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69
69화>
친해질 수 있을까 (5)
고지훈은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늦은 시간까지 웨이트 트레이닝에 열중하고 있었다.
“곧 끝날 때가 되긴 한 것 같은데?”
나는 고지훈이 훈련 중이라는 걸 확인하고 방에 숨겨두었던 공룡 인형을 가지러 들어갔다.
“어후. 진짜 무겁네.”
부피가 커서 더 힘들었다.
끙끙대며 힘겹게 거실을 지나 지하 훈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멈춰 섰는데.
잠깐, 지금 내려가는 게 맞을까?
아무리 선물을 주려는 것이긴 하지만, 고지훈의 성격을 떠올려보면 훈련을 방해받는 것에 더 예민하게 반응할 것 같았다.
그냥 여기서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자.
설마 밤을 새우지는 않겠지.
공룡 인형을 소파에 앉혀두고 나도 그 옆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1시간쯤 지났을까.
저벅. 저벅. 저벅.
드디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온다, 온다.’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소파에서 쉬고 있는 척했다.
그러다 고지훈이 올라왔을 때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선배 훈련 마치셨어요?”
“지금 시간에 여기서 뭐하고 있어?”
고지훈은 부엌에 있는 정수기로 가더니, 물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혹시 내일 집에 가시나요?”
“그럴 거긴 한데.”
“내일 가실 때 이거 가지고 가세요.”
나는 옆에 있던 공룡 인형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게 뭔데?”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내일이 따님 생일이잖아요. 요즘 친구들이 이 캐릭터 좋아한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네가 왜 선물을 줘?”
“선발 등판 준비하시느라 바쁘시기도 하셨을 테고, 제가 삼촌인데 선물 하나쯤은 해줄 수 있잖아요.”
“삼촌?”
“그럼요. 제가 삼촌이죠.”
고지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이 정도 선물은 할 수 있잖아요.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지?”
“식구죠. 한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밥도 같이 먹는데.”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가서 쉬지? 시간도 늦었는데.”
고지훈은 들고 있던 물컵을 식기세척기에 넣어두고 천천히 2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내일 꼭 가져가세요. 아마 진짜 좋아할 거예요.”
“…….”
고지훈은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들고 가긴 하겠지?
나는 소파에 앉아 있는 공룡 인형을 한 번 더 쓰다듬었다.
“너한테 부탁 좀 할게.”
다음 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설마 그대로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사람 성의가 있는데.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그치?
떨리는 마음으로 살금살금 거실로 나가보는데.
“나이스.”
공룡 인형은 보이지 않았다.
* * *
고지훈이 집에 가는 건 정확하게 일주일 만이었다.
일주일 동안 집을 비운 게 처음은 아니었다.
원정 경기를 하러 지방에 가다 보면 심심치 않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만큼은 기분이 달랐다.
처음으로 딸의 생일날에 딱 맞춰서 집에 돌아왔기 때문일까.
“드디어 다 왔네.”
고지훈은 딸과 아내를 만날 생각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아, 맞다. 저거…….”
뒷좌석에 앉혀두었던 공룡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뒷좌석 문을 열어, 왼쪽 어깨에 둘러멨다.
“어휴. 뭐가 이렇게 무거워.”
고지훈은 끙끙대며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동안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띵동.
벨을 누르자 안에서 딸이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듣고도 고지훈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띠리릭.
“아빠!”
“수아야!”
고지훈은 딸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자 평소처럼 무릎과 허리를 구부려 시선을 낮췄다.
‘어? 몸이 좀 이상한데? 조심해야겠다.’
살짝 통증이 느껴졌지만, 당장은 참을 만한 정도였다.
우선 고지훈은 공룡 인형부터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놨다.
“이거 뭐야?”
“수아 선물이지.”
“우와!”
수아는 공룡 인형을 보고 눈을 반짝이더니 꼭 껴안았다.
뒤에서 흐뭇하게 보던 아내가 다가왔다.
“수아가 저 인형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사 왔어? 요즘에 사달라고 엄청 졸라서 힘들었는데.”
수아가 좋아한다니 다행이긴 한데.
강현우는 이걸 어떻게 알고 있던 걸까?
“어……. 수아가 좋아하는 거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
“머리에 야구로만 가득 차 있어서 전혀 모를 줄 알았는데, 그래도 딸한테만큼은 관심이 많나 봐.”
“내가 우리 가족한테 관심이 없으면, 뭐에 관심 있겠어.”
살짝 삐진 듯했던 아내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나 이거 옮겨줘.”
“어디로 데려갈까?”
“소파에 앉혀줘, 저기.”
다시 공룡 인형을 짊어진 고지훈은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혔다.
수아는 그 옆에 찰싹 붙더니 인형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보는 고지훈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인형 하나에도 저렇게 즐거워하다니.
자주 사줘야겠다.
“지금 몸은 어때? 조금이라도 아픈 데 있어?”
아내가 고지훈에게 항상 가장 먼저 던지는 물음이었다.
프로에서 세 번째로 부상을 당한 날 이후에 생긴 루틴 같은 대화였다.
“문제없어. 다 괜찮아.”
“어제 경기 보니까 제구가 제대로 안 되는 거 같은데?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야?”
이제는 야구 전문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빠삭한 아내였지만, 힘들다는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제는 그냥 밸런스가 안 좋았어. 몸에 문제 있는 건 아니야.”
“휴…….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내는 깊은 근심을 내려놓았다는 듯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이전시 숙소에서 생활하는 건 괜찮아?”
“그럼. 자는 곳도 편하고, 밥도 잘 나오고, 훈련하는 여건도 잘 돼 있어.”
“같이 지내는 선수들은 어때?”
“나쁘지 않아. 다들 착한 것 같아.”
“그래도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니까 먼저 다가가 주고 그래. 안 그래도 당신이 선배라서 불편할 텐데.”
“그럼, 나도 노력하고 있지.”
마음 구석이 찔려왔다.
“근데 에이전시 사람들이 같이 지내는 거면, 강현우 씨도 있는 거야?”
“어…… 어. 1층에서 같이 지내고 있어. 현우가 타자 후배들은 계속 관리도 해주고 있던데.”
“그분하고는 얘기 나눠봤어? 사람이 괜찮아 보이던데.”
얘기야 나눠보기는 했는데…….
“그 친구가 워낙 바빠서. 따로 오랫동안 얘기 나눌 시간은 없었어. 나도 등판 준비도 해야 했고…….”
고지훈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하긴 시즌 중이라 다들 바쁘겠구나.”
“아무래도 그렇지. 원정 경기도 많고 하니까.”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럼 오늘은 자고 가도 되는 거야?”
“그게…… 오후에는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아내의 표정에서 실망감이 깊게 드리워졌다.
“하루쯤은 훈련 쉬어도 되지 않아?”
“오늘 해야 하는 프로그램이 다 짜져있어서. 미안해.”
“에이전시에서 그렇게 요구하는 거야?”
“아니, 뭐. 에이전시에서도 요구하기는 하지.”
사실 누구의 강요도 압박도 없었다.
고지훈이 스스로 내린 판단이었다.
“내가 틈날 때마다 자주 올게.”
“일단 와서 밥 먹어. 수아도 데려오고.”
아내는 속상한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지훈은 아내의 어깨를 몇 번 주물러 주고는 거실로 고개를 돌렸다.
“수아야, 가서 밥 먹자.”
고지훈의 부름에도 수아는 공룡 인형에게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직원들에게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어제 일만 생각하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탕비실로 가서 커피 한 잔을 내렸다.
커피가 내려오며 은은하게 커피 향이 느껴졌다.
출근하자마자 누리는 커피 한 잔의 여유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아침에 필요한 각성 효과를 얻고자 함도 있지만,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나만의 의식이기도 했다.
이제 막 내려온 커피를 여유 있게 한 모금 마시려는데, 김민환이 다급한 표정으로 나를 찾았다.
“현우 씨, 여기 있었구나.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지”
“지금이요?”
제발 지금 당장이라고는 하지 마라.
“어, 지금 바로. 급한 일이라.”
하……. 기대를 완벽하게 저버렸다.
겨우 한 모금만 급하게 마시고는 김민환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 있으세요?”
“하……. 스트레스.”
김민환이 얼굴을 찌푸리며 머리카락을 뽑을 것처럼 쥐어뜯었다.
“무슨 일인데요?”
“장수영이 또 난리야.”
“울프스 장수영이요?”
왼손 투수인 장수영은 7회나 8회쯤 리드하는 상황에서 좌타자에 약한 타자를 상대하는 원 포인트 릴리프 역할을 맡고 있었다.
“장수영은 요새도 잘하고 있지 않아요? 이번 시즌에도 공 좋던데.”
“응. 그래서 더 난리야.”
“네?”
“안 그래도 작년부터 나랑 만날 때마다 얘기하더라고. 자기도 마무리로 뛰고 싶다고.”
장수영은 리그를 대표할 수 있을 정도의 에이스 투수였다.
울프스 입장에서 장수영은 없어서는 안 될 핵심 투수이기도 했다.
더구나 귀하디귀한 왼손 투수였다.
왼손 투수를 상대로 타격하는 데 어려워하는 왼손 타자들이 많기 때문에, 위기 상황마다 중요한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물론 경기력만 보면 당장 마무리 투수로 뛰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긴 했다.
하지만 문제는 울프스에는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는 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 오승수가 있다는 점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좀처럼 녹슬지 않는 기량으로 해마다 최다 세이브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살아있는 전설과 같은 선수였다.
그가 부상을 당해 1군 라인업에서 제외되지 않는 이상, 그를 밀어내고 마무리 자리를 꿰찰 가능성은 희박했다.
“아무리 그래도 울프스에서 마무리 투수로 뛰기는 어려울 텐데요. 오승수가 보통 선수여야 말이죠.”
“그러니까 말이야. 후우-”
김민환이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려고 부른 거야.”
나는 들고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직접 가서 만나보고 와봐. 되도록이면 잘 달래서 멘탈 좀 잡아주고. 또 현우 씨가 그런 거 특히 잘하잖아.”
“제가요? 지금요?”
하마터면 커피를 뱉을 뻔했다.
“오늘은 홈경기니까 지금 바로 출발하면 충분할 거야. 밤에 바로 돌아오기에는 어려울 것 같으니까 숙소 예약은 해둘게. 여유 있게 얘기 좀 해주고 와.”
이렇게 갑자기 지방으로 내려가라고?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말을 저렇게 편하게 할 수 있지?
김민환은 시계를 한 번 보더니, 어서 서두르지 않고 뭐 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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