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303
305화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8월 하순의 오전이었다. 종종 구름이 떠다니기는 하지만, 내리쬐는 땡볕을 막지 못하고 있었다.
갓즈나이츠의 훈련캠프. 경기가 없는 날이지만 소속 검투사들은 비지땀을 흘려가며 경기에 매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한가로이 나무그늘 아래 편안히 누워 궁상을 떠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범석이었다. 며칠 전 벌어진 리그 3차전 경기에서 자키드에게 패한 일 탓에, 훈련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곁에 자라나 있는 강아지풀을 뽑아 입에 물고는 멍하니 하늘 쳐다봤다.
‘도대체 내 약점이 뭐야? 완벽 그 자체인데 말이야.’
아직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왠지 자키드의 조언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처음에는 많이 밀리기는 했지만 나름의 상대가 됐는데, 그가 약점이 있다고 발언한 직후 너무도 어이없게 패배했다. 이를 봤을 때 자신의 검술에 문제점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게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존심 상하게 자키드씨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얘기고.’
자키드는 반드시 쓰러뜨려야 할 경쟁자였다. 이런 그에 가서 자신의 약점이 묻는다는 것은 큰 수치라고 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당시 패배한 직후 어이없는 마음에 패배의 이유를 물었던 것도 창피해 죽겠는데, 다시 물으러 찾아간다니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젠장 할! 도대체 뭐야!”
갑갑한 마음에 내지른 외침에 뜻하는 여인이 반응했다.
“죄, 죄송해요. 그냥 걱정되어서요.”
범석이 슬며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젤소미나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걱정되어 찾아왔다고 생각한 그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한 투로 얘기했다.
“너에게 한 얘기가 아니다. 자. 여기 와서 앉아라.”
“네. 선배님.”
은근슬쩍 다가와 앉은 그녀를 보며 범석이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그게 선배님께서 훈련도 참여하지 않으시고 계속 이러시니 다들 걱정해서요.”
범석이 멀리서 자신을 곁눈질로 바라보는 휘하 엘프들을 찌릿 노려봤다. 접근금지를 선언했는데 수작을 부려오다니 화가 난 것이다.
엘프들은 주인의 명령에는 절대복종하지만, 인간과 다름없는 지적 수준을 갖추고 있기에 종종 이런 일이 벌어지고는 했다. 그가 젤소미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을 알고 상황을 봐달라고 부탁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노기를 표출하러 훈련장까지 뛰어가자니 귀찮았다. 그리고 젤소미나가 곤란해할 테니 호감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터였다.
“걱정하지 마라. 훈련하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지금 자키드 씨에게 패한 이유를 찾는 중이다.”
“아? 그럼 실의에 빠진 것이 아니에요?”
범석이 버럭 소리쳤다. 한 번의 패배로 실의에 빠질 정도라면 게임 자체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게임을 플레이해오며 수없이 많은 패배를 경험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런 일로 상심할 만큼 나는 민감한 놈이 아니다!”
“아?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서 훈련에 매진해.”
젤소미나가 일어서려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사실 그에게 또 하나 얘기해 줄 것이 있었다. 그동안 심기가 불편한 듯 보여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괜찮다고 하니 상관없을 듯 보였다.
“그런데 제가 한가지 말씀드려도 돼요?”
“무슨 말?”
“선배님께서 자키드 대사형에게 패한 이유요.”
범석이 의아한 눈초리로 젤소미나를 쳐다봤다.
“오. 그걸 네가 알았단 말이야?”
“네. 얼마 전에 대사형에게 들었어요.”
그가 바로 인상을 푹 구겼다. 이런 식으로 알 바에는 떳떳하게 자키드에게 직접 찾아가 묻는 편이 더 나았다.
“됐다. 그만해라.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낫다.”
“왜요? 안 궁금하세요?”
“궁금하지. 그런데 자키드 씨는 내 경쟁자다. 자존심 상해서 못 듣는다. 그리고 그에게 들은 내용을 알 바에는 내가 직접 자키드씨를 찾아갔지, 왜 여기서 궁상을 떨겠냐?”
“하지만 지금 자존심을 따질 문제가 아니잖아요.”
“나는 따진다. 게다가 자키드 씨에게 패한 이유는 약점 때문만이 아니야. 원래 처음부터 밀리고 있었어. 총체적인 문제 해결을 하지 않는 한, 그를 이기기란 요원하다.”
하기야 범석의 자존심이 좀 대단한가? 이는 몇 년간 그를 경험해온 젤소미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휴~ 그런 계속 이러고 계실 건가요? 선배님이 계속 혼자 여기 계시니, 팀 분위기가 말이 아니라고요.”
“글쎄. 조만간 훈련에 복귀하긴 해야 하겠는데……. 그게 좀…….”
“그럼 이러면 어떻겠어요.”
“어떻게?”
“제 스승님께 가서 부탁하는 거예요.”
“렘란트 님에게?”
“네. 스승님이라면 충분히 자키드 대사형께서 파악한 내용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가만 보니 납득이 가는 얘기였다. 빈센트감독에 인정을 받고, 그 자키드를 가리킨 인사이니, 자신의 약점을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됐다. 하지만 그는 바로 손사래를 쳤다. 자키드와 사승관계를 맺는 자에게 도움을 받자니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됐다. 그러다가 자키드씨를 사형으로 모셔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골치 아프다. 차라리 시간이 들어도 내가 해결하는 편이 낫지.”
“그래도 한 번 가봐요. 저희 스승님은 인맥도 넓어 출중한 기량의 검술가를 많이 알고 있어요. 정 껄끄럽다면 그분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시잖아요.”
그렇다면 나쁘지 않았다. 자키드 라인 쪽 사람만 아니라면, 도움을 받는 일에 그다지 문제가 없었다. 그만큼 범석은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젤소미나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자. 가자.”
“어디를요?”
“렘란트님에게 지인을 소개받으러. 네가 가자고 했잖아.”
눈을 깜빡거린 젤소미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네.”
이들은 옷만 간단히 갈아입고 곧장 스덴시티로 향했다. 그곳은 라포니 중앙정부에 소속된 인구 38만 명의 작은 도시였는데, 자키드와 젤소미나의 스승인 렘란트가 이 도시에서 검술 도장을 차리고 있었다.
한적한 도심지를 지나 주택가로 들어선 플라잉 카가 서서히 지면에 안착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옹기종기 단독 주택이 몰려 있었는데, 앞마당에 정원이나 작은 풀장 같은 시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법 부유층이 사는 동네 같았다.
차 문을 열고 나온 범석이 뒤따르는 젤소미나에게 말했다.
“으음. 여기 사는 사람들은 다들 부자인가 봐?”
“네. 그런 편이에요. 스덴 시티는 주변 풍광이 좋아, 은퇴한 부유층들이 전원생활을 즐기러 많이 이사 와요.”
주변을 둘러본 범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이 탁 트이고 도심 전체를 우거진 산이 뒤덮여 있어 제법 전원풍경이 나왔다.
“그렇군. 노년에 살러 오면 좋겠군.”
“네. 그래서 저도 훗날 은퇴하면 이곳에 와서 살게요. 스승님도 계시고, 도장에서 사귄 친구도 많으니까요.”
“후후. 나쁘지는 않지만, 혼자 결정하지는 좀 그렇지 않을까? 배우자가 될 내 의견도 들어봐야지.”
가볍게 미소 지은 범석을 젤소미나가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다. 알면서. 왜 그런 걸 물어. 하하하. 아윽.”
허벅지로부터 전해지는 통증에 범석이 신음을 내질렀다. 얼굴을 붉게 만든 젤소미나가 꼬집은 것이다.
“잔말 말고 빨리 따라오세요. 스승님께 가야죠.”
“아. 알았어. 그러니 그만 꼬집어. 아프잖아.”
콧방귀를 낀 그녀가 대뜸 앞장서자, 범석이 실실 쪼개며 뒤를 따랐다. 겉으로는 화를 냈지만, 속으로는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라면 이번 일로 호감도가 상승하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이제 공략할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범석이 걷는 내내 콧노래를 불렀다.
‘으음. 생각보다 너무 평범한데.’
한 블록 정도 걸어서 도착한 렘란트 도장은 참으로 평범했다. 도장의 위치는 5층짜리 상업건물에 3층. 흔히 도심지에서 보는 여느 도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제법 화려한 기와집에 넓은 마당을 예상하고 있던 범석은 약간 실망스러웠다.
그가 곁에 서 있던 젤소미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기 맞냐?”
“네. 여기 3층요.”
맞는다고 하는데 어쩌겠나? 범석은 바로 수긍했다.
“자. 그럼 들어가자.”
“잠시만요. 오랜만에 왔는데, 그냥 갈 수가 없어서요. 뭣 좀 사서 가야 할 것 같아요.”
하며 그녀가 1층 슈퍼마켓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범석은 멋쩍은 듯 가만히 서서, 옷깃을 가다듬었다. 좀 생뚱맞지만, 그는 지금 여자친구와 함께 결혼을 허락받으러 시골에 계신 장인 될 어르신을 만나 온 기분이 들었다. 사실 젤소미나는 렘란트를 친부처럼 여기고 있었다.
‘으음. 온 김에 젤소미나와의 교제도 허락받고 가지. 후후후.’
잠시 후, 젤소미나가 한 짐을 싸들고 슈퍼에서 나왔다.
“자. 이제 올라가세요.”
범석이 그녀의 손에 쥔 선물용 음료수를 받아들었다.
“그래. 빨리 올라가자.”
긴장한 범석이 차근차근 계단을 밟으며 3층으로 올라갔다.
야앗. 야앗. 야앗.
도장에 다다르자 훈련생들이 지르는 기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유리로 된 문을 통해 살펴보니 대략 60여 명쯤에 이르는 수였다. 슬며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그가 젤소미나를 향해 말했다.
“제법 수련생이 많네?”
“네. 근래에 대사형과 제가 유명한 검투사가 되자, 수가 많이 늘었어요. 사실 훨씬 많은 수강 요청자가 있었는데, 도장이 좁아 한 타임에 60명밖에 받지 않았데요.”
“그렇군. 하긴 유명세가 있으니, 수련생이 늘 수밖에 없지.”
도장 안으로 들어선 젤소미나가 수련생들의 무리 앞에서 호령을 붙이는 한 노년의 사내를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는데, 큰 키는 아니었지만 제법 몸이 건장해 보였다.
“렘란트 스승님!”
렘란트가 힐끗 시선을 주더니 반가이 걸어나왔다.
“허허허. 젤소미나. 웬일이냐?”
수련생들이 일제히 젤소미나를 바라봤다. 렘란트 검술도장에서 다니면서 이곳 출신의 유명 검투사인 그녀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젤소미나는 오랫동안 그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바로 옆에 범석이 서 있음을 본 것이다. 비공식이지만 그는 세계 3대 검투사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오범석 검투사다!”
수련생들이 범석에게 달려드는 사이 젤소미나가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스승님 자 이거 받으세요.”
그녀가 방금 슈퍼에서 사온 선물과 함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돈이 든 봉투로 잘 부탁한다는 뇌물이 아닌 그저 용돈일 뿐이었다. 렘란트는 고아인 젤소미나에게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이에 그가 손사래를 쳐댔다. 사실 렘란트는 그녀를 볼 때마다 면목이 없었다. 동생이 큰 사고를 당했을 당시, 제대로 된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키드로 인한 일로, 그에게 완벽한 신체를 주기 위해 렘란트는 몇 번이나 신체개조시술을 시켜줬고, 과거 월드리그를 활약하며 번 돈 대부분을 날려버렸다.
“젤소미나.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부담되게 올 때 이런 것 싸오지 말라고 말이야.”
“괜찮아요. 전혀 부담 안 돼요. 스승님도 센트럴 리그에서 뛰는 검투사가 얼마나 많은 연봉을 받는지 아시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렘란트는 여전히 미안했다. 하지만 성의이니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선물과 봉투를 받으며 겸연쩍은 듯 말했다.
“일단 지금은 받겠지만, 다음부터는 이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네. 알았어요.”
젤소미나가 무의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저 해보는 말에 의미가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런 그녀를 잠시 묵묵히 바라본 렘란트가 수련생들에게 둘러싸인 범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젤소미나와 같은 팀으로 있는 검투사의 얼굴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게다가 며칠 전에는 대제자인 자키드와 거하게 한 판 붙은 적이 있었다.
“저 아이가 바로 오범석 검투사지?”
“네. 맞아요.”
그 말에 렘란트가 범석을 향해 손짓했다.
“자네. 이리 와보게.”
수련생들로 곤란했던 범석이 모두에게 양해를 구한 후 냉큼 렘란트 앞에 대령했다.
“안녕하십니까? 렘란트님. 저는 오범석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알겠네. 하여간 반가우이. 그런데 자네 여기는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범석이 주변을 살피더니, 조용히 귓속말을 건넸다.
“여기는 말하기 좀 곤란한데요. 상당히 긴요한 얘기라서요.”
“그래?”
묘한 눈빛을 지은 렘란트가 이내 수련생에게 개인 훈련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도장 옆으로 난 작은 사무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저 안으로 들어가지.”
“네. 알겠습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렘란트가 허름한 응접용 소파에 앉아, 범석과 젤소미나를 앞에 앉혔다.
“자. 그래 무슨 일인가? 나를 왜 찾아왔지?”
범석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젤소미나를 손을 꽉 부여잡았다.
“저희의 결혼을 허락…….”
퍽!
그녀의 주먹이 면전에서 어른거림을 본 범석이 혹이 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흠흠. 렘란트님께서는 뛰어난 검사를 많이 안다고 들었습니다.”
그와 젤소미나를 미심쩍은 번갈아 바라본 렘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는 뛰어난 검사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렘란트는 과거 세계 검도협회 회장까지 역임한 적이 있었다. 그다지 돈이 되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인맥을 쌓는 데에는 무난했다.
“으음. 그런 편이지.”
“그래서 말씀인데. 노련하고 실력이 출중한 검사 한 분만 소개해 주십시오.”
“어째서?”
“잠시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렘란드가 바로 콧방귀를 껴버렸다. 그가 아무리 인맥이 넓다고 하지만, 범석보다 출중한 검사는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가르침이라니? 당연히 말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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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즐거운 하루 되시고요. 전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