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15
15화
“레이미 이거 어쩐 일이지. 담당자가 네 몸 값이 2500만 크랑인줄을 모르는 모양인데.”
“글쎄요. 저로서도 영문을 알 수가 없네요. 분명 감독님께서 제 몸값이 그 금액으로 책정됐다고 하셨거든요.”
“감독이?”
“네.”
순간 그의 미간이 심할 정도로 찌푸려졌다. 트레이드 사무 담당자는 모르는 일을 감독이 그녀에게 그리 말했다면, 2500천만 크랑의 몸값 책정을 한 사람은 감독일 확률이 컸다.
무슨 영문인줄 모르지만 이대로 그를 만난다면, 협상 진행에 큰 난관이 있을 듯 보였다.
“쩝. 아무래도 감독이 네 이적협상에 큰 장애물이 될 것 같다.”
“아니 왜요?”
“보아하니 그 몸값을 책정한 사람은 감독일 가능성이 커. 그런데 그 금액이 시장가의 5배가 될 정도로 터무니가 없다는 점이 문제야. 즉 잘만 생각해보면 감독은 널 팔기 싫어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딴에는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시장가의 몇 배나 되는 몸값의 검투사를 그 어느 팀이 사가겠는가? 그것도 전성기가 지나 은퇴를 바라볼 시점에 놓인 자신을 말이다.
하지만 사람 좋고 자신을 친딸처럼 아끼시는 감독이 자신의 앞길을 막을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야 타 지역으로 나가 얼굴 볼 일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과거에는 마음속을 탁 터놓고 얘기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그리고 내부방침으로 자신이 처음 강사로 파견 나갈 때에는, 문 앞까지 손수 배웅하며 곧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위로해 주었을 정도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제가 바란다면 꼭 팔아 주실 것에요. 겉으로 무뚝뚝해 보여도 저에게는 무척 상냥하게 대해 주셨어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범석이 다소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엘프들이 가장 바라는 바는 주인을 만나 모시는 것. 둘이 친하다면 그녀의 이런 갈망을 모른 척 하기란 힘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범석은 앞으로 벌어질 협상변수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하나하나씩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탁자의 차가 차갑게 식었을 무렵. 또 다시 응접실 문이 열렸다. 바로 감독과 얘기하러 갔던 아놀드였다. 그는 다소 당혹해 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 뒤에는 운동복 차림의 사내 하나가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백발에 턱수염을 덥수룩 기른 60대 쯤 보이는 자로, 서글서글한 눈매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를 본 레이미가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빈센트 감독님! 안녕하세요.”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빈센트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서와 레이미. 그 동안 고생 많았지?”
“아니에요. 염려해주신 덕분에, 잘 지냈어요.”
왠지 짠한 분위기에 범석이 미심적인 눈초리로 빈센트를 쏘아봤다. 저 영감탱이가 혹시 레이미에게 흑심을 품고 몸값에 그딴 수작을 부렸나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내자식은 젊던 오늘내일하는 늙탱이이건 간에 다 도둑놈이요 늑대였다.
결국 보다 못한 범석이 자리에 일어서서 다정한 둘의 해우를 막아섰다.
“흠흠.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범석이라고 합니다.”
생뚱맞은 얼굴을 한 빈센트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를 바라봤다.
“자네가? 레이미를 영입하겠다는 그 사람인가?”
“네. 그렇습니다.”
빈센트가 범석의 위아래를 꼼꼼히 살피듯 쳐다봤다. 그리고 소파 한편에 털썩 주저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긴 호흡을 내쉬었다.
“휴~ 자네도 그리 서있지만 말고 빨리 앉게.”
“아. 네.”
범석이 제자리에 엉덩이를 붙이자 레이미와 아놀드도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잠시 이들 간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렇지만 곧 빈센트가 분위기를 깨며 용건을 꺼냈다.
“아놀드의 말을 빌어보자니 자네 아마추어 팀을 창단한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마추어 팀의 검투사로 사용하기에는 레이미가 너무 과분한 것 아닌가?”
그 말은 전적으로 옳았다. 레이미 정도의 능력이면 에어리어리그에서는 주전 급 검투사로 자리 매김할 수 있고, 와이드리그에서는 팀 전력에 따라 다르지만 충분히 후보 검투사로도 활용이 가능했다. 이런 검투사를 아마추어 선수로 활용하기에는 아까운 측면이 있었다.
게다가 아마추어 경기 중 프로출신 검투사가 나갈 수 있는 시합은 여름철에 시작되는 GA컵과 초봄에 열리는 승격 토너먼트 대회, 그리고 가을에 열리는 지역 새미프로대회뿐이라 활용도가 극히 떨어졌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전 제 팀을 아마추어에만 머물게 하지 않을 겁니다.”
“아마추어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라면?”
“네. 승격 토너먼트를 통해 프로팀으로 성장시킬 겁니다. 그러니 레이미 같은 뛰어난 검투사를 영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빈센트가 수염이 들썩거릴 정도로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바라던 답변이 이게 아닌 것이다.
“흥. 프로팀? 자네 엘프들에게 프로팀의 의미가 어떤 것인 줄 아나?”
“글쎄요. 레이미의 말로는 꽤 불행한 삶이라고 하더군요.”
순간 빈센트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옆에 앉아있는 아놀드의 눈치가 보였는지 뚜렷한 반응을 내보이지 않은 채, 그저 거친 기침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가 아놀드의 허벅지 툭툭 치며 말했다.
“자네는 잠시 나가 있게.”
“지금요? 하지만 이적 협상중이 아닙니까? 담당자인 제가 어째서?”
“그러니까 이자도 끌고 가. 밖에 나가서 둘이 실컷 협상을 하든 말든 하란 말이지. 난 지금 당장 레이미와 할 말이 있으니까.”
“하지만……. 굳이 나갈 필요까지야…….”
“그럼 내가 나갈까?”
워낙 막무가내로 우기기에 아놀드는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빈센트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범석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따라나섰다.
응접실에서 단 둘이 남은 빈센트와 레이미. 먼저 빈센트가 안타까운 눈빛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섭섭했던 게냐?”
“무슨 말씀이신가요?”
“내 말은 너를 경기에 내보내지 않아 섭섭했냐고 묻는 게다. 그래서 저런 얼토당토하지 않는 팀에라도 들어가서라도 시합에 나가려는지 묻는 것이고.”
레이미가 황급히 두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범석의 검투사 팀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그저 주인을 모실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전 그저 저분이 마음에 들어서 가려는 것뿐이에요.”
“저 놈팽이가 마음에 든다고?”
볼을 붉게 물들인 레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빈센트가 턱수염이 휘날릴 정도로 한 숨을 푹 내셨다.
“휴~ 레이미. 이번 이적 건은 포기하고 내년 봄 까지만 기다리면 안 되겠냐?”
화들짝 놀란 레이미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왜요?”
“사실 너를 후보 검투사에라도 충분히 기용할 수 있음에도, 이리 밖으로 내 돌린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다.”
“무슨 이유요?”
두 손을 깍지 낀 채 턱에 가져다 댄 빈센트가 연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레이미와 그가 만나 된 시기는 14년 전 이 드래곤나이츠팀이 에이리어리그에서도 강등되어 프로딱지가 떼어진 어느 날이었다. 당시 팀은 또다시 에어리어리그로 올라가기 위해 여러 개혁을 시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어느 유명 검투사팀에서 코치로 있던 빈센트를 감독으로 데리고 온 일이었다. 하지만 강등으로 인해 팀의 분위기가 극도로 좋지 못했고, 많은 능력 있는 검투사들이 다른 프로팀으로 이적해 떠나간 터라, 그로서도 팀을 재건하기란 참으로 요원한 일이었다.
그런 때에 큰 힘이 되어준 검투사가 바로 레이미였다. 한 창 물이 올라 있던 그녀는 승격 토너먼트에서 당연 군계일학의 실력을 보였고, 그 해 팀을 에어리어리그로 다시 진출시키는 데에 큰 일조를 했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리그경기에서도 충실히 그 역할을 다해, 13년이 지난 지금 팀은 와이드리그로 진출하고 다시금 센트롤 리그를 바라볼 만큼 전력을 향상시켰다.
이에 빈센트는 그녀에게 자그마한 사례를 하기로 했다. 바로 엘프들이 가장 바라는 주인을 찾게 해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레이미가 팀의 재산으로 잡혀 있다는 점이다. 함부로 싼 가격에 일반인에게 넘겼다가는 감사에 걸려 곤욕을 당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프로팀의 생리상 일반인을 상대로 한 거래는 극구 꺼려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보인다고 며칠을 고민하자 한 가지 방도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30살이 넘고 팀 전력 외로 구분된 후 2년 안에 트레이드를 못시킨 검투사에 한해, 워커옥션마켓에 내놓을 수 있다는 예외 규정이 있던 것이다. 워커옥션마켓이란 스포츠클럽이나 공공단체 등에서 나온 나이 든 엘프를 경매로 판매하는 시장으로, 가격이 아주 저렴하게 형성되는 터라 연인을 구하려는 일반인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 덕분에 경매에 나온 엘프들 중 많은 수가 꿈에 그리던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무슨 뜻인지 알았지? 넌 이제 몇 달만 기다리면 주인을 모시고 싶어 하는 네 꿈이 이루진다. 그러니 이번 트레이드 건은 그만 여기서 포기해라.”
빈센트가 자신을 위해 이렇듯 애를 써준 점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주인을 모시고자 하는 그 꿈은 바로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바로 범석이 자신의 주인으로 자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님. 이렇게 신경 써 주시니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감독님께서 곤란함을 무릅쓰시면서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으세요.”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주인을 섬기는 게 싫다는 말이냐?”
“아니오. 범석님께서 제 주인님이 되어 주신다고 했어요.”
그 말에 놀란 눈을 한 빈센트가 엄지를 들어 응접실 문 쪽을 가리켰다.
“방금 나간 그 놈팽이 말이냐?”
“네. 그 분요.”
빈센트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참 말인지 미심쩍었기 때문이다.
“아까 그놈은 프로검투사팀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주식회사 형식으로 만들 테고, 펀딩으로 자금을 모우기 위해 인지도가 높은 너를 팀의 자산으로 삼으려고 할 텐데.”
“그건 불가능하데요.”
“불가능해? 뭐가 불가능하다는 게냐? 우리 팀은 물론 다른 프로 검투사 팀이나 다른 스포츠 팀도 모두 그런 방식으로 팀을 운영하고 있어.”
“하지만 자기는 고결한 성자가 아니라서 그럴 수 없다고 했어요. 말로는 자신의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하렘 팀을 만든다고 그러시던데요.”
빈센트가 놀란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정말 그렇다면 참으로 이상적인 팀이었다. 엘프로서는 주인을 모실 수 있어 행복하고, 팀은 소속 검투사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을 받으니 전력향상에 크게 도움이 됐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문제 하나가 있었다. 팀에서 소용이 다하거나 필요 없는 엘프를 처지 곤란하다는 점이다. 일반 팀 같은 경우에는 판매를 해 자금을 충당하겠지만 범석이 말한 팀은 그게 불가능했다. 주종의식을 맺은 엘프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주인과 영영 이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트레이드를 해올 수는 있어도 트레이드를 보낼 수는 없을 텐데. 팀에서 쓸모를 다한 엘프를 어떻게 해결한다고 하더냐?”
“코치로 활용하거나, 현역 검투사의 매니저. 그도 아니면 청소를 시키거나 경비, 식순이로 쓰면 된다고 하던데요.”
빈센트가 피식하고 웃었다. 딴에는 프로검투사를 지내 프라이드가 강할 엘프들을 청소부나 식순이로 활용한다니 제법 웃긴 것이다. 자신의 팀 엘프라면 크게 반발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받드는 존재들. 주인만 모실 수 있다면 그딴 자존심쯤은 얼마든지 휴지통에 버리고 기꺼운 마음으로 빗자루와 식칼을 들 터였다.
빈센트가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다름 아닌 수 년 전에 구매한 한 엘프에 대한 내용이었다.
오스칼. 자신이 팀에 강력히 주장해 영입할 만큼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엘프였다. 이에 보육시설에서 겨우 말과 글을 배울 때인 3년 전. 800만 크랑의 거금을 들여 샀고, 전담코치를 보내 영재교육까지 시켰다. 그런데 작년 팀에 참가하자마자 연달아 큰 사건 사고를 터트리며 골칫덩어리로 전락해 버렸다.
상대편 검투사와 싸우라고 시합에 내보내면 어느새 관중석에 튀어가 관객의 멱살을 잡았고, 밤에는 몰래 유흥가에 가서 술을 퍼먹으며 주객들과 주먹다짐을 했다. 또 팀 내 다른 검투사들과의 불화는 일반사고, 언젠가는 팀의 법인카드를 훔쳐 도박장에 가서 도박을 하다 걸린 적도 있었다.
덕분에 그녀를 극구 영입하자고 건의했던 빈센트는 곤란한 지경에 빠져들었다. 물론 아마추어리그까지 떨어진 팀을 13년 만에 센트롤 리그를 바라보는 강팀으로 성장시켰다는 공로 때문에 경질위기에 처하지는 않았지만, 한시바삐 오스칼을 처리하라는 행정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이런 팀이라면 그 아이도 제 기량을 다 발휘할 텐데.’
충성심이 강한 엘프가 그처럼 삐뚤어지는 이유는 단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 바로 주인을 모실 수 없다는 절망감이었다. 대게의 경우는 어느 정도 지나면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운명에 수긍하지만, 아주 간혹 정신력이 약한 엘프는 주인을 모시고 싶다는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오스칼처럼 어긋난 행동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를 볼 때 문제아 엘프를 올바르게 선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생각해볼 것도 없이 바로 주인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계통에서 어느 정도 일하다보면 그 방법이 무척 어려운 일임을 대번 알 수 있었다. 만약 그런 식으로 풀어주다가 보면, 이를 본 다른 멀쩡한 엘프들도 주인을 만나기 위해 똑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일으키려고 할 것이 자명한 탓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해당 팀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 테고, 끝내는 해체를 해야 하는 사태도 발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팀에서 계속 보유하고 있으면서 야생마 길들이듯이 굴복을 시키던지, 아니면 정신병을 핑계로 일부 정신치료센터에다 감금시키고 있었다.
현재 소속팀에서 빈센트에게 원하는 방식이 바로 후자였다. 그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방법으로, 만약 그렇게 했다가는 그 아이는 수십 년을 철창 안에서 살아야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뜻밖에 좋은 해결방법이 등장했다. 바로 범석이란 자가 만들 팀에 파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주인을 모실 수 있게 되고 결국에는 엘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착실한 삶을 살아갈 것이 분명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로서, 범석은 재능 넘치는 검투사를 얻게 되어 좋고, 자신은 얼마간의 이적자금과 과거 그녀를 선택한 것이 옳은 판단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생각을 모두 마친 빈센트가 서서히 감았던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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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또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