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31
31화
완연한 초여름의 날씨였다. 어제 밤사이에 내린 비는 리마시티시민체육공원을 땅을 촉촉이 젖게 만들었다. 나무들은 싱싱한 푸른 잎을 뽐내듯 바람결에 흔들렸고, 운동장 곳곳에는 청소로봇들이 분주하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이런 한 가운데 일단의 슈트를 착용한 수십의 무리들이 3열 횡대로 서서 검을 허공에 대고 휘두르고 있었다.
“엠마! 검을 내지를 때 다리가 뒤틀린다. 확실히 고정하고 했지!”
범석이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들고 있던 검을 툭툭 쳤다.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프로검투사 될 수 있겠어!”
“열, 열심히 하겠습니다.”
범석이 고개를 돌려 레이미를 노려봤다. 그녀가 엠마의 훈련을 맡았기 때문이다.
“레이미! 엠마를 확실히 가르치라고 했지! 검을 휘두를 때 하체의 움직임이 중요하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확실히 기본기부터 숙달시켜!”
“네, 넷. 며칠 내로 교정시켜 놓겠습니다.”
고개를 주억인 범석이 이번에는 멀리 서있는 비너스를 보고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각각의 손에 금속 뿔이 잔뜩 박혀있는 거대한 사각방패를 들고 있었는데, 휘두를 때마다 거친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이 꽤나 위협적이었다.
‘후후. 누가 가르쳤는지는 모르지만 참 맛깔스럽게 성장시켰군.’
스스로를 향해 칭찬을 날리며 혼자 실실 웃는 범석이었다. 비너스의 방패 기술을 가르친 이가 바로 그였다.
기분이 좀 좋아진 그가 계속해서 주변을 돌며, 팀 내 검투사들의 훈련을 도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정오가 거의 다다를 무렵. 모두를 향해 훈련종료를 선언했다. GA컵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이틀. 그 동안 주말에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강도 높은 훈련을 수행해 왔으니, 오늘 내일 정도는 훈련을 줄여 체력을 비축할 필요가 있었다.
“자. 다들 오늘 훈련을 종료한다. 모두 주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를 바란다!”
“네. 알겠습니다!”
갓즈나이츠의 검투사들은 생각지도 않은 휴식에 의기양양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동안 훈련으로 주인을 모실 기회가 많지 않아 적적했던 터라, 오늘의 휴식은 꿀맛 같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준비해온 점심도 챙겨먹지도 않고 바로 입고 있던 슈트를 벗고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자자. 우리도 빨리 집으로 가자.”
범석의 엘프들이 얼굴에 홍조를 뿌리고는 일제히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은 어떻게 해서든 범석의 사랑을 한 번이라도 더 받아내기 위해, 아론에게로 향하는 내내 몰래 연지와 분을 꺼내 발라댔다.
그때 어딘가에서 범석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범석님! 할 말이 있는데요!”
그가 가던 길을 멈추고 엠마를 돌아다봤다.
“무슨 일인데?”
“오늘 저녁에 혹시 바쁜 일 있으세요?”
이성에게 저녁시간을 묻는다? 그렇다면 혹시 데이트 신청일지도 몰랐다. 그 동안 계속 작업을 걸어 호감도를 올린 성과가 이제야 나타난다고 생각한 범석이 기대한 찬 표정을 지었다.
“음. 글쎄. 따로 할 일은 없는데. 왜 그러는데?”
“흑사회 선배님중의 한 분이 오늘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범석님을 초대했어요. 가능하신가요?”
범석의 미간이 슬쩍 꿈틀거렸다. 오랜만의 휴식시간에 노친네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난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팀에 많은 지원을 해준 흑사회의 조직원이니 대뜸 거절할 수도 없었다. 하여간 자신에게 1500만크랑이 되는 거금을 지원해준 존재들이었다. 언젠가는 한 번 만나서 인사를 드릴 필요가 있었다.
“뭐. 그럼 가야지. 어디서 몇 시까지 가면 되는데?”
“바람이 머무는 집 레스토랑으로 오후 6시까지 오시면 되요.”
“좋아. 그때 가서 뵌다고 그래. 그럼 얘기는 다 된 거지?”
“네. 그럼 전 준비할 것이 많아서 이만 가볼게요. 이따 호텔에서 봬요.”
“그래 이따 보자.”
엠마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돌아가는 발걸음이 너무도 가벼웠다. 범석도 이왕 이렇게 된 일, 마음 편히 흑사회 선배라는 작자를 만나기로 했다. 어차피 저녁때까지는 시간이 많았고, 기껏해야 식사 한번이니 그리 시간을 잡아먹지 않을 터였다.
“자. 일단 타자.”
맨 마지막으로 아론에 올라선 그는 갑작스레 앞에 서있던 오스칼을 확 덮쳤다. 탐스러운 힙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범석은 우악스럽게 그녀의 하의를 끌어내리고는 바로 자신의 팽창한 애물을 꺼내 음부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무성한 검은 숲 균열 속에 거칠게 밀어 넣었다.
서서히 하늘로 치솟는 아론의 창문으로 너나 할 것 없이 옷을 벗고 범석에게로 가는 엘프들의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바람이 머무는 집이라…….?”
하루의 해가 서쪽 하늘에 걸릴 무렵. 어느 고급레스토랑 앞에 범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서있었다. 훈련의 피로를 풀 겸 엘프들과 놀아야 할 이 저녁때 짝 빼입은 정장을 입고 이런 도심지의 한 공간을 헤매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일단 왔으니 들어가야겠지. 어차피 호감도 관리도 해야 하니까.’
범석이 목을 꽉 끼는 넥타이를 약간 풀고 자동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휘황찬란한 레스토랑 분위기에 그가 잠시 한 눈을 팔았다. 반들거리는 푸른색의 대리석바닥도 모자라 그 위로 고급 양탄자가 실내 가득 깔려 있었다. 하늘 높이 천장에 달린 잘 세공된 투명의 샹들리에의 조명은 주변을 은은히 비쳐 환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냈고, 벽장식으로는 다양한 크기의 목조인형과 고풍스러운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내심 감탄스러워 하는 그에게 정장을 한 엘프가 다가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혹시 일행이 있으신가요?”
“아. 일행이 있는데, 어디 앉아있는 줄은 모르겠네. 너무 넓어서 도통 찾을 수가 없어.”
“아. 그러세요? 그럼 예약은 하고 오셨나요? 예약을 하셨으면 카운터 인명록에 남아있으니 금세 찾을 수 있어요.”
지금껏 살아오면 식당예약이란 자체를 해본 역사가 없던 그였다.
“글쎄. 예약은 안했는데. 꼭 해야 되나?”
“아뇨 상관은 없어요. 으음. 그럼 일행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말씀을 주시면 제가 카운터에 가서 확인해보고 말씀드릴게요.”
“엠마라는 여성인데.”
그 엘프가 바로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이런 회장님 손님이셨군요.”
“회장님? 엠마가 여기 회장이야?”
“아뇨. 엠마님은 저희 회장님의 후배에요. 먼저 와있으니까 저를 따라오세요.”
“으음. 그래.”
엘프의 안내로 범석은 넓은 로비를 굽이굽이 돌아 중앙무대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테이블 앞까지 왔다. 그곳에는 고급 꽃 장식 원피스를 입고 있는 한 금발이 여인이 앉아있었는데, 무대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들을 차분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워낙 예쁘게 화장을 하고 꾸미고 있던 지라, 안내를 받지 않았다면 엠마인 줄 모르고 스쳐지나갔을 빤했다.
“호. 이거 엠마가 맞는지 모르겠네?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모르고 데이트 신청할 빤했다.”
범석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 범석님. 오셨어요.”
“마님이 부르시는데, 마당쇠인 내가 당연히 와야지. 후후.”
“범석님도 참…….”
엘프종업원이 의자를 뒤로 젖히자, 그가 자리에 앉았다.
“언제고 다시 이런 자리를 만들자고. 그때는 선배라는 자는 빼고 우리들끼리 오붓하게 말이야.”
엠마가 손사래를 치며 깔깔 웃어댔다. 사실 이 게임 속 세상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사이는 거의 견원지간에 가까웠다. 여자들은 가정과 직장 등에서 자신들이 가져야할 자리를 차지한 엘프들을 미워했고, 남자들은 탁월한 외모와 충성심을 지닌 엘프들을 질투하는 여성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남자들은 인간여성과 어울리는 같은 남성들을 호모보다 더 심한 변태로 취급하기가 일수였다. 호모야 특이한 취향이기에 어쩔 수 없다지만 왜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엘프보다 훨씬 못한 인간여성에게 애정을 쏟을 수 있냐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결혼이라는 관념은 물론, 자연적인 출산조차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
게임 설정 상에 의하면 한 때 이 일로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인류가 멸망에 직면할 빤한 적도 있다고 했다. 다행히 의무적인 인공수정과 특수 배양관을 의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만큼의 2세들이 태어나고는 있지만, 덕분에 남자와 여자와의 골은 더욱 깊어져갔다. 이젠 살비비고 살아야할 이유가 완전히 사라진 이유에서였다. 이에 연방정부에서는 일부다처제등과 같은 말도 안 되는 법률까지 제정하며, 어떻게 해서든 남녀간의 끈을 이어주려 했지만,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문화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범석이 데이트를 신청하는 멘트를 날리니, 엠마로서는 농담으로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호호호. 농담도 잘하시네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주변에서 범석님을 변태라고 놀려댈 걸요.”
“농담 아닌데. 난 엘프고 인간여성이고 안 따져. 변태라고 놀리면 어때? 자기 좋으면 되는 거지.”
말투로 보아 진실처럼 들리는지 엠마가 물끄러미 그를 직시했다. 여자로서 남자의 사랑의 갈구하는 것은 자연적인 본능이었다. 이성적으로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은 무척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자들에게 또 하나의 본능이 있었다.
“으음. 생각해 보고요. 갑자기 이러시니 저로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요.”
“그래. 곰곰이 잘 생각해봐.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하며 범석이 씨익하고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대화로 호감도가 크게 올랐음을 정보창을 통해 확인했던 것이다. 공략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계속 수작을 걸다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품에 안길 날이 올 터였다. 그는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오늘 만나실 분이 이 레스토랑 회장님이셔?”
“아 네. 맞아요.”
범석이 주변의 실내장식을 둘러보더니 그럴싸한 표정을 지었다.
“꽤 부자인가봐. 이런 고급 레스토랑도 가지고 있고 말이야.”
“꽤 아니라 아주 많이에요. 이런 레스토랑을 전 세계에 40여 군데를 가지고 계시거든요. 그리고 다른 체인점분야에도 다수 진출하셨고요.”
그가 앞에 놓인 물 잔을 들어 벌컥 들이켰다. 그렇다면 상당한 부호로 예상되었다.
“휴. 이거 대단한 사람을 만나나 본데. 부담스러운걸.”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차차 적응 되실 것에요.”
“적응이 돼?”
“네. 만나보시면 아시게 될 것에요.”
그 때 범석의 머무는 테이블로 30대 초반쯤 보이는 금발의 젊은 남성이 다가왔다. 그를 본 엠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셨어요. 루카스선배님.”
“으음. 그래. 옆에 있는 자가 그 범석군이라는 아이인가?”
“네. 맞아요.”
제법 젊어 보이는 자가 군이라는 호칭을 써가며 하대하자 범석이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나 그가 곧 개조인간임을 떠올리고는 이내 이해했다. 개조인간은 엘프와 비슷한 신체를 가진 덕에 젊음의 시간이 매우 길었다. 대략 50세까지는 20대의 면모를 보이고 그 이후에서야 천천히 노년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지금 30대쯤 보였다면 대충 환갑에서 칠순정도 나이라고 생각하면 됐다.
범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중하며 인사했다.
“어서오십시오. 제가 바로 범석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루카스라고 하네. 하여간 만나서 반갑네. 자자 그럼 자리에 앉지. 자네랑 할 얘기가 많아.”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 범석이 자리에 앉았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이유가 바로 대화였다. 무슨 이야기인 줄은 모르는지만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의자를 바짝 붙이며 자세를 바르게 했다.
———-
다음 또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