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94
94화>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1)
회의실로 들어온 고지훈이 임예지의 반대편에 앉으며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됐다.
밝은 미소를 보이는 임예지와는 다르게, 고지훈은 허리 통증 탓인지 심각한 표정이었다.
“우선 고지훈 선수 검사 결과를 우리 회사랑 제휴가 되어있는 미국 병원에 보내뒀어요. 조만간 소견서 받아볼 수 있을 거예요.”
“아, 그런가요.”
고지훈은 큰 표정 변화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박정준 교수님께도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말씀드렸어요. 이제부터는 지금보다 더 자주 와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결과 나올 때까지 치료받으면서 기다려봐요.”
“지금 상황에서 병원을 몇 번 더 간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까요?”
만족스러운 답변이 아니었는지 고지훈의 반응은 삐딱했다.
“교수님 말로는 자주 치료받으면 확실히 좋아질 거라고 하시던데요.”
“자주 방문해서 해결할 수 있는 거면 왜 이제까지는 그렇게 안 한 거죠?”
고지훈이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임예지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더니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제까지는 조금 조심스러우셨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고지훈 선수가 최대한 시즌 소화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시려다 보니 이제까지는 조심스럽게 진행하셨던 것 같네요.”
“그럼 그동안 국내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결과 나오면 미국으로 넘어가서 치료받는 건가요?”
“미국 병원에서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방법으로 선택해야겠죠.”
임예지의 답을 들은 고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근데 국내 병원 결과는 아직 안 나왔다는 거죠?”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거예요. 워낙 중요한 사안이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판단해달라고 부탁해 뒀거든요.”
임예지의 대답에는 조금의 막힘도 없었다.
“그렇군요.”
“우선 오늘 오후에 박 교수님 예약 잡아뒀으니 가서 진료받아보세요.”
“알겠습니다.”
고지훈의 답을 들은 임예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 * *
“현우 씨도 읽어봐 봐.”
“이게 뭔데요?”
김민환이 서류 봉투에서 종이 몇 장을 꺼냈다.
“미국 병원에서 보내준 소견서야. 어젯밤에 왔더라고.”
“소견서가 벌써 도착했어요?”
미국에서 보내온 서류답게 온통 빼곡하게 영어로 적혀 있었다.
게다가 의학용어로 가득하다 보니 아는 단어도 몇 개 찾아보기 어려웠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결론만 요약하자면 국내 병원에서 보낸 소견서랑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거야.”
“그렇다는 건…….”
“여기서도 최소 3개월은 치료를 받아야 할 거래. 물론 계획대로 치료가 진행되지 못한다면, 치료 기간이 그 이상으로 늘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고.”
“국내 병원이랑 완전히 같은 소견인 거네요.”
내 말에 김민환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아픈 데 없이 치료받고 복귀하는 걸로 추진해 보죠.”
무리해서 치료 기간을 단축하려다 보면 오히려 다시 부상이 심해져 회복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으니까.
“그게 말이야 쉽지만…… 대표님한테 진짜 그렇게 추진하자고 말할 수 있겠어? 현우 씨도 임 대표님이 50이닝을 100이닝으로 만들 방법이 정말 없는 거냐고 말할 때 표정 봤잖아. 기억 안 나?”
“당연히 기억하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해결책을 찾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임예지의 눈빛을 본 사람이라면 아마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게 틀림없다.
“근데 그런 상황에서, ‘미국 병원에서도 100이닝 던질 수 있게 만드는 건 어려울 거라고 하네요. 그럼 이제 우리도 어쩔 수 없으니 그냥 50이닝 소화하는 걸로 만족하시죠.’라고 말할 수 있겠어?”
“아니요. 절대 못 하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 얘기를 어떻게 꺼내.”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그걸 모르겠으니까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거지. 으아!”
김민환이 머리를 푹 숙이고는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헝클어뜨렸다.
그러다 갑자기 멈추더니 고개를 쓱 들어 올렸다.
“현우 씨, 좋은 아이디어 없어?”
“휴……. 글쎄요.”
“현우 씨가 이제까지 말도 안 되는 문제들 많이 해결했잖아. 이번에도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기가 막히게 하나 튀어나올 타이밍인 거 같은데?”
이제까지는 정보창의 도움을 받아서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보창이 있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의사에게 어떤 치료를 받아야 좋을지 정도는 정보창으로 알 수 있겠지만, 치료 기간 자체를 단축할 수 있는 능력은 아니었으니까.
“제가 화타 같은 의사도 아니고, 부상 치료를 받아야 하는 선수한테 뭘 해줄 수 있겠어요.”
“정말 뭐 없겠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김민환의 눈빛에서는 간절함 그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방법이 갑자기 튀어나올 리는 없었다.
“차라리 대표님한테 어떻게 보고를 해야 설득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전략을 세워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전략? 어떤 전략인데? 어서 얘기해 봐.”
김민환이 갑자기 고개를 벌떡 들어 올리더니 펜을 들며 당장 적을 준비를 했다.
“결국 우리가 FA 협상하면서 고지훈이라는 선수의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지.”
“고지훈 정도 실력을 가진 선수가 한 시즌에 150이닝 이상 소화하면서 이닝이터 역할까지 해주면 당연히 좋기야 하겠죠. 근데 솔직히 커리어 내내 보여준 모습은 이닝이터랑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게 현실이잖아요.”
“정확하게 맞는 말이야.”
김민환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한 시즌 동안 이닝 소화가 많았다고 해서 더블즈나 다른 구단들이 고지훈을 이닝이터 투수라고 생각해 줄까요?”
선수에 대한 평가는 지난 수년 동안 축적된 데이터로 이루어질 테니까.
“오히려 FA 직전 시즌이라고 무리해서 던진 것 같으니, 내년에는 지쳐서 많이 못 던지는 건 아닐까라고 걱정할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은데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
김민환은 내가 하는 말을 적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까 아예 관점을 바꿔야죠. 이닝 소화 내용은 아예 꺼내지도 말고, 이제까지 잘해왔던 부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가야죠.”
“근데 부상으로 3개월이나 이탈하고 50이닝 정도밖에 못 던지는 건, 내가 생각해도 좋을 게 없어 보이는 데 그건 어떻게 얘기할 건데?”
“이것도 좋은 쪽을 부각시켜야죠.”
내가 이번에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자 김민환의 표정에는 조금씩 흥미로움이 번졌다.
“어떻게?”
“치료만 제대로 받고 오면, 이제까지 고생했던 부상은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을 테니까요. 고지훈은 부상만 없으면 최고의 선수잖아요.”
“그럼, 그거야 분명한 사실이지.”
“차라리 이번 기회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치료받고 오는 게 나은 선택인지도 모르죠.”
“그렇지!”
김민환이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책상을 세차게 내려쳤다.
* * *
“왈! 왈왈!”
내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마당에 있던 루피가 나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왔다.
앞다리를 내 다리에 올리고는 꼬리를 신나게 흔들었다.
“오셨어요?”
이주혁이 뒤따라서 달려왔다.
얼굴과 등에 땀이 흠뻑 젖어있었다.
“무슨 훈련했어요? 땀을 엄청 흘렸네요.”
“루피랑 놀고 있었거든요. 그나저나 진짜 예쁘네요, 이 녀석. 애교도 많고요”
“그렇죠. 매번 볼 때마다 느끼지만 사랑해 주지 않을 수가 없어요.”
나는 허리를 숙여 루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석훈이랑 성주도 없어서 심심했겠어요.”
“이런저런 정리 좀 하다 보니까 시간 금방 가던데요. 루피랑 뛰어노는 것도 재밌고요. 이렇게 쉬어본 적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이주혁은 트라이아웃이 끝나자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원정 경기 때문에 며칠 동안 집을 비운 오석훈, 박성주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도 못했고, 나도 막상 보내려니 아쉬워서 며칠 더 쉬다 가라고 붙잡은 상황이었다.
“부모님께서는 별말씀 없으셨어요?”
“고생 많았다고 하시더라고요.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고, 조급하지 말라고 하시면서요.”
“맞아요. 주혁 씨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는 좋은 기회가 꼭 올 거예요.”
“덕분에 이렇게 여유 부리면서 푹 쉬어보네요.”
“여기 있는 동안이라도 제대로 푹 쉬다가 가요.”
나와 이주혁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띠리릭. 철컹.
대문이 열리더니 고지훈이 캐리어를 밀며 들어왔다.
“어, 선배 오셨어요?”
“그동안 잘 지냈지?”
고지훈이 숙소를 비운 지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고지훈은 한 손으로 캐리어를 밀고, 다른 손으로는 힘겹게 상자를 들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다가가서 상자를 대신 들었다.
“우리 와이프가 만든 쿠키인데, 다 같이 나눠 먹으라고 주더라고.”
“우와, 정말요? 감사하네요.”
“밀가루로 만든 게 아니라서 선수들이 먹어도 몸 관리하는 데 크게 문제없을 거야.”
“잘 먹겠습니다.”
상자를 건네받는 사이에 고지훈과 몸이 살짝 닿자 정보창이 업데이트됐다.
-허리 통증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약간의 현기증이 느껴지고 있다.
갑자기 허리 통증이 줄어들고 있다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갑자기 이런 변화가 가능한 거지?
“나는 들어가서 짐 정리 좀 하고 있을게.”
“네, 저도 곧 들어갈게요.”
고지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캐리어를 밀며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눈을 비비며 정보창을 다시 읽었다.
분명히 통증이 줄어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내 눈에 헛것이 보이는 건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고지훈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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