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5
5화>
두 번째 인생의 시작 (2)
“마이 볼!”
“좋아. 나이스 캐치!”
오랜만에 찾은 모교 야구장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나는 텅 비어있는 관중석에 홀로 앉아 후배들이 경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프로 무대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과 비교하면 부족한 점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하지만 흙먼지를 맞으며 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그들은 하나같이 즐거워 보였다.
하긴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에도 프로 지명을 받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크긴 했지만 그래도 야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행복했었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같은 목표를 가진 동료들과 매일매일 성장해가고 있다는 보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더구나 대학 졸업을 앞두고 프로 지명까지 받았으니 더는 두려울 것도 걱정할 것도 없었다.
비록 드래프트 하위 순번이어서 팬들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어도 세상 모든 걸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고작 몇 년이 흘렀을 뿐인데 그 행복감은 두려움으로 바뀌어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후배들을 지켜보는 내내 내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지는 이유였다.
“이 시간에 여기 있어도 돼?”
“감독님!”
유성환 감독님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프로에서 뛰다가 애들 훈련하는 거 보니까 부족한 게 바로 보이지?”
“지금의 저보다 훨씬 나은 거 같은데요.”
그 말에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린 유성환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요즘은 어때? 몸은 괜찮아?”
“뭐, 그냥 그렇습니다.”
“인생이 생각처럼 잘 안 흘러가지?”
“예. 사실은…… 구단에서 은퇴 제안받았습니다. 전력분석원 자리를 만들어준다고요.”
담담한 내 대답에 유성환이 멈칫했다.
“음. 그랬구나……. 네 생각은 어떻니?”
“선수 생활에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누구보다 열심히 할 자신도 있는데…… 근데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타석에 선다는 게 아직 무섭기도 하고요.”
“그래? 너 혹시 대학교 1학년 때 생각나니? 막 입학했을 때.”
뜬금없는 감독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훈련 시작하고 3일 정도 지났을 때쯤인가? 네가 엄청난 강점을 가진 선수라는 확신이 생겼어. 외야 수비 능력 하나만큼은 국내에서도 탑 클래스가 될 재능이 있었지. 당장 프로 무대로 데려다 놔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으니까.”
나는 그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타격에서 최고가 되기는 쉽지 않아 보였어. 고쳐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도 했고, 공을 골라내는 능력도 그리 특출난 편이 아니었지. 그 모습을 본 스승으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어.”
“프로 지명을 받고 싶으면 수비 훈련에 더 집중해라.”
수비만이라도 우리나라 최고가 된다면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전략이었다.
그때 감독님이 나에게 건넨 조언은 충격에 가까운 역발상이었다.
덕분에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있었다.
“맞아.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은데. 열심히 노력해서 부족한 부분을 메워봤자 경쟁력을 가지기 어렵다면, 지금 당장 잘할 수 있는 것에 더 집중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나도 같은 생각이라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표정에서 어두움이 사라지진 않았다.
“근데 제가 남들보다 잘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충분하지. 너는 누구보다 야구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능력이 있잖아.”
하긴 상대 투수의 강점과 약점. 그리고 지금 어떤 승부를 해올지에 대해 분석하는 일이 내게는 너무 쉬우면서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머리로 분석해낸 걸 실전 경기에서 직접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야구 분석 능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포지션이 포수였기 때문에 몇 경기는 포수로 나서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포구와 주자 견제, 프레이밍에서 낙제점을 받아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저기 훈련하는 선수들 중에는 프로 지명은 못 받았어도 재능을 가진 친구들이 많아. 다만 어떤 부분에서 재능이 있는지 자기 자신도 몰라서 아직 꽃피우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예전의 너처럼 말이야.”
예전의 나처럼……?
만약 내가 어떤 부분에 재능이 있고 어떻게 훈련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지적해준 유성환 감독님 같은 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분명한 건 지금 정도도 되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보다 단지 운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그런 스승을 만나지 못한 선수들은 자신이 가진 재능을 꿈의 무대에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쓸쓸히 사라졌을 것이고…….
내가 정말 그런 선수들을 도울 수 있을까?
* * *
“선배님 감사합니다.”
김재형이 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얼마 전에 내가 해준 조언을 듣고 난 이후에 성적이 급격하게 좋아진 후배였다.
그리고 1군에 콜업되더니 단숨에 주전 자리까지 넘보고 있었다.
오늘 1군은 경기가 없는 날이라 나를 직접 만나 인사하고 싶다며 먼 2군 경기장까지 찾아왔다.
내 손에는 그에게 건네받은 홍삼 한 박스가 들려있었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다 네가 열심히 해서 잘된 거지.”
“아닙니다. 솔직히 코치님보다 선배님 조언 하나가 훨씬 좋았습니다. 그리고 타격할 때 반 발짝 뒤에 서보라는 조언은 선배님한테 처음 들어보기도 했고요.”
김재형이 내 귀에 대고 혹시나 주변에 들릴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 그거 하나 바꿨는데 그렇게 됐다고? 다른 것도 좋아진 거 아냐?”
“진짜라니까요. 타격 위치만 살짝 옮기니까 볼 맞는 타이밍이 확 좋아지던데요.”
진지하게 말하는 김재형의 표정을 보니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
“공을 오래 봐라, 성급하게 승부하지 마라. 이런 뜬구름 잡는 조언만 들었을 때는 전혀 감이 안 잡혔는데, 선배님이 해주신 조언대로 하니까 바로 해결이 된 거예요.”
“내가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긴 하네.”
내가 한 거라고는 머리 위로 보이는 내용을 그냥 읊어준 것뿐이었다.
어찌 되었건 후배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동시에 왜 내 머리 위에는 이런 게 보이지 않는 건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런데요, 선배님. 확실히 1군 투수들도 그렇지만 수비가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안타가 될 것 같은데 수비에 잡히는 것도 많고……. 그래서 말인데, 지금 저 같은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지금보다 더 잘하고 싶다고?
1군 주전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으로도 만족하기 어렵다는 건가.
역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내가 어떻게 알겠냐.
1군 무대 경험이라고는 겨우 한 경기에 한 타석 서본 게 다인데.
그냥 어깨나 한번 두드려주고 보내려 했는데, 김재형의 표정을 보니 내가 해줄 한마디를 절실하게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 이제는 뭐라고 말해 줘야 하나.
그때였다.
-타구의 발사 각도를 높인다면 장타 확률을 높일 수 있다.
김재형의 머리 위로 보이던 내용이 바뀌었다.
이게 업데이트도 되는 건가 보다…….
그건 그렇고, 일리가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요즘 김재형의 경기를 보니 타이밍은 나쁘지 않았지만 내야 수비가 강한 팀을 만나는 날에는 상대에게 막혀 아웃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2군에서는 충분히 안타가 될 수 있을 만한 타구가 1군에서는 아웃이 되니, 타율이 떨어지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그러니 내야를 뚫기 위해서 타구의 발사 각도를 높여야 한다는 말은 그에게 꼭 필요한 조언이 될지도 모르겠다.
“발사 각도를 조금 높여봐.”
“발사 각도요?”
“그래. 내야 수비에 막히는 걸 뚫어내려면 지금보다 스윙 각도를 조금 높이는 게 도움이 될 거야.”
“아하! 선배님 감사합니다.”
김재형은 몇 번이고 나에게 인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해주는 건가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올뻔 했다.
하지만 고민이 해결되어 발걸음이 가벼운 후배의 모습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는 스파이크로 갈아 신고 몸을 풀기 위해 그라운드로 향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었지만 역시나 오늘도 선발 라인업에는 내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선수단 명단에만 올라가 있을 뿐 경기장에서 뛰는 모습은 볼 수 없는 선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쪼로록-
벌써 커피가 바닥을 보였다.
스마트폰 화면을 눌러 시계를 보니 출발해야 할 시간이 이제 30분도 남지 않았다.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창밖을 내다봤다.
창밖에는 분주하게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 눈에는 내가 아침 일찍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즐기는 여유 있는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금 나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지도 모르는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있었다.
더 이상 선수 생활을 이어 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나는 은퇴를 결정했다.
그리고 재규어즈에서 권유한 전력분석원 자리도 거절하기로 했다.
전력분석원이 되어 정확한 상대 전력 분석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데 도움을 주는 건 나름 멋진 일이었다.
하지만 내 조언을 듣고 자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펼치는 후배들을 보니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강점이 뭔지 몰라서 힘들어하는 선수들을 도와 잠재력을 터트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오늘이 그 첫걸음을 내딛는 날이었다.
오늘 면접을 보러 가는 곳은 국내에서 최고로 꼽히는 YJ 스포츠에이전시였다.
야구를 포함해서 축구, 농구, 배구, e-스포츠의 스타 플레이어 선수들을 여럿 보유하고 있는 국내 최고의 에이전시였다.
처음에는 혼자서 에이전시를 차려서 맨땅에 헤딩하듯이 시도해 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아직은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평생 운동만 하면서 살아왔기에 모르는 분야도 많았고, 에이전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분야를 배우고 경험을 쌓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인맥이나 경험이 부족한 나에게 YJ 스포츠에이전시는 내 능력을 인정받고 최고의 에이전트로 성장하기 위한 최적의 회사일 것 같았다.
물론 이 회사를 나에게 추천해준 사람도 유성환 감독님이니 더욱 그런 확신이 들었다.
띠리리링-
테이블에 놓인 스마트폰이 이제 이동해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나는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내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