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World RAW novel - Chapter 4
4화
‘내 최초의 엘프라…….’
범석이 구급침대에 누워있는 은빛머리칼의 엘프를 바라봤다. 한 스물 살 안팎의 나이쯤으로 보였는데 족히 175가 넘는 큰 키였다. 부드러운 이목구비와 가는 허리라인은 물론이거니와 뚜렷하게 돋보이는 몸매의 굴곡은, 인간의 수준으로 볼 때 결코 나올 수 없는 완벽한 인체대비였다.
보통 때 같으면 하체 밑에서 무언가 울컥하며 솟아올랐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제가 잘 되고 있었다. 시퍼레진 입술과 새하얗게 창백해진 얼굴로 거친 호흡을 내뿜는 모습이 그리 가련해 보일 수가 없었다.
범석은 안타까운 표정을 하며 그녀의 정보 창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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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없음.
구분 : 엘프(3년).
소속 : 없음.
명성 : 2.
악명 : 0.
H유무 : 무.
스테미나 : 851/9400(위급한 부상).
사회성 : 22, 근력 : 71, 체력 : 94.
민첩 : 68, 균형감각 : 63, 지능 : 66.
정신력 : 91. 판단력 : 62, 재주 : 34.
운 : 36.
현재기량/잠재능력 : 607/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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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 금성의 환상.
특이사항 : 엘프시장에서 팔려오자 마자 지하투기장 결투에 투입. 현재 큰 부상으로 사경을 헤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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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석은 감탄을 금할 길에 없었다. 936이나 되는 엄청난 잠재능력도 놀랍지만 94의 체력과 91이라는 정신력 스텟 정말 환상적이었다.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수치로 만에 하나가 나올까 말까한 뛰어난 능력치였다. 잘만 키운다면 앞으로의 플레이에 큰 밑바탕이 되어줄 재목이었다.
‘햐. 엄청나다. 아직까지 살아있는 이유가 이거였어.’
이 은빛 머리칼의 엘프가 아직 살아있음을 납득한 그였다. 체력은 생존력과 관계가 있는 스테미너를 결정하는 수치이고 정신력은 스테미너가 떨어지는 양을 적게 만드는 수치였다. 아마 이 두 수치가 이리 높지 않았다면 이 엘프는 진작 죽음을 당했을 터였다.
‘그래도 아주 위험해. 지금 스테미너가 너무 낮아. 이대로 가다가는 죽을 수 있어.’
현재 그녀의 스테미너 수치는 851. 부상을 당한 채로 저 수치가 0이 되는 즉시 사망이 되므로 아주 위험하다 말할 수 있었다.
범석은 급히 시계를 찾았다. 저 은빛머리칼의 엘프의 특성이 ‘금성의 환상’임을 살펴본 탓이다. 오후 3시부터 오후 9시까지 모든 스텟 수치를 +10시켜주는 레어급 특성으로, 오후 3시만 된다면 스테미너 수치가 1000이 상승되니 생존확률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이 됐다.
“잠깐 지금 몇 시지?”
구급요원 엘프가 손목에 차여진 시계를 확인하고 대답했다.
“지금 오후 1시 50분이요.”
그렇다면 근 한 시간이 남았다는 얘기였다. 아주 간당간당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구급요원을 바라봤다.
“이봐. 어떻게 해서든 이 엘프의 생존 시간을 늘려줘. 한 시간 정도면 되는데.”
“이미 최선을 다해 응급조치를 해놨어요. 더 이상 제가 할 일은 없어요.”
“그럼 이대로 손 놓고 있으면서 운을 바래야 한다는 말이야?”
그 말에 엘프응급요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제 말은 단지 제 할 일이 끝났다는 말이에요. 이제 주인인 범석님이 나설 차례에요.”
“내가? 내가 뭘 해야 하는데?”
“그저 손만 잡고 저 엘프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달라고 기원하시면 돼요. 엘프들은 주인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 하나만으로도 생존의 열망을 크게 가지게 되요.”
범석은 그 말이 왠지 그럴싸하다고 느껴졌다. 주인을 가장 사랑하는 엘프였기에, 주인의 위로에 힘을 얻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문제라면 소유증명서를 받지 못해 아직 주인도 아니었고, 또 정보 창에서의 저 엘프의 이름은 아직 없음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난 아직 이 엘프의 주인이 아니야. 증명서류가 없다고. 또 이 얘는 이름도 없다고.”
“그건 상관없어요. 아직 주인이 아니시지만 주인이 되실 거잖아요. 그 정도쯤은 아무리 멍청한 엘프라도 알아먹는다고요. 그리고 이름은 마음에 드시는 걸로 아무거나 지어 주시면 되고요.”
범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렇게 마음을 졸이며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억지로라도 그리 생각하며 시도해보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할 것도 없이 은빛머리칼 엘프의 이름을 비너스로 지었다. 그녀의 특성이 ‘금성의 환상’임을 떠올린 탓이다. 비너스는 금성을 나타내는 여신의 이름이었다.
범석이 비너스에게 다가가 파르르 떨리는 차가운 손을 꼭 붙잡았다.
“네 이름은 비너스다. 그리고 곧 주인이 될 내가 이렇게 부탁한다. 비너스 꼭 살아남아라.”
그 말과 동시에 비너스가 움칫거리더니 몸의 떨림이 다소 완화되었다. 상태가 크게 호전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약간의 희망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플라잉 앰뷸런스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하강을 하고 있었다. 엘프 병원에 거의 다왔다는 뜻으로 아주 반가운 신호였다.
“다 왔어요.”
앰뷸런스가 지면에 안착하자 바로 뒷문이 열리며 3층의 흰색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원으로 보이는 곳에는 아름다리 꽃과 나무들이 자라나 있었고, 중앙에 위치한 분수에서는 투명한 물줄기가 시원하리만큼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붉은 색 보도블록 길옆으로는 조그만 동상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고,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는 밝은 색 톤의 목조 문으로 꾸며져 있었다. 척보기에 치료센터라기 보다는 어느 부잣집 고급 별장처럼 보였다.
“여기 엘프 치료센터가 맞아? 잘못 온 것 아냐?”
비너스가 실려 있는 침대카트를 내리던 엘프 응급요원이 말했다.
“미하일 치료센터라는 곳이에요. 방금 떠나온 경찰서에서 가장 가깝고 실력이 좋아 이리로 왔어요.”
“으음. 맞다 이거지…….”
우물쭈물 하던 범석이 밖으로 뛰어내려 침대카를 받아들었다. 설마 이렇게 자신감 넘치게 말하는데 잘못 왔겠냐는 것이다. 곧 그는 허공에 붕붕 떠있는 침대카의 손잡이를 끌고 병원 문까지 급히 뛰어갔다.
“응급환자에욧!”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의료진들이 급히 뛰어나왔다. 의사로 보이는 한 동양계 스타일의 여인과 간호사로 보이는 몇몇의 엘프들이었다. 범석이 힐끗 여성 의사를 살펴봤다. 스무 살 초반쯤으로 보였는데, 키는 160정도 나가는 것 같았다. 피부는 동양인 특유의 황갈색 톤에 아주 고왔고, 몸매는 좀 마른 편이었다. 미모는 엘프보다는 못했지만 인간치고는 아주 상당한 편이었다.
범석은 슬며시 그녀의 정보창을 열었다. 비너스를 치료할 의사로 보이로 보이니, 어느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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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수잔 리.
구분 : 인간(23년).
소속 : 미하일 치료센터.
명성 : 330.
악명 : 0.
호감도 : 34.
H유무 : 무.
스테미나 : 981/1000.
사회성 : 57, 근력 : 9, 체력 : 10.
민첩 : 12, 균형감각 : 11, 지능 : 72.
정신력 : 54. 판단력 : 89, 재주 : 74.
운 : 71.
현재기량/잠재능력 : 459/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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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 자애의 의술.
특이사항 : 미하일 치료센터의 외과의사. 나름 본업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돈만 밝히는 치료센터 원장 때문에 이직을 결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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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맡길 만하군.’
의사로 가장 필요한 소양은 판단력과 지능, 재주. 이중 뭣하나 빠지지 않았고 특히나 가장 중요한 판단력에서는 89의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수잔의 특성은 시술시 치료 성공확률 50%증가라는 ‘자애의 의술’이었다. 이만큼 치료에 특화된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어 보였다.
뭐 근력, 체력, 민첩, 균형감각등이 바닥을 기고 있다는 점이 눈에 뜨이지만, 보통 인간은 신체능력수치가 각각 20 이상을 넘지 않는다는 점을 볼 때 그리 나쁜 수치가 아니었다.
“어, 어떻게…….”
철근이 비너스의 가슴을 뚫고 있는 장면을 본 수잔이 급히 손에 들고 있던 권총형 MRI진단기를 상처부위에 가져대었다. 그리고 방아쇠형 버튼을 눌렀다. 3D화면으로 떠오르는 MRI 형상에, 그녀의 심장 우심방 바로 옆 부분이 꿰뚫려 있는 모습이 확인되었다. 심장에 상처를 입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자칫 이대로 나두다가는 압박에 멈춰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녀가 엘프간호사들이 가져온 바이탈 체커기의 단자들을 비너스의 몸에 부착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수치를 확인하고는 눈을 치켜뜨며 범석을 노려봤다. 체력 저하와 혈압, 맥박의 수치를 봤을 때 장시간 방치 한 정황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치료센터에 데리고 오지 않은 거죠! 분명 척 보기에도 심각한 부상이라는 알 수 있었을 텐데요! 주인으로서 자격이 없군요. 시술 후 경찰이나 해당 시민단체에 연락할 테니 각오하세요.”
“저, 그게…….”
수잔이 갑작스럽게 적의를 드러내자 범석이 당혹스러웠는지 말을 더듬었다. 이를 본 엘프구급요원이 적반하장식이라는 듯이 수잔을 쏘아봤다.
“지금 저희가 떠나온 곳이 바로 경찰서에요. 원래는 더 빨리 치료센터로 옮겼을 수도 있는데, 귀하 치료센터를 비롯한 모든 치료센터에서 치료비 확보문제로 난색을 표하며 거절을 했어요.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경찰서로 갔는데 마침 이분이 보시고, 자비로 치료해 주시기로 한 것에요. 당신들이 이 분을 탓할 처지가 아니에요.”
그 말에 수잔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사실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치료행위 거부를 결정한 것은 원무과 일 테지만 그녀 또한 이 치료센터의 일원.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만은 없었다.
“미, 미안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사죄를 받은 범석이 짜증스러운 낯빛을 지었다. 자신이 지금 받고 싶은 것은 사죄가 아니라 건강한 모습으로 일어나는 비너스의 모습이었다.
“참나. 사과는 나중에 하시고. 빨리 치료나 해주십시오. 한 시가 급하단 말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당장에 수술에 들어갈 테니, 여기서 기다리세요.”
이윽고 범석을 비롯한 수잔은 비너스가 실린 침대카를 끌고 엘리베이터로갔다. 그리고 2층에 있는 수술실로 들어가 수술 장비 일체를 준비하고 가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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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또 갑니다.