 여유가 생겨가는 느낌이었다.
이제 사진을 충분히 찍었는지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는 빈도수가 크게 줄었다.
시간이 생각보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지금 나준호 선수 협상 분위기는 어떤가요?”
갑자기 한 기자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음……. 어느 팀하고 말씀이시죠?”
내 한마디에 갑자기 기자들이 술렁거렸다.
갑자기 무슨 문제가 있나?
“드래곤즈 말고 다른 팀하고 협상이 진행 중인가요?”
아뿔싸.
내 말이 문제였다.
저 기자는 당연히 드래곤즈하고 단독으로 협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물었던 게 분명했다.
유도 질문도 아니었는데 나 혼자 걸려 넘어졌다.
“나준호 선수가 이적할 가능성이 있는 건가요?”
“지금 협상하고 있는 다른 팀이 어느 팀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다른 팀의 제안하고 차이가 큰가요? 나준호 선수는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고 검토 중인가요?”
여기서 내가 아무 대답을 안 하고 들어가더라도 이적과 관련된 기사가 쏟아져 나올 거란 건 분명해 보였다.
들어가자마자 임예지에게 보고해야겠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은 어떻게 넘겨야 하지?
“나준호 선수가 이번 FA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선수라는 건 다 아시지 않나요? 그런 선수한테 다른 팀이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지금 다른 팀하고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건 맞는 거죠?”
내가 모든 걸 털어놓기 전까지는 기자들의 질문이 멈추지 않으리라는 걸 예감했다.
“자세한 내용은 공식적으로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급하게 기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하나만 더 답변해달라는 기자들의 아우성이 계속 이어졌다.
휴.
쉽지 않은 신고식이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쭉 흘러내렸다.
* * *
“괜찮아요. 잘하셨어요.”
내가 아까 있던 이야기를 빠짐없이 다 했는데도 임예지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칭찬에 가까운 말까지 들을 수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
내가 무언가 더 물어보려던 찰나에 다른 손님이 다가왔다.
“임 대표.”
누군가 임예지를 부르며 다가왔다.
나와도 인연이 깊은 조광훈 재규어즈 단장이었다.
“단장님, 잘 지내셨죠?”
“아이고, 잘 지내기는요. 팀이 우승을 못 했는데 단장이 잘 지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의 말이 엄살이라는 걸 드러내듯 재규어즈 단장의 얼굴에는 여유가 느껴졌다.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이번에 모기업에서 든든하게 지원받으신 거 같던데요?”
“그래 봐야 집토끼 잡고 나면 다 끝날 건데요 뭘.”
재규어즈에서도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할 수 있는 외야수 이상훈이 FA 자격을 얻은 상황이었다.
이상훈도 나준호와 마찬가지로 못해도 총액 100억 원은 안겨줘야 잡을 수 있을 만한 스타 플레이어였다.
임예지와 인사를 나눈 재규어즈 단장이 옆에 있던 나를 보고는 조금은 과장된 행동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게 누구야. 현우야. 오랜만이다.”
“단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는 재규어즈 단장과 악수를 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요즘 잘하고 있다는 소식 많이 들리더라.”
“감사합니다.”
그의 머리 위로 보이는 정보창에는 의외의 내용이 떠올랐다.
-재규어즈 프랜차이즈 이상훈과 FA 협상에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고민스럽다.
-협상 결렬 가능성에 대비해 다른 선수들의 협상 과정을 알아보고 있다.
이상훈은 재규어즈에서 데뷔를 했고, 몇 년 전 우승을 거머쥐었던 시즌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 선수였다.
어느 누구도 이상훈과 재규어즈를 떼어 놓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재규어즈 하면 이상훈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팬들도 꽤 있을 정도였다.
혹시 이상훈이 이적하게 되는 상황이라도 맞게 된다면, 열성적이기로 유명한 재규어즈 팬들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단장이 그런 선수와의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상황이라니.
재규어즈 팬이기도 한 나로서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협상이란 그런 걸까…….
“현우 같은 인재는 우리 구단에서 놓치지 말아야 했는데 말이야. 하하하.”
재규어즈 단장이 나와 임예지를 번갈아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덕분에 저희 회사에서 도움을 아주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임 대표. 요즘 나준호 협상은 어떻게 잘 돼 가고 있어?”
“글쎄요. 아직 초반이라서요. 여기저기서 다양하게 이야기 들어보고 있습니다.”
“드래곤즈에서 확실하게 잡을 거 같더니…… 그 정도 제안을 한 건 아닌가 보네.”
재규어즈 단장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은근슬쩍 협상 상황을 떠보는 게 분명했다.
혹시라도 이상훈과 협상이 결렬됐을 때를 대비한다는 게 이걸 말하는 걸까?
같은 외야수이긴 하지만, 나준호는 우익수였고 이상훈은 중견수였다.
게다가 플레이 스타일도 완전히 달랐다.
나준호는 언제라도 홈런을 때려줄 수 있는 선수였고, 이상훈은 기술적인 컨택트 능력과 빠른 스피드 그리고 넓은 수비 범위가 강점이었다.
“드래곤즈 프랜차이즈 선수인 건 변함없지만 지금은 엄연히 FA 선수니까요.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계약하려면 다른 구단에서 어느 정도 평가를 하고 있는지도 충분히 들어봐야죠.”
임예지가 모호한 답변으로 재규어즈 단장의 물음에 답했다.
“그래야지. 음……. 그럼 이따 또 인사합시다.”
시원하게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해 아쉬운지 재규어즈 단장의 표정이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애써 억지로 웃으며 돌아섰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선수와 야구 관계자들이 시상식장에 도착했다.
임예지와 함께 다니다 보니 야구계에 걸출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각 팀 단장과 선수는 물론이고 야구협회 관계자들과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만나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악수도 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다니는 정보창으로 온통 가득 차 있었다.
-구단 선수들과의 연봉 협상이 수월하지 않아 걱정이 많다.
-내일 방출 선수에게 통보해야 해서 마음이 불편하다.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팀으로 트레이드를 원하고 있다.
보통은 단장이나 선수로서 느끼는 애로사항과 고민거리가 많았다.
당장 필요한 정보를 얻지는 못해서 아쉬워하던 찰나에.
-FA가 아닌 선수도 다년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다.
방금 슬쩍 지나가며 인사를 나눈 야구 관계자 덕분에 꽤 의미 있는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FA 선수가 될 자격 요건을 갖추기 전까지는 무조건 1년 계약밖에 할 수가 없었다.
FA 요건을 갖추는 게 까다로운 편이라, 이미 전성기가 지나가고 난 다음에 FA 자격을 갖추는 사례도 많았다.
아무리 선수 커리어 내내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다고 해도 이미 전성기가 지난 선수에게 좋은 조건이 담긴 계약서를 건넬 팀은 없었다.
따라서 만약 저 말대로만 된다면 FA 요건 충족과 관계없이 선수가 자신의 전성기에 소속팀과 다년 계약을 맺어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생기는 셈이었다.
오석훈과 박성주도 머지않아 잠재력을 터뜨렸을 때, 걱정 없이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후로도 나는 여러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편하게 시상식을 관람하는 것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다.
반면에 임예지에게서는 조금도 힘든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준호 선수!”
갑자기 임예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대표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나준호가 나와 임예지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정장을 입고 스타일링까지 한 모습을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나도 반가운 마음에 나준호와 악수를 하자 정보가 업데이트됐다.
-가족들은 이적에 있어서 나준호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시상식에서 만난 드래곤즈 선수들에게서 잔류해달라는 말을 듣고 생각이 복잡해졌다.
오히려 가족들이 완강하게 의견을 주장했다면 결정이 더 쉬워졌을까.
만약 지금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아마 혼돈 그 자체일 게 분명했다.
그러다 갑자기 몸에서 생리적인 신호가 왔다.
“대표님, 저 잠깐 밖에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금방 돌아올 겁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나는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아까부터 계속 참고 있었는데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서둘러 행사장 밖에 있을 화장실을 찾아 나섰다.
화장실이 찾기 쉬운 위치에 있긴 했지만, 행사장의 규모가 커서 그런지 몰라도 가는 동안 거리가 점점 늘어나는 기분마저 들었다.
내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거의 달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 왔다는 생각이 들 때쯤,
“억!”
화장실에 급하게 들어가다가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일단 허리를 굽혀 죄송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현우 씨?”
상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어? 단장님.”
“우리가 또 여기서 뵙네요.”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반가운 마음도 잠시.
내 시선은 그의 머리 위로 보이는 정보창에 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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