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104
105화
“저기. 프로 검투팀인 갓즈나이츠의 이사장인 오범석이라고 합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본 한 금발의 비서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말아 올리며 급히 다가섰다. 전에 TV에서 본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오늘만 해도 회장인 글로리아가 그의 경기를 볼 때 살짝 눈여겨보기도 했었다.
“아. 범석님이시군요. 그런데 여기를 어떻게 오셨죠……?”
“오늘 이 호텔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차 왔다가, 글로리아님을 뵈러 왔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안에다 말씀드릴까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범석이 대답했다.
“예. 부탁합니다.”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녀가 인터폰을 누르고 글로리아와 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잠시 후 허락이 떨어졌는지 회장실 문고리를 부여잡고는 살며시 열었다.
“자.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안으로 들어서자 업무용 책상에서 급히 일어서는 글로리아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옷깃을 정돈하더니, 황급히 마중 나왔다.
“어서 오세요. 범석씨. 어떻게 여기까지…….”
“어떻게 라니요. 행사차 왔다가 인사라도 할 겸 찾아왔습니다.”
“아 그래요?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그를 근처 응접용 소파로 안내하는 글로리아를 바라보며 비서여인이 말했다.
“회장님. 차를 내올까요?”
그러자 범석이 손사래를 흔들었다. 여기까지 찾아와서 차 대접만 받고 갈 수는 없었다. 딴에는 생명의 은인인데, 최소한 식사 대접 정도는 받아야 했다. 그래서 오늘, 연회식장에서 잘 차려진 요리에 제대로 손도 대지 않았다.
“아닙니다. 차는 다른 곳에 가서 마실 예정입니다.”
“다른 곳이라요?”
“글쎄요. 그건 글로리아님께서 결정하실 일이죠. 하하하.”
범석의 너스레에 글로리아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럼 나가서 드시겠어요?”
“네. 호텔 어디에 전경이 좋은 식당이 있으면 안내해 주십시오. 오늘 거하게 대접받으러 왔으니까 단단히 각오하셔야 합니다.”
“호호호.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글로리아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옷걸이로 가, 걸려 있는 손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어찌 보면 범석과의 첫 번째 데이트가 될 수 있으니,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는 비서에게 지나가는 말투로 얘기했다.
“그러면 다들 퇴근해.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그 말에 금발의 여인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오늘 회장인 글로리아가 이 늦은 시간까지 퇴근하지 않고 있기에 자신들도 아직 집으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오늘 일과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네. 회장님.”
분주하게 책상을 정리하는 비서들을 스치며, 범석과 글로리아가 밖을 나섰다. LED등이 비치는 복도를 지나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범석씨 전에는 무척 고마웠어요. 덕분에 목숨을 구했어요.”
“하하하. 고맙긴요. 다 절 위해서 한 일입니다.”
뜬금없는 눈빛으로 글로리아가 그를 바라봤다.
“어째서 그 일이 범석씨를 위한 일이죠?”
“아주 간단합니다. 글로리아님께서 그때 변고를 당했으면, 제 마음이 무척 아팠을 겁니다. 연모하는 여인을 잃는다는 것은 저에게 큰 고통이니까요.”
그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순진한 표정으로 노골적으로 애정을 갈구해오니, 어찌할 바를 몰랐던 탓이다.
가히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부끄러워 계속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던 글로리아가 말을 돌렸다.
“저, 저기. 식사를 뭐로 하시겠어요.”
“후후. 아무거나 다 잘 먹습니다. 다만, 분위기 좋고 오붓하게 식사할 장소라면 좋겠습니다.”
“그, 그래요? 그럼 호텔 스카이라운지 식당으로 있는데 가시겠어요?”
“네. 그러죠.”
“그럼 잠시만요.”
하며 그녀가 황급히 엘리베이터의 단추를 눌렀다. 범석과 대화하느라 지금까지 엘리베이터를 불러야 한다는 사실은 잊고 있었다. 이내 자동문이 열리자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 맨 꼭대기 층의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층수를 나타내는 LED숫자 표시가 급하게 카운트 되더니, 89층에 이르렀을 때 멈췄다.
“자. 여기에요. 내리세요.”
내려서자마자 바로 앞으로 온통 사방이 유리 칸막이로 된 고급스러운 식당이 하나 나왔다. 하늘 위로는 노란빛을 머금은 보름달이 밝게 내리 비취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작은 별들이 끝도 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아래로 노닥이며 식사를 하는 신사들과 엘프들이 있었고, 단체로 왔는지 몇몇 여인들이 웃음꽃을 피우며 수다를 떨어댔다.
밤의 정취가 물씬 풍기지만 조명으로 밝은 실내. 범석과 글로리아가 길게 뻗은 대리석바닥 길을 함께 걸어갔다. 그러자 한 여성 호텔직원이 후다닥 다가오더니 거의 90도의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어, 어서 오세요. 회장님.”
그 호텔직원은 자못 긴장하는 기색을 하고 있었다. 글로리아가 이곳에 찾아오는 이유는 시찰일 경우가 많았으니, 뭔가 꼬투리를 잡히지 않나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여기 조용한 실내 있지?”
“아. 예.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VIP전용 룸이 있어요.”
“지금. 손님이 와 있어?”
“아니요. 지금은 비어 있어요.”
방긋 웃은 글로리아가 바로 말했다.
“잘됐네. 그럼 그 방으로 안내해줘. 중요한 손님이 와서 말이야.”
힐끔 범석을 바라본 호텔 여성직원이 양손으로 우측 사잇길을 가리켰다.
“네. 알겠어요. 그럼 안내 드릴게요. 따라오세요.”
“음. 고마워.”
호텔직원의 안내를 받은 범석과 글로리아가 스카이라운지 식당을 빠져나가 긴 통로를 지났다. 원통형의 유리로 둥글게 막혀 있는 길이었는데, 그 끝에 이르자 고풍스러운 목재 문이 하나 나왔다.
그리고 그 문이 열리는 순간. 범석이 눈앞에 펼쳐지는 널찍한 방안 구조를 보고 심히 감탄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유리 칸막이는 어떤 이음새도 없이 일체형으로 이뤄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바닥에 깔린 양탄자는 푹신하고 화려하기 그지없었고, 방 전체가 호텔 건물 밖으로 툭 나와 있는지 사방으로 시야를 가리는 물체는 무엇하나 보이지 않았다.
“호오. 대단한데요. 이런 곳은 처음 와봅니다.”
“그래요? 마음이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자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글로리아의 인도를 받으며 중앙에 있는 탁자로 간 범석이 길게 나열된 의자 중 하나에 착석했다. 그 앞자리를 차지한 글로리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범석씨. 뭐로 하시겠어요.”
“글쎄요. 격식 있는 건 별로 안 좋아해서요. 전 그냥 가볍게 먹고 배를 채울만한 음식이 좋습니다. 대신 양은 많이요. 하하하.”
농담 어린 그의 식사주문에 생긋 웃은 글로리아가 호텔직원에게 말했다.
“말씀하신 종류로 여기 상이 가득 차도록 가져오도록 해. 그리고 최상품 고급 포도주 서너 병도 준비해오고.”
“네.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정중히 인사를 한 호텔직원이 나가자, 범석이 대화를 시작했다.
“아. 그래. 전에는 무척 놀라셨죠? 부지불식간에 그런 일을 당하셨으니…….”
“예. 그때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어요. 정말 당시는 아이를 낳지 않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후회스럽더라고요. 제 핏줄을 이어받은 자식이 있다면 유산을 받을 테니 지금껏 쌓아놓은 재산이 허공에 날아갈 일이 없으니까요.”
그가 새삼 놀란 표정을 연기했다.
정보창으로 확인한 결과 글로리아는 아직 처녀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직 인공수정을 받아 아이를 낳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물론 인공캡슐로 아이를 가지는 방식도 있지만, 이는 남성들이 선호할 뿐이지 여성은 자연분만을 주로 했다. 그래야 자식을 얻는 기분이 난다나? 이를 봤을 때 범석은 그녀가 아직 아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쯤은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 없기에, 범석은 지금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래요? 아이가 없으십니까?”
“예. 아직요. 바쁘게 살다 보니까 자식을 낳고 키울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그렇군요. 그럼 이제 그런 일도 당하셨으니, 곧 아이를 낳으시겠군요.”
그 말에는 글로리아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여성들도 그렇지만, 그녀도 꼭 자연산 아기를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연산 아기. 남녀 간의 애정 속에서 자연적으로 잉태되는 아기를 말하는데, 이 시대에서는 천연 기념물적인 존재라 할 수 있었다. 바로 엘프의 창조와 남녀 간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일이었다. 남자들은 여자를 사회구성원의 일부로 생각할 뿐이지, 절대 애정을 쏟을 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글쎄요. 또 일이 바쁘다 보니 차일피일하네요. 하지만, 곧 시간을 내서 가져야죠.”
“아. 네. 언제쯤에 가지실 예정이십니까?”
글로리아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왜 이런 개인적인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딴에는 은인의 질문이니, 매몰차게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글쎄요. 이번 달은 좀 안 되고 다음 달이나 다다음달쯤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뭐 더 길어질 수도 있지만요.”
“아. 그렇습니까?”
범석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속마음은 아주 다급했다. 아이를 낳으려면 인공수정을 해야 하니, 결국에는 그녀의 몸속에 다른 남성의 씨앗이 들어가게 되었다. 무척 찝찝한 일로, 어떻게 그녀의 공략을 빨리 마무리했다. 물론 더 길어질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이를 믿고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에 그가 계속 대화를 시도하며 친밀도 올리는 작업을 수행해 나갔다.
이러는 사이, VIP룸으로 일단의 호텔직원들이 음식을 가지고 와 나열하기 시작했다.
“회장님. 주문하신 요리가 나왔습니다.”
이름은 알 수 없는 요리가 여럿 섞여 나왔지만, 맛깔스럽기 그지없어 보였다. 연갈색의 투명한 소스가 뿌려진 어패류 요리하며, 진한 육수가 우러나오는 스테이크. 붉은빛을 반짝이는 해물 섞음 요리와 초밥, 스파게티 등등……. 과연 이 음식들을 다 먹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여기에 놀라운 사실 하나는 식탁 중앙에 88년산 포도주가 떡하니 놓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이 게임의 시간상 51년도임을 봤을 때, 족히 반세기가 훨씬 넘어가는 고급포도주라는 말이 됐다. 포도주는 네임벨류와 연식별로 그 가격차이가 천지차이임을 볼 때, 매우 고가라고 예상되었다.
그는 포도주병을 들고 직원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아니. 이 포도주는 얼마나 합니까?”
“네. 88만 크랑입니다.”
즉 이 포도주 10병이면 에어리어리그 주전급 검투사를 영입해올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가 소유한 자금을 볼 때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하루 식사 대용으로 마시기에는 분명히 아까운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가 영 아니라는 표정으로 글로리아를 바라봤다.
“이거 너무 대접이 과하신데요. 깨질까 봐 만지기도 부담스럽습니다.”
“너무 마음쓰지 마세요.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니까요.”
글로리아가 포도주병을 들더니, 바로 라벨을 따버렸다. 그렇다는 얘기는 이 포도주의 상품적 가치는 사라졌다는 뜻, 88만 크랑이 허공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범석이 하는 수없이 빈 포도주잔을 앞에 내밀었다.
“뭐. 그렇다면 한 잔 마시겠습니다.”
글로리아가 직원에게 직원들에게 나가라고 눈짓을 준 후, 포도주병을 들어 천천히 잔을 채웠다. 그리고 반쯤 따랐을 때쯤 범석이 바로 낚아채 그녀의 잔도 채웠다.
글로리아가 잔을 높이 들며 말했다.
“자. 그럼 우리 건배할까요?”
털컥 문소리와 함께 모든 직원이 나가는 모습을 본 범석이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녀의 옆 좌석으로 이동했다.
“건배보다는 저희 색다르게 술을 마셔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색다르게 라니요?”
“자료를 찾아보니 엘프가 창조되기 이전에 사랑하는 남녀가 술을 마실 때 이런 식으로 마셨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하는 남녀가 건배하는 방법이 따로 있었다는 매우 흥미로웠다.
“그래요? 어떻게요? 한 번 해보세요.”
“그럼 실례를 범하겠습니다.”
쭉 포도주를 한 모금 입안에 머금은 그가 갑작스럽게 글로리아의 입에 키스를 시도했다. 당황스러웠던 그녀가 몸을 빼려고 했지만, 강인한 두 팔에 꽉 부여 잡혀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비집고 들어가는 입술 사이에서 시큼한 포도주 액이 스며 들어갔다.
글로리아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에는 그의 무례한 행동에 순응했다. 범석의 우악스러운 애정표현이 그리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그들의 입속에는 혀의 움직임과 함께 고급 포도주의 액체가 물결 쳤다.
“어떻습니까? 맛이?”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할 글로리아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범석씨. 전에도 그랬지만, 왜 자꾸 저에게 이런 짓을…….”
“후후.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글로리아님의 자태에 반했다고요.”
그녀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범석을 바라봤다. 전에도 이런 식으로 자신을 우롱하려는 자가 심심치 않게 있었던 탓이다. 아무리 남자가 여성을 혐오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자들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안 믿어요.”
“뭘 믿지 않는다는 겁니까? 그럼 제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줄 아시는 겁니까?”
“그럼 정말 저를 좋아한다는 말인가요?”
“물론입니다. 한번 안아보고 싶어 미치겠습니다. 아니 반드시 제 여자로 만들 겁니다.”
글로리아가 뚫어지라 그를 표정을 살폈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의 안목으로 진실 여부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쳐다봐도 거짓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정말인가요?”
“네. 그래서 아까 글로리아님이 인공수정으로 아기를 가진다고 할 때, 무척 짜증이 났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여성의 몸에 남의 씨앗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으니까요.”
“그럼 저에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요?”
음흉한 미소를 지은 범석이 슬며시 탁자의 위의 음식들을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일. 분위기도 좋겠다, 여기서 끝을 내버리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바로 글로리아를 껴안은 후 텅 비어버린 식탁 위로 올려놓았다.
============================ 작품 후기 ============================
이 놈의 감기가 잘 안떨어지네요. 벌써 삼일째 머리가 띵한 가운데 글을 쓰니, 제대로 써진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심하기라도 하면 핑계대고 며칠간 푹 누워있겠지만, 그것도 아니고요. 하하하. 하여간 빨리 날씨에 적응해야할 텐데요. 이거 나이가 드니 영 환절기가 힘겨워집니다. 하하하.
그럼 모두들 좋은 하루 보내시고요. 전 내일 또 같은 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