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56
56화>
스프링캠프 (3)
“잘 부탁드립니다.”
“어…… 나도 잘 부탁해요.”
내가 용기를 내서 말을 걸어봤지만, 고지훈의 반응은 아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김민환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서로 잘 아는 사이인가?”
“아니요.”
고지훈은 김민환에게도 단답이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봐.”
“네.”
고지훈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제가 바로 다음 순서라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 그래. 어서 가봐, 오늘도 파이팅 하고.”
고지훈은 김민환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글러브를 왼손에 끼우며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고지훈의 성격이 어떤지 대충은 들어서 알고 있었긴 한데…….
막상 눈앞에서 직접 겪어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
편하게 대화할 정도로 친해지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쟤가 원래 저래. 그래도 나쁜 애는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
김민환이 내게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선발 투수들 등판하는 날은 다 그렇잖아요.”
투수에게는 미세한 변화도 그날의 경기력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특히나 등판을 앞둔 선발 투수 중에는 경기 전에 말을 걸기도 어려울 정도로 예민한 경우가 많았다.
고지훈도 조심해 줘야 하는 스타일인 게 분명했다.
그렇게 위안 삼으며 고지훈이 피칭 훈련을 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 더블즈는 연습경기가 아니라 투수와 타자가 각각 나누어서 훈련하고 있었다.
실전 경기만큼의 긴장감을 느끼기는 어려웠지만 컨디션이 어떤지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펑!
“어휴, 너무 좋다.”
펑!
“완전 나이스!”
고지훈이 공을 하나하나 던질 때마다 받아주는 포수가 호들갑에 가까운 추임새를 넣으며 기를 살려줬다.
언뜻 보기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불펜 포수도 구단에서 중요한 존재였다.
포수의 외침 덕분에 조금씩 고지훈의 긴장이 풀려가는 것 같았다.
던지면 던질수록 공에서 힘이 느껴지기도 했다.
펑!
“이걸 도대체 누가 쳐.”
펑!
“우와우!”
포수의 멘트는 한 번도 같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고지훈의 페이스가 빨라도 너무 빠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시기에는 투수들의 오버 페이스를 막기 위해서 스피드 건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정확한 구속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벌써 시즌 초중반쯤에나 나올 법한 구속으로 보였다.
“팀장님. 고지훈 선수 너무 오버 페이스 아닌가요?”
“그런가? 평소에도 저 정도는 됐던 거 같은데?”
김민환도 헷갈리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2월밖에 안 됐는데 이 정도 페이스면 너무 무리일 텐데요.”
“근데 중요한 건, 쟤가 우리 얘기는 전혀 안 듣는다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럼 누가 얘기해 줘야 듣는데요?”
“모르겠네? 자기 몸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는 거지. 내가 알기로는 더블즈 트레이닝 코치들도 크게 터치 못 하는 거 같던데.”
“참 피곤한 스타일이네요.”
“어쩌겠어, 그러려니 해야지.”
그러다 문득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그럼 우리 회사랑 매니지먼트 계약은 왜 맺은 거래요?”
“그거야 뭐…… 연봉 협상이랑 단순 업무들 맡기는 거지. 병원 예약하거나 아니면 장비 필요한 거 사달라고 하거나.”
그것들도 중요한 부분이기는 한데…….
무슨 생각인 건지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저런 스타일은 그냥 신경 쓰지 말고 혼자 놔두면 돼. 가끔 해달라고 하는 것만 신경 써주면 크게 문제는 없을 거야.”
원하는 답은 아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참고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이제 출발해야 할 거 같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요?”
시계를 보니 벌써 낮 12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주혁 씨도 나랑 몇 년 동안 같이 일해봐서 잘 알고 있으니까 아마 도움 많이 줄 수 있을 거야.”
나는 시선을 돌려 밝게 웃고 있는 이주혁과 눈이 마주쳤다.
“잘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그럼 한국 가서 보자고. 주혁 씨도 파이팅 하고.”
김민환이 인사를 나누고는 몸을 돌려 걸어가다 갑자기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무슨 일이세요?”
“짐. 내 짐 꺼내 줘야지.”
맞다. 차에 짐이 있었지.
이주혁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적이며 차 키를 찾았다.
“현우 님, 잠깐 차에서 짐 좀 옮겨드리고 오겠습니다.”
“네. 천천히 하고 오세요.”
김민환과 이주혁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이 떠난 뒤, 나는 혼자서 두리번거리며 훈련장을 돌아다녔다.
“분명히 주변에 있을 텐데.”
계속 고개를 돌려가며 운동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보니 드디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정환아!”
나도 반가운 마음에 최정환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마주 뛰어갔다.
“선배, 여기서도 뵙네요.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세요?”
“고지훈 선배가 우리 에이전시 소속이잖아.”
“아, 맞다.”
“이번에도 준비 잘하고 있지?”
최정환의 팔뚝을 만져보니 작년보다 더 굵어진 것 같았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정보창이 업데이트됐다.
-강현우의 자료를 보고 자신의 강점에 확신을 하게 됐다.
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최정환의 강점은 평균 구속이 150km/h를 넘는 빠른 공이었다.
회전까지 좋아서 컨디션이 좋은 날은 도저히 건드릴 수조차 없는 공이었다.
자신의 강점만 확실히 믿고 공을 던지면 지금보다 훨씬 성장할 수 있겠지.
“작년보다 러닝이랑 웨이트 더 많이 해봤는데 어때요? 달라 보이나요?”
“장난 아닌데. 운동을 얼마나 한 거야?”
가슴에 하체까지 확실히 더 탄탄해졌다.
“겨울에 준비 좀 더 하면 구속이 더 올라갈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지금보다 더 빨라진다고? 그럼 타자들은 어떻게 치라고?”
“못 쳐주면 저야 고맙죠.”
최정환이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웃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오늘 피칭은 하는 거야?”
“아까 던져서요. 오후에는 러닝하고 웨이트 하려고요.”
“아쉽네. 피칭은 다음에 와서 봐야겠다.”
“선배님이 와서 보시는 거면 더 준비 많이 해놔야겠어요.”
“아냐 부담 갖지 마. 괜히 지금 무리하다가 시즌 들어가면 지친다.”
나는 최정환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해 줬다.
“지금처럼만 해도 분명히 작년보다 더 좋아질 거야.”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정환이 힘차게 대답했다.
“오늘도 열심히 훈련 하고. 나도 근처에서 며칠 머물 거니까, 시간 맞춰서 또 한 번 들를게.”
“네.”
최정환이 밝은 미소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훈련장으로 달려갔다.
지금처럼 밝게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 * *
더블즈 캠프에서 일정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김민환이 빠지는 바람에 나와 이주혁 단둘이서 차를 타고 가게 됐다.
고작 한 명 줄어들었을 뿐인데, 존재감이 확실한 사람이라 그런지 차 안이 휑한 느낌이 들었다.
“주혁 씨는 투수예요?”
“어? 네, 맞아요.”
이주혁이 깜짝 놀란 눈치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딱 보면 알죠. 근데 구속이 140km/h까지 나오는 거면 그냥 취미 생활은 아니신 거 같은데?”
정보창에서 투수로 평가받아보고 싶다는 내용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냥 취미 수준이에요. 140km/h가 평균 구속도 아니에요. 어쩌다가 잘 나올 때나 그렇지…….”
“체계적으로 훈련받아본 적은 있어요?”
“제대로 배워본 건 아니에요. 저희 대학교에도 야구팀이 있거든요. 그 친구들이랑 친분이 있기도 해서 건너건너 물어봤죠. 그리고 지금 같은 시기에는 프로팀 스프링캠프 훈련장 돌아다니면서 선수들 하는 모습들도 지켜보고요.”
주변 선수들이 하는 훈련만 따라 했는데 그 정도라면 대단한 성과인 게 틀림없었다.
정확한 건 공을 던지는 모습을 직접 봐야 알 수 있겠지만.
“프로 입단 한번 도전해 보는 거 어때요?”
“에이……. 제가 무슨 프로요.”
눈이 커진 이주혁이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여기 타자들이 제가 던진 공은 그냥 쉽게 때려내던데요 뭘. 그렇게 배팅볼 칠 거면 1달러씩 내라고 하고 싶었다니까요.”
이주혁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그냥 공부 열심히 하려고요.”
“이번에 졸업한다면서요?”
“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빨리 지나갈 줄은 몰랐어요. 아직 제대로 준비도 못 했는데…….”
“졸업하면 뭐 할지 생각해둔 거 있어요?”
“글쎄요. 사실 지금도 고민 중이에요.”
이 얘기는 괜히 꺼낸 것 같았다.
어떤 이야기로 다음 대화를 이어가야 하나 어색해지려던 찰나에.
“어?”
길가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낯선 도로에서 만난 외국인이었지만, 나는 머리 위로 보이는 정보창 덕분에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불펜 투수가 아닌 선발 투수로 뛰고 싶다.
-구속이 빨리 지지 않아 고민이 많다.
어제 타코 집에서 강하게 부딪쳤던 그 친구였다.
“Where are you going?”
내가 들을 수 있는 건 이주혁의 첫 마디가 전부였다.
이주혁과 그 외국인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얼핏 지역 이름과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 이름이 나온 것 같았다.
“우리 숙소 근처로 가는 거 같은데 같이 가는 거 괜찮으시죠?”
“그럼요.”
“Get in.”
이주혁의 한마디에 마이클 스콧이 싱글벙글 웃으며 뒷좌석에 탔다.
말로만 듣던 히치하이킹을 처음으로 경험해 봤다.
미국에 와보니 이런 것도 다 해보네.
차는 다시 속도를 내서 달리기 시작했다.
“What’s up bro!”
타자마자 표정과 손짓에서 자신의 감정을 한껏 드러내며 무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마이클 스콧의 ‘Thank you so much’라는 말 이후로는 뭐라고 하는 건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주혁이 중간중간 통역을 해준 덕분에 겨우 대화에서 소외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친구, 야구 선수라는데요?”
물론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른 척해야지.
“정말요? 어느 팀인지 물어봐 줄 수 있어요?”
TV에서도 전혀 본 기억이 없는 걸 보니 메이저리거는 아닌 듯했다.
그럼 마이너리거인 걸까?
마이너리거라고 해도 가장 상위인 트리플A 소속이라면 상당한 실력을 가졌을 텐데.
이주혁이 내 질문을 스콧에게 영어로 물었다.
스콧의 말이 끝나자 이주혁이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선 데빌스라고, 내일 버팔로즈랑 경기하는 팀 소속이래요.”
타코 집에서 부딪친 것에 이어서 히치하이킹에다가 내일 상대팀 선수인 것까지.
그냥 단순한 우연으로 넘기기에는 재미있는 인연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