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77
77화>
게으른 천재 (1)
출근하기 전에 간단하게 시리얼을 먹고 있었다.
숙소에서 지낸 이후로는 아침밥을 챙겨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좋았다.
“현우. 오늘도 일찍 나가는 건가?”
어, 이 목소리는?
고개를 돌려보니 고지훈이 인자한 미소로 나를 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시리얼을 먹다 말고 뿜을 뻔했다.
불과 며칠 전에 보았던 고지훈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네. 오늘은 회의가 있어서요.”
“고생이 많네.”
고지훈은 식사용으로 준비되어 있던 단백질 셰이크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식탁으로 다가오더니 나와 마주 보고 앉았다.
가벼운 인사만 나누고 지나갈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의외의 행동에 당황스러우면서도 먼저 다가와 줘서 고마웠다.
“요즘 컨디션은 괜찮으세요?”
“평소랑 비슷해. 공 던질 때 감각도 그대로고.”
“시즌 내내 일정하게 몸 관리하시는 거 보면 정말 대단하세요.”
“프로 선수들이면 다 이렇게 하는 데 뭐.”
고지훈이 민망한지 어색하게 미소를 보이고는 손으로 무언가 가리키며 나에게 말했다.
“혹시 뒤에 있는 물 한 병만 줄래?”
“네, 여기요.”
나는 생수 한 병을 집어 고지훈에게 건넸다.
그 과정에서 고지훈의 정보창이 업데이트됐다.
-휴식 시간의 부족으로 부상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어?
휴식 시간이 부족한 것이 조금씩 경기력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걸까.
특히나 올해는 부상을 조심해야 할 텐데.
옆에서 훈련하는 모습만 보고 있어도 고지훈에게 휴식이 부족하다는 것은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얘기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친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수아가 몇 살이죠?”
“이제 세 살이야.”
이제는 고지훈의 표정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딸 키우는 기분은 어때요?”
“잠깐만.”
갑자기 고지훈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나에게 사진과 영상을 하나씩 보여줬다.
수아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다.
“선배랑 많이 닮았는데요?”
“정말 닮은 것 같아?”
“코랑 입이 닮았어요.”
“그래? 다들 그러는 데 나는 잘 모르겠더라고.”
말과는 다르게 한 번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수아가 태어났던 날부터 최근 며칠 전까지 일대기에 가까운 사진과 영상을 모두 보고 나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하마터면 회의 시간에 늦을 뻔했다.
* * *
오늘 회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김민환이었다.
자신만만한 표정은 말할 것도 없고, 어깨도 한껏 올라가 있었다.
장수영의 트레이드가 성사되는 데 자신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구름 위를 걷고 있는 표정이었다.
“김 팀장님, 장수영 선수 어제 경기 보니까 정말 대단하던데요.”
“1이닝을 완벽하게 막았습니다. 타자들이 배트에 맞추지도 못하더라고요. TV로 보는 데도 패스트볼로 스트라이크 던질 때마다 시원시원하기도 했고요.”
김민환의 대답을 들은 임예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엔젤스에서 마무리 보직을 유지하는 데는 문제 없겠죠?”
“갑자기 부상을 당하지 않는 이상 문제없을 겁니다.”
이번에는 내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장수영 선수가 생활할 집은 마음에 들어 하던가요?”
“일단 급하게 당분간 지낼 월세 집을 구해주고 왔는데요. 경기장하고도 가깝고 집도 깔끔해서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아마 계속 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선수가 갑작스럽게 팀을 옮기게 됐을 때, 정신없을 선수 대신 머무를 집을 구해주는 것도 에이전트의 업무 중 하나였다.
“두 분 다 고생 많으셨네요.”
“감사합니다.”
임예지의 한마디에 김민환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임예지는 회의 자료를 한 장 넘기며 대화를 이어갔다.
다음 페이지를 보더니 임예지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근데 소영준 선수는 왜 성적이 계속 이렇죠?”
“아……. 영준이요.”
“어제 경기에서도 중요한 상황에서 실책을 했던데요. 그리고 타율도 올라갈 생각이 없어 보이고요.”
“그러게요. 요즘도 그렇긴 하죠…….”
임예지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방금까지 자신만만하던 김민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소영준은 펠리컨즈 유격수였다.
종종 홈런이나 장타를 보여준 적이 많아서 타격에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 선수였다.
다만, 유격수임에도 수비의 안정감이 많이 떨어진다는 점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만년 하위권 팀인 펠리컨즈가 아니었으면 절대 주전 유격수로 뛸 수 없는 수준의 수비 실력이었다.
“소영준 선수가 몇 년째 실력이 제자리인 것은 어떤 점이 문제인 걸까요?”
“글쎄요…….”
임예지가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웠는지 김민환이 고개를 돌려 나를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는 그 간절한 눈빛을 무시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대화를 이어받았다.
“성장이 더뎠던 이유는 무엇보다 팀에서 경쟁 관계가 만들어지지 못한 이유가 클 테고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었다.
이런 말까지도 하는 게 맞을까 하는 고민이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팩트였다.
“수비에서 이런 식의 에러가 자주 나온다는 건, 절대적인 연습량이 부족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그래요?”
임예지가 딱딱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민환을 바라봤다.
“김 팀장님, 이대로 계속 보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은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요?”
“쓰읍……. 영준이 문제요?”
김민환이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성적이 뒷받침되지 않으니 점점 인지도도 낮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SNS 팔로워 수가 늘어나지 않는 것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고요.”
“어……. 그건 그렇긴 합니다.”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면서 회의실에는 잠시 적막이 흘렀다.
임예지가 회의 자료를 덮으며 회의를 마무리했다.
“대책이 뭐가 있을지 최대한 빠르게 고민해 보세요. 이런 상황이라면 에이전시 입장에서도 뭔가 조치를 취하긴 해야 할 것 같네요.”
“네…….”
김민환의 어깨가 회의 초반과는 다르게 힘없이 내려가 있었다.
* * *
“자, 어서 마셔.”
김민환이 들고 온 커피를 나에게 건넸다.
이제 나한테 직접 커피까지 타다 줬다.
“잘 마시겠습니다.”
“이거 좋아하는 거 맞나?”
“이거도 나쁘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회사 앞에 카페에서 파는 아메리카노가 더 맛있긴 하죠.”
나는 카페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까닥했다.
“아, 그래? 나가서 한 잔 사 올까?”
“아니요. 꼭 그것만 먹는다는 건 아니고요. 한 번 마셔보니 맛있긴 하더라는 의미예요.”
“다음에는 나가서 한 잔 살게.”
“팀장님께서 사주신다면야 감사히 먹어야죠.”
나는 여유 있게 김민환이 타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나저나 소영준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글쎄요…….”
갑자기 튀어나온 이슈라 나로서도 곧바로 대안을 생각해내기는 어려웠다.
“이번에도 트레이드를 추진해 보는 게 좋을까?”
“트레이드요?”
장수영이 트레이드를 통해서 좋은 전환점을 만들어낸 직후라 이번 상황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지금 팀에서는 경쟁 구도가 없다고 하니까, 경쟁이 있는 팀으로 옮겨주는 게 자극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소영준이 지금 당장 경쟁이 치열한 팀으로 가면 1군 라인업에 이름 올리는 것 자체가 어려워질 텐데요. 에러 많은 유격수를 1군 경기에 출전시킬 팀이 있을까요?”
“그렇긴 하지…….”
겨우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단숨에 무너지자 김민환이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을까?”
“소영준이 요즘에 훈련을 열심히 하고 있긴 한가요?”
“하……. 솔직히 그 친구가 훈련을 열심히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
김민환이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답했다.
“그래도 학교 다닐 때는 천재 소리 들었는데…….”
“맞아. 데뷔할 때만 해도 국가대표 유격수 하나 나오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김민환은 고개를 살짝 들어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눈이 커지며 나를 바라봤다.
“소영준이랑은 잘 아는 사이인가?”
“고등학교 동기이기는 하죠.”
“아! 그래?”
김민환의 표정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그럼 서로 친하겠네?”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개인적으로 연락해 본 적이 없어서, 친하다고 할 정도는 아닌데요.”
“에이, 그래도 학교도 같이 다녔으면 친한 거겠지.”
김민환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걸 보니 무슨 말을 할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되기는 했다.
“가까운 사이기도 하니까 직접 한번 만나서 얘기 좀 해보는 건 어때?”
역시나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라서 이런 얘기를 편하게 하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그래도 나이가 같으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더라도 이미 답은 정해진 듯했다.
“그럼 제가 가볼까요?”
“그래 줄 수 있겠어?”
김민환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그렇다면 이대로 끝내기에는 뭔가 억울했다.
“근데 장거리 출장을 또 가기에는 카페인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나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흔들며 말했다.
“나가자. 비싼 걸로 한 잔 더 마셔.”
“회사에 있는 걸로 한 잔 더 마셔도 되긴 하는데…….”
“아니야. 이왕 마시는 거 제대로 마셔야지.”
“그게 낫겠죠?”
김민환의 손짓에 나는 못 이기는 척 일어났다.
* * *
펠리컨즈는 오늘부터 버팔로즈와 3연전을 치를 예정이었다.
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버팔로즈와 달리, 펠리컨즈는 시즌 시작부터 하위권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수비의 불안이었다.
10개 구단 중에서 실책 수만으로도 상위권이었고, 지표로 드러나지 않는 실책성 플레이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펠리컨즈의 수비 실책을 모아 만든 클립 영상이 인터넷에서 수백만 회의 조회 수를 기록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
그중에는 소영준의 지분이 상당히 많았다.
게다가 타선이 시원하게 터지는 것도 아니었고, 선발 투수진마저도 탄탄하다고 평가받고 있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팀이 상위권으로 가기를 바란다는 건 로또 당첨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오늘 경기에서도 펠리컨즈가 이길 거라고 예상하는 팬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경기 시간보다 일찍 펠리컨즈 홈경기장에 도착했다.
덕분에 양 팀 선수들이 몸을 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소영준의 반대편에는 오석훈과 박성주의 모습도 보였다.
경기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펠리컨즈와 버팔로즈 관중들이 하나둘 관중석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서 경기장에 있는 모두가 경기 시작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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