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85
85화>
다시 만난 인연 (3)
“설마?”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진 투수는 박성주에게 다가가며 무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제스처를 취하던 박성주는 투수의 고함이 이어지자 3루로 달리던 걸 멈추고는 투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경기장에는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투수와 박성주가 충돌하려고 하자 옆에 있던 유니콘즈 수비수들이 빠르게 다가와 두 선수를 갈라 놓았다.
곧바로 더그아웃에 있던 버팔로즈와 유니콘즈 선수들도 모두 그라운드로 뛰쳐나왔다.
달려 나온 양 팀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모여들며 어지럽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시즌 첫 번째 벤치클리어링이 발생하는 순간이었다.
“우우우우-”
“박성주! 박성주! 박성주!”
관중들도 버팔로즈와 유니콘즈로 갈려 각기 다른 목소리를 냈다.
다른 선수들이 투수와 박성주를 막으며 다행히 직접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쉽게 마음이 가라앉혀지지 않는지, 투수는 계속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박성주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한국에 처음 온 선수라 배트 플립이 낯설긴 한가 봐요.”
“구단에서 말을 해줬을 텐데, 그래도 기분이 상하려나요? 어떻게 보면 정말 별거 아닌 세리머니인데.”
이것과 비슷한 세리머니에 익숙한 나로서는 외국 선수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완벽하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미국에서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인정해주는 추세이긴 한데, 다혈질인 선수들은 요즘도 못 참더라고요.”
“하긴 미국에서는 담아두고 있다가 몇 달 뒤 경기에서 빈볼 던지기도 하는 거 보면, 같은 야구인데도 문화가 참 많이 다른 게 신기하긴 해요.”
“미국에 비하면 한국은 많이 순한 맛이긴 하죠.”
“근데 설마 저 투수가 다음 타석에서 성주한테 빈볼을 던지려나?”
나는 갑자기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음……. 방금 배트 플립에 예민하게 반응한 걸 보면 그럴 가능성도 있겠는데요?”
“그냥 위협구 정도면 몰라도, 몸에 맞아서 부상당하면 안 되는데.”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버팔로즈와 유니콘즈 동료들이 투수와 박성주를 겨우 진정시키고 나서야 벤치클리어링은 마무리됐다.
박성주는 3루와 홈 베이스를 밟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이제 전광판의 점수는 1:0으로 바뀌었다.
혹시 곧바로 타석에 선 타자에게 빈볼이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경기는 문제없이 이어졌다.
유니콘즈 투수는 벤치클리어링 이후에 잠시 흔들리는 듯하더니 평정심을 되찾고는 초반에 보여줬던 위협적인 공을 던졌다.
오히려 벤치클리어링 이후로 힘을 얻었는지 유니콘즈 타자들의 연속 안타가 터지며 1:2로 경기를 역전시켰다.
4회 초 2 아웃.
어느덧 다시 타순이 돌아 3번 타자 오석훈의 순서가 되었다.
지금까지 버팔로즈의 안타는 박성주의 홈런이 유일했다.
다른 타자들은 타격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돌아섰다.
“타순이 한 바퀴 돌고 나서부터는 변화구도 섞어서 던지는 것 같은데, 변화구도 수준급이라 공략하기가 쉽지 않겠어요.”
이주혁은 2번 타자와의 승부 내용을 적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석훈이의 선구안을 믿어봐야죠.”
펑!
“스트라이크!”
펑!
“볼.”
오석훈과의 승부는 팽팽했다.
투수가 던지는 공 하나하나에는 혼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구속도 구속이지만 단 하나도 쉬운 공을 던지지 않았다.
모두 스트라이크 존을 겨우 걸치거나 빠지는 코스였다.
띡.
힙겹게 맞춰내더라도 파울라인 안쪽으로 보내기 어려운 공이었다.
“어떻게 공 7개를 던지는 데 살짝이라도 가운데로 몰린 공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죠?”
“석훈이에 대해서 충분히 전략을 세우고 온 것 같아요. 적당히 쉽게 승부하려고 했으면 이미 안타 맞았을 거예요.”
하지만 오석훈도 쉽게 당하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존 바로 앞에서 꺾이는 절묘한 변화구가 날아오는 데도 몸을 움찔하며 참아냈다.
“볼넷!”
결국 9구까지 이어진 승부는 오석훈의 판정승이었다.
투 아웃이기는 했지만, 박성주의 홈런 이후로 첫 번째 출루에 성공했다.
오석훈이 스피드가 빠르다 보니 투수에게도 훨씬 부담이 커질 게 분명했다.
그리고 박성주가 타석으로 걸어왔다.
박성주가 타석에 들어서자 지난 타석의 벤치클리어링이 떠오르며 그라운드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박성주 홈런! 박성주 홈런!”
“삼진! 삼진! 삼진!”
관중들도 아까보다 큰 함성을 보내며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투수가 위험한 빈볼을 던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포수의 사인을 받은 투수는 1루에 있는 오석훈을 흘끗 한 번 바라보고는 곧바로 공을 던졌다.
“어?”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은 박성주의 몸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박성주는 날아오는 공이 두렵지도 않은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펑!
“볼.”
몸쪽 아주 가까운 곳으로 날아왔지만 몸에 맞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일부러 던진 위협구였다.
“우우우-”
버팔로즈 팬들이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박성주는 배트를 몇 번 휘두르며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포수에게서 공을 받은 투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음 투구를 준비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조금의 주저함 없이 공을 던졌다.
펑!
투수의 공은 이번에도 박성주 몸에 가깝게 날아왔다.
“볼.”
두 개 연속 위협구였다.
결국 심판이 유니콘즈 통역을 부르더니 마운드로 올라가 주의를 줬다.
“우우우우우-”
버팔로즈 팬들의 야유 소리는 더욱 커졌다.
2 볼 0 스트라이크.
위협구를 던지면서 볼 카운트가 불리해졌다.
1:2로 점수 차가 한 점밖에 나지 않은 데다, 여기서 볼넷을 내준다면 스피드가 빠른 오석훈을 2루까지 보내야 했다.
아무리 좋은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라고 해도 부담스러운 상황일 텐데.
“우우우우-”
투수는 버팔로즈 팬들의 야유 속에서 포수와 사인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세 번째 공을 힘껏 던졌다.
투수가 공을 놓는 순간 이번에는 몸쪽으로 날아오는 위협구가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박성주도 이를 느꼈는지 자신 있게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오!”
“간다! 간다!”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모든 버팔로즈 팬들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이주혁도 마찬가지였다.
“홈런!”
“와아아아아-”
3루심이 검지를 돌리며 홈런임을 알리자 관중석은 또 한 번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연타석 홈런이라니.
게다가 1:2의 상황을 3:2로 단숨에 역전 시키는 홈런이었다.
투수는 담장 밖으로 날아가는 공을 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모자를 벗었다.
배트에 맞자마자 홈런이 될 거라는 걸 직감했을 박성주는 공이 날아가는 동안에는 타석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공이 담장을 넘어가고 홈런이라는 걸 완전하게 확인한 뒤에야 1루 베이스를 향해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배트를 멀리 집어던지고 나서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며 팬들의 함성을 유도했다.
“와아아아아아아-”
버팔로즈 팬들은 아까보다 더 큰 함성으로 화답했다.
겨우 다시 모자를 쓴 투수가 이 모습을 보더니 다시 한 번 눈빛이 변했다.
투수는 손에서 글러브를 빼서 박성주를 향해 집어 던지고는 성난 들소처럼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1루 베이스를 밟으려던 박성주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투수를 향해 달려갔다.
“어, 어어?”
주변에 있던 유니콘즈 내야수들이 급하게 달려와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두 선수의 직접 충돌이 벌어지며 아까보다 훨씬 격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더그아웃에 있던 양 팀 선수들은 물론이고, 불펜에 있던 투수들까지 그라운드로 다급하게 뛰어나와야 했다.
두 선수 모두 워낙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았던 탓에 동료 여럿이 달라붙은 뒤에야 겨우 떼어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도 한참 동안 두 팀의 날 선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과격한 반응을 보이는 선수들도 있었다.
“우우우우-”
“박성주! 박성주! 박성주!”
버팔로즈 팬들은 일방적으로 박성주를 연호했다.
코치들까지 나와 중재를 하고서야 격해졌던 감정이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두 팀 선수들은 하나둘 더그아웃과 불펜으로 다시 돌아갔다.
상황이 정리되자 심판이 박성주와 투수를 가리키며 퇴장을 선언했다.
“어, 퇴장이라고?”
“위협구 던진 건 투수였는데?”
이를 지켜보는 나도 살짝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양 팀 감독이 달려 나와 심판에게 어필을 해봤지만 심판의 판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두 선수가 퇴장당하고 나서야 상황은 완전히 정리됐다.
경기는 계속 이어졌고 결국 버팔로즈의 승리로 끝났다.
박성주의 마지막 홈런이 결승점이 됐다.
* * *
경기가 끝나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나와 이주혁은 함께 앉아 트라이아웃 참가 신청서를 작성했다.
테스트 당일에 현장에서 등록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해서 미리 등록해두고 싶었다.
양식이 그리 까다로운 편도 아니었다.
간단한 인적 사항과 포지션, 야구 관련 이력만 적으면 됐다.
“딱 일주일 남았네요.”
“이제 진짜 실감 나는 것 같아요.”
“컨디션 조절만 잘하면 좋은 결과 있을 거예요.”
나는 이주혁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럼 내려가서 더 훈련하고 있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같이 가요.”
나와 이주혁은 함께 방을 나섰다.
거실을 지나 지하 훈련장으로 내려가려는 데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띠리릭.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오석훈과 박성주였다.
“저희 왔습니다.”
“벌써 왔구나. 오늘도 고생 많았어.”
나는 먼저 들어온 오석훈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리고 뒤에 있던 박성주에게로 시선을 옮기는데,
“성주야 너 얼굴 괜찮은 거야?”
박성주의 얼굴은 아직도 울그락불그락했다.
“선배, 그 자식 힘 엄청 세요.”
“몸은 다친 데 없어?”
“제가 누군데요. 당연히 괜찮죠.”
“진짜 다행이다.”
심통 난 아이 같은 박성주를 보자 웃음이 피식 터졌다.
“저 홈런 치는 거 보셨죠? 오늘 두 개나 쳤어요.”
그러고 보니 오늘만 홈런을 두 방이나 쳤다.
벤치클리어링이 워낙 임팩트가 커서 그쪽이 더 강하게 기억에 남기는 했지만 말이다.
“성주야, 오늘 진짜 멋있었어.”
이주혁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히히. 고마워, 더 잘해야겠다.”
박성주가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답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려오더니 문이 열렸다.
띠리릭.
뒤이어 들어온 사람은 고지훈이었다.
“선배 오셨어요?”
“어. 조금 피곤해서 올라가서 쉴게.”
고지훈은 심각한 표정으로 짤막한 한 마디만을 남기고는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걷는 모습부터 어딘가 불편한 게 느껴졌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나가는 고지훈의 몸에 살짝 접촉했다.
-병원 진료를 받고 나서도 통증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다음 선발 등판에 필요한 훈련을 충분하게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정보창을 보자 얼마 전에 캐치볼을 하며 고통스러워했던 순간이 스치고 지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