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88
88화>
마지노선 (3)
고지훈이 최악의 경기를 펼친 데다 곧바로 1군 명단에서 제외되기까지 하면서 회의실의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임예지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다 보니 오석훈과 박성주의 활약은 자연스럽게 묻힐 수밖에 없었다.
“어제 경기 보셔서 아시겠지만, 고지훈 선수의 상황이 아주 좋지 못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 나눠보죠.”
임예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김 팀장님, 업데이트된 내용 있나요?”
“방금 확인해 봤는데요. 정확한 검사 결과는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하긴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시즌 아웃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시즌 아웃이요?”
김민환의 말을 듣는 순간 임예지가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원래도 안 좋았던 허리가 경기 소화하면서 더 안 좋아졌다고 해서요. 충분히 휴식을 취해서 확실하게 회복하고 복귀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김 팀장님. 올해가 고지훈 선수한테 중요한 시즌인 건 잊지 않으셨죠?”
임예지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물론 그거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말씀하신 그 방법이 정말 최선인가요?”
“어, 그게…….”
“에이전트라면 선수를 위한 최고의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하지만 선수가 부상을 당한 상황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뭐가 있을까요?”
용기 내서 한마디를 던지면서도 김민환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
“제가 지금 그 얘기 들으려고 두 분하고 회의하고 있는 건가요? 그럼 고지훈 선수가 혼자서 회복 다 할 때까지 손 놓고 있으면 되겠네요? 정말 그런가요?”
“그건 아니지만…… 구단에서 어떻게 판단하는지를 지켜보고 움직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서요.”
“구단에서 해주는 걸 기다리고만 있을 거면, 에이전시의 역할은 도대체 뭐죠? 그리고 선수가 비싼 돈을 지불해 가면서 에이전시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하는 이유는 뭐고요?”
점점 임예지의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있었다.
“…….”
“우리 역할은 우리가 찾아서 해야 하는 겁니다. 선수한테서 비싼 돈 받고 있으면 그만한 값어치를 해줘야죠.”
“알겠습니다…….”
말문이 턱 막힌 김민환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답했다.
“우선 팀장님께서는 고지훈 선수 몸 상태를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집중해 주세요. 국내 검진만으로 확실하지 않다면 미국이나 일본 병원으로 보내서라도요.”
“네.”
김민환은 힘 없는 목소리로 답하며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특히 현우 씨는 고지훈 선수가 정신적으로 흔들리지 않도록 관리해 주세요. 고지훈 선수 성격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멘탈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을 거예요.”
“네, 제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나는 더욱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높은 톤으로 답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럼 병원에서 검사 결과 나오는 대로 다시 이야기 나누시죠.”
임예지는 마지막 말을 던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내가 회의실 문을 닫고 들어오는데, 김민환은 눈을 감은 채로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아우. 스트레스.”
처음 김민환을 만났을 때보다 늙어 보이는 게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팀장님, 그럼 어떤 거부터 하는 게 좋을까요?”
“하……. 일단 검사 결과는 오늘 밤이나 늦어도 내일 오전까지는 나올 거야. 정확한 결과 나오는 거 보고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어?”
“그렇긴 한데, 사실 검사 결과야 뻔하지 않을까요? 허리에 무리가 와서 밸런스가 안 맞고, 어깨랑 팔꿈치로 무리해서 힘을 내려다 보니 몸이 전체적으로 안 좋아졌다. 이걸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도 아닌데요.”
정보창에서 고지훈이 허리 통증을 느끼고 있다는 내용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캐치볼을 하면서 내 눈으로 직접 보기까지 했다.
“후……. 그거야 그렇기는 하지.”
김민환은 땅이 꺼질 것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바로 허리 통증을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나 의사부터 찾아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게 좋겠네.”
“혹시 에이전시랑 연결된 해외 병원이 있나요?”
사실 나는 아직 해외 병원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았다.
“근데 현우 씨 생각은 어때?”
“무슨 생각이요?”
질문에는 대답도 없이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고지훈을 빨리 복귀시키도록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부상 회복을 빨리할 수만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복귀시키는 게 좋지 않나요. 선수 입장에서도 한 경기라도 더 뛰고 싶지, 누가 병원에 누워서 경기 보고 싶겠어요.”
“정말 그런 방법이 있을까?”
“글쎄요……. 치료를 잘 받을 수 있으면 하루라도 빨라질 수는 있지 않을까요?”
“만약 우리가 원하는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이 안 된다면?”
김민환은 스무고개를 하는 것처럼 계속 연결되는 질문을 던졌다.
“그럼 어쩔 수 없죠. 회복이 다 되고 난 다음에야 경기를 뛸 수 있는 거니까요.”
“음……. 그렇지.”
김민환은 잠시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근데 그런 걱정은 왜 하시는 건데요?”
“내가 임 대표님하고 같이 일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민환의 말에 집중했다.
“오늘 회의에서 저렇게 예민해진 이유가 뭐일 것 같아?”
“그야 소속 선수가 하루라도 빨리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아닐까요?”
“물론 그것도 맞지.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김민환의 표정을 보니 아직 더 할 말이 남아있는 눈치였다.
“또 다른 이유가 있어요?”
“고지훈이 올해 FA잖아.”
“그게 어때서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는 빠르게 회복시키려는 이유가 FA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지.”
대단한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김이 팍 새는 기분이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기는 할지 궁금할 정도로 당연한 대답이었다.
“FA랑 관계없이 에이전트라면 선수가 하루라도 빠르게 그라운드에 설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죠.”
“현우 씨는 고지훈이 이번에 FA 요건도 채우면서 부상 회복까지 동시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해?”
“……?”
“병원에서 언뜻 듣기로는 못 해도 1개월에서 2개월은 웨이트 트레이닝도 자제하는 게 좋을 거라고 하던데, 치료 다 받은 이후에 다시 감각 끌어올려서 마운드에 서려면 거기서 또 한두 달은 더 걸리겠지? 그렇게 해서 나머지 FA 일수 채울 수 있겠어?”
그런가?
만약 김민환이 들은 말대로라면 FA 일수를 채우기는 분명 어려웠다.
만약 이번 시즌에 필요한 1군 등록 일수를 채우지 못한다면, FA 요건은 다음 시즌까지 마치고 난 뒤에야 채울 수 있게 된다.
운동선수의 몸값은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가 높은 만큼, 절대 좋을 리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민환도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근데 올해 1군에 50일 정도만 있으면 FA 요건을 채우게 될 텐데요?”
“어떻게 계산해야 그렇게 돼?”
“국가대표로 국제 대회 나간 것 있잖아요. 그거까지 합산해서 계산해 보면 충분히 될 거예요.”
몇 년 전에 국가대표로 소집되어서 경기를 뛰었기 때문에 FA 요건을 채우는 데 필요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 그렇지! 내가 그걸 잊고 있었네.”
“그 정도면 아직 시즌이 많이 남았으니까 3, 4개월 정도는 충분히 회복하는 데 써도 여유 있죠. 제대로 회복하고 난 다음에 잘하는 모습 보여주면 되잖아요.”
“그래, 그게 정답이다.”
김민환이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쾌재를 불렀다.
* * *
띠리릭.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끌시끌한 대화가 들려왔다.
“우와, 이걸 잡는다고? 말도 안 돼!”
“방금이 안타였으면 역전 당할 뻔했어.”
이주혁과 오석훈 박성주가 TV 앞에 모여 야구 게임을 하고 있었다.
“형, 오셨어요?”
옆에서 게임을 지켜보고 있던 오석훈이 벌떡 일어나 나를 맞아줬다.
“게임이 많이 재밌나 봐?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던데?”
“소리가 그렇게 커요? 우리는 조용히 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옆 동네까지 다 들릴 것 같은데.”
내가 오석훈과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이주혁과 박성주는 게임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몰입하고 있었다.
게임 속 투수가 공을 던지고, 타자가 스윙을 했다.
“아악!”
“스트라이크 아웃!”
박성주가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감싸는 순간, 이주혁이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질렀다.
“와, 이번 수비는 진짜 어려웠다.”
“어떻게 무사 만루에서 점수를 못 내냐!”
박성주는 자책하며 스스로 꿀밤을 때렸다.
스코어를 보니 박성주는 이번에도 지고 있었다.
그나마 점수를 한 점이라도 냈다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현실에서는 그렇게 야구를 잘하는 애가 어떻게 게임에서는 이렇게까지 못하는 거야.
“성주는 이번에도 지고 있어?”
“중반까지 팽팽했는데 홈런 한 방 맞고 나서 확 밀렸어요.”
“그냥 주혁이가 훨씬 잘하는 거 아냐?”
“에이……. 아직 게임 안 끝났어요. 야구는 끝날 때까지 모르는 거잖아요.”
박성주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다시 조이스틱을 쥐었다.
그 모습을 보자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근데 고지훈 선배는 안에 계셔?”
“훈련장에 안 계신 거 보니까 방에서 쉬고 계신 거 같은데요?”
오석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평소 고지훈이라면 훈련장에 있을 게 분명했지만, 지금 몸 상태로는 기본적인 웨이트 트레이닝도 어려울 테니까.
“한번 올라가 봐야겠네.”
내가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저벅. 저벅. 저벅.
2층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고지훈이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캐리어가 들려 있었다.
“선배, 어디 가세요?”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며칠 동안만 집에 다녀올게.”
“집에요?”
집에 가는 횟수도 줄여가면서까지 훈련에 집중했던 선수인데, 부상으로 힘드니 생각이 달라졌나 보다.
“잠깐 쉬고 싶기도 하고, 와이프도 걱정하는 것 같아서.”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죠.”
“금방 다녀올게.”
고지훈은 나와 다른 선수들에게 몇 번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문밖을 나섰다.
나는 대문까지 나가 고지훈을 배웅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몸도 마음도 지쳐있을 테니 잠시 집에서 가족들과 휴식을 취하고 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고지훈의 어깨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축 처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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