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Agent RAW novel - Chapter 96
96화>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3)
고지훈이 낮 경기에 등판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1군에서도 주말에 낮 경기가 편성되긴 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낮 경기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해서 컨디션 조절하기 어려운 적이 더 많았는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다시 등판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렜는지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고지훈은 눈이 떠지자마자 경기장으로 가서 워밍업부터 시작했다.
워밍업을 하는 동안에도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구속이 올라오지 않은 상황이니 제구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2군 경기임에도 고지훈의 집중력은 한국시리즈 못지않았다.
“플레이 볼!”
드디어 심판의 콜이 들렸다.
마운드에 선 고지훈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포수를 향해 힘껏 공을 던졌다.
펑!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존에 간신히 걸칠 만한 코스로 들어갔다.
타석에 서서 지나가는 공을 우두커니 바라본 타자는 고지훈의 정교한 제구력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지훈은 다음 공을 던지는 데도 조금의 주저함이 없었다.
펑!
“스트라이크!”
패스트볼은 이번에도 완벽한 코스로 들어갔다.
0 볼 2 스트라이크.
순식간에 유리한 볼 카운트를 만들었다.
이제 유인구로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할 타이밍이었다.
고지훈은 글러브에서 슬라이더 그립으로 바꾸고 공을 던졌다.
후웅-
스트라이크처럼 보이다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가 날아오니, 타자로서는 도저히 배트를 휘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심판은 고지훈의 복귀 후 첫 탈삼진을 축하해 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우렁찬 콜과 함께 큰 액션으로 삼진을 알렸다.
고지훈은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마음 같아서는 기쁨의 어퍼컷이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2군 타자들에게는 1군 핵심 선수가 던지는 변화구에 안타를 때려내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 타자를 상대로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후웅-
“스트라이크 아웃!”
헛스윙 삼진을 잡아낸 것은 물론이고,
펑!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존 구석구석을 노리는 패스트볼로 타자를 꼼짝 못 하게 하며 루킹 삼진을 잡아내기도 했다.
그렇게 고지훈은 첫 번째 이닝의 아웃카운트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냈다.
투구수도 12개밖에 되지 않았다.
“고지훈 파이팅!”
관중석에서 누군가의 응원 소리가 들려왔다.
1군 경기만큼 웅장한 환호성은 아니었지만, 힘을 얻기에는 충분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이닝에서도 고지훈이 던지는 공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펑!
“스트라이크!”
펑!
“스트라이크 아웃!”
승부가 이어질수록 삼진 아웃을 당한 타자들의 수가 늘어났다.
2회, 3회에도 상대 팀은 1루 베이스를 밟지 못했다.
원래 3이닝 정도를 소화할 계획이었는데 투구 수가 많지 않아 4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4이닝 동안 피안타 하나 없이 8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무실점으로 퍼펙트하게 마무리했다.
원하는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하고 마운드를 내려가는 고지훈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 * *
김민환은 눈앞의 기록지를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비볐다.
“정말 고지훈이 등판한 기록이 맞다는 거지?”
“네, 진짜 맞아요.”
“다른 선수가 등판한 걸 잘못 기록한 게 아니고?”
“우리 에이전시 소속이자 더블즈 투수 고지훈이 정확하게 맞아요.”
“동명이인도 아니고?”
“우리나라에 등록된 프로 야구 선수 중에 고지훈이라는 이름을 가진 선수는 딱 한 명뿐이에요.”
2군 경기는 중계가 없어서 직접 경기장에 가야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기록을 의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걸 보고 의심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럼 이제 완전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이야?”
“구속이 평균보다 조금 낮은 편이긴 한데요. 훈련하다 보면 곧 올라올 것 같고요. 그거 빼고는 흠잡을 게 없던데요.”
“통증도 없대?”
“통증이 심하게 느껴졌으면 80구 가까이 던지지도 못했겠죠.”
“그렇긴 하지.”
김민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빛에서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팀장님, 그럼 이제 문제가 해결됐다고 봐도 되는 걸까요?”
“그러게……. 선수가 공 던지는 데 문제가 없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김민환은 기록지를 다시 살펴보면서도 시원하게 답하질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찜찜함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박정준 교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문득 고지훈에게서 봤던 정보창 내용이 떠올랐다.
“팀장님 혹시 박정준 교수라고 아세요?”
“당연히 알지. 우리 에이전시 선수들이 재활해야 할 때 항상 찾아가는 분이잖아.”
아! 어디서 들어봤는지 이제야 기억났다.
재활 분야로는 국내 최고 권위자로 불리는 의사였다.
그렇다면 고지훈도 박정준 교수에게 치료를 받았을 테니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본 거야?”
“고지훈 선배는 계속 그 교수님한테 치료받았겠죠?”
“그렇지. 국내에서는 최고 권위자이기도 하고, 임 대표님이랑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지내서 친분도 깊으니까 우리 에이전시에서도 굳이 다른 병원으로 보낼 이유가 없었지.”
김민환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근데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 거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3개월 동안 치료받아야 한다는 소견을 받았잖아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내 한마디에 김민환의 표정에는 다시 궁금증이 내려앉았다.
“혹시 이전에도 지금이랑 비슷했던 상황이 있던 적이 있었어요?”
“처음이지. 그래도 내가 이쪽 일 꽤 오래 했는데도 이런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김민환이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도대체 어떤 진료를 받았길래……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걸까요?”
“글쎄…… 근데 진료 몇 번 받았다고 갑자기 이렇게 좋아질 수가 있는 걸까? 그랬으면 우리가 이제까지 고민하고 있을 이유도 없었겠지.”
“그렇긴 하죠.”
나와 김민환이 한참 동안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봐도 답을 알 수는 없었다.
“뭐. 선수가 안 아프고 잘 던질 수 있게 됐다는데, 그거면 충분하지. 안 그래?”
“그런 거겠죠……?”
“1군 콜업까지 됐는데 도대체 뭐가 더 고민이야. 남은 시즌 동안 부상 없이 공만 던질 수 있으면 싹 해결되는 거지.”
애써 미소를 보이는 김민환과는 달리 내 머릿속은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 * *
“헉. 헉. 헉.”
나는 벌써 한 시간이 넘도록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었다.
고지훈이 훈련하는 모습을 티 나지 않게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후욱-
후욱-
이후 섀도 피칭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투구 과정에서 이상한 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통증이 있다면, 저렇게 훈련을 소화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으니까.
아까 훈련장에 들어오기 전에 몸을 접촉한 덕분에 정보창에 업데이트된 내용은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도 진료를 받고 허리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현기증이 이전보다 자주 느껴지고 있다.
진료에 관한 내용에서는 전혀 특별할 게 없었다.
요즘 어떤 진료를 받고 있는지가 나왔다면 쉽게 해결됐을 텐데.
하는 수 없이 직접 대화를 나눠보면서 이유를 찾아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자연스러운 대화를 위해서는 고지훈의 훈련이 끝날 때까지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헉. 헉. 헉.”
하지만 고지훈이 얼마나 훈련을 오래 하는지, 내가 러닝머신 위를 달리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내가 먼저 쓰러지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드디어 고지훈의 훈련이 끝났다.
겨우 살았다.
나는 급하게 스톱 버튼을 누르고 멈춰 섰다.
헉. 헉. 헉.
어우 숨차.
대화는 둘째치고 일단 살기 위해서라도 숨부터 골라야 했다.
“러닝 하는 거 좋아하나 봐?”
고지훈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럼요. 이렇게 뛰고 나면 기분도 상쾌해지고 좋더라고요. 헉. 헉.”
사실 이렇게까지 오래 뛰어본 건 처음이었다.
“나도 러닝 많이 뛰는 편인데, 나보다 더 많이 뛰는 사람은 처음 보는 거 같아.”
나는 힘겹게 호흡을 고르고 나서야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선배, 1군 등판 일정 나왔나요?”
“바로 선발 등판하는 건 아니고, 내일 2군에서 불펜으로 1-2이닝 정도 던지고 다음 텀부터 1군 선발 등판하기로 했어.”
“던지는 데는 무리 없으시고요?”
“시즌 초보다 몸 상태는 더 좋은 거 같아.”
공을 던지면서 투구 밸런스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만 봐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내가 정말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질 타이밍이었다.
“박정준 교수님한테 받는 진료가 효과가 크긴 한 가 봐요?”
“며칠 전부터 확실히 통증이 줄어들기는 하는 것 같아.”
“좋아졌다니 다행이긴 한데…… 이전하고 어떤 게 달라졌길래 그런 거예요?”
나는 정말 신기한 것처럼 물었다.
“예전보다 자주 가니까 달라지더라고. 이쪽 분야에서는 유명하신 분이라더니, 확실히 실력이 좋기는 한가 봐.”
“얼마나 가시는 건데요?”
“예전에는 2주에 한 번 정도 갔는데, 당분간은 일주일에 세 번씩 가기로 했어.”
근데 진료를 자주 받았다는 것만으로 해결됐을 리는 없잖아?
“치료 방법이 많이 달라졌나 봐요?”
“글쎄……. 달라진 건 딱히 없는 거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고지훈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요?”
그냥 자주 받은 게 전부라는 건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물리치료 받으면서, 진통제나 영양제 맞고 오는 건 항상 똑같지 뭐.”
“아무리 그래도 조금이라도 뭐가 달라진 게 있으니까 몸이 좋아지지 않았을까요?”
“글쎄, 나도 이유까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고지훈의 표정을 보니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거참 신기한 일이네요.”
“최근 몇 년 동안 공 던지면서 밸런스가 이렇게 좋았던 적이 없었거든.”
“지난번에 등판하셔서 던지는 거 보니까 시즌 초보다 좋긴 하더라고요.”
“지난번 경기면…… 2군 경기라서 중계를 안 했을 텐데?”
“당연히 직접 가서 봤죠.”
“정말? 거기까지 왔다고?”
고지훈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내가 2군 경기장까지 찾아갔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제가 당연히 가서 봐야죠. 등판하시는데.”
“네가 보기에는 어떤 거 같았어?”
“결과로 나온 그대로죠. 완벽하다는 말 말고는 표현할 방법을 못 찾겠던데요.”
“그래?”
과한 칭찬에 고지훈이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고지훈과의 대화로는 원하는 내용을 얻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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