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181
183화
협상 테이블 배정인이 곤혹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원래 검투사와 프로팀관계자 간의 계약협상은 1대 1로 시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젤소미나와 함께 온 범석이 단체협상을 제의하며, 테이블을 하나만 원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와 계약을 원하는 팀은 총 3팀. 이들이 단체로 협상을 벌였다가는 자연스레 경쟁이 붙게 되고 영입비용은 상승하게 되어 있었다.
“저, 정말 괜찮으신가요?”
무뚝뚝한 표정을 지은 범석이 바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물론입니다.”
배정인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카운터 벽에 걸려 있는 전자열쇠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자신들이 손해날 일이 없으니, 이들의 부탁을 들어줘도 하등 문제가 없었다.
“여기 302호실 열쇠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원하시면 다른 협상실도 배정해 드릴 테니, 언제든지 말씀 주십시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 범석이 열쇠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빈센트와 레베카를 바라보며 씽긋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3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가 앞장서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자, 빈센트가 급히 따라붙고는 귓속말을 던졌다.
“자네. 정말 단체협상으로 할 생각인겐가?”
“네. 물론입니다. 어차피 저희가 설정한 가격 대가 있으니, 특별히 경쟁으로 인한 연봉 상승은 없을 것 아닙니까?”
“하긴 그렇기야 하지만, 설마 무슨 꿍꿍이 수작이 있어서 이러는 것은 아니겠지?”
범석이 눈을 도르르 굴리고는 대답했다.
“제가 시간이 없어서 그럽니다. 사실 이번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한 이유가 바로 3일 후부터 시작될 승격 토너먼트에 투입시킬 검투사를 충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저로서는 될 수 있으면 단번에 협상을 끝내고 싶은 겁니다.”
“으음. 그게 가능한 얘긴가? 검투사단 갱신은 이적 기간 말미에만 가능한 터인데?”
“네. 그렇지만, 이번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영입한 검투사들은 상시 등록 대상이 됩니다.”
“오. 그런가? 그래서 자네가 이리 서두르는군.”
“후후. 네. 그러니 양해 부탁합니다.”
빈센트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재 갓즈나이츠는 범석이 부상을 당한 탓에, 전력이 크게 다운된 상태였다. 여기에 주력 검투사들의 숫자도 적어, 한 명이라도 더 능력 있는 검투사를 수혈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젤소미나가 팀 훈련을 받지는 못했지만, 본연의 실력이 뛰어나기에 프리롤 정도는 활용할 수 있었다.
“그렇군. 알겠네. 하지만, 과연 자네가 젤소미나를 영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아무리 자네팀이 급하더라도 나는 절대 그녀를 양보할 마음은 없으니까.”
“네. 그 점은 저도 알고 있고,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빨리 가서 협상을 시작하지. 자네를 위해 시간을 절약해줄 용의 정도는 있으니까 말이네.”
빈센트가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로 향하자, 범석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덩치가 큰 고래라도 그물에 걸리면 나룻배에 실려가는 법이었다. 그가 감독으로서 최고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 정보가 있는 한 단체협상에 들어가면 자신의 손아귀에서 놀게 되었다. 물론 개인면담을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협상순서의 전후에 따라 논파가 될 위험성이 있었다.
‘후후. 이로써 드래곤 나이츠는 젖혀놨고.’
그런데 이 전략으로 드래곤 나이츠를 협상 대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지만, 레베카에게 썩 괜찮은 협상 카드 하나를 던져줘야만 했다. 하지만, 33%의 확률보다 50%의 확률이 젤소미나를 영입할 가능성이 더 크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는 곧 모두와 함께 3층으로 올라가 협상실로 찾아갔다.
“자. 다들 이쪽으로 앉지.”
협상실은 1대 1을 기준으로 만들어졌기에 간신히 네 명이 앉을 자리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부로 들어올 수 있는 이는 당사자인 젤소미나와 범석, 빈센트, 레베카가 전부였다. 이에 에스더를 비롯한 팀 관계인사들은 휴게실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범석이 긴장한 채로 앉아 있는 젤소미나에게 나긋한 말투로 얘기했다.
“젤소미나. 마음을 편히 가져라. 그렇게 떨고 있으면 이번 협상이 네게 불리해져.”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다행히 세팀이 여전히 협상에 임하려 하고 있지만, 아까 테스트시합 당시 졸전을 펼치며 무능한 자신의 모습을 이들에게 보였었다. 과연 이 협상을 통해 원하는 연봉을 받아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죄, 죄송해요. 테스트시합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요.”
“테스트시합? 그 점이라면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네 선배니까 살짝 알려주는 것인데, 너는 훌륭히 네 솜씨를 뽐냈다. 즉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검투사라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는 얘기지.”
일방적으로 발리다가 처참하게 깨졌는데, 훌륭히 솜씨를 뽐냈다니? 젤소미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어떻게요?”
“네가 상대한 레베카와 라피네는 아무 데이터도 없는 상태라면 나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다.”
그녀의 얼굴이 순간 환해졌다. 범석은 당장 월드리그를 뛰어도 수준급의 활약을 할 수는 검투사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그가 버거워할 만한 상대라면, 자신이 패배해도 하등 이상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1,000만 크랑의 연봉을 충분히 얻어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 정말 제가 1,000만 크랑의 연봉을 받을 수 있나요?”
“글쎄다. 나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지만, 사실 갓 프로에 입문하는 자가 연봉 1,000만 크랑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원래 그 정도의 연봉의 받으려면, 다년간 프로리그 활동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가능한 일이거든.”
젤소미나가 다시금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여, 역시 그런 건가요…….”
그녀의 힘없는 모습에 마음에 약해진 범석이 연유를 묻기로 했다. 왜 이토록 1,000만 크랑의 연봉에 목을 매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나이가 적기에 앞으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네 선배다. 후배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큰돈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충분히 융통성을 발휘해줄 수 있지. 네가 그만큼 실력이 된다는 사실은 잘 아니까.”
그 말에 다시 고개를 들은 젤소미나가 갈등 어린 눈빛을 보였다. 인정에 호소하는 일이라 약간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잠시 머리를 숙이면, 남동생의 얼굴에 다시 웃음을 되찾아 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 매일 술과 마약에 찌든 무책임한 아버지를 만나, 하나뿐인 혈육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남동생과 함께 버려지게 되었다. 다행히 이 시대에는 사회구성원으로 자랄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기에, 훌륭한 시설의 보육기관에 보내지게 되었고, 지난날 부모 밑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편하게 생활해 나갈 수 있었다. 1인 1실의 주거공간과 언제든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습환경. 여기에 부모처럼 자신들을 따듯이 보살피는 보육 선생님에, 좋은 친구들까지. 이 시기를 살아가는 젤소미나는 자신들을 버린 아버지가 고맙게 생각될 정도로 행복했다. 그가 양육권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이런 호사를 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운은 작년쯤에 끝이 났다. 남동생이 불의의 플라잉카 사고를 당해버린 것이다. 다행히 운이 좋아 목숨은 건졌지만, 한쪽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전신마비까지 당해 지금 병원에서 몸져누워 있는 상태였다.
“아. 남동생이 건강을 되찾아주기 위해 신체 개조 시술이 필요하다는 뜻이지?”
“네.”
“그런데 신체 개조 시술은 의료보험도 적용되지 않는데다가 비용도 최소 6,000만 크랑 이상 들어가는 것으로 아는데. 고작 1,000만 크랑 가지고 가능하겠어?”
“하지만, 의료용으로 한해서는 정부에서 세금을 크게 감면해 주고 있기에, 1,500만 크랑이면 가능해요.”
그렇다면 당장에라도 치료할 수 있어 보였다. 1,000만 크랑의 연봉으로 다년간 계약을 맺으면 1,500만 크랑 정도의 계약금은 너끈히 받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계약금을 1,500만 크랑 정도로 맞춰준다면 만족하겠네?”
당연한 소리이기에 젤소미나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네. 물론이에요. 제가 이번에 신인 드래프트에 나온 목적이 바로 동생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니까요.”
“좋아. 그럼 5년 계약으로 연봉 500만 크랑에 계약금 1,700만 크랑을 줄 테니, 당장 사인할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빈센트가 일어나 버럭 소리쳤다. 범석이 젤소미나의 과거사 얘기를 들으며 얼렁뚱땅 채가려 하기 때문이다.
“자네. 지금 뭐하는 겐가!”
“뭐긴요. 후배가 사정이 좋지 않으니, 선배로서 도움을 주려는 것이지요. 하하하.”
“우리라고 그 정도 조건 못 들어줄까 봐서?”
범석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이거 괜히 단체협상으로 들어가자고 고집을 부렸나 후회가 들었다. 지금이 1대 1 이적협상이었다면 이번 제의에 그녀가 바로 사인을 했을 공산이 컸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됐다. 만약 순번에서 뒤로 밀려 먼저 빈센트나 레베카가 협상했다면 코빼기도 보지 못하고 그녀를 빼앗기는 사태를 맞이했을 수도 있었다. 지금 젤소미나는 동생의 치료비만 장만하면 바로 사인해버릴 기세였다.
“하하하. 그렇다면 한 번 제시해 보십시오. 드래곤 나이츠는 어떤 조건을 내걸 겁니까?”
젤소미나를 잠시 잠깐 유심히 바라본 빈센트가 입을 열었다.
“일단 조건은 나중에 얘기로 하고 젤소미나양에게 궁금한 점이 하나 있네.”
“네. 말씀해보세요.”
“보아하니, 자네 검술실력은 일반 학원스포츠계에서 나올만한 것이 아니네. 내 생각에는 분명히 어딘가에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검술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어디서 그런 소양을 닦은 겐가?”
별로 숨긴 내용이 아니기에 그녀가 바로 대답했다.
젤소미나가 부모로부터 버려지고 찾아간 보육시설 근처에는 기와로 된 지붕을 얹은 고풍스러운 저택이 하나 있었다. 당시 7살이었던 그녀는 이런 주택을 처음 봤기에 신기하게 여겨졌고, 이 집을 지나갈 무렵이면 항시 시선을 주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놀다가 그 집안으로 공이 넘어가는 일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몰래 남의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망설여졌지만, 공을 두고 보육센터로 돌아갈 수도 없는 얘기라 용기를 내 마침 열려 있던 목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그저 공만 가지고 나가려 했다. 그런데 널찍한 마당 너머에 있는 기와로 된 건물 안에서 연방 어른들의 고함이 터져 나왔고, 이를 궁금히 여긴 그녀는 몰래 기웃거리며 연유를 살폈다.
한지로 발라진 나무틀 문 너머에는 다름 아닌 한 중년 사내의 구령 아래 호구를 착용한 수십 명의 검사가 죽도를 휘두르는 장면이 보이고 있었다. 바로 이 건물이 검술도장이었던 것이다. 뭐 당시는 워낙 어렸던 터라 저 어른들이 무엇 때문에 저리 몽둥이를 허공에다 휘두르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땀이 바닥에 배도록 휘두르고 또 휘두르는 모습이 참으로 재미있어 보였다. 자신도 친구들과 재미있는 놀이를 할 때면 온몸이 땀에 젖도록 뛰어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몰래 구경하던 중, 마침 심부름을 하고 온 엘프 하나에게 그 모습이 딱 걸려버렸다. 어쩔 줄 몰랐던 그녀는 어린 마음에 손에 들고 있던 공을 떨어뜨리며 마구 울어 젖혔고, 도장 안은 한순간 난감함에 휩싸였다. 웬 꼬마 여자아이가 침입해와 소란을 피워대고 있으니, 어른들로서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에 도장주인 중년의 사내가 어르고 달랬고, 결국 조그마한 죽도를 하나 쥐여주고는 근처에서 놀게 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스승님께 검술을 배우게 됐어요.”
팔짱을 끼며 듣고 있던 빈센트가 질문을 툭 던졌다.
“그럼 그 도장주가 스승님이라 이거지?”
“네.”
“혹시 스승의 성함이 어떻게 되는지 아나?”
모를 리가 없던 젤소미나가 바로 대답했다.
“렘란트씨에요.”
그 말에 빈센트가 미간을 꿈틀거렸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던 탓이다. 그리고 과거 월드리그에서 활동했던 한 개조인간을 떠올리고는 다시금 물었다.
“혹시 블라스트 렘란트라는 분 아닌가?”
“네. 맞아요. 어떻게 아세요?”
“역시. 그랬군! 그분의 제자였어. 후후후. 역시나 뭔가가 다르다고 했지.”
이에 궁금했던 범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혹시 아시는 분입니까?”
“으음. 아주 잘 알고 있지. 썩 유명하지는 않으셨지만, 한 때 월드리그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신 검투사님일세.”
물끄러미 빈센트와 젤소미나를 번갈아 쳐다본 범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지금 당장 어느 정도 신체능력만 받쳐준다면, 월드리거로 거듭날 정도로 뛰어난 검술을 지니고 있었다. 별로 유명하지도 못한 월드리거가 13년 만에 이런 아이를 키워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분이 혹시 가르치는 소양이 원래부터 좋았습니까?”
“글쎄. 그건 직접 뵙지 못해서 나도 잘은 모르겠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분의 검술 솜씨는 역대 최강이었지. 한 예로 렘란트님은 신체능력이 에어리어리거 수준보다 못한데, 월드리그에서 흔적을 남길 만큼 활약을 하셨지.”
그 말에 놀란 범석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신체능력이 에어리어리거 수준보다 못하다면 평균 60대 이하. 이 수준이라면 자신도 월드리거와 맞붙어 승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렘란트라는 자가 장시간 동안 당당히 월드리거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수백 년간 실전을 통해 검술을 발전시키온 자신보다 뛰어난 검술실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그렇다면 저보다 기술적으로 뛰어나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으음. 그래서 말했지 않았나? 역대 최강이라고 말일세.”
“아니. 그분 나이가 몇 살인데요?”
“글쎄. 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90세 때 개조 시술을 받으셨다고 하셨으니, 지금은 160세 가까이쯤 되셨을 것일세.”
아무리 뇌의 수명이 다른 장기보다 수명이 길다지만, 징하게 오래 산 양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개조신체의 신체의 대부분 부위가 교체되지만, 기억과 언어중추를 관장하는 뇌 일부는 그대로 이식되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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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하루 보내시고요. 전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