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48
48화>
새로운 목표 (5)
“몇 개월로 해드릴까요?”
“일, 일시불이오.”
나는 화면에 뜬 가격을 보고 살짝 움찔했다.
“0이 하나, 둘, 셋, 넷…….”
혹시나 0의 개수를 잘못 센 건가 했는데 분명히 맞았다.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두 명인데.
“여기 사인 좀 해주세요.”
팬인가?
오늘따라 사인할 일이 참 많다.
“어디예요?”
“여기요.”
식당 종업원이 카드 서명 패드를 가리키고 있었다.
괜히 오버했네.
나는 아쉬운 대로 시원하게 서명을 휘갈겼다.
“덕분에 잘 먹었다.”
“뭐 이 정도 가지고. 다음에는 소고기 풀코스다.”
“그래. 기대할게.”
나는 정인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디로 갈래?”
“오랜만에 학교나 더 구경하고 싶다.”
“학교? 너는 진짜 재미없는 놈이다. 놀 줄 모르는 건 여전하네.”
“내가 모르기는. 나만큼 노는 사람 없을걸.”
“요즘에는 뭐 하고 노는데.”
“놀 게 얼마나 많은데…….”
“뭐 하고?”
“세상에서 야구보다 재밌는 게 있긴 하냐? 아무리 찾아도 모르겠던데.”
“변한 게 하나도 없다.”
정인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취기가 올라오는지 한 발자국씩 걸을 때마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한겨울에 불어오는 찬 바람 덕분에 몰려오는 잠을 쉽게 쫓을 수 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매일 등교했던 길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멈춰 서서 쭉 뻗은 그 길을 바라봤다.
“여기는 진짜 옛날하고 똑같은 거 같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
추억에 잠겨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근데 학교는 졸업하고 처음 와본 거지?”
“그런가……? 진짜 그런가 보네.”
“자주 좀 오지.”
“사는 게 바쁘잖냐.”
재규어즈에서 선수 생활을 하던 때만 해도 언제든 찾아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이었는데.
한 번도 오지 못했다.
“10년 만에 와본 소감은 어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미안한 건 또 뭐야.”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후배들이 운동하는 환경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너 에이전트 해볼 생각 있냐?”
“갑자기 내가 에이전트?”
정인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잘 어울릴 거 같아서. 공부도 많이 했잖아.”
프로 선수로 뛴 경력만 없을 뿐이지, 스포츠와 관련한 이론적인 지식은 나보다 훨씬 뛰어났다.
후배들이 믿고 따르는 모습도 보니 코치로서 충분히 능력이 있어 보이기도 했다.
“나는 프로 지명도 못 받았는데 어떻게 에이전트를 하냐.”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나도 하잖아.”
“너는 프로 지명도 받고 1군 경기까지 뛰어봤잖아.”
“고작 한 게임 뛰었다. 그것도 대수비하고 딱 한 타석.”
중간에 투입돼서 중간에 병원으로 실려 갔으니, 정확하게는 한 게임은커녕 한 이닝도 아니었지.
“그래도 그게 어디야. 자기 이름 찍힌 프로팀 유니폼 입어 본 거랑 아닌 거랑 어떻게 같을 수가 있냐.”
물론 나도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작 한 경기가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한 경기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열심히 노력하고도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쉬움이 더 클 수밖에 없겠지.
“에이전트 되면 후배들 졸업하고도 도와줄 수 있잖아.”
“근데 우리 애들이 거기 들어가려고 해도 일단 지명을 받아야 하잖아. 에이전시에서 지명 못 받고 방황하는 애들까지 도와주지는 못할 거 아냐.”
“그렇기는 한데…….”
“게다가 지명 못 받은 애들은 둘째치고, 2군에서 뛰는 애들 중에서도 에이전시 소속된 애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너희 회사에서도 그런 애들 관리는 안 해줄 거 아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석훈도 2군에서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이미 최고 유망주라고 평가받고 있었고 1군 경험도 있던 선수였다.
이후에 계약한 박성주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렇다고 해서 에이전시 같은 회사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거기도 돈 벌어야 하는 회사인데, 연봉 낮은 애들한테 받는 수수료로 관리해 주는 게 가능하겠어?”
정인규가 깊디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야.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면 되지.”
순간 이상한 분노 같은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그거야……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방금까지 뜨겁게 들끓었던 의지와는 다르게 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만약에 네가 사장님 되면 생각해 볼게.”
“내가?”
“네가 그런 애들 도와줄 수 있는 회사를 만들기만 하면 안 갈 이유도 없지.”
내가 그런 회사를 만든다고?
잠시 생각에 잠겨 앞만 보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낮에 봤던 정문을 지나게 됐다.
내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나는 내 사진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인규야. 나 부탁 하나만 하자.”
“뭔데?”
“학교에 말해서 저거 좀 떼줘라.”
나는 고개를 돌린 채로 플래카드를 가리켰다.
정인규가 고개를 올려 내 손이 가리킨 곳을 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어때서. 보기 좋기만 한데. 우리 학교의 자랑이잖아.”
“다음에 내가 다시 만들어서 보내줄게.”
나의 절박한 마음을 모르는지 정인규가 아까 갔던 훈련장 방향으로 계속 걸어갔다.
“그건 됐고. 가서 오랜만에 실력이나 좀 보여줘라.”
“무슨 실력? 저거는 어쩌고?”
“학교 정문에 얼굴 붙어있을 수 있다는 것도 행운이야 인마.”
“아이. 그래도 저건 아니라니까.”
“춥다 들어가자. 빨리 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정인규가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뒤따라 달렸다.
우리는 불 꺼진 실내 연습장으로 들어갔다.
* * *
팡-
실내 연습장에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떠보니 정인규가 던진 공이 내 글러브에 들어와 있었다.
투수 출신이라 볼 회전이 보통 이상이었다.
구속도 빠른 편이었다.
“후…….”
오석훈과 가볍게 캐치볼을 해본 적은 있었지만, 힘을 실어 던진 공을 받아본 건 은퇴 이후 처음이었다.
공을 받는 순간 눈을 감은 건 여전했지만, 옛날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 이제 괜찮냐?”
내가 긴장하는 표정을 보고 나서야 정인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빨리도 물어본다.”
“순간 깜빡했지.”
나는 글러브에서 공을 빼서 정인규를 향해 다시 던졌다.
“다시 한번 던져봐.”
“살살 던질게.”
“아니. 아까처럼.”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글러브를 다시 제대로 손에 끼웠다.
심호흡도 깊게 내쉬었다.
“괜찮겠어?”
“후…… 괜찮아. 괜찮겠지.”
정인규가 난감한 표정으로 공을 만지작거리며 던지기를 주저했다.
나는 고개를 까딱하고 글러브를 들어 올리며 던지라는 신호를 보냈다.
“진짜 던진다.”
“어, 들어와.”
정인규가 천천히 다리를 들어 올리자 나는 온 정신을 날아올 공에 집중했다.
팡-
공이 이번에도 글러브에 제대로 들어있었다.
나는 글러브에서 공을 꺼내 보며 만지작거렸다.
오랜만에 공의 감촉이 온전히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야구공을 휘감고 있는 솔기가 주는 느낌도 아름다웠다.
공을 이리저리 잡아보고는 다시 정인규를 향해 던졌다.
“너 이제 괜찮은 거 같다?”
“그러게. 조금씩 좋아지기는 한 거 같은데.”
“배팅 한번 해볼래?”
“배팅?”
글러브를 끼고 공을 잡는 것과 배트를 들고 타석에 서는 건 나에게는 심리적 압박의 차원이 달랐다.
캐치볼은 몇 번 도전해 봤지만 배팅만큼은 아직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다.
무리일 거 같긴 한데.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 다시 시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꿈틀거렸다.
물론 아직도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해보자.”
“진짜 괜찮겠어?”
나는 구석에 세워져 있던 배트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배팅케이지로 들어갔다.
야구공이 가득 담긴 카트를 밀고 온 정인규가 양손에 공을 들고 보호 그물 뒤에 섰다.
“준비되면 말해줘.”
나는 배트를 들고 팔을 쭉 뻗고 심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배트를 들고 타석에 서본 건 은퇴한 이후에 처음이었다.
두 손으로 배트를 강하게 쥐었다.
나는 타격 자세를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던진다.”
이번에는 정인규의 표정에서도 긴장감이 느껴졌다.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배트를 휘둘렀다.
따앙!
공이 맞는 순간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배트를 쥔 손에는 조금도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공이 배트에 완벽하게 맞았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짜릿한 쾌감이었다.
나는 팔을 쭉 뻗어 마지막 팔로 스루까지 마치고 날아가는 공을 바라봤다.
투구를 마친 정인규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내가 때려낸 공이 쭉쭉 뻗어 반대편 벽 상단에 맞고 떨어졌다.
“이야! 너 그동안 뭐 한 거냐?”
눈이 동그랗게 커진 정인규가 목소리 톤이 한껏 높아져서 나에게 물었다.
“다시 한번 던져봐.”
나는 방금 느낀 감각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간다!”
“후-”
딱!
공에 힘이 실리기는 했지만 첫 번째 스윙이 주었던 감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슈웅.
딱!
슈웅.
따악!
그렇게 갑자기 타격 훈련에 버금갈 정도로 스윙을 하게 됐다.
정인규의 공은 스윙 연습을 하기 좋게 가운데로 날아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처음과 같은 타격이 다시 나오지는 않았다.
혹시나 다시 그라운드에 설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마음도 가슴속으로 고이 넣어두어야 했다.
다만 야구가 이렇게 재미있다는 걸 오랜만에 또 한 번 느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 스윙과 캐치볼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대가로 연습장 이곳저곳에 흩뿌려진 엄청나게 많은 공을 주워 담아야 했다는 것만 뺀다면.
* * *
내가 탄 택시는 빠른 속도로 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늦은 밤이라 차들도 많지 않아서 도심 속에서 카레이싱을 즐기는 기분도 들었다.
창문을 바라보며 잠시 감상에 빠졌다.
그런데 아까 정인규의 말 한마디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네가 그런 애들 도와줄 수 있는 회사 만들기만 하면 안 갈 이유도 없지.
잠시 잊고 있었다.
내가 에이전트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를.
자기가 가진 재능이 뭔지도 몰라서 발휘하지 못한 선수들이 팬들에게 사랑을 받고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것.
지금도 그 마음에 변화는 없었다.
어느 회사에서 그걸 이룰 수 있을까?
YJ 스포츠에이전시? 아니면 스카이코퍼레이션?
두 곳 모두에서 이룰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면 정말 내가 그런 회사를 만들 수도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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