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162
164화
해가 중천으로 뜬 정오 무렵이었다. 그 화사한 시간. 오전 훈련을 마치고 식당으로 온 범석이 철제식판을 든 채로 잠념에 빠져 있었다. 그 앞으로 줄이 텅 빈터라 뒷줄에 소속 엘프검투사들이 앞질러 오늘의 메뉴인 햄스테이크와 빵을 주섬주섬 주워담고 있었지만, 그는 인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멍한 자세로 서 있었다.
레인보우그룹의 위기. 그리고 만삭에 가까운 몸을 하고 은행마다 돌아다니며, 무릎 꿇고 사정하는 글로리아의 처량한 모습. 이 모두가 가슴속 한 편을 억누르고 있음에도 그로서는 딱히 어떻게 도와줄 방도가 없었다. 자신들이 큰 무리를 하면서까지 11억 크랑을 모았지만, 겨우 한 달을 버틸 자금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회사가 망할 것이라고 기정사실화한 글로리아는 그 돈을 받지 않고 홀로 이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고 있었다.
“주인님. 앞줄이 비었어요.”
레이미의 말에 범석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아까까지 길게 늘어서 있던 줄이 이제 자신 휘하의 엘프들만이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는 황급히 앞으로 걸어가 샐러드와 과일만을 집어든 채로 멀리 보이는 빈 탁자로 걸어갔다. 도저히 입맛이 없어, 빵과 스테이크는 입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뒤따라온 레이미가 범석의 옆에 앉고는 다소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오후에도 강도 높은 훈련을 수행해야 하는데, 주인인 그가 빈약한 식단을 골라왔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그것으로 돼요?”
사과를 손에 쥐었다가 다시 내려놓은 범석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입맛이 없어서일 뿐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여전히 신경이 쓰였지만, 레이미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항시 함께 생활하는 그녀가 근래에 범석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네. 알았어요. 대신에 저녁때는 푸짐하게 식사하셔야 해요? 제가 주인님이 좋아하시는 불고기를 해 드릴게요.”
“아니. 오늘 오후에는 어디 갈 데가 있어서 힘들겠다.”
“어디를 가시게요?”
“음. 세리에시티.”
짧게 대답한 그가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이 세계에는 흔하지 않은 종이재질로 된 명함으로, 전에 오사하에서 만난 윌킨스금융지주사의 회장인 윌킨스가 전해준 것이었다. 범석은 식사를 마치는 대로 렉스터와 함께 윌킨스금융지주의 본사가 있는 세리에시티로 갈 참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 할배가 그 많은 돈을 꿔줄까?’
범석과 윌킨스회장 간의 인연이라고는 고작 야외식사 한 번과 훈련캠프를 짓는 데 필요한 8,000만 크랑을 대출받을 때 전화 한 통 건일 뿐이었다. 이런 인연을 빌미로 찾아가 거금을 빌려달라고 말하기가 겸연쩍었다. 게다가 대화해 봤을 때 윌킨스는 참으로 계산적이고 돈에 관련해서는 냉정한 면모를 보이는 인사처럼 느껴졌다. LHN이라는 거대 금융사와 척을 지려는 위험을 감수하려 할 지 의문이었다.
‘하는 수 없지. 지금은 기댈 사람이 그 노친네밖에 없으니까.’
범석이 다시 사과를 집어들어 우적우적 씹은 후, 억지로 목 안으로 넘겼다. 세리에시티까지는 머니, 빨리 식사를 마친 후 떠나야 했다. 약속시각이 오후 3시인지라 아론을 타고 간다고 해도 그다지 시간이 남아돌지 않았다.
사과를 모두 먹은 그가 샐러드를 수저로 퍼서 먹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가볼 테니까. 오후 훈련 착실히 수행해라.”
식당을 떠나간 범석은 아론이 있는 훈련캠프 내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간을 살펴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듯 주변을 서성거렸다. 얼마 후 빠르게 날아온 플라잉 카 한 대에서 급히 렉스터가 내려 그에게 뛰어왔다.
“범석아. 많이 기다렸냐?”
“아닙니다. 자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아론에 탑승한 범석과 렉스터가 나란히 앉은 자세에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글로리아님은?”
“글로리아님께는 연락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렉스터가 머리 위로 의문표시를 그려넣었다. 오늘 찾아갈 윌킨스는 전세계 금융계열 2위에 올라서 있는 윌킨스금융지주의 회장이었고, 레인보우그룹의 채권 12%를 소유하고 있는 채권자였다. 그가 돕고자 한다면 레인보우그룹은 기사회생할 수 있을 터, 글로리아를 데려가지 않음에 의문이 들었다. 당사자가 없다면 자칫 성의 없는 방문으로 비칠 수 있었다.
“왜? 글로리아님이 없으면 그쪽에서 우리가 급한지 알겠냐?”
“상관없습니다. 윌킨스회장님은 상대가 사정이 급하다는 이유로 자금을 선뜻 내어줄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만남도 3년간 무료로 서브 스폰서로 지정해준다고 해서야 겨우 성사되었습니다. 그것도 단 10분요.”
렉스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3년간 프로검투팀의 스폰서가 되기 위해서는 적게 잡아도 수백만 크랑이 들어갔다. 10분 대화로 이 같은 돈을 꿀꺽하다니, 윌킨스회장의 이해타산적인 점이 자못 걱정이 들었다.
“야. 전에 식사도 같이 했다면서? 그래도 딴에는 친분이 있는 사람한테 너무한 것 아냐?”
“원래 그분 성격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식사라야 봐야 그저 도시락을 같이 까먹는 수준이었을 뿐이었으니까요.”
“야. 그게 더 무섭지. 아무리 으리으리한 식당에서 같이 밥 먹어도 업무상 만나는 사람과 사이좋게 공원에서 같이 도시락을 까먹는 사이가 같을 수 있겠냐?”
딴에는 그리 보였지만, 범석이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렇지만, 윌킨스회장님은 돈에 관련해서는 전후에 구별이 없습니다.”
“그래? 아주 꽉 막힌 인사라는 얘기군.”
“뭐. 깐깐한 노친네들야 다 그렇죠. 뭐.”
“그나저나 나는 글로리아 회장과 동행하지 않는 게 여전히 걱정된다. 네 말이 맞는다고 해도 사실 옆에 없는 것보다야 낫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글로리아님이 또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전에 괜히 바람만 넣어다가, 지금 미안해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입니다.”
렉스터가 좌석에 등을 바짝 기대고는 팔짱을 꼈다.
“흑사회의 일 말이야?”
입을 다신 범석이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렸다.
“쩝. 뭐. 그렇죠.”
“하여간 너도 참 대단하다. 그런 거물들과도 연이 있고 말이야. 나도 딴에는 발이 넓다고 자랑하고 다녔는데, 그 얘기를 듣고 요새는 입 다물고 다닌다. 쪽 팔려서 말이야.”
“그럼 뭐합니까? 도움이 안 되는데요.”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LHN이 작정하고 나섰으니, 그들로서도 껄끄럽겠지.”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던 범석이 얹잖은 표정을 지었다. 이해는 가는 일이지만, 자신이 정작 필요로 할 때 꼬리를 내리는 흑사회가 섭섭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제가 그들에게 해준 것이 얼마인데요. 좀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발을 빼니 기분이 좀 나쁩니다.”
“뭐. 그래도 내부 현금자산을 외부로 빼돌리는데, 협조해준다고 했다며? 그 정도면 제법 신경을 써준 거지.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글로리아님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어차피 망할 회사 빨리 접고, 훗날을 대비해 뒷주머니를 차라는 건데 왜 그걸 안 하겠다는 거냐?”
“으음.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죠. 따르던 사원들도 눈에 밟히고, 청춘을 바쳐 일궈온 기업인데, 허무하게 문을 닫게 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았을 테지요. 그리고 뒷주머니를 차는 일은 도리에 어긋나고 불법적인 일이니, 양심에 가책을 느꼈을 수도 있고요.”
렉스터가 바로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흥. 양심의 가책? 지금이 그걸 느낄 때냐?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지금 레인보우그룹이 무너지면, 채권단은 빚잔치를 통해 큰돈을 번다고. 그 많은 빌딩과 호텔, 오피스텔을 거의 반값으로 차지하니까 말이야. 그런데 보유한 현금자산까지 그들 입속에 처넣자고? 나 같으면 억울해서라도 그렇게 못 해.”
“하지만, 경매를 통해 채무를 갚고 남는 자금은 주주들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상당수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글로리아님도 제법 건질 수 있고요.”
“훗. 채권단이 그걸 용납할 것 같아? 지금까지 부도난 회사의 자산을 채권단이 매각한 후, 주주들에게까지 자금이 돌아간 예가 거의 없었다. 특히나 이번에는 더 그래. 야료를 부려 중간에 다 가로챌 것이 너무 빤하다고. 지금 채권단들이 짜고 고스톱을 치는 이유가 도대체 뭐겠냐? 실질적으로 돈 때문이 아니겠냐! 돈!”
듣고 보니, 수긍이 가는 바였다. LHN이 다른 은행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할 터. 그 중 레인보우그룹의 자산이 포함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는 하겠네요.”
“뭐가 그렇기는 하겠네요냐! 알면 글로리아님을 설득해야 할 것 아니야? 솔직히 내 생각에는 윌킨스회장을 만나는 것보다야, 글로리아님이 흑사회의 말대로 하도록 설득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아니 왜요?”
“왜긴! 윌킨스은행이 레인보우그룹의 채권 12%를 가지고 있잖아. 그들도 작당했을 가능성이 무척 많다고. 그런데 회장이라는 작자가 얼씨구나 너를 도와주겠냐?”
아주 틀린 소리가 아니었기에, 범석으로서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전에 만나본 윌킨스회장은 전혀 그럴 사람 같지는 않았다. 뭔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였다고나 할까? 어떠한 경우라도 이해득실을 따지기는 하지만, 거시적인 안목으로 사물을 바라볼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래도 믿어봐야죠. 지금 기댈 사람은 그분밖에 없으니까요.”
“휴~ 좋다. 하여간 이번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우리 같이 글로리아님을 설득하는 작업에 들어가기로 하자. 그대로 폭삭 망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범석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암만 생각해봐도 렉스터가 말하는 대로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탓이다. 자기 회사에 애정을 갖고 거느리는 사원들을 아끼는 마음도 좋지만, 일단 그녀가 살고 봐야 했다. 솔직히 현금자산만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리마시티 중심가에 그럴싸한 빌딩을 짓고 새롭게 시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면 레인보우그룹의 간판을 다시 올릴 수 있고, 적지만 해고될 사원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줄 수 있었다.
“네. 그래 봐야죠. 그편이 글로리아님에게 좋으니까요.”
“그래 잘 생각했다. 자. 그럼 나는 도착할 때까지 눈 좀 붙이고 있을 테니, 이따가 깨워라.”
렉스터가 의자의 등받이를 뒤로 쭉 밀고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어제 새벽까지 술을 먹고 뻗은 터라, 피곤이 몰려왔던 탓이다. 이에 피식 웃은 범석이 같은 자세로 잠을 청했다. 왠지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차량에만 탑승하면 잠이 쏟아졌다.
– 주인님. 세리에 시티에 도착했어요. 내리실 준비를 하세요.
아론의 콜에 범석이 눈을 번쩍 뜨고는 창 밖을 내다봤다. 아래에는 우후죽순 솟아 있는 고층 빌딩과 넓게 펼쳐져 있는 도심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세리에시티의 금융가라고 생각한 범석이 입가에 침까지 흘리며 퍼질러 자는 렉스터를 급히 깨웠다.
“경감님. 도착했습니다.”
슬그머니 눈을 뜬 렉스터가 등받이를 바로 세우며 말했다.
“으음. 벌써? 그래 지금 몇 시야?”
전면의 전자시계를 본 범석이 대답했다.
“2시 35분입니다.”
“그래? 이거 아슬아슬하겠군.”
“네. 그러니 도착하자마자 좀 서둘러서 가야 합니다.”
곧 아론이 윌킨스지주금융 본사 빌딩 주차장에 내려섰다. 안착으로 인한 작은 진동이 몸으로 느껴지자 렉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가지.”
범석과 렉스터가 급한 걸음으로 빌딩 정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안내데스크를 찾아 회장실까지 향하는 길을 문의했다.
안내데스크의 직원들은 무척 친절했다. 자사 회장님과 면담약속을 한 손님이 찾아왔으니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직원 한 명이 직접 따라붙어 길을 안내했고, 범석은 길을 찾기 위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윌킨스 회장을 설득할 시간은 고작 10여 분밖에 없기에 지각이라도 하는 날이면 큰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끼이익.
“이쪽입니다.”
짙은 경첩 울리는 소리와 함께, 회장실 문이 열렸다. 범석은 안내원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마중 나온 한 남성 비서를 바라봤다.
“안녕하십니까? 오범석이라고 합니다. 오늘 윌킨스회장님을 뵙기로 했습니다만…….”
“아. 범석님이시군요. 그렇지 않아도 언제쯤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 따라오시지요.”
비서를 따라 작게 난 복도를 걸은 범석과 렉스터가, 원목으로 짜인 목재 문 앞에 섰다.
“자. 여기입니다. 들어가시지요.”
서서히 열리는 문소리에 범석이 길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레인보우그룹을 죽고 사느냐가 결정되는 마지막 기회이니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부터 설득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윌킨스라는 노회한 여우였다.
또르르르. 툭. 딸캉.
윌킨스는 원목 골프연습매트가 깔아놓은 바닥에 골프공을 연방 굴리며 골프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뒤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퍼터를 한쪽 벽면에 세워두고는 반갑게 맞이했다.
“범석군. 어서 오게. 이거 오사하에서 보고 나서 거의 이년이 다되어 가지?”
“네. 그렇습니다.”
“그래. 팀은 운영은 잘 되어가고? 갓즈나이츠라고 했던가?”
“네. 현재 에이번드리그에서 4위에 올라 있습니다. 현재 2위와 승점 1점 차이고요.”
윌킨스가 심히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사하의 투기장 경기에서 범석의 검술실력이 비범하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애들 소꿉놀이와 같았던 아마추어팀이 그새 성장해 리그 2위 자리를 노린다니 무척 놀라웠다.
“이거 대단한걸.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어. 허허허. 이거 전에 8,000만 크랑을 대출해준 일이 잘한 일 같아 기쁘이. 사실 일단 약속을 해서 꿔주기는 했지만, 약간은 불안했거든.”
“저도 그 돈을 꾸고 많이 불안했습니다. 통장에서 이자가 빠져나가는데, 살벌하더라고요.”
윌킨스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원래 돈이라는 것이 다 그런 걸세. 호주머니에 있는 100만 크랑의 돈은 하루에도 써버릴 수 있는 작은 금액이지만, 빚 100만 크랑은 사람의 목숨도 앗아갈 수 있는 큰돈이지. 그래서 돈이 무서운걸세.”
“하지만, 그 빚으로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으니, 매력적이기도 하죠. 가령 오늘처럼 말입니다.”
윌킨스가 삐쭉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제법 말을 받아치는 본새가 그럴싸했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날씨가 본격적으로 쌀쌀해 집니다. 바람도 거세고, 제법 초겨울 날씨가 이어집니다. 모두들 감기 조심하시고요. 차근차근 월동 준비도 하십시오. 특히나 옆구리 난로 하나쯤은 필시……. ㅋㅋㅋㅋ그럼 모두들 좋은 보내시고요. 전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