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165
167화
“범석아. 우리 차분히 다시 한 번 생각하자.”
“여기서 더 생각하고 자시고 어디에 있습니까!”
휴게실 자판기 앞에 선 렉스터가 사정하듯 말했다.
“한 번 우리의 상황을 살펴보자는 거다. 지금 레인보우그룹을 치는 얘들이 크게 세 조직이다. 하나는 경제인단체라는 곳이고, 두 번째는 LHN이야. 그리고 나머지 세 번째는 흑사회이고. 문제는 세 조직 모두 우리가 손댈 만한 단체가 아니라는 점이야. 뭣 모르고 나섰다가는 우리는 그냥 입김 한 방에 날아가게 돼.”
범석이 날카로운 눈매로 그를 쏘아봤다.
“그래서 저보고 참으라는 겁니까!”
“참으라는 뜻이 아니야. 일단 일의 경중을 따져보자는 거지.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뭐야?”
“복수요.”
얼굴을 쓸어내린 렉스터가 조용히 말했다.
“야. 글로리아님부터 도와야 할 것 아니야. 그리고 놈들의 의도가 레인보우그룹 해체니, 여기부터 해결을 봐야지. 그럼 자연스럽게 복수도 하게 되잖아.”
맞는 얘기이지만, 왠지 한참 모자란 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범석이 대답했다.
“물론. 레인보우그룹 사태를 해결해야겠죠. 하지만, 이 일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다면 그렇게 해도 좋은데, 일단 우리가 힘을 키울 때까지 기다리자. 지금은 레인보우그룹에만 매달리기도 벅 차.”
“아뇨.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긴. 뭘 없어. 넘쳐나는 것이 시간이고만. 아직 우린 젊잖아.”
그래서 더 문제였다. 범석은 젊은 혈기를 억제할 만큼 이성적이지 못했다.
“지금 못하면 나중에도 못합니다.”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본 렉스터가 말했다.
“좋아. 그렇다 치고. 이번 일 어떻게 처리할 거야? LHN의 발바르회장을 만나야 하는데, 우리는 그럴 능력이 안돼. 분명히 흑사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우리가 적의를 표출하면 얼씨구나 도와주겠느냐고? 일단 지금은 모르는 척을 하며 이용해야 해.”
“흥. 놈들이 레인보우사태에 관련해 깊게 관여하고 있는데, 저희에게 협조하겠습니까?”
“물론 솔직히 말한다면 안 하겠지. 하지만, 다른 건수를 만들어 가면 되잖아. 설령 레퍼드씨의 회사나 나탈리의 LKS방송을 키워나가기 위해 펀딩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지. 그리고 윌킨스 회장은 수단과 방법을 따지지 않는다고 했을뿐더러, 금액에 대한 내용도 언급이 없었어. 발바르회장과의 대화 도중에 간단한 속임수를 써 지갑 속의 돈을 꺼내게 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일이야. 절대 흑사회는 우리가 레인보우그룹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거야.”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직 흑사회는 자신이 앙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 다른 연유를 들이댄다면 충분히 도움을 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범석은 더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마구 흔들어댔다.
“아니요. 일단 도움을 받게 되면 마음이 약해집니다. 그럼 흑사회를 칠 때, 다소 인정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저는 철저한 응징을 위해, 힘이 들더라도 놈들을 의지하지 않을 겁니다.”
“야! 그럼 발바르회장의 지갑을 어떻게 열거야!”
고민할 것도 없이 범석이 바로 입을 열었다.
“아주 손쉽게 열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삥 뜯을 겁니다. LHN은 이번 사건의 원흉. 그 수장에게 머리를 숙이며, 구걸하기는 싫습니다.”
얼굴을 새하얗게 만든 렉스터가 다급히 말했다.
“너, 너. 지금 장난해? 천하의 발바르회장을 삥 뜯는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상관없습니다. 윌킨스회장님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으니까요.”
“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 너 잠시 잊었나 본데. 나 경찰이야. 그게 내 앞에서 할 말이냐고? 그리고 발바르회장에게 그런 일이 발생하면, 이 주변 모든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너 잡으러 다닐 거다.”
범석이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 그래서 부탁인데요. 경감님께서 안 잡히는 방법 좀 알려주십시오. 경험이 많은 테니, 수사망을 빠져나가는 방법도 잘 아실 것 아닙니까?”
“아 이 자식 보소. 아예 나까지 공범으로 만들려고 하네. 내가 아무리 비리 경찰이라도 강도질까지는 안 해.”
“글로리아님을 위해서입니다.”
그 말에 농담이 아님을 완전히 깨달은 렉스터가 그의 멱살을 부여잡고 경고했다.
“야. 발바르회장 같은 거물급 인사들에게 얼마나 많은 경호원이 따라붙는 줄이나 알아? 아마 접근도 못 해보고 잡힐걸. 게다가 아까 윌킨스회장님이 하신 말씀 못 들었어? 발바르회장은 최근 LHN본사 빌딩에 거주지역을 만들어, 그곳에 두문불출한다고 말이야. 설상가상으로 철저한 경비시스템에 보호되고 있다는 뜻이야. 도저히 불가능해!”
“불가능하고 아니고는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입니다.”
“문제는 해보다 안 되면 끝장이니까 그렇지! 이놈아.”
범석이 하등 상관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위험하면 째면 됩니다. 설마 제가 경비원들 따위에게 잡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순간 렉스터의 눈에 갈등 어린 빛이 감돌았다. 범석의 실력이라면 도망 정도는 쉽게 칠 수도 있다고 생각된 것이다. 유리창이 없는 빌딩은 없으니, 원한다면 언제든지 깨고 밖으로 튀어 나갈 수 있었다. 물론 무작정 뛰쳐나간다면 추락사가 자명하지만, 낙하산이나 추진장치가 달린 고가의 슈트를 착용하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위험하기는 매한가지. 절대 찬성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안 돼. 왜 편한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가려는 거야. 난 절대 찬성할 수 없어.”
“그럼 저 혼자 합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렉스터가 이마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야. 도대체 너 왜 그래? 우리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충분히 이성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싫은 놈들에게 머리 숙이지 않고, 레인보우그룹을 구하는 방법은 이뿐입니다.”
입술을 잘끈 깨어 물은 렉스터가 그의 손목을 붙잡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근무시간이라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다지만, 지금 늘어놓을 내용은 아무 곳에서나 떠버릴 만큼 가벼운 얘기가 아니었다. 그는 곧 주차장에 안착해 있는 아론으로 찾아가 그 안에 탑승하고는 조용히 말했다.
“정말 할 거냐?”
“네. 물론입니다.”
렉스터가 힘없이 근처 좌석에 철퍼덕 앉고는 차분히 범석을 쳐다봤다. 이만큼 설득했음에도 말을 들어 먹지 않는다면, 기어이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일은 당장에 잡아가던지, 훗날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뒤에서 지원하는 일이었다.
렉스터는 결국 후자를 선택하게 되었다. 인정상 자신의 손으로 그를 잡을 수는 없었다.
“휴~ 그럼 대충 조언을 해주지.”
“그럼 도와주시는 겁니까?”
고개를 주억거린 그가 범석을 향해 손짓했다.
“대신 네가 잡히면 나는 모르는 일이다.”
“당연합니다. 경감님까지 끌고 들어갈 만큼 염치없지는 않습니다.”
“좋아. 그럼 말해줄 테니, 똑똑히 들어. 이번 일을 벌여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가 가장 주안점을 둬야 할 것은 바로 이슈를 최대한 크게 키우는 거다.”
“이슈를 키우다뇨? 조용히 처리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렉스터가 머리를 천천히 양옆으로 저어댔다.
“아니. 그럼 경찰들도 조용히 너를 끝까지 잡으려 들 거다. 하지만, 전 국민이 알 정도로 이슈가 커지면, 경찰들은 위신을 위해 24시간 대거의 인력을 투입해 전력투구하게 돼. 이때 네가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다.”
“아니 왜요?”
“아무리 거대한 조직력을 갖춘 경찰이라도 그 정도 인력을 장시간 동안 한 사건에 투입할 수 없거든. 게다가 언론의 이목까지 집중되니, 서두르게 되고, 그러다 보면 헛다리를 짚기 십상이다. 즉 다른 자를 범인으로 오인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지.”
범석이 이해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렇다고 증거도 없이 멀쩡한 사람으로 범인으로 몰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증거와 자백만 있으면 꼼짝없이 넘어가게 되어 있어. 잘 생각해봐라.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한 범인이 자수했는데, 그 집안에서 범행에 쓰인 도구가 고스란히 나오는 거야. 여기서 경찰이 그를 누구라고 여기겠냐?”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고 판단한 범석이 바로 대답했다.
“뭐. 범인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래. 바로 그거야. 대신 잡혀들어갈 자만 있다면, 현행범으로 잡히지 않는 이상 너는 무사할 수 있다는 뜻이지.”
“그럼 죄를 뒤집어씌울 누군가를 매수하자는 얘기입니까?”
“아니. 그럼 놈이 추궁에 못 이겨 실토해버리거나, 매수한 자금을 추적당하는 날이면 끝장이다. 어떻게든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자가 자수하도록 만들어야지.”
범석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참나. 세상천지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남의 죄를 뒤집어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렉스터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새기며 말했다.
“그래서 이슈를 크게 키우자는 거야. 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참 미친놈 많다. 범 세계적인 사건만 한 번 언론에서 터져 나오면 경찰서로 찾아와 자기가 저질렀다고 떠벌리는 놈들이 족히 수천에서 수만이 나온다. 게다가 매번 그놈이 그놈이여. 오죽했으면 우리 경찰들이 수사의 혼선을 피하고자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하겠냐?”
“정말입니까?”
“웃기는 얘기지만, 사실이다. 우리는 이 중 하나를 점찍어 뒤집어씌우면 돼. 문제는 어떻게 이슈를 키우느냐다.”
범석이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어떻게 키워야 할까요.”
“이도 어쩌면 간단하다. 네가 발바르회장을 삥 뜯는 장면을 녹화해, 전체 방송국에 돌리면 되는 거지. 생각해봐라. 세계 최대 은행의 총수가 삥을 뜯기는데, 왜 뉴스거리가 안되겠냐? 아마 언론사마다 대서특필할 거다.”
범석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확실히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뭐 그렇기는 하겠습니다. 그런데 촬영이야 초소형 카메라가 있으니 가능하겠지만, 어떤 방식으로 녹화된 장면을 방송사에 보냅니까? 전송 시 해당 IP가 기록되기에 대번 걸리게 됩니다.”
“괜찮다. 이 문제를 해결해줄 인물 하나를 내가 섭외해오면 되니까.”
“그래요? 누구입니까?”
“암영이라는 활동명을 사용하는 세계적인 크래커인데, 실력이 아주 끝내준다.”
크래커라면 컴퓨터를 이용해 네트워크상에서 범죄를 일으키는 해커를 의미했다. 대게 자신의 기술능력 과시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더러는 돈을 노리거나 특정 회사에 원한을 품고 해킹하는 자들도 있었다.
“어느 정도인데요?”
“못 뚫는 방화벽이 거의 없을 정도다. 게다가 얼마나 용의주도한 지 한 번도 잡힌 적이 없었다.”
“아. 그래요? 그런데 경감님이 그자를 아는 겁니까?”
“그 애가 바로 리마시티에 살거든. 그래서 암영으로 의심되는 해킹사건이 터져 나올 때마다 연방경찰청에서 업무지시를 받아 우리 경찰서에서 항시 감시했었는데, 언제나 증거가 없어 잡지 못했어.”
렉스터 말을 들은 범석이 얼굴에 모호한 기색을 떠올랐다.
“참나. 직접 감시를 했는데, 잡히지 않을 정도면 혹시 암영이라는 크래커가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 확실해. 나한테는 걸렸거든.”
하며 렉스터가 암영을 잡은 실화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삼 년 전쯤의 일이었다. 당시 업계순위 3위에 해당하는 TNB은행이 정체불명의 해커에게 노골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여기에 암영도 그 용의선상에 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연방경찰청은 리마시티 모든 경찰서에 그자에 대해 감시지시를 했고, 사이버경찰대와 수사과 형사들이 24시간 풀가동하며 잠복근무 및 네트워킹 감시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암영에게서는 수상한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 자주 여동생이 놀러 온 적은 있었지만, 그자는 두문불출 외출을 삼갔고,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네트워크 신호도 그저 평범한 사이트를 검색하는 수준일 뿐 특별히 해킹을 시도한다는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다시 TNB은행이 해킹공격을 받았고, 암영은 아니라고 판명이 나 리마경찰서에 걸렸던 비상근무는 해제되었다.
그런데 렉스터는 왠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해킹이 있던 날에도 여동생이 잠시 찾아왔음을 떠올랐던 탓이다. 혹시나 오빠의 사주를 받고 그녀가 범행을 저지를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목표를 바꿔 잠복근무에 들어갔다. 하지만, 해킹의 해자도 모르는 그가 암영의 여동생이 해킹을 하는 것인지 게임을 하는 것인지, 멀리서 지켜봐서는 전혀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과거 조사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여기서 한 가지 단서를 발견했다.
그자와 여동생은 과거 일찍 아버지를 잃고 한 정부시설에서 자랐는데, 기록과 사진을 제외하고는 그의 존재가 너무도 모호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여동생만 알뿐, 암영에 대해서 기억을 떠올리는 자가 없었다.
이에 다시 한 번 미행에 들어갔고, 기어이 꼬리를 잡고 말았다. 암영의 여동생이 회사의 업무차 타지로 출장을 간 적이 있는데, 잠시 머물렀던 장소 근처 가정집이, 이어지는 해킹 공격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서, 설마 그럼 그 여동생이?”
“그렇지. 그 여동생이 바로 범인이었어. 지금까지 암영으로 의심받던 오빠는 네트워크상으로 만들어진 가상인물이었고.”
“그래서 잡으셨습니까?”
렉스터가 바로 부정을 표했다.
“왜 잡냐? 두고두고 써먹어도 모자랄 판에. 체포하지 않는 조건으로 종종 필요하면 도움을 받고 있지.”
여자라는 사실에 관심이 간 범석이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쁩니까?”
“글쎄다. 꽤 예쁘기는 하지만, 인간 여자가 예뻐 봐야 무슨 소용이냐? 능력만 좋으면 되지.”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만연해진 범석이 렉스터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언제 소개시켜 주시렵니까?”
“으음. 뭐. 이번 일로 여러 가지 논의해야 할 점이 있으니, 조만간 만나게 해주지.”
“후후.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네가 지금까지 내게 해준 것이 얼마인데. 하여간 이번 일은 진짜 조심해야 하니까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렉스터는 그의 은혜라는 의미를 착각하고 있었다. 지금 범석의 관심사는 바로 암영이라는 예쁜 여인이었다. 하지만, 하등 상관없는 일, 이들은 다시 리마시티로 돌아가는 내내, 이번 발바르회장 습격작전에 대해 논의를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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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하루 되십시오. 전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