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4
4화>
두 번째 인생의 시작 (1)
“헉. 헉.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뛰었다.
세어보지 않아서 정확히 몇 바퀴째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오래 뛰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머리에선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몸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치료를 받는 지난 몇 주 동안 전혀 훈련을 못했기 때문에 체력이나 근력이 바닥이나 다름없었다.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던 내 몸을 깨우고, 얼마 남지 않은 시즌 개막에 맞춰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해왔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운동량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아무도 오지 않은 운동장에서 내가 죽을힘을 다해 뛰고 있는 이유였다.
다행히 체력과 근력은 노력으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는 공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동료 선수들의 도움을 받아 가볍게 던져주는 공으로 훈련해봐도 공포가 쉽게 사라지진 않았다.
막 깨어났을 때보다는 나아졌지만 타석에 서기 전부터 느껴지는 두려움은 여전했다.
어느덧 퇴원한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반드시 병원으로 와야 한다는 의사의 당부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보였던 그 이상한 정보창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다.
팀에 복귀하고 인사를 하자마자 팀 동료들에게서도 정보창이 보였다.
같은 구단 선수들에게만 보이는 건가 싶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정보창이 나타나는 타이밍도 제각각 달랐다.
바로 보이는 경우도 있었고, 한참 지나도록 안 보이기도 했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분석해보면 동료 선수들과 신체 접촉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 내용이었다.
-지금보다 반 발짝 뒤에서 타격하면 완벽한 타격감을 찾을 수 있다.
-수비 포지션이 바뀌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빠른 공을 높게 던질 때 훨씬 효과적이다.
-여자친구와 싸워서 힘든 상황이다.
수술 후유증 정도로 생각하고 넘기려고 했지만, 화면에 나와 있는 내용은 모두 그 선수와 관련이 있는 내용들이었다.
심리적인 내용이 나오기도 했고, 선수가 고민하는 부분의 해결책이 등장하기도 했다.
가끔은 야구와 관계없는 개인 정보가 보이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부 내용을 지나가는 조언처럼 말해주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은 몇몇 선수가 경기력이 급격하게 좋아지더니 곧 1군 캠프로 콜업이 된 것이다.
내가 귀신에 들린 건가?
신기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왜 다른 사람들 정보만 보이고 내 건 안 보이는 걸까…….
거울을 아무리 봐도 내 정보창은 뜨지 않았다.
만약 그들처럼 나한테 필요한 내용이 뜬다면 단숨에 리그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걸 자꾸 신경 써봐야 속만 쓰릴 뿐이다.
나는 다시 운동장을 돌며 구슬땀을 흘렸다.
그렇게 추운 겨울부터 스프링캠프까지 고교 시절보다도 더 혹독한 스케줄로 훈련을 마치자 드디어 시즌 개막이 다가왔다.
언론과 팬들의 관심이 온통 나의 극적인 복귀에 쏠렸다.
며칠 동안 정신을 잃고 누워있다가 피나는 노력으로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온 선수라는 과분한 칭찬까지 더해졌다.
그 덕분에 2군 개막전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강현우 파이팅!”
“강현우 흥해라!”
관중석에서 몇몇 관중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낮에 열리는 데다 교통편도 불편한 2군 경기임에도 지난 한 해 동안 한국 프로야구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선수의 복귀전이라는 이유로 많은 팬이 찾아왔다.
비싼 카메라를 움직이며 훈련 과정부터 경기 장면을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누르는 기자들도 눈에 띄었다.
나는 내 유니폼을 흔들며 응원하는 팬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손을 흔들어주었다.
경기는 오후 1시에 시작되었다.
경기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타순이 돌아왔다.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관중석의 팬들과 더그아웃에 있는 팀 동료들이 큰 목소리로 나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후우-
1군 데뷔 경기보다 심장이 더 두근거렸다.
장갑을 끼고 있어도 손에서 나는 땀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혹시 마운드에 서 있는 상대 투수의 머리 위로도 화면이 보이는지 확인했다.
아쉽게도 보이지 않았다.
경기 전에 내가 분석해두었던 내용으로 상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작년 드래프트 3라운드에서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한 신인 선수였다.
고교 시절 팀의 우승을 이끈 투수로, 2군에 있는 건 실력 부족 탓이 아니라 프로 경험을 쌓아가는 과정이었다.
평균 구속은 140km/h 초중반.
구석구석 찌르는 제구력과 변화구 구사 능력이 좋은 선수였다.
마운드에 선 투수가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고 나서 공을 던질 자세를 취했다.
나도 그 모습을 보고 타격할 준비를 마쳤다.
상대 투수가 던진 첫 번째 공이 내 몸쪽으로 깊숙하게 들어왔다.
“억!”
스트라이크였다.
몸쪽 가까이에 왔을 뿐 몸에 맞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외마디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투수가 두 번째 공을 던지기 위해 가슴 앞쪽으로 글러브를 모았다.
그의 매서운 눈빛을 보자 살짝 두려워졌다.
아까 섰던 자리보다 반 발자국 정도 멀어진 자리에 섰다.
“후. 후. 후우-”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해봤지만 짧은 시간에 진정시키는 건 무리였다.
“윽!”
상대 투수의 두 번째 공 역시 몸쪽으로 가깝게 날아왔다.
아까처럼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지만 이번에는 힘겹게 참았다.
역시나 스트라이크였다.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타자에게 완전히 불리한 카운트가 되어 버렸다.
나는 크게 심호흡하고 다시 타석에 섰다.
아까보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조금 더 먼 곳에 서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 먼 곳에 선다면 바깥쪽으로 날아오는 공에는 전혀 대처를 할 수 없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아까처럼 반 발자국만 떨어져서 섰다.
타석을 밟고 있는 내 다리가 미세하게 후들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애써 상대 투수의 글러브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포수의 사인을 받은 투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 있게 공을 던졌다.
펑-
“스트라이크 아웃!”
심판의 우렁찬 콜에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앞서 던진 두 개의 공과 달리 지금 서 있는 곳에서 가장 먼 쪽으로 날아온 공이었다.
배트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한 완벽한 패배였다.
첫 타석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게 마지막이었기를 바랐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다.
몇 이닝 진행되면서 내 약점이 명확하게 드러나자 나를 상대하는 투수들이 몸쪽 공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때마다 나는 제대로 된 승부를 해보지도 못하고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했다.
공격에서 어려움을 겪자 자신 있던 수비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외야로 날아오는 평범한 뜬공만큼은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한 줄 알았는데, 타석에서 느낀 공포가 전염되었는지 수비 상황에서도 에러를 저질렀다.
타석에서 무기력한 모습과 수비에서 어처구니없는 에러가 쌓이다 보니 경기 출장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타율은 1할이 채 되지 않았고 수비율도 경기를 하면 할수록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 가장 큰 강점이던 수비 성적이 최하위 수준이라는 게 치명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2군 선발 라인업에서도 내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경기 출전을 못 하고 벤치에서 몸만 풀다가 끝나는 경기가 점점 늘어났고,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 * *
그러던 어느 날, 단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단장이 일개 선수를 호출하는 일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전력분석원이요?”
“그래. 내가 굳이 말 안 해도 스스로 더 잘 알고 있을 거 아냐. 지금 그 상태로 선수 생활은 무리야.”
“단장님. 조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어떻게든 이겨내겠습니다.”
내 의지 표명에도 불구하고 조광훈 재규어즈 단장은 책상에 놓인 데이터 서류를 뒤적이며 말을 이어갔다.
“평범한 뜬공도 심심치 않게 놓치지. 타율은 1할도 안 되는데 수비율까지 최하위. 게다가 타석에서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데 팀에서 어떻게 더 기회를 주나?”
“단장님. 저 진짜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나와 눈이 마주친 단장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현우야. 지금부터 하는 말은 구단 단장이 아니라 선배로서 하는 말이다.”
진지한 단장의 표정을 보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너 계속 선수로 뛴다고 해도 솔직히 1군으로 올라갈 확률은 극히 희박해. 지금 상황이면 2군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도 장담하기 어려워. 문제는 시간이 더 지나면 신인들이 입단할 건데. 너 걔네들하고 경쟁해서 이길 자신 있어?”
냉정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단장의 말에 나는 단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너도 잘 알겠지만. 전력분석원 자리도 항상 있는 거 아니다? 이번에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진 거야.”
“그래도……. 단장님.”
“왜, 전력분석 일이 마음에 안 들어?”
“아니요. 그건 아닌데…….”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자신 있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앞으로 영원히 전력분석 일만 하라는 거 아니잖아. 여기서 경력 쌓아가다가 구단에 자리 생기면 코칭스태프로 갈 수도 있어. 너 원래 수비나 작전 수행능력은 좋았잖아. 그쪽 코치로는 충분히 경쟁력 있어.”
단장이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며칠만 고민해 봐도 될까요?”
“그래.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야.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이야기해줘. 그런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 한참 시즌 중이라 전력분석원 자리도 언제까지 비워둘 수는 없으니까.”
“네. 고민해보고 말씀드릴게요.”
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단장실을 나왔다.
터덜터덜 걸어가다 보니 구단 사무실 입구에 있는 재규어즈 앰블럼과 우승 트로피가 아프게 눈을 찔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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